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된다
옛날 옛적에, 밤하늘에 떠 있는 달과 별들을 바라보며 모닥불 앞에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우리를 생각해 보자. 어떤 방식으로 소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언어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말로 하는 언어'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인류가 표정과 몸짓, 소리를 통해 의사소통을 했다고 본다. 사냥감을 묘사하기 위해 흉내를 내고, 어디가 아프면 아픈 부위를 만진다거나 배가 고프면 무언가를 먹는 시늉을 했을 것이다.
그러한 소통을 하기 위한 행위가, 어쩌면 '공연'의 가장 오래된 형태, 즉 인간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최초의 예술이었을지도 모른다.
고대인들에게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이 '언어'라는 것을 체계화하고 '말'로 소통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은 굉장한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말은 신비로웠고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말한 것이 현실이 된다'는 믿음은 여러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렇게 해서 신화와 전설 그리고 드라마가 태어났다.
기원전 8세기경, 고대 그리스에는 이미 수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그리고 주변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던 여러 신화들.
우리에게는 '신화'로 읽히지만,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신들은 실재하는 존재였다. 그들에게 신화는 상상이나 허구가 아니라, 신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던 시대의 '역사'였을 것이다.
비극 속 인물들처럼, 선하고 고귀한 이들에게도 불행은 찾아왔다. 희극 속 인물들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종종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했다. 관객들은 그들의 이야기들을 보며 웃고 울고, 그 속에서 자기 자신과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고대 그리스에서의 이야기는 자신과 공동체와 사회를 성찰하는 거울이었던 셈이다.
- 공동체의 예술에서 개인의 예술로
고대 그리스에서 연극은 한 개인의 것만이 아니었다.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제전은 국가적 행사이자, 참여하는 것은 시민의 의무였다. 극작가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았고, 부유한 시민들이 제작비를 후원했다. 당시의 연극은 개인의 표현보다는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종교적 그리고 사회적 행위로써의 의미가 컸다.
중세시대(5~15세기)에는 예술의 중심이 대부분 종교, 교회 안에 있었다. 성가, 프레스코화, 스테인드글라스는 모두 신앙을 위한 도구였으며, 신에게 바치는 헌정의 예술이었다.
이후 르네상스시대(14~17세기)에 들어서면서, 예술의 중심은 신에서 인간으로 옮겨오는 흐름이 보인다. 그 배경에는 강력한 후원자들이 있었다. 후원제도는 당시 예술가들이 생계를 유지하며 창작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한 중요한 기반이었다. 대표적으로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가들을 지원하며 '인문주의 예술'을 열었다.
새로운 도구와 기술은 언제나 예술의 형태를 바꿔왔다. 1440년경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여러 지식과 글들을 대중에게 열어주었다. 16세기 르네상스 음악에서는 다성음악이 발전하며 악보의 표기법이 체계화되었다.
이러한 기술적 혁신은, 예술을 예술가들만을 위한 것이 아닌 대중들에게도 접근을 가능케 하였다. 예술은 점차 뛰어난 예술가들이 만든 작품을 '보는 것/듣는 것'에서 '참여하는 것'의 의미로 변해갔다. 그렇게 예술이나 학문이 '재탄생', '부활'을 의미하는 '르네상스'라는 시대가 열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현대에 들어 예술은 점차 더욱 개인의 내면과 정체성에서 출발하는 창작물이자 시장의 상품이 되었다. 20세기 이후 라디오와 TV, 인터넷의 발달로 예술은 더욱 쉽게 소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최근에는 대중들이, 사회에서 추구하는 '유행'에 따라 예술을 소비하기보다는, '개인의 취향'에 맞는 예술 작품을 찾아 소비하는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오늘날의 AI 기술로 인해 예술이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평생 쌓은 감각과 기술이, 이제는 몇 분만에 '뚝딱' 재현될 수 있는 시대다. 동시에 AI는, 재능 있는 사람만이 예술가가 되는 것이 아닌, 누구나 예술창작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이며, 누구나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도구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의 작가들이 이 AI 기술을 손에 쥐었다면, 과연 어떻게 사용했을까? 사실 당시에도 분명 오늘날의 AI 같은 새로운 '기술'들이 생겼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시 극장은 배우들의 목소리가 관객들에게 널리 퍼지도록 기하학과 음향학을 이용해 정밀하게 설계되었다. 그리고 극장에서 사용하던 여러 무대 장치들은 아마 현대의 AR/VR 기술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처럼 결국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기술을 통해 우리들의 이야기를 더 멀리, 더 깊이 전해왔다. AI 또한 인간의 창작을 대체하기보다, 우리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창작자 입장에서 이 새로운 기술은, 관객에게 더 멀리, 더 깊이 다가갈 수 있는 하나의 장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로써 고대 그리스의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비극과 희극들을 보며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종교성이나 오락성이 있는 작품이 아니라, 우리 인간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 즉 사회와 시대를 더욱 이해하려는 시도의 방식임을 보았다.
다음 편부터는 중세와 르네상스의 드라마를 통해 또 어떤 다른 변화가 있을지 함께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