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호퍼의 Room by the Sea
큰 조카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다녀왔다.
비행기가 땅을 벗어나는 순간, 몸이 잠시 방향을 잃었다.
순간의 어지러움이 가라앉고 나니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한 고요가 찾아왔다. 중력이 느슨해진 자리에서, 영혼이 감각이라는 옷을 벗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상태로 들어선 듯했다.
죽음의 순간이 이럴까?
비행기가 구름 위로 올라섰다.
완고한 땅의 경계들이 아득해지자 사유를 붙들고 있던 중력도 느슨해졌다
영혼이 둥지를 틀고 한 생을 살아가는 집이 육신이라면, 그 집에 더이상 온기가 흐르지 않아 고요해진 상태가 죽음일 것이다. 몸을 떠난 영혼이 다시 어느 생의 입구에 서는 것이 윤회라면, 삶은 저마다 품고 온 인연의 흔적들을 다른 시간 속에서 하나씩 풀어내는 긴 여정일지도 모른다.
한 시간 남짓 거대한 인공 새의 뱃속에서 중력을 벗어난 상태를 생각하다 보니 역설적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비행기가 착륙했다.
몸은 다시 땅의 중력을 받아들이고, 정리되지 않은 사유들은 낯선 풍경 속으로 흩어졌다. 맹렬하게 불어 닥치는 찬바람을 맞으며 길을 헤매다 왔던 길을 되짚어 가서야 가까스로 식장 건물을 찾았다. 건물 안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화려한 상들리에, 하객들의 과장된 몸짓, 무리지어 서 있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소음... 모든 것이 과하게 흐르는 그곳은 찬 바람이 몰아치는 밖과는 분명 다른 시공간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이들과 웃음을 나누면서도,마음 한 쪽은 이 소란한 열기보다는 조금 더 차분하게 기도를 건네고 싶었다. 무리 속에 섞여 있었으나 시선은 자꾸만 풍경 밖으로 밀려났다.
내 안에서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고요한 빛의 풍경이 따로 흐르고 있었다. 바다와 맞닿은 방안으로 빛이 들어와 바닥을 가로지르고, 빛이 닿지 않는 곳마다 벽에 붙어 길게 늘어진 그림자들이 선명해지는 풍경. 그 정적 속에서,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결혼은 서로의 기억에 매일같이 접속하는 일이다.
너의 시간 속에 내가 들어가고, 나의 시간 속에 네가 머무르며 교집합을 이루려는 의지다.
완전해지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불완전한 채로 함께 견디겠다는 합의다.
이전의 나를 부분적으로 떠나보내고, 새로운 관계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일.
그런 관점으로 보면 결혼은 한 생 안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윤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혼식은 그 사실을 세상 앞에서 선언하는 의식이다.
삶은 여러 번의 이륙과 착륙을 반복하는 수많은 윤회의 과정이구나 생각하며,
식이 진행되는 동안 할머니로서 손주들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기도했다.
잘 견뎌내 주기를, 그리하여 익숙한 땅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연착륙할 수 있는 지혜가 함께 하기를!
소란한 식장의 인파를 빠져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리움미술관으로 향했다. 미술관 로비의 깊은 어둠 속, 압도적인 수직의 빛 줄기가 파인더 안으로 내리꽂혔다. 그 서늘한 빛의 선 곁에서 가늘게 명멸하는 초승달 모양의 작은 빛 조각을 보았다. 심연 같은 어둠 속에서도 끝내 훼손되지 않은 어떤 빛의 신호 같아 위로가 되었다. 바닥에서 점멸하던 비상구 사인은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발밑의 좁은 경계선 위에서 나지막이 명멸하고 있었다.
정오의 빛은 그림자를 지우지 않는다. 다만 내부에 숨어 있던 그림자들이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밀려 나올 뿐이다. 그 잔인하고도 명징한 빛 아래서, 나는 영혼의 비상구 불빛을 따라 내 자신의 문을 열고 다시 세상으로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