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희생 Offret Le Sacrifice> 을 곁들인
최근 영화를 잇달아 봤다. 대중성과는 다소 거리가 먼. 나는 일개 대중이라 잘 이해는 못 했다. 오늘 노트북을 켜기 전 결심은 각 영화에 대한 감상문을 쓰는 거였는데, 영화의 잔상만 흐릿하게 남아있을 뿐 해석이 안 되니 글이 써질 리가 없다. 열흘 동안 연달아 4편의 영화를 봤는데 할 얘기가 없다니.
그럼 나는 이해도 못 하는 이런 영화들을 왜 이렇게나 자주 보는 걸까. 심지어 접근성이 좋은 것도 아니다. 상영 시간도, 상영하는 영화관도 몇 안 된다. 긴 러닝타임에 엉덩이가 제법 아픈 영화도 있었고, 극적인 장면 없이 잔잔한 서사에 커피를 연신 수혈하며 졸음을 참은 영화도 있다. 몇 안 되는 휴일에 나는 왜 이런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건가.
결론은 지적 허영심이다. 최근 본 영화들을 같은 범주로 묶어도 되는지는 또다른 차원의 문제이지만, 이런 영화들은 뭔가 '있어' 보인다. 나는 CGV나 메가박스 같은 대형 영화사가 아닌, 한 관 짜리 작은 영화관에서 조금 심오하고 유명하지 않은 영화를 굳이 찾아보는 취향을 가진 '나'를 즐기는 것이다.
하나 더 얹어 보자면, 소위 예술 영화의 잔잔하고 고요한 정서도 마음에 안정감을 주는 것 같다. 쇼츠와 유튜브, OTT로 도파민에 절어 있는 뇌를 2시간 동안 디톡스해주는 효과도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통상 '예술 영화'라고 불리는 이런 영화들은 정말 예술 그 자체가 아닌가 싶다. 이해의 영역이 아닌, 감각하고 경험하는 체험이니까 말이다.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영상 시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유작 <희생>를 봤어.
영화를 설명하는 화려한 수식어, 지적 허영심을 채우기 충분해 보이지 않는가. 잠깐 눈을 껌뻑인 순간도 있었지만, 2시간 29분 동안 자리를 지키긴 했다. 정서적 체험은 충분히 즐겼고, 뒤늦게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찾아보며 영화를 이해해보려고 한다.
먼저 시대. 무려 1986년에 나왔다. 지금은 사라진 소비에트 연방 시절 러시아 감독의 영화다. 한국에서는 내가 태어난 1995년 개봉했는데, 29년 만에 4K로 다시 극장에 올랐다. 나는 이번에 처음 접했지만, 영화 좀 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역사상 최고의 영화감독으로 꼽힌다고 한다. 또다른 거장 장 뤽 고다르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본다는 건 기적으로서의 영화 체험”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도 “타르코프스키 때문에 평론가가 됐다고 거짓말까지 하고 싶다”고 할 만큼 한국 영화인 사이에서도 추앙받는 존재라고 한다.
줄거리로 넘어가보자. 영화의 서사는 단순하다.
스웨덴 남부 발트해에 위치한 섬에서 작가 알렉산더는 말을 하지 못하는 아들 고센과 죽은 나무에 물을 주며 평화로운 생일을 맞는다. 알렉산더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친구들이 찾아오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진다. 장식장이 흔들리고 그 안에 있던 우유가 담긴 병이 와장창 깨진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절망과 공포에 휩싸인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처음으로 신에게 절박하게 기도를 올린다. 자신을 희생할테니 세상을 구해달라고 말이다.
포스터에서도 빨간 색으로 강조하고 있는 저 나무에서 영화가 시작하고 끝도 난다. 오프닝에서 알렉산더는 아들 고센에게 말한다.
아주 먼 옛날 늙은 수도승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단다.
그리고 제자에게 나무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 물을 주라고 시켰지.
제자는 매일 아침 나무에 물을 줬단다.
그러길 3년이 지난 어느 날 나무에 온통 꽃이 핀 모습을 발견한 거야.
노력하면 결실을 맺는 법이란다.
매일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다보면 세상은 변할 거야.
나무를 심고 물을 주며 알렉산더는 고센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다. 꽤 긴 시간 동안 원테이크로 긴 대화가 오가는데 이 장면에서 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떠올랐다. 독백이 이어진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느꼈지만, 관통하는 메시지도 닮았다. 믿음과 기다림.
전쟁이 닥치고 절망에 빠진 알렉산더는 우체부 오토에게서 집안일을 봐주던 마리아와 동침하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듣는다. 처음엔 의심으로 가득했던 그는 결국 마리아를 찾아간다. 마리아는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만 알렉산더가 권총을 꺼내 자살을 하려하자 그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마치 꽃이 피길 바라며 죽은 나무에 매일 물을 주던 수도승처럼, 세상을 구한다는 믿음으로.
그리고 이튿날, 알렉산더는 잠에서 깨어나고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하다. 그들의 행위가 세상을 구한 걸까, 아니면 구운몽처럼 알렉산더의 꿈에서 일어난 허구였던 걸까. 영화에서 알렉산더는 기도에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집을 태움으로써 또한번 '희생'을 한다. 알렉산더가 가족들과 친구들이 부른 정신병원 차에 강제로 태워지고, 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를 힘겹게 든 고센이 화면에 등장한다. 그리고 내내 말이 없던 고센이 입을 연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아빠 그게 무슨 뜻이지요?
종교적 색채가 강한 영화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출연진 이름이 나오면서 배경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방박사의 경배'라는 그림이 걸리고 바흐의 '마태 수난곡'이 흐른다. 알렉산더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그리스도에 빗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구원을 위한 희생이라는 점에서 마리아와의 동침이 꼭 필요했는지는 잘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물론 이 장면이 노골적이거나 섹슈얼하진 않았고, 피에타처럼 숭고한 느낌으로 그려지긴 했지만 필수적인 장치였는지는 의문이다.
사는 게 의미 없다고 느껴질 때 보면 좋을 영화다. 의미 없는 나날이 반복되는 듯해도 믿음으로 마음을 쏟다보면 죽은 나무에 꽃이 피든, 변화는 생긴다. 그렇다면 <희생>의 주제는 희망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