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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 K씨

by 예재호

50대 중반의 K 씨는 키가 181cm에 몸무게가 100kg이 넘고, 허리둘레는 36인치는 될 거구의 경찰관입니다. 이곳저곳 부르는 곳이 많아 항상 바쁜 그는 일주일에 4회 정도 음주하고,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면서 하루 반 갑 담배도 태웁니다.


그의 목소리와 휴대전화 벨 소리는 대기실 그 누구보다 우렁찹니다. 늘 붉은빛을 띠는 얼굴은 아무리 푸근한 표정을 짓더라도 위압감이 있습니다. 거칠 것이 없이 성큼성큼 걷는 걸음걸이가 트레이드마크인 그는, 우리 병원에서 제일 가는 터프가이 중에 한 분입니다.


“건강검진에서 당뇨가 있다 하니 알아서 잘 고쳐주소.”라며 우리 병원에 오신 게 벌써 5년도 훌쩍 지났으니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합니다만, 저는 여전히 긴장을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보다 두 배는 큰 체구인 데다 무엇보다 직업도 직업인지라 주눅이 안 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한테 맞지 않더라도 실신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긴장하는 이유가 비단 그뿐만은 또 아닙니다. 잔소리를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것도 제게 조바심을 들게 하는 겁니다. 딴 건 몰라도 담배만큼은 어떻게든 끊게 해드려야 하는데 싶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착한 의사 코스프레냐고요? 아닙니다. 나중에 큰 일이라도 생기면 뒷감당을 어떻게 지겠습니까?


그런데 거의 매번 오실 때마다, 나 너무 바쁘니 빨리 약만 처방해달라며 (혹은 아예 문 쪽에 서서 들어오지 않고 '오늘 피 뽑고 가면 되'냐며) 말도 붙이지 못하게 만드시기 일쑤여서 이야기를 꺼내는 것부터 쉽지 않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자식에게 '오늘은 자고 가라'며 붙잡아도, 바쁘다며 서둘러 현관문을 나서는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요?


어쨌든 약이라도 꼬박꼬박 잘 드시고, 검사 수치라도 잘 나오고 있으니 다행히 아니냐며 생각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몇 달 전, 그분이 처음 보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냅니다.




"원장!“

"그 유튜브 보니까 스타틴제? 나쁜 약이니 먹지 말라고 나오던데, 내 약에도 들어 있죠?"

"네 그렇습니다."


K 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지긋이 저를 쳐다보다 취조하듯 툭 하고 말을 던집니다.


"그거 빼면 안 됩니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제 앞 큰 북극곰처럼 앉아 있는 그분은 저보다 두 배는 큰 체구에, 험상궂지는 않지만, 근엄한 얼굴에, 무엇보다 경찰관이었습니다. 게다가 얼마나 사람 다루는데 노련하신지 제가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만 하면, 슬그머니 빠져나가시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순간 마음이 흔들립니다. 여기서 어떻게 대답해야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


시간을 벌 겸, 지난번 검사 결과를 찾아 띄워봅니다. 4월에 한 검사 결과가 LDL이 45입니다. 썩 낮습니다. 머리를 굴려보니 중단해도 120 정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진작에 안 드시고 계셨으면서 은근히 떠보시고 있을 가능성도 있단 걸 압니다.


비겁한 것 같아도, “정 그러시면 한 달 정도 끊어보시고 다음 달에 오르면 다시 드셔보시죠.” 하고 슬그머니 위기를 모면해 볼지 고민해 봅니다. 고집이 있으신 분도 아니고, 자기 몸에 애정이 없는 분도 아니어서 한 달쯤 중단하면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냥 다시 처방해 줘 원장. 안 먹으니, 목덜미가 뻐근하고 이상해.”라고 알아서 말씀하실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의 몸에서 은은히 풍기는 멘솔 담배 향과 두 달 전에 비해 1kg 정도 는 것으로 재어진 체중을 보니 덜컥 겁이 납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습니다. 결심이 섰습니다. 눈을 질끈 감고, 누가 봐도 괜찮은 척해 보이려고 짓는 게 뻔한 어설픈 미소를 띠며, 긴장한 손길로 유튜브 창을 큰 모니터에다 올렸습니다.


“어느 유튜브 보셨습니까?"


아마 K 씨는 제가 알아서 꼬리를 내리고 ‘그럼요. 그럼요. 나쁘다니 빼 드릴게요.’ 할 거라고 기대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근데 웬걸, 결연한 목소리(!)로 제가 되물으니 K 씨 은근히 당황하신 것 같습니다. 눈이 커지고, 느긋하게 책상에 기대있던 팔을 거두어 팔짱을 끼고 흠흠 헛기침합니다.


”글쎄, 카톡으로 누가 보내준 거라 나도 기억이 잘 나진 않네요.“


용기를 얻은 저는 그분이 보는 앞에서 검색창에 ”스타틴 부작용“이라고 쳐 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누가 과연 스타틴을 용감하게 깔 생각하겠냐며 생각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만든 영상이겠거니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혹은 얼굴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AI 음성을 써서 만든 조악한 거짓 영상일 거로 생각했습니다. 검색해서 기껏 해봤자 10개나 나오겠냐며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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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영상이 수없이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의사라고 당당히 말씀하시며 올린 동영상들이 더 많습니다. 조회수가 대단합니다. 놀랐습니다. 당황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두려움이 듭니다.


'혹시 모르는 사이 뭐가 새로 발표되었나?'

'아니야. 아무리 내가 최근에 게을렀어도 스타틴을 그만 먹어야 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면 모를 수가 없어.'

'9시 뉴스에 나오고 전국 방방곡곡에 소문이 나야 했다고'


그때, ”응, 저기 저거. 안경 쓰신 저분 동영상이었던 것 같아.“ K 씨가 썩 내키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영상 하나를 지목합니다.


영상을 틀며, 전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제가 몰랐던 게 있었다면 아마 K 씨가


”넌 내과 의사란 놈이 저런 것도 모르고 그동안 나한테 이런 약을 처방했냐고, 당장 경찰서로 가자고. 오늘부터 구속이라고“ 할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라, 진료실에 들어와 있던 간호사도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사이, 영상이 시작됐습니다.


저와는 달리 귀티가 흐르는 외모의, 누가 봐도 신뢰가 가는 목소리를 가진, "제 동료"가 조곤조곤한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의 교양 있는 목소리는 좁고, 쇠락하며, 대기하는 환자가 한 명도 없어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제 진료실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영상을 다 보고 난 뒤, 저는 안심했습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별다른 내용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최소한 K 씨에게 엎어치기를 당하거나, 구속될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내과 의사로서의 원죄’로부터 벗어난 것 같아 마음이 홀가분했습니다.


그리고 화가 났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K 씨는 스타틴을 끊으면 큰일 나는 사람이었습니다. 50대 중반의 남자였고, 비만한 체격에 금연하지도 못했으며, HDL은 겨우 35밖에 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무엇보다 당화혈색소는 잘 조절되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무엇보다,

무엇보다도

그는 당뇨환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나도 약을 끊어볼까?'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귀티가 줄줄 흐르는 저 동료 의사’의 동영상에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간 K 씨의 위세에 눌려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 했던 것이 결국 이런 사태를 일으킨 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내심 말씀이 없으니 편하다며(!)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자책했습니다. 조금 전, “정 그러시면 한 달 정도 끊어보시고 다음 달에 오르면 다시 드셔보시죠.”라고 대충 모면해 볼까 하고 생각했던 저 자신에게 화가 났습니다.


영상이 끝나고도 한참을 묵묵히 고민하고 있다가, K 씨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이 선생에게 전화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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