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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Feb 20. 2020

13. 첫

큰 수술실 들어가기 전

서둘러 낳아서 버린 시집

칠삭둥이 자식들

다시 불러모아

얼굴이라도 씻겨야겠다

코라도 한 번 

팽, 하고 풀어주고

피 묻은 낯바닥

흙 묻은 낯바닥

코 묻은 볼때기

그렁그렁한 눈물자국

찬물로라도 한 번

내 손으로 씻겨주고 

세상으로 다시 

내보내야만 하겠다

이 험한 세상에서

부모에게서도 버림받은 몸으로

얼마나 서러움 깊었을까


더 큰 수술실에서 나와보니

포경수술 받으러 가는 길에

길에서

쏟아버린 자식들 같다는 생각


명찰부터 제대로 달아서 내보내야겠다

<땅의 뿌리 그 깊은 속>에서

<우리들의 고향>으로

이름표를 바꾸어서 달아줄 수 있을까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⑨ 장석남〈방을 깨다〉

방을 깨고 마주친 비참

글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날이 맑다
어떤 맑음은
비참을 낳는다

나의 비참은
방을 깨놓고 그 참담을 바라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광경이, 무엇인가에 비유되려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몰려온 것이다
너무 많은 얼굴과 너무 많은 청춘과 너무 많은 정치와 너무 많은 거리가 폭우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밝게 밝게 나의 모습이, 속물근성이, 흙탕물이 맑은 골짜기를 쏟아져 나오듯

그러고도
나의 비참은 또 다른 지하 방을 수리하기 위해 벽을 부수고 썩은 바닥을 깨쳐 들추고 터진 하수도와 막창처럼 드러난 보일러 비닐 엑셀 선의 광경과 유래를 알 수 없는 얼룩들과 악취들이 아니고
해머를 잠시 놓고 앉은 아득한 순간 찾아왔던 것이다
그 참담이 한꺼번에 고요히 낡은 깨달음의 화두(話頭)가 되려 한다는, 사랑도, 꿈도, 섹스도, 온갖 소문과 모함과 죽음, 저주까지도 너무 쉽게, 무엇보다 나의 거창한 무지(無知)까지도 너무 쉽게 깨달음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나의 비참은

나의 두 다리는 아프고
어깨는 무너진다

방바닥을 깨고 모든
견고(堅固)를 깨야 한다는 예술 수업의 이론이 이미 낡았다는
시간의 황홀을 맛보는
비참이 있었다

아직도 먼 봄, 이미 아프다
나의 방은 그 봄을 닮았다
나의 비참은 그토록 황홀하다

〈방을 깨다〉는 사유를 자극하는 시다. 시인은 방을 깬다. 해머로 “벽을 부수고 썩은 바닥을 깨쳐 들추고” 오랫동안 견고함 아래에 숨어 있던 실상을 만천하에 드러낸다. 시인이 방을 깨고 마주친 것은 참담함이다. 그 참담함은 깨진 방의 어수선한 광경들이 “무엇인가에 비유되려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몰려온다. 방과 깨다, 라는 행위와 비참에 대한 은유의 관능으로 이 시는 제법 풍요롭다. 방을 보존하고 머무는 자는 방을 대지삼아 경작하는 자다. 대지를 경작함으로써 대지로 귀속되는 농경 정착민과 마찬가지로 방을 경작하는 자들은 방에 귀속되어 살아간다. 정착민들은 국가ㆍ민족ㆍ국토의 일부로 스스로를 영토화한다. 반면에 방을 깨는 자들은 방이라는 영토에서 달아나는 자다. 그들은 도주의 선을 타고 바깥으로 달아난다. 달아남으로써 스스로를 탈영토화하는 것이다. 혈통ㆍ가족ㆍ집을 버리고 대지를 떠도는 이들은 유목민, 이방인, 수행자, 도둑, 음유시인들로 명명된다. 방을 깨는 자들만이 새로운 방을 만든다. 파괴/생성은 한몸이다. 파괴하지 않는 자는 만들지도 않는다. 〈방을 깨다〉는 방을 깨는 공간적 사태를 지각적 사태의 은유로 바꾸며 나아가는 마음의 자취를 보여준다.

