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시경 검사나 치과 치료 전에 꼭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혹시 항혈소판제나 항혈전제를 드시나요?"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이고 내가 먹는 약은 며칠 전에 끊어야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2. 앞서 헤파린의 발견에 관한 비사를 먼저 전해드린 것은 아마 헤파린이라는 약물에 대해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이 많으실 것 같아서였습니다. 사실 헤파린은 기본적으로 주사제로 처방되므로 입원한 환자에게 주로 처방되는 편입니다.
3. 하지만 헤파린의 발견은 의학 발전에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헤파린이 없었으면 도전해보지 못했을 치료법이 대단히 많습니다. 특히 혈액 투석과 체외막산소요법(에크모, ECMO) 시술처럼 '몸에서 피를 밖으로 꺼내 외부에서 처리를 하고 다시 몸 안으로 되돌려 주는 과정'에는 헤파린이 매우 매우 필수적입니다. 우리 혈액은 인공적인 관이나 필터에 닿으면 상처가 났구나라고 인식하고 즉각적으로 응고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4. 이미 생긴 피떡(혈전)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데에도 헤파린은 꼭 필요합니다. 베스트 박사가 상용화한 헤파린이 최초로 적용된 분야가 다름 아닌 심부정맥혈전증(DVT)이었습니다. 폐색전증, 심방세동처럼 혈전이 혈관을 콱! 틀어막아 혈행을 방해하는 상황에서 헤파린은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정맥라인을 잡고 헤파린 캡을 쓰는 것도 헤파린이 혈관을 막히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5. 그런데 이런 일들에 아스피린을 쓰면 안 되는 건 지 궁금하실 수 있습니다. 두 약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이해하시면 언제 끊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아시게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6. 항 혈전제의 종류에는 항응고제와 형혈소판제가 있습니다. 둘 다 혈전(피떡)을 생기는 것을 막지만 작용하는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예상하셨듯이 항혈소판제는 아스피린 (혹은 후예), 항응고제는 헤파린 (혹은 후예)라고 이해하셔도 됩니다. 먼저 앞서 다뤘듯이 항혈소판제(아스피린 계열)는 혈소판이 다른 혈소판을 부르는 SOS 신호(TXA2, ADP 등)를 막는 식으로 작용합니다.
7. 이와는 달리 항응고제(헤파린 계열)는 응고인자라고 하는 단백질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스파이더맨이 혈소판이고, 스파이더맨 손에서 나오는 그물이 응고인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출혈이 일어난 곳에 스파이더맨이 출동하면 그물로 단단히 고정하면서 일을 해결합니다.
8. 항혈소판제제(아스피린 계열)는 혈소판 자체에 작용하므로 한 번이라도 항혈소판제제와 접촉한 혈소판은 일생동안 그 영향을 받습니다. 피폭된 혈소판이 모두 제거되지 않는 한 출혈의 위험성이 있으므로 혈소판의 수명만큼 약을 중단해야 합니다. 그 기간이 바로 일주일입니다.
9. 아스피린 외에 항혈소판제제로는 플라빅스(클로피도그렐), 에피언트(프라수그렐), 브릴린타(티카그렐러) 등이 있습니다. 이런 약들은 기전에는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일주일은 끊어야 지혈에 문제가 없습니다. 모두 혈소판에 직접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10. 항응고제는 혈소판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응고과정에 작용하는 단백질(응고인자)을 막습니다. 아무리 온갖 세상의 스파이더맨들이 한 곳에 뭉치더라도 거미줄의 재료가 떨어져 버리면 콸콸 흐르는 피를 막기에는 역부족일 겁니다.
