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꾸만
관(館)이
관(棺)으로
보이는 것일까
나는 관 안에서
침을 말리고 있다
황새 한 마리 강가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요즘 보기 드믄 꽃상여 하나 지나간다. 꽃상여 안에는 관이 하나 누워 있으리라.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이여차 어이여차. 꽃상여가 강을 건넌다. 꽃상여가 글쎄 징검다리를 잘도 건넌다. 황새 한 마리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강을 거슬러 오르던 연어 한 마리도 잠시 멈춘다. 황새도 연어도 꽃상여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상황에서 나는 타면자건(唾面自乾)을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 타면자건(唾面自乾)
얼굴에 묻은 침을 닦지 않고 절로 마르게 함. 꾸준하게 참음. 당(唐) 나라 누사덕(婁師德)은 성질이 너그러웠는데 그 동생이 대주(代州) 고을원으로 나가게 되어 사덕이 모든 일에 참으며 처신하라 이르니, 동생이 다른 사람이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손으로 닦고 대항치 않겠다고 하매, 사덕은 ‘그것은 안 될 말이다. 침을 닦으면 그 사람이 노할 것이니 그대로 말리어야 한다.’고 했음.<당서唐書 누사덕전婁師德傳>
唾面待乾 出胯俛就 虛心而行乎世(타면대건 출과면취 허심이행호세 ; 얼굴에 뱉은 침은 그대로 말리고 가랑이 밑으로 숙이고 나가 허심하게 세상을 살아가네.)<이규보李奎報 외부畏賦>
祗辱壯心難掉舌 待乾唾面更低眉(지욕장심난도설 대건타면갱저미 ; 장한 마음은 다만 욕이 될 뿐 혀 놀리기도 어려우니, 침이 묻은 얼굴 마르기를 기다리고 다시 눈썹 숙여야 하리.)<이구李玖 성직우제省直偶題>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⑧ 이문재,
〈배꽃은 배 속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다〉
어쩌랴, 이 속절없는 봄밤의 취기를…
글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그때 봄날 우리들은 삶의 극지
삼송리거나 교문리에서 살았는데
극지여서 그랬으리 봄은 더욱 신랄했으니
나주 배꽃 한창인데도 길 떠나지 못해
안달할 적이며 더워진 마음은
삼송리거나 교문리 가는 밤길에 올라섰는데
몸들이 불을 켜 밤길 훤했다
보름 쪽으로 둥글어지던 달빛이며
은박지처럼 빛나던 개구리 울음소리
안으로 안으로 옹골차지던 배꽃이
숨가빠 죄다 숨이 가빠
봄밤은 흥건했으나
속수무책으로 나는, 그대는
하르르 하르르 무너졌으니
나는 그대는 우리들은
늘 맨 처음 아니면 맨 끝이었으니
우리들은 서로
그리고 더불어 극단이었다
남행하지 못한 늦봄 심야
스스로 불켜고 근교로 나갔던 발광체들이
저마다 배 속으로 들어가 문 걸어 잠근 배꽃들을
소리쳐 부르고 있었으니
서울에서 밀려난 청춘들이 하나 둘씩 모여 살던 곳이 삼송리나 교문리인데, 그곳은 아직 배밭이 있던 한적한 서울 변두리였다. 1980년대 초 미개발지로 논밭이 남아 있던 삼송리나 교문리의 황량한 벌판은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처럼 먼 지평으로 날던 청춘들이 제 버거운 삶을 내려놓은 기착지였다. 변두리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보름 쪽으로 둥글어지던 달빛”, “은박지처럼 빛나던 개구리 울음소리”, 그리고 “안으로 안으로 옹골차지던 배꽃”이 어우러진 그 봄밤 숨결을 가진 것들은 천지에 들어찬 봄의 생기와 아름다움에 취해 제 삶이 머문 자리보다 더 먼 곳을 꿈꾸기 일쑤였다. 허나 어쩌랴.
극지여서 그랬으리 봄은 더욱 신랄했으니
안달이 난 마음은 발정 난 고양이들처럼 온몸에 불을 켜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렇다, 삼송리나 교문리가 극지여서 더욱 그랬던 것이다. 누구는 감옥으로 가고, 누구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고, 누구는 인도로 성지순례를 가는데, 감옥도 유학도 성지순례도 떠나지 못한 미욱한 청춘들만 남아 더워진 마음으로 삼송리나 교문리에 오는 봄을 속절없이 맞았다. 봄은 간절하게 기다린 자나 기다리지 않은 자에게 평등하게 분배되었다. 그 분배에는 어느 한 사람 예외도 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나눠진다는 원칙과 정의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배나무마다 배꽃들은 작렬하고 달빛은 환하게 부서져 내려 밤하늘의 별들조차 전율하고, 봄은 그토록 신랄하게 마음을 들쑤시는데, 오, 그 신생의 삶을 살지 못하고 그늘에 붙잡혀 있는 청춘들이라니! 그들은 거기를 뜰 수가 없었다. 그곳은 청춘의 극지였으므로 “봄은 더욱 신랄”하고 바람이 든 마음들은 저 멀리까지 달아났다 다시 돌아오곤 했다. 거기에 엎드려 사는 청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삼송리나 교문리 너머의 삶을 꿈꾸고 있었으므로 그 삶이 비천했다. 가난하고 미래도 불확실한 그 시절의 삶이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온통 배꽃의 흰빛에 물드는 봄밤의 저 서울 외곽 삼송리나 교문리에는 말 그대로 피안(彼岸)의 황홀함이 번지곤 했다.
