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뮤지컬 수첩

#9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들>과 오늘날의 시사점

by 심택근

기원전 423년,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스파르타와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압박이 심화되고, ‘소피스트’라 불리는 이들이 궤변과 화려한 말솜씨로 사람들을 사로잡던 시기였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고 주장한 프로타고라스의 이 발언은 절대적 진리는 없고, 모든 판단은 개인의 인식에 달린다는 상대주의적 철학의 대표 구절이다. 이런 사고는 현대의 다원적 가치관과도 어울려 보이지만, 동시에 당시 논쟁에서 상대를 이기기 위해 무엇이든 논리로 포장하는 습관을 강화하기도 했다.

소피스트들은 오늘날의 '스피치 컨설턴트'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말을 가르치고 말로 상대를 설득하는, 납득시킬 줄 아는 기술을 가르치는 자들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진리와 윤리보다 상대방을 이기며 설득하는 것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었다.


이때 겨우 23세였던 아리스토파네스<구름들>을 무대에 올린다. 현재 남아있는 그림들과 조각상들로 우리는 흔히 그의 모습을 나이 지긋한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으로 떠올리지만, 이 작품은 그가 젊고 혈기왕성하게 사회에 목소리를 내던 시기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구름들> 속에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는 세대 단절, 교육의 위기, 공감의 부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희극은 부자간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교육형태를 날카롭게 풍자한다. 아버지 스트렙시아데스는 빚을 면하려고 궤변술을 배우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사고소’에 찾아가지만, 결국 그 궤변 교육이 그의 아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끝내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감히 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여 부자 관계를 파멸로 이끄는 (막장) 이야기이다.




<구름들>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들


1. 교육의 목적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자립적이며 능동적인 한 인간으로 서도록 돕고 지원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오늘날,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 덕분에 누구나 손쉽게 지식과 자료를 얻을 수 있다. 그렇기에 앞으로의 교육은 '무엇을 아는가'보다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얻은 지식을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 개인의 윤리와 책임감에 대해 더욱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 작품 속 소피스트들의 교육은 궤변으로 논쟁에서 이기는 법만을 가르쳤고, 결국 인간 간의 감정과 윤리를 해체하게 만들었다. 놀라운 점은, 지금 이 시대에도 소피스트 같은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는 그런 궤변이 옳은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사실 이런 문제는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어느 한 존재가 가지는 힘에 대한 경계와 비판. 예를 들어, <반지의 제왕> 속 절대반지는 그것을 소유한 자에게 막강한 힘을 손에 쥐어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허튼 유혹과 어둠에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개인의 욕망을 이용해서 스스로(악)의 뜻을 이루려는 것 말이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그 절대반지는 AI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만약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 혹은 윤리나 도덕성이 결여된 이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용한다면 어떤 결과가 찾아올까?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피스트를 풍자하며 던졌던 질문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2. 세대 간 공감의 부재

이 작품 속 부자간의 관계에는 이해도 존경도 없다. 각자의 말만을 하며, 상대방에게서 원하는 것만 요구한다. 물론 희극이기에 우스꽝스럽고(정말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이가 없는) 도저히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지 싶지만, 자식이 부모보다 위에 있어 부모를 가르치고 훈계하려 하고, 부모는 자식들을 조종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모습들은 전혀 낯설지 않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당시 아테네 인들에게도) 자신이 사회적으로 맡은 역할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상대를 무시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시도, 즉 공감이 필요함을 일깨운다. 공감 없는 교육은 명령이 되고, 공감 없는 비판은 혐오가 될 뿐이다.


3. 예술, 시대 표현의 장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공감이 담긴 비판이었다. 사람들은 극장에 모여 함께 웃으며 공동체와 자신을 돌아보았다.

오늘날, 이런 소통의 장은 유튜브, 소셜 미디어로 옮겨갔다. 사람들은 댓글로 서로 공감하고 소통을 한다. 그러나 동시에 '함께' 공동체로서 감상하는 공간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영화관에 가서 타인과 영화를 즐겼지만, 이제는 영화관에서 다른 이들과 영화를 한 공간에서 관람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부스슥거리는 소리, 영화는 안 보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이들의 방해 요소 때문이다. 음악도 스피커로 같이 즐기기보다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즐기는 시대다.

이런 변화 속에서 예술이 공동체적 경험을 하게 하여 소통의 장 마련을 하려면, 작품만을 창작하는 것이 아닌, 함께 그 작품을 즐기며 소비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고민과 창출이 필요해 보인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창작 지원 정책과 예술가들의 직업의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살던 그 시절, 전쟁이 일어나고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 속에서도 그는 희극을 써서 당대의 문제들을 웃음으로 풀어냈다. 극이 끝난 후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 나누며 그 문제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혼란스러운 이 시기에, 계속해서 예술작품들이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500년 전, 아테네의 극장에서 울려 퍼지던 이 희극이, 2025년 현재까지 메아리쳐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모두를 위한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예술은 그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는 역사를 공부할 때, 당시에 남겨진 기록들(글, 음악, 미술, 건축 등...)을 통해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들여다본다. 예술작품 하나하나가 그 시대를 증언한다.

따라서 예술가는 단순히 자기만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동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동시에 공동체의 목소리를 작품 속에 담아내야 한다. 물론 오늘날 많은 예술이 개인주의적 표현에 초점을 두지만, 예술이 가진 본래 힘 중 하나는 사람들을 모아 소통을 하게 하고, 공동의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래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극을 보며 웃고 떠들며 마음을 나누었듯, 작은 불씨 같은 작품 하나가 누군가의 마음속에 공감을 심고, 그 공감이 퍼져 세상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참된 가치일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