11. 항응고제로 대표적인 것이 헤파린입니다. 헤파린은 안티트롬빈-3라고 하는 응고인자의 역할을 강화시켜 트롬빈의 힘을 억누르게 만듭니다. 그동안 잽싸게 안티트롬빈-3을 피해 다니던 트롬빈은 헤파린에 꽉 묶이는 바람에 안티트롬빈-3에게 잡혀 힘을 잃습니다. 트롬빈은 응고과정 전반에 관여하므로 피는 굳지 않게(항응고) 됩니다. (어쩐지 슈퍼맨을 무력화시키는 크립토나이트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12. 맥린의 연구에서 보셨듯 헤파린은 외부에서 주입되는 물질이 아닙니다. 우리 몸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자연적인 항응고제입니다. 현재는 보통 돼지에서 추출한 헤파린을 정제하여 약으로 씁니다. 우리 몸에서 만들어내는 물질이다 보니 장점이 있습니다. 약을 끊으면 곧 응고작용이 정상화됩니다. (크립토나이트에서 벗어난 슈퍼맨은 곧 힘을 되찾습니다. 재료를 넣어주면 다시 거미줄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혈액투석을 하는 4시간 동안만 헤파린을 쓰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13. 하지만 크립토나이트가 적정한 수준으로 슈퍼맨의 힘을 빼앗고 있는지 평가는 꼭 필요합니다. 헤파린을 투여할 때 자주 채혈해 aPTT라는 항목이 충분히 늘어났는지 확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aPTT는 피가 멎는 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환자마다 안티트롬빈의 농도와 활성이 달라서, 똑같은 농도의 헤파린도 어떤 사람에겐 부족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겐 과할 수 있습니다.
14. 항응고제 중에서도 경구로 먹는 약들이 있습니다. 이런 약들은 반감기가 지나간 이틀 정도만 중단해도 약효가 떨어져 트롬빈과 같은 응고인자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경구 항응고제(DOAC)의 조상이 헤파린이어서 그렇습니다. 자렐토(리바록사반), 릭시아나 (에독사반), 프라닥사 (다비가트란), 엘리퀴스 (아픽사반) 등이 있습니다. 기술이 좋아져서 이런 약들은 모니터링도 필요 없습니다.
15. 환자에게 항혈소판제를 쓰느냐 항응고제를 쓰느냐는 기준은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대충의 기준은 있습니다. 동맥처럼 압력이 높고 흐름이 빠른 곳에서는 응고 인자보다 혈소판의 응집이 훨씬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관상동맥 스텐트를 넣은 환자가 DOAC 등의 항응고제를 쓰지 않고 항혈소판제인 아스피린과 플라빅스를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6. 반대로 정맥이나 튜브 내부와 같이 유속이 느리고 면적이 넓은 곳에서는 혈소판보다는 응고인자끼리 활성화되는 것을 억제하는 것이 혈전 생성을 예방하는 데 유리합니다. 고여 있는 연못에 이끼가 끼이면서 엉망이 되는 것처럼 응고인자끼리 엉겨 붙어 피브린을 형성하고 그 그물망에 혈소판이 끼이기 때문입니다.
17. 내가 먹는 약이 어떤 계열인지 확인해 보고, 혈소판에 작용한다면 넉넉하게 일주일을, 응고인자에 작용한다면 2~3일 정도 중단하면 되겠구나 예상하시면 되지만 또 예외는 있습니다. 혈소판에 작용하지만 일주일까지 필요하지 않은 항혈소판제도 있기 때문입니다. 디스그렌(트리플루살), 실로스탄(실로스타졸), 안플라그 (사포그릴레이트) 등이 자주 처방되는 예인데 이 약들은 3일 정도만 중단해도 혈소판의 기능이 돌아옵니다.
18. DOAC에 밀려가는 추세지만 항응고제인 와파린(쿠마린)을 드시고 있다면 역시 예외가 됩니다. 와파린은 2일을 끊었다고 해서 지혈이 돌아왔는지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마음대로 끊어서도 안됩니다) 다음에 다룰 내용입니다만 와파린은 혈관 단위에서 작용하는 다른 약들과 달리 간에 작용해 응고인자 생산공장을 중단시키는 방법으로 작용합니다. (으레 단백질이 그렇듯이 응고 인자 대부분도 결국은 간에서 많이 생산을 떠맡고 있습니다.) 만들어진 상품을 억제하는 방식(헤파린)이 아니므로 딜레이가 있어 헤파린으로 전환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와파린은 이후 간의 기능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PT(INR)에서 또 나옵니다.
19. 노파심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위에서 나온 약을 드시고 있다면 중단하시기 전에 꼭 주치의 선생님과 상의하셔야 합니다. 출혈이 되더라도 혈전이 생기면 절대 안되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