속수무책으로 나는, 그대는
하르르 하르르 무너졌으니
봄은 천지의 기운이 음에서 양으로 바뀌는 절기다. 봄밤의 흥건함은 오로지 양의 기운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소녀들은 초경의 붉은 피를 흘리고, 소년들은 제 몸에서 새 순(筍)이라도 돋는 듯 온몸이 근질근질해진다. 땅속의 뿌리들은 연한 흙 속을 더듬어 물과 자양분을 취하고, 씨앗들은 땅거죽을 밀어 올리며 싹을 내민다. 양기의 힘을 받은 온갖 생령들은 저를 짓누르는 무거운 것들을 찢고, 깨고, 솟아난다. 서둘러라, 봄밤의 가지들이여, 피워 내야 할 꽃잎들을 부지런히 피워 내라.
우리를 이끄는 것은 잿빛 삶을 뚫고 나와 하늘과 땅 사이를 물들인 흰빛이다. 배꽃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발광체다. 배밭은 흰빛의 고요로 충만한 바다다. 흰 깃을 가진 수천의 새들이 그 바다의 어둠에서 날아오른다. 배나무 가지에 숨어 있던 피닉스들이 자꾸자꾸 흰 깃을 달고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것은 잿빛 죽음을 뚫고 나오는 흰빛의 삶이다. 죽음을 질료 삼아 피어나는 이 신생의 삶들을 물어 나르는 불의 새들, 영원히 죽지 않는 피닉스들이다. 우주에 깃든 양의 기운으로 생기를 얻은 불의 새들은 생로병사를 가로질러 날아간다.
스스로 불켜고 근교로 나갔던 발광체들이
저마다 배 속으로 들어가 문 걸어 잠근 배꽃들을
소리쳐 부르고 있었으니
1980년대 서울의 변방인 삼송리나 교문리는 삶의 극지였다. 그 시절 그곳에는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의로움도 없고, 휘황한 흰빛에 물든 비천한 삶들은 널려 있었다. 그곳이 곧 남극이거나 북극이라고 단정질 수는 없지만 무릉도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만큼 척박하고 그만큼 가난했다. 흰빛들은 잠든 욕망들을 두드려 깨운다. 그래서 성적 욕망들의 소용돌이로 마음은 더워지고 숨결은 자꾸 가빠진다. 극지에서 극지가 아닌 곳, 즉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아 보고 싶다는 꿈을 꾸는 것은 청춘의 권리다. 그러나 현실은 문문하지 않다. 흰꽃이 되고 온몸에 불을 밝혀 어둠을 밝히고자 하나, 그 꿈들은 속수무책으로 “하르르 하르르 무너졌으니”, 그들이 나아갈 길은 단 하나뿐이었다. 삼송리나 교문리에서 그들 스스로 ‘극단’이 되는 것이었다. 취기가 불러일으킨 만용에 기대 두보(杜甫)나 이하(李賀)의 후손임을 참칭하거나 랭보나 보들레르의 위악과 퇴폐를 무단으로 가져다 훈장처럼 제 가슴에 달고 몰래 염세주의적인 시를 쓰거나 했다. 그 시절 삼송리나 교문리에서는 누구나 나는 너에 대해, 너는 나에 대해, 그리고 시와 삶과 세계에 대해 ‘극단’이었다.
배나무 가지에 달라붙은 발광체들이 마침내 배 속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다. 배꽃이 만개해서 그 흰 꽃잎들이 하르르하르르 지던 저 아득한 봄밤 그 발광체들은 용솟음치는 양의 기운들을 배 속에 가두고 스스로 둥글어져 속이 옹골찬 배로 익어 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삼송리나 교문리를 뜨지 못한 미욱한 청년들은 그 ‘극단’에서 스스로 둥글어져 하나의 우주를 이룰 것이다. 그때 저 배꽃이 황홀하게 피고 지던 서울 근교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던 그 많던 청춘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떠돌까?
