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맥린의 헤파린

aPTT

by 예재호

1. 오늘의 이야기는 지도 교수에게 노벨상을 빼앗겼던 비운의 연구자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억울한 동료를 위해 나선 이야기입니다.




2. 인슐린을 발견한 프레데릭 벤팅 박사를 기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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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22년, 벤팅 박사는 개의 췌장에서 인슐린을 분리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다음 해 사경을 헤매던 중증 당뇨 환자에게 그의 인슐린이 최초로 투여됩니다. 환자는 드라마틱하게 회복했습니다. 아무런 치료법이 없어 고통받던 수많은 당뇨 환자에게 구원과도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벤팅 박사는 인슐린을 개발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고 지금까지도 최연소 수상자입니다.


4. 인슐린을 독점적으로 판매하면 큰돈을 벌 수 있었지만 벤팅 박사는 특허권을 포기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치료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상을 받지 못한 동료를 위해 노벨상 상금도 공평하게 반반씩 나누었습니다. 이런 벤팅 박사의 미담이 전해져 많은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습니다. 더운 여름 내내 벤팅과 함께 고생했던 동료는 찰스 베스트, 당시 의대생이었습니다.


5.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까지만 이어지면 참 좋으련만, 씁쓸한 뒷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벤팅이 상금을 나눈 이유가 베스트는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서 빠졌기 때문입니다. 노벨상 위원회는 의대생 베스트 대신 지도 교수 맥클라우드 박사를 공동수상자로 지명했습니다.


6. 벤팅은 '고작 여름휴가 가는 김'에 실험실만 빌려준 게 다인 맥클라우드 교수가 어부지리로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것에 크게 격분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은 비록 노벨상은 받지 못했으나 벤팅과 함께 인슐린을 발견한 덕분에 일약 스타 연구자가 된 의대생, 찰스 베스트 박사가 등장합니다.


insulin.jpg 좌측이 오늘의 주인공 찰스 베스트




7. 1916년, 고명한 윌리엄 하웰 교수 연구실에 한 늙수그레한 본과생이 불쑥 들어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제이 맥린, 겨우 16살이 되던 해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에 가족 모두를 잃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악착같이 공부한 끝에 명문의대 존스 홉킨스에 합격한 사람이었습니다. 낮에는 막노동으로 생활비와 학비를 근근이 벌면서 말이지요.


JMC.png 젊은 날의 제이 맥린


8. 누구보다 성공하고 싶었던 그는 진작부터 큰돈을 벌 수 있는 성공적인 외과의사를 꿈꿨습니다. 어린 맥린은 뛰어난 외과의사가 되려면 지혈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대학에 혈액학의 대가인 윌리엄 하웰 교수가 있었습니다. 하웰 교수는 세팔린(Cephalin)이라는 물질이 응고 과정에 관여한다는 것을 발표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공에 대한 열망으로 무작정 하웰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9. 맥린은 하웰 교수에게 연구에 참여시켜 달라고 졸랐습니다. 패기 넘치는 맥린의 태도에 흥미를 느껴서일까요? 혹은 당시 연구에 일손이 필요해서였을까요? 하웰 교수는 흔쾌히 허락합니다. 교수는 맥린에게 세팔린을 분리해서 응고 과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확인해 보라고 지시합니다.


cephalin.png 세팔린은 아직도 쓰입니다. 다름 아닌 aPTT 측정 시약으로 말이죠.


10. 신이 난 제이 맥린은 열심히 실험에 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실험 도중 이상한 현상을 발견합니다. 보통 세팔린을 추출해 혈액과 반응시키면 하웰 교수의 가설대로 대부분 응고가 빨리 일어나기 마련이었는데 이번엔 반대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혈액이 굳지 않았던 것입니다. 역설적인 결과에 맥린은 '세팔린과 섞인 어떤 물질'이 응고를 방해하는 것 같다고 지도 교수 하웰에게 보고합니다.


11. 하지만 지도 교수 하웰은 맥린의 발견을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아무래도 본인의 연구 주제와는 상충되는 결과다 보니 굳이 논란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하웰은 맥린에게 '실험결과를 발표하되 응고를 늦추는 무엇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라고 설득합니다. (맥린은 헤파르포스파티드(heparphosphatid)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12. 하지만 맥린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실험을 반복해 봐도 똑같은 결과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떤 물질은 혈액 응고를 방해한다'는 맥린의 주장을 포함한 채로 논문이 발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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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논문 발표에 성공한 맥린은 안타깝게도 추가 연구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외과 의사로서 성공을 하는데 지혈을 방해하는 물질이라니, 썩 매력적으로 느껴지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맥린은 여전히 가난했고 학비는 비쌌습니다. 다행히 맥린은 고대하던 외과 레지던트 과정을 무사히 밟는 데 성공합니다.


