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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THE NEW G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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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n Feb 06. 2020

어쩌다 보니 스타트업의 대표가 되었다

1편. 돌이켜보니 그랬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나는 직원으로 시작해서 월평균 B2B 매출만 5천만 원을 바라보는(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조심스럽게 시드 투자도 앞두고 있는(앞두고만 있다), 그리고 여섯에서 일곱 사이 팀원을 둔 아주 아주 작은 스타트업의 공동대표가 되었다.


회사는 계속 성장하고 있고, 회사가 성장하는 속도만큼 나도 성장해야 한다는 큰 부담을 갖고 있는 요즘. 내가, 그리고 회사가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성장하고 있는지에 대해 써보기로 했다.



2016년, 맨땅에 헤딩 잘한다고 생각했던 시절


"형, 맨땅에 헤딩 그거 하나는 내가 제일 잘해"


맨땅에 헤딩. 돌이켜보니 처음에 나는 정말 그것밖에 할 줄 몰랐다. 하고 싶은 일도 아니었다. 클라이언트와 메일을 주고받는 법도 몰랐고, 미팅에서의 비즈니스 매너도 몰랐고, 제안서를 만드는 법도 몰랐고, 콘텐츠를 만드는 법도 몰랐고, IR deck 같은 것도 몰랐다.


정말 몰랐다, 모르니까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었다. 지나고 보니 잘 모른다, 는 불확신이 내게는 결국 동력이 되었지만.. (이렇게까지 모른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해도 되는 건가..)




"형, 3억짜리 생일선물 어때?"


[사진 한 장을 본다 > 꽂힌다 > 밤새 장표를 만든다 > 다음날, 미팅을 한다 > 한 시간을 떠들고 3억짜리 계약을 따낸다]


맨땅에 헤딩은 주로 이런 식이다. 그래도 예전처럼 대책 없이 "같이해주세요" 하지는 않는다(짬밥을 1년 반 정도는 먹었으니까..). 그래도 1년 반 동안 스무 곳 가량의 클라이언트들과 함께 일 하면서 어깨너머로 뭐라도 배우긴 했나 보다.


이 사진 한 장을 보고 나는 밤새 장표를 만들었다. (출처 : 인스타그램)


이런 걸 streetwise(길거리에서 배운 지혜)라고 한다던데, 나는 그 streetwise를 맥락 없이 써보려 한다.


부디 보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길, 그리고 가감 없이 크리틱(critic) 날려주길.




'어쩌다 보니..'


말 그대로 '어쩌다 보니'였다. 2016년 겨울, 딱히 교류 없이 지내던 학교 선배(지금의 코 파운더)에게 연락을 받았다. 당시 형(코 파운더)은 '전만수'라는 시니어 인플루언서를 키우고 있었다. 신문에도 나오고, 인스타그램 팔로워도 2만 명이나(당시에는 그게 꽤 큰 숫자였다) 되고, LF나 후지필름 등 제법 있어 보이는 브랜드랑 작업도 하고 있었고, 형의 페이스북을 보니 옷도 만드는 것 같고, 그런 것들이 당시에 나는 제법 그럴싸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거기에 코가 꿰인 거다..).


2017년, 전만수 형님과 모델놀이나 하던 시절


"출근할래?"


그 말 한마디에, 2016년 겨울부터 2017년 11월 정도까지 1년 정도 출근을 했다. 당시에 내가 한 거라곤 가끔 '전만수' 선생님과 촬영을 하고, 물어물어 아이돌에게 우리가 만든 코트를 협찬하기도 했고(도대체 왜 했을까?), 쇼핑몰 택배를 싸고, 쇼핑몰 속 모델이 되기도 했고, 블로그도 썼고,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기도 했다(코 파운더는 당시에 카페도 운영했었다).


당시에 했던 일(왼쪽부터 택배 싸기, 사진 찍기, 커피 만들기)


[Sales team director]가 하는 일 치고는 알바생과 다를 게 없었다. 되짚어보면 시키는 일도 제대로 못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태도도, 지식도, 실행력도 부족했다. 모든 게 부족했다. 형이 나한테 기대하는 게 있었을 텐데, 나는 그저 밥만 축냈다.. 부끄럽고, 미안했다.


어쨌거나 2017년 11월, 형의 첫 번째 헬로우젠틀(HELLO GENTLE)은 그렇게 망했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해보자'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형(코 파운더)은 과외를 하며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팀원 중 한 명은 워킹홀리데이를 떠났고, 한 명은 취업을 했고, 다른 한 명은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미뤄둔 학교를 다니며, 스물둘부터 계속해온 클럽에서 주말마다 밤새 일을 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났다.


2015년부터 2017년 끝자락까지 함께했던 헬로우젠틀 팀


"그래.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2018년 6월, 형에게서 "우리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해보자"라고 연락이 왔다. 평범한 우리 주변 아저씨들을 만나보자고. 딱 15명만 만나보자고.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좋은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이니까.. 까짓것 마지막이라는데 한 번 도와주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한편으론 형이 조금 가엽단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의 나는 딱히 미래에 대한 계획도, 의지도 없었다. 그나마 자기소개서를 쓸 수 있었던 한 회사에 인턴으로 지원했지만 그마저도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었다. 아주 엉망진창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세워 둔 스쿠터가 그냥 쓰러지던 엉망진창의 시절


여차 저차 해서 열다섯 명의 아빠를 만났다. 그게 THE NEW GREY(더뉴그레이)라고 부르는 메이크오버 캠페인의 시작이었다. 사실 내가 만났던 아빠는, 다섯도 채 되지 않았다. 형이랑 사마(지금은 군대에 간 이전 팀원)가 다 만난 거지. 나는 이런 핑계, 저런 핑계 대고 빠지기 일쑤였다. 오죽했으면 지구에서 싫은 소리 최고 못하는 형이 내게 그랬다.

2018년 4월부터 9월까지 만났던 아빠들


"할 거면 확실히 하고, 아님 말아"


그냥 자존심이 격하게 상했다.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는데(주 3일 밤을 새우고, 주 5일 20학점짜리 학교를 나가고, 실연의 아픔도 있었고.. 정말 나름의 사정이었다..), 변명 같은 건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 말곤 없었다. 형의 말에 나는 "부끄럽고, 미안해. 할게, 할 거니까 지켜봐 줘" 뭐 이런 종류의 대답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말 그대로, 어쩌다 보니 나도 대표가 되었다.


브런치를 쓰는 사이, 좋은 소식이 도착했다. 이번에 다섯 아빠와 마카오에 다녀오며 만든 영상이 부산광역시 극장들의 스크린에서 2개월 동안 릴리즈 된다는 소식이었다.

#TRIPFORGREY with 더뉴그레이, 로우로우, 플랙, 진에어

다음 편에서 계속..이라고 쓰면 되나요?


*지금까지의 더뉴그레이가 궁금하다면?(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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