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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Feb 18. 2020

10. 유채꽃

내가 제주도에 처음 왔을 때

사삼을 노래하는 시인들이

유채꽃밭을 노래하고 있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사삼을 노래하는 시인들이

동백꽃을 노래하기 시작한다


제주도 유채꽃은 4월 3일 전후로 절정을 이룬다. 내가 처음 제주도에 왔을 때, 제주도 시인들은 4월의 유채꽃을 노래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삼일절발포사건으로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을 유채꽃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한 비유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다. 한국에서 유채꽃은 1962년부터 유료작물(油料作物)로서 본격적으로 재배하였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사삼민중항쟁 시대에는 유채꽃밭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좀 더 알아보니 "유채는 유럽·중국·일본 등지에 분포하며, 한반도에 들어온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동의보감』에 '평지'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고, 『산림경제』에 '운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오랜 시간 재배된 것으로 보인다. 유료 작물()로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재배한 것은 1960년대 초부터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찌되었던지 유채꽃은 참으로 아름답다. 특히, 푸른 바다와 어우러지는 광활한 유채밭은 황홀 할 정도로 아름답다. 유채(料)는 말 그대로 기름을 짜는 채소라는 뜻이다. 유채는 어릴 때는 나물로도 많이 먹지만 주로 열매로 기름을 짜서 먹는다. 유채꽃의 꽃말은 '쾌활'이다. 그런데 영어로는 끔찍한 이름을 가졌다. 


유채(料)를 영어로는 <rape>라고 한다. 영어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유채꽃

rape[reɪp] 1. 강간하다 2. 강간 3. (어떤 지역에 대한) 훼손[짓밟기]

rape[réip] 1. 강간하다, 성폭행하다 2. 강탈하다, 약탈하다 3. 파괴하다, 침범하다

영어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나는 왜 이런 끔찍한 이름을 쓰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또한 유채꽃의 꽃말이 왜 '쾌활'이 되었는지도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⑥ 문태준 시인의 <누가 울고 간다>

묵은 것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시선

글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문태준 시인
1995년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이후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유심작품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가재미》 등이 있다. 현재 불교방송 PD로 재직 중.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 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낼 수 없는

 문태준의 〈누가 울고 간다〉의 미덕은 그 투명성에 있다. 모호한 구석은 한 점도 없고 세상은 아주 투명해서 그 내장까지 속속들이 내비치는 듯하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 즉, 우주, 신, 우연들과 같은 불가사의한 것들은 대상 속으로 숨고, 대상은 깊이를 숨긴 채 표면의 투명성만으로 제 존재를 드러낸다. 시의 화자가 그 투명함 속에서 돌이킬 수 없는 존재함의 한때를 관조할 때 빛, 소리, 찰나들이 존재 속으로 밀려 들어오며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들이 제 의미함을 묻는다. 의미가 없는 것들을 마치 예지몽(叡智夢)과 같이 품고서 의미로 조작하는 것은 물론 대상들을 보고 누리는 주체의 향유함에서 비롯한다.   

그 관조와 향유, 대상들을 의미 속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 가능한 것은 “나는 외따롭고 / 생각은 머츰하다” 하기 때문이다. 외따롭다는 것은 세계로부터 ‘나’를 분리해 내는 것, 관계의 연루에서 홀연히 자유롭다는 것을 암시한다. 머츰하다는 것은 타인들과의 교섭이 그친 상태, 잠시 주어진 뜸함을 이르는 말이다. 이 바쁘지 않고 한가로움은 먹고사는 일의 수고와 노동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우리를 노동과 수고에 얽어매는 것은 욕망이다. ‘나’는 온갖 욕망함의 바깥으로 밀려나 있다.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할 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하는 데카르트적 의미의 사유하는 인간이 탄생한다. 생각을 잠깐 그친 그 순간이 새로운 생각함이 시작되는 순간인 까닭이다. ‘나’의 나-됨을, 세계에 부속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세계에서 탈구된 채 혼자 덜그럭거림을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는다. 뜻밖에도 이 자유는 ‘나’를 수고와 피로를 불러오는 욕망함이 없는 상태로 끌어간다. 욕망함의 그침이 불러온 것은 세계 관조의 여유이고, 대상 세계를 받아들이는 몸의 감각적 투명성이다. 세계는 더할 수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 투명함은 이중적이다. 우선 ‘나’의 몸 감각의 투명성이 그 하나고, ‘나’의 몸 감각의 투명함을 튕겨 내는 외재적 세계, 겨울 아침의 청량함이 드러내는 투명함이 그 둘이다. 안에서 나오는 투명함이 바깥의 투명함과 마주쳐 쨍한 소리를 낸다. 외재적 세계를 채운 대상들의 소리, 색, 형상은 ‘나’의 주관적 지각의 질료로 충분히 주어진 객관 세계다. 대상 세계의 있음 속에서 투명해진 ‘나’의 감각-지각은 대상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멀어진다. ‘나’의 마음은 눈앞에서 우는 가슴이 붉은 작은 새가 아니라, 언젠가 ‘나’를 떠나면서 울었던 그 사람에게로 달려간다. 이것은 ‘나’의 존재가 연루된 찰나와 사물들 세계에서의 미끄러짐, 다시 말하면 실재의 세계에서 실재가 없는, 실재의 잔상들의 세계 속으로 도망가기다.  

