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벨리코 타르노보 사람들
벨리코 타르노보.
이 일곱 글자를 외우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친구들이 어디에 가느냐고 물을 때마다 몇 번이나 버벅거리며 말했던 그곳. 8백여 년 전이라는 먼 과거의 일이긴 하지만 한때 불가리아의 수도로 꽃을 피우기도 했던 그곳. 어려운 이름만큼이나 우리에겐 너무나도 생소한 그곳을 드디어 찾아왔다.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다. 산등성이를 따라 촘촘히 들어서 있는 마을 사진 한 장에 이끌려온 것뿐.
정말 엽서 속에나 등장할 것 같은 풍경이 매일 눈앞에 펼쳐졌지만 왠지 즐겁지만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 먹구름들이 무성해져 갔다. 대체 무엇 때문인 걸까? 무엇 때문에 이 아름다운 풍경을 눈앞에 두고도 즐기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플로브디프에서는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벨리코 타르노보에 온 이후로부터 사람들의 표정과 눈빛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무뚝뚝한 표정, 무미건조한 목소리, 냉랭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그들이 나를 차갑게 대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착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마음이 서늘해져 가는 것만은 사실. 어쩌면 정이 차고 넘치던 터키를 지나와 더욱더 대조적으로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 한 켠에 쓸쓸함을 묻어둔 채 지내던 어느 날. 그 마음을 급속도로 냉각시켜 주는 결정적인 사람이 등장했다. 그녀의 이름은 다이애나. 며칠째 머무르고 있던 호스텔 스텝 중 한 명이었다. 첫 만남부터 유쾌하지는 않았다. 여행 기간을 통틀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반기던 스텝은 그녀가 유일무이했으니.
있는 동안만큼은 잘 지내 보고자 살갑게 다가갔던 게 잘못된 거였을까. 그런 행동이 그녀를 성가시게 만들었던 걸까. 아니면 나의 모자란 영어 실력이 우스웠을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투와 표정에서 나를 향한 멸시가 느껴지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처음엔 오해겠거니 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녀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불쾌한 마음을 이끌고 매일 거리로 나와서였을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마저도 괜히 더 냉랭하게 느껴졌다.
무거워진 마음을 게워내기 위해 차레베츠 성채에 올랐다. 성곽을 따라 굽이굽이 진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자 숨겨진 마을들이 속속히 눈에 들어왔다. 성곽 주위로 이렇게나 마을이 많았었다니. 그동안 내가 봐왔던 벨리코 타르노보는 절반도 안 됐었구나 싶었다. 그중에서도 성곽 뒤편에 위치한 한 마을이 눈에 띄었다. 빨간 지붕들이 촘촘히 모여 있던 마을. 저긴 어떤 곳일까 문득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고민 없이 성곽에서 나와 마을을 향해 걸었다. 앞서가고 있던 아저씨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는데 그 표정이 알쏭달쏭했다. 그 뒤로도 아저씨는 계속 뒤를 돌아보았고,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이 조금 불편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덤덤히 걸었다.
멀리서 보이던 마을이 서서히 가까워지면서 그제야 아저씨의 표정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곳은 관광지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곳이었다. 벨리코 타르노보 주민들이 모여 사는 진짜 터전이었던 것. 그동안 봐왔던 벨리코 타르노보와는 전혀 다른 모습들이 펼쳐졌다.
도심 중심지가 관광객들을 위해 잔뜩 꾸며진 마을이었다면, 이곳은 민낯 그대로를 드러내고 있었다. 초입부터 왠지모를 음침한 분위기가 느껴져 '아차, 내가 잘못 온 건가. 돌아갈까?' 살짝 긴장했지만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라는 생각으로 나를 붙잡았다. 이내 조심스레 발걸음을 한 걸음씩 옮겼다.
마을의 중심으로 발걸음을 옮겨가니 사람들의 모습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집 앞에 의자를 둘러놓고 주민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 골목을 가로질러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 동네 가게 앞에서 맥주를 마시는 할아버지들의 모습. 90년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던 골목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를 삭막한 도심 풍경이 아닌, 온기가 가득히 넘치는 골목 풍경.
그 평화로움을 깬 건 다름 아닌 '나'였다. 관광객이 오지 않을 평범한 마을에 낯선 동양인 여자가 홀로 길을 걷는 게 그들에게는 꽤 신기한 모습이었나보다. 골목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할머니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고 이내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그 따뜻한 시선은 골목에서 사라질 때까지 내게 고정되었다. 또 2층 발코니에서 한가로이 대화를 나누던 동네 사람들이 나를 구경하기 위해 거리 위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기까지 했다.
곧이어 꼬마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내 뒤를 쫓아왔다. 그중 누군가가 "헬로"라고 말을 꺼내자 곁에 있던 아이들 모두 꺄르르 웃음꽃을 피워낸다. 그리곤 아는 영어를 총동원해서 "이름이 뭐야?", "어디에서 왔어?"라며 말을 걸어왔다.
한참을 동네 꼬마 아이들과 손짓 발짓 대화를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헬~~~로, 헬~~~로" 건너편 골목에 있는 어린 소녀의 외침이었다. 똑같이 "헬로" 인사를 전하자 손 키스를 연거푸 날려주는 아리따운 소녀.
마을 한 바퀴에 이렇게 환영을 받은 것은 처음. 단지 성곽길을 하나 지나쳤을 뿐인데 마치 이상한 나라에 도달한 앨리스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이상한 나라가 아닌 행복이 넘치는 나라.
내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따뜻한 온기와 정은 이렇게 뒷골목 속에 감춰져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깊숙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