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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L Mar 10. 2017

나는 게으른 여행자입니다

불가리아 플로브디프에서 보낸 시간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이 있다.

모든 요일을 토요일처럼 보낼 수 있는 권리.

일상 속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 다른 사람 눈치 볼 필요 없이 오로지 나의 취향에 맞게 하루를 디자인할 수 있는 권리.


여행을 떠나와서 가장 먼저 선택한 자유는 핸드폰에서 알람을 모두 해제시켜 버린 것이었다. 어떠한 방해 요소 없이 오로지 나의 생체리듬에 따라  몸이 스스로 일어나야  때라고 인식할  자연스럽게 눈을 뜨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이른 아침, 알람 소리에 겨우겨우 하루를 시작하는 직장인, 학생, 주부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일일 터. 우리가 바라는 소소한 일(그렇지만 결코 쉽지 않은) 중 하나가 아닐까.


몇 년 동안 밤낮을 바꿔가는 일상을 보내왔던 내겐 그 어떠한 것보다 절실한 것이었다. 매달 잡지를 만들어 내는 일은 생각보다 고강도의 노동이 필요한 일이었다. 한 달에 절반은 깊은 새벽까지 작업이 이루어졌고, 동이 트고 집에 들어오는 횟수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새벽 시간에 정이 들어간다 싶으면, 어느새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이른 아침을 마주해야 했다. 일 년에 12번을 그렇게 낮과 밤을 바꿔가며 생활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이오리듬은 망가져 갔고, 퀘퀘한 다크서클은 이미 얼굴 속에 부착이 되어 떨어지지도 않았다. 자유가 주어진다면 며칠 동안 오로지 잠만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내가 드디어 자유의 시간을 쟁취한 것이니, 여행 중 알람을 끄는 일은 숙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Plovdiv, Bulgaria


불가리아 플로브디프에 오면서부터 본격적인 게으른 여행이 시작되었다. 플로브디프에서 맞이한 아침 풍경은 늘 똑같았다. 부스스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면 이미 모두 떠나고 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같은 방에 머무는 4명 중 매일 꼴찌를 기록했다.


꼴찌의 장점이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아침 전쟁에 동참하지 않아도 되는 것. 장기 여행자들의 단골 숙박 장소인 호스텔은 아침이 시작되는 동시에 욕실 눈치 싸움이 시작된다. 그러나 늦게 일어난 새는 여유롭게 욕실을 차지할 수 있다. 덕분에 허둥지둥 요란스러움이 아닌 느릿느릿한 여유로움으로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




Plovdiv, Bulgaria


하루의 시작은 근처 카페에서부터 시작됐다. 햇살 가득 쏟아지는 카페 테라스에 앉아 브런치를 먹으며 늦은 아침을 맞이했다. 그리고 거리 속 사람들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낼지 떠올리기 시작했다. 주어진 보기는 늘 동일했다. 산책, 공원, 카페, 언덕 4개의 보기가 정해져 있었고, 매일 순서만 뒤바뀌었다.


든든히 배를 채운 뒤에는 발걸음이 닿는 대로 무작정 거리를 걸었고, 공원에 앉아 실컷 나무 구경, 사람 구경을 했다. 그러다 지칠 때쯤이면 카페에 들어가 떠오르는 생각들을 노트에 끄적였다. 누군가 나를 지켜봤다면 아마 동네 한량쯤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Tsar Simeon's garden, Plovdiv, Bulgaria



해가 지기 1시간 전쯤이면 플로브디프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올라 널찍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곤 이어폰 속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노을이 지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이렇게 탁 트인 하늘을 바라볼 기회가 얼마나 될까? 도심에서 보이는 하늘 면적으로나, 하루 중 여유 시간으로나 그 어떤 것으로 따져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쉽게 오지 않는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 더욱더 오랫동안, 더욱더 깊숙이 누리고 싶었다.


Ancient fortress nebet hill, Plovdiv, Bulgaria




붉었던 노을도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하면 2세기에 지어진 고대 로마 극장에서 오페라, 뮤지컬 등의 공연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비슷한 일상이었지만 똑같은 하루는 단 하루도 없었다. 그 비슷함 속에서도 차이는 존재했다. 그 차이들이 하루하루를 새롭게 각인시켜 주었다.


Ancient Theatre, Plovdiv, Bulgaria






보통 이틀 정도 머물고 떠나는 작은 도시, 플로브디프에서 그렇게 5일을 머물렀다. 최대한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시간을 항유하면서.


단조로운 나의 여행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가 물어왔다. 지겹지 않냐고. 또 누군가는 그 먼 곳까지 갔는데, 시간들이 아깝지 않냐고 물어왔다. 언제 또 그곳에 갈지 모르는데 부지런히 돌아봐야 하지 않겠냐고.

물론 이곳에 또 언제 올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여행은 마치 숙제를 하듯 동그라미 쳐가며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보기위해 바삐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일분일초를 쪼개가며 타이트하게 살았던 일상이 넌더리 나서 떠나온 건데 이곳에서까지 그 생활을 이어가고 싶진 않았다.


내가 정말 바라는 건, 낯선 도시에서 여유로운 일상을 만들어 내는 일. 최대한 느릿 느릿하게 삶의 속도를 늦추는 일. 그 시간 사이로 마음의 독기와 살기를 모두 빼내고 여유로움과 넉넉함을 차곡차곡 채워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 못 보면 어떤가. 그럼 내일 하루 더 이곳에 머물면 되는 것이고, 하루가 부족하면 이틀 더 머물면 된다. 나는 시간이 넘치는 여행자니까. 그것으로도 다 채워지지 않을 것 같다면 다음에 또 와서 두고두고 보면 되겠지.


중요한 것은 많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니까. 얼마나 더 깊이 보았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슴속에 새기고 가는지가 더 중요한 거니까. 결국 그 시간들이 다시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줄 테니.



The old town, Plovdiv, Bulg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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