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화, 회피 그리고 변태 사이
좋은 말로 하면 승화, 현실은 회피나 변태 정도가 되려 나?
살면서 짜증 나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나만의 DEATH NOTE를 만든다. 사실 인물 노트라고 하는 것이 맞다. 일단 노트를 펴고 그 인물을 묘사한다. 당연히 편향적인 인물이다. 자신의 감정이 들어간 사람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몇 년 전 일기장에 나를 힘들게 했던 상사를 묘사한 글이다. 묘사가 유치하지만 그 당시 나에게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반대의 경우는 잊지 않으려고 노트에 적는다.
‘그녀의 외모는 평범한 아줌마 몸매다. 아줌마를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나도 아줌마이니까. 인상 또한 그에 준하는 분위기다. 피둥피둥 찐 살들이 심술궂어 보인다. 명품가방과 옷으로 그 살 들을 가렸지만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란 이럴 때 써야 할 것 같다. 품위라고는 털끝만큼 찾아볼 수가 없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널 뛰듯 말을 내뱉는다. 직위는 신분이 아니다. 근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갑질 문화가 따로 있으랴. 인격이 지렁이 수준이다.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로 떠벌리면서 다닌다. 위선자다. 사람을 하찮게 생각하는 썩은 내 나는 인간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상처 받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할수록 뇌 속에서 맴돈다. 그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면 막말로 나만 손해인 거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뇌는 계속해서 해결하라고 지시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한다. 나는 타고난 순둥이라 내 선을 지키려고 해도 안 될 때가 많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 상처 받을 때 내가 하는 복수하는 방법이다. 그 인물을 묘사하고 조롱한다. 그럼 속이 좀 풀린다. 나중에 소설을 쓰게 된다면 그럴 일은 희박하지만! 그 인물을 악당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본다. 아무튼 통쾌하기까지 하다. 변태 맞다.
반대의 경우는 잊지 않으려고 노트에 적는다. 좋은 기억을 떠오르게 하면 벌써부터 입꼬리가 올라간다.
자원봉사를 하러 가는 날이다.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노인요양시설이다. 그곳에는 어르신들이 모여 산다. 어르신들이 중앙 거실에 모이면 우리는 미술수업을 한다. 심리미술치료 선생님이 주도가 되어 어르신들과 미술놀이를 하는 거다. 말 벗도 해드리고 그런다. 내가 만난 어르신들 중에 어렸을 때부터 소아마비로 평생 사신 분이다.
“그녀는 하얀 백발을 하고 휠체어에 앉아 있다. 몸은 꼬여 있다. 그녀의 앙상한 다리는 한걸음도 걸을 수 없어 보인다. 과거에 좋았던 일을 떠올리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는 날이었다. 그녀는 팔도 꼬여 뭐 하나 자유로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는 색연필을 뼈만 남아 있는 그녀의 손에 쥐어 준다. 손도 펴기 힘든데 열심히 그리는 그녀가 궁금해진다. 그녀의 그림에는 집 한 채와 휠체어를 탄 그녀 그리고 그 옆에는 부모님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서 있다.
“어르신 어떤 그림이에요?”
“음… 나 어렸을 때야”
“부모님이신 거죠?”
“그렇지.”
“그때가 제일 좋았었나 봐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그녀는 아리송한 대답을 한다.
“왜요?”
“난 어렸을 때부터 소아마비라 부모님을 힘들게 했지. 그게 참 싫었어. 그래서 그냥 죽을까도 많이 생각했지. 근데 부모님이 슬퍼할 까 봐 그럴 수 없었어.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가 참 좋았어. 우리 부모님은 날 소아마비 걸린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거든. 다른 아이처럼 똑같이 대해주셨어. 오히려 더 소중한 사람처럼...”
나는 심장이 뜨거워졌다. 거의 울 뻔했다.
“와, 좋은 부모님 이셨네요!”
“맞아, 좋은 사람들이었 어. 그래서 아직도 내가 살고 있지.”
그녀는 자신의 부모를 다시 떠올리는 듯했다. 주름지고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서 따뜻한 미소가 보였다. 매주 가는 봉사 날이면 난 그녀와 함께 하고 싶어 졌다. 그녀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
이렇게 글로 쓰다 보니 내 기억 속에서 그녀가 소환된다. 이런 기억 소환은 나만의 타임머신이 된다. 그녀를 다시 만나고 온 느낌이다.
<사진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