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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 Sep 22. 2019

사소한 말 한마디

입사 초기 당시 팀장이었던 분이 누군가와의 통화에서 "아 그건 우리 팀 여직원이 그렇게 한 거고 어쩌고"라며 이어갔던 그 한마디를 아직도 기억한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회사에는 남자와 여자가 모두 있는데, 여성 직원은 늘 '여직원'이라고 불렸고 남성 직원은 그냥 '직원'이라고 불렸다. 다들 무의식 중에 하는 말이라 듣는 이가 격하게 불쾌할 일은 없었지만, 굳이 그렇게 나눠서 표현하는 그 방식 자체가 내겐 이상했다. 아마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다른 의도나 내용을 담지 않고, 늘 쓰던 말이기에 자연스럽게 썼을 것이다.


회사에서 성차별 혹은 유리천장 같은 것을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만 내가 신입 때만 하더라도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분위기가 팽배했고, 나 또한 불편함을 불편하다고 드러내는 것을 썩 잘하는 편은 아닌지라 그저 침묵했었다. 그냥 불편했던 어떤 날이 있었고, 가끔은 불쾌하기도 했지만 또 지나갔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조직에는 워낙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에, 각자의 생각과 감정을 날이 선 채로 드러낼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는 것이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는 이상, 도드라지게 행동하는 그 무엇이든 쉽지는 않다. 그리고 그 사실은 지금도 여전하다.


다만, 사람의 언어가 사고를 어느 정도는 반영하고 지배한다는 사실을 믿는 나는 적어도 사용하는 작은 단어 하나라도 누군가 불편할 수 있을 소지가 있다면 바로잡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여직원, 여류작가, 여사우, 여고생, 여대, 여의사, 여군 등 반대로 남자를 구분 지어 표현하지 않는 단어는 생각보다 많다. 느껴지지 않을 만큼 너무 사소한 단어라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무심코가 결국 무의식 속의 작은 차이를 구분 짓고 다르게 대하기 시작하는 시초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사소하지만 결코 작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불편함을 선명하게 느끼는 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장서서 어떠한 변화를 주도할 만큼의 깜냥 또한 되지 못하는 게 나다. 전에는 그런 내가 답답하기도 했고, 생각만 하는 스스로가 싫어서 아예 모른 척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가만히 있는 것도 꽤나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함을 깨닫고는, 폭이 넓진 않더라도 내 주변부터 하나하나 짚어가 보자 싶었다. 불편함을 고쳐야 하는 그 순간은 물론 아무리 친한 관계라도 오히려 친분이 있어서 더욱 어려울 수 있었지만, 다행히도 내 주변 사람들은 사소하게 뾰족한 나를 이해하고 문제를 인식하고 노력해 보겠다고 말해주었다.


무엇이 평등하다는 것이 꼭 50:50의 비율로 정확히 떨어지는 그 지점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몇 대 몇으로 구분 짓는 비율보다, 평등을 바라보는 구성원 간의 가치관과 합의점 같은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논의하겠다는 기본적인 자세가 훨씬 중요하다. 일단 어떤 현상이든 생각을 나누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그 과정에 절충 혹은 합의가 이루어지는 그 지난한 단계를 느리게라도 밟아나가는 노력은 꼭 지속되었으면 한다. 이렇게 적어 두고도 그래서 변화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어디서부터 당장 어떻게 해야 하냐 라고 물으면 정답처럼 내어 줄 문장은 없다.


말 수가 적은 남편과 살지만, 밥 먹으면서도 커피 한잔 하면서도 가끔은 이런 주제를 가운데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결국 개개인에게 사회는 닿아있지 않을 만큼 먼 거리에 있는 무엇 같지만, 함께 살고 일하고 이야기 나누고 생각을 공유하는 누군가로 대변되는 사회는 지금 곁에 늘 있게 마련이다. 이야기 자체는 소소하고 금세 증발되지만, 그 이야기가 넓어지며 갖게 되는 힘은 결코 작지 않다는 사실을 믿고, 적어도 나부터라도 끊임없이 이야기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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