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는 나무를 알고 있다
전생에 방랑시인이었다는 그는
이번 생에는
딱 한 편만 쓰겠다고
어느 깊은 밤 나에게 말했다
봄부터 부지런히 시를 썼다가
깊은 가슴 속에
해마다 딱 한 줄씩만 남기고
아낌없이 모두
낙엽으로 날려서 보낸다고 하였다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⑦ 문정희 시인의 <나 떠난 후에도>
몸에 지핀 불, 술을 통해 본 삶과 죽음
글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문정희 시인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 문학상, 나지 나만 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새떼》, 《찔레》,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아우내의 새》 등이 있고, 미국에서 출간된 영역시집 《Windflower》가 스페인어ㆍ독일어ㆍ히브리어 등 8개 국어로 번역, 소개되었다. 현재 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
나 떠난 후에도 저 술들은 남아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사람들을 서서히 죽이겠지
나 떠난 후에도 사람들은
술에 취해
몸은 땅에 가장 가까이 닿고
마음은 하늘에 가장 가까이 닿아
허공 속을 몽롱하게 출렁이겠지
혀끝에 타오르는 불로
아무렇게나 사랑을 고백하고
술 깨고 난 후의 쓸쓸함으로
시를 쓰겠지,
나 떠난 후에도
꿀 같은 죄와 악마들은 남아
거리를 비틀거리며
오늘 나처럼 슬프게 돌아다니겠지
누군가 또 떠나겠지
〈나 떠난 후에도〉는 상상된 죽음을 노래하는 슬픈 시다. 우리는 죽는 존재들이지만 동시에 “새벽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매일 저녁, 어둠 속에 매몰되어야 하는 태양새 (l’oiseau-soleil)의 운명”(가스통 바슐라르)을 느끼는 존재들이다. 내가 죽은 뒤에도 이 세상은 여전하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괴한 현실이다. 삶이 물질의 허망한 형식이라면 죽음은 그것의 해체일 것이다. 내가 죽어서 무(無)와 공(空)으로 돌아갔는데, 세상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니! 오히려 술을 마시고 취하고 사랑을 고백하고 술 깬 뒤의 쓸쓸함으로 진저리를 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 기괴하고 납득할 수 없는 슬픔 때문에 시적 화자는 거리를 돌아다녔다.
아마 시적 화자는 술을 마신 뒤 몽롱한 황홀경 속에서 거리를 배회했을 것이다. 죽음은 삶의 흐름을 끊는 단절이다. 그러나 이 죽음은 상상된 것이다. 이 상상된 죽음이 불러온 슬픔으로 의식은 이상하게 고양된다. 그 고양된 의식의 눈에 비친 세상은 경이와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내가 소멸된 세상에서 “꿀 같은 죄와 악마들은 남아 / 거리를 비틀거”린다. 시적 화자가 상상적 죽음에 이른 이런 순간들은 존재의 고갈이면서 고갈이 아니고 덧없음이면서 덧없음이 아니다. 죽음은 운명의 견고함을 마침내 완성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시적 화자의 죽음은 미래의 것 즉, 아직 오지 않은 죽음이다. 여기서 기묘한 안도감과 함께 살아 있음에 쏟아지는 신적인 시선과 빛으로 우리를 이끈다.
술에 취한 자들의 “몸은 땅에 가장 가까이 닿고 / 마음은 하늘에 가장 가까이 닿아 / 허공 속을 몽롱하게 출렁”인다. 술은 제 장력(張力)으로 자아를 땅과 하늘 사이로 잡아끌어 팽창시킨다. 이때 시인은 몸과 마음을 분리한다. 몸은 땅에 가장 가까이 닿고 마음은 하늘에 가장 가까이 닿는다. 몸과 마음이 분리된 허공 속에서 자아는 출렁인다. 이 출렁임 속에 중력의 속박은 없다. 도취의 기쁨으로 한없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자아의 새만 있을 뿐이다. 죽음이 어둠이라면 삶은 빛이다. 죽음이 슬픔으로 가라앉는 의식이라면 삶은 기쁨으로 떠오르는 의식이다. 이 자아의 새는 유한의 세계에서 무한의 세계로 건너가는 이며, 땅으로 끌어내리는 중력의 법칙을 뚫고 수직으로 상승하는 새다.
술은 무엇보다도 도취를 부른다. 시의 박물관에서 술은 항상 타오르는 물이다. 술의 질료는 액체이지만 그 본질은 불이다. 불은 생명의 열정에 대한 상징이다. 그 불은 자아의 새가 공중으로 떠오르게 하는 동력이다. 술은 몸에 들어와 불길로 타오르고 열기와 찬란한 빛을 쏟아내며 내 안에 응축된 죽음이 일으키는 소멸과 무의미, 냉담한 예감들을 재로 만든다. 생이 점화한 불꽃 속에서는 끊임없이 불사조들이 금빛의 날갯짓을 하며 솟아오른다. 술의 포상인 도취와 고양은 삶을 화석화(化石化)하고 부동화(不動化)하는 죽음의 메마름과 불모성에 대한 도발이다.