14. 맥린이 발견한 '세팔린에 혼합된 어떠한 물질'은 이후 지도 교수였던 하웰에 의해 정체가 밝혀집니다. 처음엔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실험을 반복하며 맥린의 주장이 맞다는 것이 증명되자 하웰도 흥미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하웰은 '어떠한 물질'을 추출해 내는 데 성공했고 1918년에 그는 헤파린(haparin)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howell.jpg 하웰 교수


15. 맥린의 예상대로 헤파린은 혈전을 막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헤파린은 응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성분인 트롬빈을 무력화시켜 응고연쇄반응(coagulation cascade)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전방위적으로 막았습니다. 아래 그림에서 보면 안티트롬빈(AT)이 트롬빈을 억제할 수 있도록 헤파린은 둘을 꽁꽁 싸맵니다. (트롬빈을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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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자신이 발견한 물질의 존재가 증명되었으니 맥린 또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지도교수 하웰은 헤파린은 '전에 맥린이 발견한 물질과는 명확히 다른 물질'이라고 선을 그어 맥린을 섭섭하게 만들었습니다. 억울했지만 수련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지도 교수에게 반박하기는 어려웠습니다.


17. 설상가상으로 맥린은 외과의사로서 썩 소질이 없었습니다. 그는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 1927년 코넬 대학교 병리학과에 합류하여 1939년까지 재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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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하웰이 헤파린을 분리하여 그 역할을 규명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헤파린이 바로 임상에 적용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하웰은 독성 때문에 환자에게 헤파린이 무분별하게 적용되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당시 제약회사에서 출시한 헤파린엔 불순물이 많아 투여받은 환자에게는 여러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출혈이 멈추지 않아 사망하는 경우도 잦았습니다.


19. 헤파린을 본격적인 치료약으로 쓰게 된 데에는 다름 아닌 베스트 박사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벤팅과 함께 인슐린을 개발한 베스트는 비록 노벨상은 받지 못했지만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30살에 이미 학과장 자리를 꽤찰 정도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많은 사람들에게 헤파린은 베스트 박사가 발굴해 낸 치료제라는 인식이 남아 있습니다.


20. 아마 베스트는 하웰의 발표를 전해 듣고 헤파린이 환자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던 것 같습니다. 베스트는 연구팀을 꾸려 정제 과정을 거쳐 독성을 일으키는 불순물을 완벽하게 제거한 고순도 헤파린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약물의 농도와 효과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표준화했으며 대량 생산법도 개발해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21. 베스트의 공로로 1930년대부터 헤파린은 본격적으로 쓰일 수 있었습니다. 수술 후 환자들이 혈전으로 사망하는 주요 원인이었던 폐색전증이나 심부정맥 혈전증에 헤파린이 쓰였습니다. 무엇보다 베스트의 헤파린덕택에 최초의 혈액 투석이 성공합니다. 사람들은 베스트가 헤파린을 개발함으로써 많은 환자들의 생명을 구한 것에 대해 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베스트는 성공과 명예를 모두 거머쥐었습니다.


haparin--.png 지금은 이정도는 아니지만 헤파린은 투석에 필수적이었습니다.




22. 제이 맥린은 여전히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말년의 그는 오하이오주에서 개원을 했지만 파산 위기에 몰릴 정도로 어려웠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그는 1947년 워싱턴 D.C. 암 관리국에서 근무하기도 하고, 1949년에는 서배너로 옮겨 방사선 치료를 하기도 했습니다. 맥린은 어떤 곳에서도 연구나 임상 외과 분야에서 안정적인 경력을 쌓지 못했습니다. 그의 말년은 불안정했습니다.


23. 시간이 흐르며 맥린에게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것이 패기가 넘치던 20대 시절의 헤파린뿐이었다는 것을 절절히 깨달은 것으로 보입니다. 불쌍한 맥린은 처음에는 하웰 교수의 눈치를 보느라 조심스러웠지만, 1945년 하웰 교수가 사망한 후 본격적으로 자신의 공로를 주장했습니다. 헤파린을 발견한 공적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알렸습니다.


24. 하지만 이미 헤파린의 주도권은 하웰도 아닌 베스트에게 가 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인슐린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헤파린마저 도입한 베스트의 권위는 굉장했습니다. 맥린은 다름 아닌 베스트에게도 장문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25. 베스트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최초의 발견은 1916년 맥린이 했다고 논문에서 밝힙니다. 베스트 정도의 거물이 굳이 무명 연구자를 지지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사실 베스트 입장에서는 누가 발견했는가에 대한 진흙탕 싸움엔 별 관심이 없었을 만도 합니다. 이미 헤파린의 공적은 자신에게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맥린을 최초 발견자라고 언급한 데에는 아마도 벤팅과의 연구에서 본인의 업적이 과소평가되어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이 반영되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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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1963년, 맥린이 사망한 지 6년 후, 존스홉킨스 대학교에 맥린을 기리는 명판이 세워졌습니다. (다름 아닌) 업존 사에서 그의 미망인에게 기증한 6,000달러의 기념패와 함께 말이지요. 비문에는 "1916년 의대 2학년 생 시절 윌리엄 H. 하웰 교수와 공동으로 헤파린을 발견한 그의 주요 공헌을 기리기 위해, 1963년 5월 3일 뉴욕 과학 아카데미가 주최한 외과 환자 출혈 학회에서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에 이 명판을 기증합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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