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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희 Jul 23. 2021

휴가 중

낙안읍성에서 선암사까지

휴가 둘째 날은 낙안읍성으로 향했다. 

큰 아이가 가고 싶다고 한 곳이다.

“해미읍성?”

“낙안읍성!”

머릿속과 말이 따로 논다.

분명 낙안읍성을 생각했는데 입에서는 ‘해미읍성’이라고 하고 있다.

 

둘째 날은 큰아이의 날이다. 막내도 순수히 받아들인다. 오늘의 주인공은 형이란 걸 미리 해 두었다. 별거는 아니지만 그날의 메인이 되는 것이다. 일정도 큰 아이가 정했다. 낙안읍성과 선암사를 가겠다고 한다. 네비를 찍고 구불구불 산을 몇 개 넘었다. 반복되는 산들은 꼭 같은 길을 다시 달리는 기분이었다. 처음 가는 길인데 언젠가 와 봤던 길 같은 느낌이었다. 


낙안읍성은 가장 보존이 잘 된 조선시대 마을이라고 한다. 낙안읍성에 가까이 다다르자 표지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정래길 00로’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 이름을 딴 도로가 나온다. 낙안읍성에서 선암사에 이르는 길이라고 보면 된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었던 마을의 무대가 낙안읍성이라고 한다. 작가 조정래는 선암사에서 태어났다. ‘태백산맥’은 오래전 읽었다는 기억만 있는 책이다. 너무나 유명한 책이다. 힘들고 복잡한 시대의 이야기. 전쟁 전후의 사람들 이야기이다. 이젠 호랑이 담배 피우는 시절의 것들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낙안읍성 입구에서 매표구를 찾았다. 사람은 없고 기계만 있다. 아마 자리를 비웠나 보다. 더웠다. 그나마 구름이 잔뜩 끼어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시원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구름만 끼어있을 뿐 뜨거운 열기는 여전했다. 낙안읍성 입구는 관광지라 그런지 잘 꾸며놓았다. 널찍한 잔디밭이 그 무더위에도 그 푸르름이 시원해 보였다. 


낙안읍성의 첫 느낌은 마치 수원성의 미니어처 같았다. 담도 낮고 성문도 작았다. 입구를 지나 안내도가 하나 있다. 몇 가지 코스길이 제시되어 있다. 제대로 보려면 몇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우리는 큰 아이 뒤를 따랐다. 자신이 코스를 안내하겠다고 했다. 


처음 보이는 곳은 귀빈이 오면 접대하는 곳이었다. 기와지붕에 널찍한 마당이 있다. 사진 몇 장을 찍고 나오니 민속촌이나 전주 한옥마을에서도 볼 수 있는 전통놀이 체험장이 보였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다행이다. 이런 날씨에 이 시간에 사람들이 많으면 그게 이상한 거다. 막내는 혼자서 열심히 체험을 하고 있다. 


차 안에서 우리가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초가집에서 살았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기와집에 살려면 문무 대신이나, 양반, 그 지방에 땅 좀 갖고 있는 지주 정도 돼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일반 서민이었을 확률이 더 크다. 물론 노비나 천민이었을 수도 있지만 거기까지 상상하기 싫었다. 우리 대부분은 서민이었다가 조선 후기에 족보를 사서 신분 세탁한 자손들일 것이다. 나는 00파 몇 대손 00 씨다. (풋)


낙안읍성은 원래는 백제시대부터 내려오던 마을이며 통일신라 때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고려시대  '낙안군'으로 명명되고 조선 태조 때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성을 쌓게 되었다고 한다


초가집을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에어컨 실외기들이 보였다. 대게는 민박집으로 운영을 하고 있다. 전통문화체험장 보였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현재는 운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행히 큰 아이는 ‘짧은 코스’를 짰다. 다음은 ‘선암사’였다. 왜 선암사로 잡았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절구 경이 좋다고 한다. 낙안읍성에서 삼십 분 정도 걸려 ‘선암사’에 도착했다. 아빠(아무 생각 없는 자)는 차에 있겠다고 한다. 막내(억지로 하는 자)도 차 안에서 잠깐 잠들었다가 깨서 그런지. 가기 싫은 눈빛이다. 결국 큰 아이와 동행할 사람은 나(의무감에 하는 자)밖에 안 남는다. 큰 아이(놀고 싶은 자)는 앞장을 섰다. 


'아하. 운동화를 갖고 왔어야 했는데..'


초입부터 돌길이다. 입구 자체는 생각보다 넓고 나무들이 우거져 좋았다. 선암사까지 1km라고 쓰여 있다. 

다행이다 싶었다. 이 정도면 아주 짧은 거리다. 선암사 입구 앞에 돌다리가 하나 있다. 그 옆으로 돌무더기들이 나란히 있다. 나도 하나 보태었다. 소원도 빌어본다. 다리가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었다. 그 느낌이 아니다.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그 모습을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다. 사진은 그렇다. 


그래서 자신의 사진을 찍으면 못생기게 나오는 게 아닐까. (풋)


'역시 샌들은 영 아니다.' 발이 불편하니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꼭 인생 같다. 내가 힘들면 아무리 좋은 경치가 내 옆에 있어도 소용이 없다. 온통 내 신경은 내 발에 가 있다. 


'운동화를 챙겼어야 해'

'모든 것들에 대비했어야 했는데' 

작은 후회들, 큰 후회들...


아들은 보이지 않는다. 선암사 입구에 이르자 고양이 한 마리가 정 중앙에서 졸고 있다. 입구에는 기념품들을 팔고 있다. 공양을 하라며 판매원은 공양미를 권유한다. 좀 더 올라가 보니 스님들의 염불소리가 들렸다. 


'해탈'이 가능한 일 일까? 이십 대까지 엄마를 따라 절에 다녔다. 나는 대체로 착한 딸이었다. 법명도 있다. '현원'이다. 어질 현에 순할 원이다. 어질고 순하게 살라는 뜻이다. 스님들의 염불소리에 나는 잡생각만 떠오른다. 나는 중생이다. 대웅전으로 한 중년 남자가 들어간다.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들어가 삼배(세 번 절하는 것)를 부처님께 올린다. 


'소원을 빌었을까?' 

'나처럼 로또나 맞게 해 달라는 소원은 아니겠지.'

나는 그 남자가 좀 더 근사한 소원을 빌었길 바랐다. 

역시 난 속물이다.


선암사의 대웅전 옆 돌계단에서 앉았다. 아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역시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따로 있나 보다. 집에서는 사람인지 곰인지 뒹굴기만 하더니. 절에서는 잽싸게 돌아다닌다. 대웅전 지붕이 많이 낡아 보였다. 대부분 색이 바랬다. '왜 보수를 하지 않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아들이 나를 불렀다. 이제 내려간단다. 내려가면서 슬쩍 아들 손을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은 내 손을 놓는다. 손에 땀이 많다. 그래도 조금은 서운한 느낌이 든다. 별거 아닌 일도 이렇게 내 감정은 '해탈'과는 거리가 멀다. 


내려가는 길은 발걸음이 가볍다.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꼭 나 자신이 승리자처럼 느껴졌다. 이미 다 겪은 자의 여유로움이다. 주차장에 갔는데 차가 없다. 우리 둘은 두리번거렸다. 전화기를 꺼내 전화를 하려는 찰나에 차를 발견했다. 처음 주차되어 있던 곳이 맞다. 다른 큰 차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숙소로 출발했다. 여름휴가가 아니라 수학여행을 온 기분이다. 큰 아이는 좋았다고 한다. 다행이다.


내 발은 여기저기 상처가 났다. 

역시 언제나 운동화는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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