방이란 무엇인가? 방은 은밀한 사생활의 공간이다. 자아의 거처, 영혼이 머무는 시공간이며, 사적 체험, 몽상, 기질, 취향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 방이다. 영혼은 볼 수 없지만 그 사람이 사는 방을 보면 그 사람의 영혼이 보인다. 개인의 방은 오로지 자아를 위한, 자아만의 공간, 자아가 독점적인 영유권을 주장하는, 타자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신성불가침의 구역이다. 그런 까닭에 방은 타자의 도덕과 윤리학이 틈입하지 못하는 개인의 도덕과 윤리학이 꽃피는 공간이다.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입법자를 갖지 않는다.” 내 삶의 입법자는 나일 수밖에 없듯 방의 거주자가 곧 방의 입법자다. 방은 몸으로 채워진 공간이다. 대개의 방들은 노동이 아니라 휴식과 재충전의 공간이다. 시인은 방을 해머로 깨는데, 시인이 깬 것은 아집에 빠진 마음이라는 감옥이고, 거짓된 자아의 방이다. 방을 깬 뒤 비참과 만나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방을 깨는 행위는 그 방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그 방에서 이루어지는 실존을 바꾸겠다는 뜻이다. 왜 방을 깨는 것일까? 방은 나라고 확신하는 자아상, 혹은 한 소식을 들은 선사(禪師)와 같이 내가 도달했다고 믿은 어떤 진경, 만법유식(萬法唯識)의 표상이다. 이 시의 화자는 그걸 깨달음이라고 생각했는데, 깨달음이라고 한 순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방을 깨고 난 뒤 만난 것은 비참이다. ‘비참’의 내용들은 무엇인가? 방을 깨자 드러난 “하수도와 막창처럼 드러난 보일러 비닐 엑셀 선의 광경과 유래를 알 수 없는 얼룩들과 악취들”은 비참의 진짜 실상이 아니다. 이것들은 비참의 표층일 뿐 진정한 비참의 내용들이 아니다. 진짜 비참은 나중에 인식으로, 깨달음으로 온다.

해머를 잠시 놓고 앉은 아득한 순간 찾아왔던 것

 방을 깨자 그 두터운 바닥 아래에 있던 너무 많은 얼굴, 너무 많은 청춘, 너무 많은 정치, 너무 많은 거리, 나의 모습, 속물근성 따위가 “흙탕물이 맑은 골짜기에 쏟아져 나오듯” 나온다. 방을 깨던 해머를 잠시 내려놓은 그 휴식의 순간에 비참의 심층이 나를 홀연 덮쳐온 것이다. 번개와 같이 한 깨달음이 인식의 지평을 꿰뚫고 지나가는 이 순간은 어떤 순간일까? 니체는 “보라, 나는 항상 스스로를 극복해야 하는 존재다”라고 말한다. 바로 그 순간, 스스로를 극복해야 하는 존재라고 깨닫는 순간이 아닐까? 다시 니체는 말한다. “창조하는 자들이여, 너희들의 삶에는 쓰디쓴 죽음이 무수히 많아야 한다.” 무수히 많은 죽음을 거친 뒤에야 새로운 탄생이 있다. 시인은 방을 깬 뒤에 사랑, 꿈, 섹스, 소문, 모함, 죽음, 저주 따위는 물론이고 거대한 무지까지도 깨달음이라고 주장하는 파렴치한 상황, 그것이 비참의 심층이다. 아무 깨달음도 없이 깨달음의 연기만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부끄러움을 불러온다. 방을 깨고 보니, 그동안 화두를 붙잡고 있는 시늉만 하고 있었던 것. 그 반성은 통렬하다.