사진 : 이규열
이문재(1959~ )는 경기도 김포 사람이다. 그이가 태어난 김포군 검단면 마전리는 본디 황해도 출신 실향민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만든 마을이다. 그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인천고등학교로 진학하는데, 그때까지도 문학에는 별 뜻이 없었다고 한다. 그이를 시인으로 키운 것은 경희대 국문과로 진학한 뒤 만난 압도적인 문학의 열기다. 류시화, 박덕규, 박주택, 김형경, 이혜경 등이 그이의 대학입학 동기들인데, 사회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힌 소수 종파의 신도같이 그 동기들이 뿜어내는 도저한 문학적 광신의 열기에 저도 모르게 감염되고 만 것이다.
그이가 <시운동> 4집에 처음 시를 발표한 1980년대 초 무렵 어느 날 그이를 만났다. 김포공항에서 새들을 쫓는 공포탄을 쏘며 병역의무를 마치고 사회로 복귀한 그이는 털이 채 자라지 못한 꺼병이같이 어리숙한 모습이었다. 청년 이문재의 모습은 문청보다는 견습수사(見習修士)에 더 가까웠다.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이의 입에서 남에 대한 험담이 나오는 걸 못 듣고, 누구를 향해 성난 얼굴을 보이는 것을 못 보았다. 그이는 대학을 마친 뒤 주부생활ㆍ학원사를 거쳐 <경향신문>과 <시사저널>에서 기자와 편집위원, 취재부장을 하다가 2005년 5월 그만두었다. 현재는 경희사이버대학 문창과 초빙교수로 있다. 마음 연한 부분을 사포로 문지르는 듯 거친 ‘잡지판’에서 활자밥을 오래 먹으면서도 그이는 여전히 보리밥과 매생이국을 찾고, 배알이 없는 사람처럼 싱거운 미소를 달고 다녔다. 그이를 시골사람으로 만드는 먹성과 순한 사람으로 규정짓게 하는 유전자는 쉬이 변질되지 않은 것이다. 몇 해 만에 만나도 그이는 변함없이 헐겁게 웃는다.
청년시인 이문재는 아주 섬세하게 비애의 가족사를 시에 담아냈다. 고은의 초기 시가 없던 누이와 형수를 호명해서 낭만적 가족사를 지어낸 것과 마찬가지로 그 가족사는 몽상주의자가 지어낸 아우라로 모호하고 불확실했다. 그이가 죽은 형수와 옛집 지붕 위로 흘러가는 별들을 호명하며 옛 기억들에 아우라를 만들 때 거기엔 어떤 정치적 자각이 깃들 여지가 없었다. 청년의 내면에 들끓는 욕망들은 결핍의 자리에서 정화 과정을 거쳐 탁기가 빠진 맑은 그리움으로 변하는데, 젊은 몽상주의자의 그 관습적 레토릭의 문체는 항상 근거가 불확실한 그리움의 습기를 잔뜩 머금어 쥐어짜면 물이 뚝뚝 떨어졌다. 습기로 부푼 그 세계는 눅진하고 모호한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세계였다.
그이가 변한 것은 문명이 제 몸과 마음의 불화를 촉발하게 한다는 참담한 자각이 있은 뒤다. 어느 날 제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없고, 마음이 있는 곳에서 떨어진 몸이 홀로 헐벗은 채 떨고 있는 무참함과 마주친 뒤 그이는 문명에 내장된 야만성과 폭력성에 진저리치며 건강한 생태 환경을 지키는 전사(戰士)로 거듭난다. 그이의 문체는 모호함을 떨쳐 내고 단호하고 명확한 전언을 실어 나르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내 삶은 이미 환경문제였다 / 나는 공해배출업소였다”(<고비사막>)라는 문장에는 한 점의 모호함도 없다. 그이의 시는 몸에서 멀어진 마음을 몸의 크기에 맞춰 몸으로 되돌려 놓는 ‘산책’을 주목하고, 문명의 야만성에 연루되지 않은 채 생명을 기르고 거두는 소농(小農)의 유기농 노동을 예찬한다. 그이의 문학적 근황은 여전히 생태학적 상상력 언저리, ‘산책’과 ‘농업박물관’(“농업박물관 앞뜰 / 나는 쪼그리고 앉아 우리 밀 어린 싹을 / 하염없이 바라다보았다”.<농업박물관>), 즉 느림, 비움, 슬로푸드, 언플러그드, 녹색혁명 등에서 그리 멀리 나아가지 않은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글쓴이 장석주님은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고, 같은 해 동아일보에 문학평론이 입선되어 시인과 문학평론가의 길을 함께 걸어온 사람이다. 그동안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붉디 붉은 호랑이》, 《절벽》 등의 시집을 내고, 《20세기 한국문학의 모험》(전 5권) 등 50여 권의 책을 냈다. 지금은 국악방송에서 생방송 <장석주의 문화사랑방>을 진행하고 있다.
* 《topclass》2008년 0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