나는 시가 “광기가 불러 주는 것을 이성이 받아 적은 것”(알베르 카뮈)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좋은 시는 광기만으로는 안 되고, 더더구나 이성만으로 도달할 수는 없다. 광기와 이성의 화학적 결합만이 시를 낳는다. 그 화학적 결합으로 승화가 생겨나는데, 승화는 칙칙한 영혼마다 웅크리고 있는 저 불행의 도저한 밑바닥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새다. 괴테는 “나는 불길 속에서 죽음을 갈망하는 / 살아 있는 자를 찬양하고 싶다”(〈행복한 노스탤지어〉)고 썼다. 불꽃에 매혹되어 그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들은 죽음이 아니라 삶의 절정을 찬양하는 자아들이다. 〈나 떠난 후에도〉는 흐름을 끊는 죽음을 빌려 살아 있음의 기쁜 슬픔을 찬양하는 시다. 시인은 서서히 죽어 가는 것에 대한 예감들을 타오르는 불로, 생명 됨의 연옥(煉獄) ― 꿀 같은 죄와 악마들 ― 으로 바꾼다. 그 타오르는 불 속에서 불사조가 솟아 날아오른다. 날아오르는 것들은 불꽃 속으로 몸을 던진다. 오, 불꽃 속에 몸을 던지는 새들이여, “어두컴컴한 그림자 속에 / 너는 더 이상 갇혀 있지 않구나”(괴테, 위의 시).
사진 : 이창주
문정희는 전라남도 보성 사람이다. 시인은 일찍이 진명여고 시절부터 각종 백일장을 석권하며 문명(文名)을 휘날렸다. 10대 때 이미 첫 시집을 낼 정도로 조숙이던 시인은 미당 서정주의 문하에 들어 시를 배운다. 모국어의 장인은 이 감수성의 천재에게 언어 다루는 법을 전수한다. 문정희 앞에 열린 시의 길은 탄탄대로였다. 시인은 순조롭게 등단을 하고 시집을 내고 이름을 널리 알렸다. 시인은 누구나 내면에 저를 시인으로 키운 천형(天刑)을 안고 있다. 그 천형들은 대개 치명적 결핍들이다. 시인들은 가난, 육체의 결손, 죄, 마약중독, 불행, 외모 콤플렉스… 들과 같은 몹쓸 천형과 극한의 나락이 물리는 젖을 먹고 자라난다. 신은 어떤 이에게 가난과 불행을 주고 그 보상으로 영혼의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예술가의 천분을 준다. 보들레르, 비용, 장 주네, 김소월, 이상, 노천명, 한하운, 김신용… 들이 다 그렇다. 수난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살아 돌아온 자만이 시인이 될 수가 있다. 운명에서 수난과 천형의 조건이 사라진 뒤에도 이것은 흔적을 남긴다. 운명의 저 안쪽에 남은 그늘과 그림자가 바로 그것이다.
문정희 시인에겐 그런데 그늘과 그림자가 없었다. 아니, 없는 것처럼 보인다. 타자성 속에서 자기를 잃었기 때문일까? 정말 한 점의 그늘과 그림자가 없을까? “시를 쓰며 눈물을 캐며 / 그 깊은 침묵 속으로 누가 다녀갔는지 / 얼마나 슬픈 고백을 했는지 / 그때 번개는 얼마나 뜨거이 울부짖었는지”(〈당신의 손가락에 보석이 빛날 때〉) 시인은 화려한 외모와 언변을 가지고, 그걸로 늘 좌중을 휘어잡는다. 음지라고는 도무지 모른 채 오직 양지의 수혜 속에서 제 삶을 양육해 온 듯 화려한 외모와 언변 밑에 숨은 극한의 외로움과 고통의 나락에서 내지르는 울부짖음, 불행에 대한 위험한 탐닉을 우리는 잘 모른다. 어느 시대에나 가장 좋은 시인들은 세계의 가난을 산다. 모든 시인은 세계의 가난이 만든 수난의 횡단자이다. 많은 사람들은 시인이 쌓은 시의 성채에서 부(富)와 그것의 화려한 외관, 그리고 비상한 활력만을 보았지, 그 밑에 은닉된 치명적인 가난과 침울함을 보지 않는다. 그래서 문정희는 가장 잘못 알려진 시인, 가장 오독되는 시인이 되었다.
문정희의 시적 싸움은 타인들에 의해 오독된 제 운명과의 싸움이다.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것이 곧 예술가의 성공은 아니다. “지난밤의 외로움을 바다 끝까지 밀고 나아가 / 심연에 살며 / 불온한 천재로 자꾸 태어나기를 기다렸다”(〈유명한 예술가〉) 시인은 심연을 사는 불온한 천재를 꿈꾼다. 그가 불온한 것은 세계의 가난에 대해 도발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편함에 노예처럼 길들여지는 정주민이 아니라 “날마다 길을 떠나는 집시”, “화적 떼의 아내”, “하다못해 혈혈단신 화전민”으로 살고 싶어한다(〈집시가 되어〉).
* 《topclass》2008년 0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