봄은 씨앗과 싹들이 땅 거죽을 깨고 밖으로 밀려 나오고, 나무의 잎눈들은 나뭇가지를 찢고 한사코 밖으로 잎눈을 내미는 계절이다. 숨어 있던 것들이 깨고 찢고 밖으로 밀려 나온다는 점에서 봄과 방을 깨는 것은 하나의 은유적 맥락에서 만난다. 안다는 것이야말로 무지의 발로이고, 올바르다는 확신이야말로 그릇됨이고, 깨달았다는 생각이야말로 몽매함이다. 시인은 얼룩과 악취로 범벅이 된 방을 깨고 난 뒤 비로소 그런 사실을 깨닫는다. 제 마음을 보려는 자들은 마음을 깨라. 방을 깼으니, 새 방을 들이거나 해야 한다. 시인의 마음은 이미 깨버린 방과 돌아가 몸을 눕혀야 할 저 먼 곳의 새 방 사이에서 서성인다. 있던 방은 깨버렸으나 있어야 할 방은 아직 멀리 있다. 시인이 흠모하고 들고자 하는 방은 “쾌적한 정신의 거처”(<창(窓)을 내면 적(敵)이 나타난다>), 대오(大悟)와 견성(見性)이 머물 만한 방이다. 꾸밈이 없는 무위자연(無爲自然)과 갓난아기로 되돌아간 사람, 그리고 일자무식인 육조 혜능만이 새 방을 가질 만한 사람이다. 묵은 방과 새 방의 사이에서 시인이 하는 것은 딴청과 시늉이다. 시인은 딴청과 시늉을 하며 더러는 시 몇 편도 남길 것이다.

사진 : 김선아

장석남(1965~)은 인천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덕적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다. 언제 그이를 처음 보았을까. 1990년 언저리였을 것이다. 그이가 서울 동숭동에 있던 열음사 편집부에 앉아 있던 시절이다. 키가 크고 훤칠한 미남자였던 그이를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 맑은 눈동자에서 나는 외딴집 냄새, 방랑의 기질, “늦둥이 송아지 눈매에 앉힌 낮달”(〈돌멩이들〉)을 엿보았다. 그이가 영화감독과 어울린다는 소문이 들리고, 성철 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주인공으로 발탁되었다는 소문도 잇달았다. 어느 날인가는 텔레비전의 한 드라마에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그게 다 그이의 방랑 기질 때문이려니, 했다. 양평 시골에 집을 짓고 들어앉아 가야금을 뜯거나 돌에다 문자를 새기고, 눈 쌓인 밤에는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소나무의 여린 가지들이 뚝, 뚝 제 관절을 부러뜨리는 소리나 듣고 있다는 소식도 바람에 실려 왔다. 그게 다 그이의 눈동자에 들어 있던 외딴집 냄새려니, 했다.

장석남의 시 세계는 약하고 여리고 가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 금세 마르는 눈물, 고양이 눈같이 새파란 달, 썰물과 모래톱, 뒹구는 돌멩이, 짧게 들리다 마는 새소리, 국화꽃 그늘, 살구나무들이 뿌리를 가지런히 하는 소리, 해살거리다 곧 사라지는 봄빛, 잔광, 아지랑이, 빗소리, 꽃진 자리, 뱃고동 소리, 멧새가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 그래서 장석남의 시는 노래가 아니라 속삭임이요, 영원한 단조음이요, 한숨이다.

장석남은 “새로 모종한 들깨처럼 풀 없이 흔들리는 / 외로운 삶”(<자화상>)을 사랑하는 시인이다. 어쩔 수 없는 그이의 기질이다. 장석남의 시집 중에서 《젖은 눈》(솔, 1998)을 가장 좋아한다. “이 세상에 / 살구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 복숭아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 꽃이 만들던 그 섭섭한 그늘 자리엔 / 야윈 햇살이 들다가 만다고”(<꽃이 졌다는 편지>) 쓰던 고요하고 여린 것들로 향하는 그이의 기질과 취향, 마음과 그 자취가 이 시집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글쓴이 장석주님은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고, 같은 해 동아일보에 문학평론이 입선되어 시인과 문학평론가의 길을 함께 걸어온 사람이다. 그동안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붉디 붉은 호랑이》, 《절벽》 등의 시집을 내고, 《20세기 한국문학의 모험》(전 5권) 등 50여 권의 책을 냈다. 지금은 국악방송에서 생방송 <장석주의 문화사랑방>을 진행하고 있다.


* 《topclass》2008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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