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는 신비한 첫 문장(feat. 고수리)
글을 써보기로 다짐한 이후, 고수리 작가님의 책, ‘마음 쓰는 밤’을 다시 폈다.
“나는 기억한다.”
글쓰기 문턱을 없애고, 단번에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는 신비한 첫 문장이다. ‘나에게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어떻게 글쓰기를 시작해야 할까’ 막막한 사람들에게 ‘나는 기억한다’ 글쓰기는 삶의 기억을 휘저어 와르르 글감을 꺼내보는 방법이기도 하다.
*고수리 ‘마음 쓰는 밤’ (2022)
예 진리의 나는 기억한다
나는 기억한다, 학교에 가기 싫다던 중 2의 나를 데리고 광안리 바다를 걸어주던 엄마를.
나는 기억한다, 나와 손을 잡고 걸으며, 하늘과 구름, 들꽃과 나무와 같은 거리의 사소함에 감탄하는 아빠의 시선들을.
나는 기억한다, 나를 데리고 밀면과 돼지국밥을 먹으러 다니던 할머니, 다리가 불편했던 할머니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택시를 불러 어느 음식점으로 향했다.
나는 기억한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나를 데리고 나가 뭐든 사주던 삼촌을.
나는 기억한다, 전교 3등을 했던 날을.
나는 기억한다, 갑자기 공부가 재미없어졌던 날을.
나는 기억한다, 온라인 강의를 하나 듣고 나면, 그 강의를 똑같이 시연하며 공부했던 나를.
나는 기억한다, 박스에 과자를 가득 담어 선물하던 친구들의 마음을.
나는 기억한다, 대학 면접을 보러 가던 길의 바다를.
나는 기억한다, 도서관에서 보이던 바다를. 바다 때문에 다니기로 결심한 학교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기억한다, 뇌가 기억해야 한다며, 밤을 새더라도 한시간은 꼭 자고 시험을 봤던 날들을.
나는 기억한다, 유일하게 같은 방향이던 과 동기 오빠와 함께 버스 타던 날들, 그리고 갑작스러운 오빠의 죽음을.
나는 기억한다, 수업이 끝나고 버스 타기 전에 사먹던 롯데리아 양념감자를.
나는 기억한다, 매번 과탑을 하다 못했던 어느 학기를. 나 대신 과탑의 자리를 차지 했던 그 오빠에 대한 나의 째려봄을.
나는 기억한다, 어느날 갑자기 발표를 하다 얼굴의 모든 감각이 얼어버렸던 날을.
나는 기억한다, 사회과학학부인 내가 영상학 수업을 들으며 설렜던 날을.
나는 기억한다, 광고홍보학과생들의 뛰어난 ppt에 내 발표를 얹어 뿌듯했던 날을.
나는 기억한다, 필리핀 어학연수에서 느꼈던 여러 감정들, 그리고 여전히 기억나는 그 나라의 거리, 공기, 냄새. 내겐 향수가 짙은 곳.
나는 기억한다, 처음 대학원에서 발표하던 날을, 혹시나 다시 얼굴이 굳을까 걱정하며 사람들 앞에 섰던 날을. “서울말로 해주세요~~”장난치던 동기들의 따뜻함을.
나는 기억한다, 서울에 와 처음으로 눈을 봤던 날을, 기숙사 창문을 열었을 때, 온 세상이 하얗던 배경을, 감격해 울어버리는 나를 진짜 이상하게 쳐다보던 룸메를. 나는 태어나서 눈이 쌓인 걸 처음 봤단 말이야 ..
나는 기억한다, 논문학기에 온 몸에 힘이 없어 삼계탕을 먹던 날을.
나는 기억한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억쑤같이 쏟아지던 날,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내가 두바퀴를 돌고는 천장에 매달려 있던 날을, 친한 언니를 천국에 보낼 뻔 한 날을.
나는 기억한다, 10장 이상 쓰지 못하는 나의 다이어리들을.
나는 기억한다, 빈아, 너가 먼저 하늘나라에 가고 혼자서 떠난 추웠던 속초 바다를.
나는 기억한다, 더운 여름날의 속초도. 그리고 거기서 만난 많은 인연들도.
나는 기억한다, 처음으로 서울 불꽃축제를 봤던 날을. 드라마 같던 설렘의 감정들을.
나는 기억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공동체에서 덩그러니 혼자 튕겨져 나온 아픔을.
나는 기억한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던 어느 날의 우울을.
나는 기억한다, 이 하루가 온전히 내 것임을 느꼈던 그 날의 발걸음을.
나는 기억한다, 무기력이 어색해 어쩔 줄 모르던 날들을.
나는 기억한다, 가슴 시리던 어느 가을 날 걸었던 잠수교를.
나는 기억한다, 만날 때마다 여행 같은 시간을 선물해주는 그녀의 사랑스러움을. 사실은 나와 닮은 모습들이라는 것에 지어지는 미소.
나는 기억한다, 부산에 내려가기로 결심하고, 한번의 미동도 없던 너가 펑펑 울던 마지막 날을.
나는 기억한다, 부산에 내려와 2주 넘게 집 밖에 한번도 나가지 않던 나를
.
..
아마도 나는 더 많은 것들을 기억하겠지.
내가 기억하는 장면들은 따뜻하고, 소중하고, 예쁘고, 안쓰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