다시 그 감각적 명료함 속에서 안과 바깥은 서로를 비춘다. 눈 내린 이튿날 넝쿨에 가슴에 붉은 새가 와서 운다. 그 울음은 맑고 겨울 빛처럼 여리다. ‘나’는 외따로운 가운데 그 작은 새와 새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바깥에서 울리는 작은 새의 울음소리는 ‘나’의 안에 있는 울음소리를 불러낸다. 작은 새의 애처로운 울음소리는 “저렇게 / 울고 / 떠난 사람”의 울음소리와 합쳐진다.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 있었다”의 문장에서 ‘있었다’라는 무뚝뚝한 과거완료형 시제는 완강하게 그것의 되돌릴 수 없음을 환기시킨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를 떠나가면서 그 사람은 울었다. 그 울음소리는 “가슴속으로 / 붉게 / 번지고 스며” 오랜 기억으로 남았다. 그 사람이 떠나감으로써 나는 혼자 남겨진 사람, 외따로운 상태가 되었다. 그러니까 시의 화자가 울고 떠난 사람을 떠올리게 된 것은 내가 불현듯 외따로운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흘러간 시간과 흘러오는 시간 사이에 찰나적 일치들이 일어난다. “벌 하나가 웽 날아가자 앙다물었던 밤송이의 몸이 툭 터지고 / 물살 하나가 스치자 물속 물고기의 몸이 확 휘고 / 바늘만 한 햇살이 말을 걸자 꽃망울이 파안대소하고 / 산까치의 뾰족한 입이 닿자 붉은 감이 툭 떨어진다 / 나는 이 모든 찰나에게 비석을 세워준다”(<찰라 속으로 들어가다>) 이렇듯 찰나 속에서 대상 세계는 저를 외시한다. 찰나, 그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정현종)이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찰나의 지속성 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시간대가 서로 다르지만 외따롭다는 조건에서 흘러가 버린 시간 속의 ‘나’와 흘러온 시간의 찰나 속에 있는 ‘나’는 하나다. 그 외따롬 속에서 ‘나’의 존재는 과거의 순간으로 솟구쳤다가 다시 현재의 바닥으로 떨어진다. 눈 내린 아침 넝쿨에 날아온 새와 넝쿨에 앉아 울던 그 새가 떠나 버린 그 사이의 시간대에 ‘나’의 존재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날아와 울던 작은 새의 울음소리가 ‘나’를 어떤 상념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 상념의 뒤에 가려져 있는 것은 회한과 괴로움이다.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 / 울고 / 갈 것은 무엇인가”

왜 그렇게 빨리 떠났느냐는 원망의 기색을 내비치는 이 구절은, ‘나’는 떠난 그 누구에게 몹쓸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 사랑하는 일에 충분히 몸과 마음을 다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비친다. 외따로움과 생각의 머츰함은 이미 ‘나’에게서 미끄러져 사라진다. ‘나’는 다시 저 과거와 그 과거의 타인들과 연루된 존재이며, 생각은 그 연루됨 속에서 여러 가지를 뻗어 ‘나’를 피차별적으로 연쇄된 관계의 고리에 얽어맨다. 과거에 울고 간 누군가 있었고, 지금에서 울고 간 타자의 울음소리를 기억하며 그 실연의 경험을 반추하는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닌, 전체성과 무한과 다가올 미래 앞에서 홀로 새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하나의 타자로서 무수한 타자들 속의 ‘나’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사진 : 권용상

문태준은 경북 김천 사람이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불교방송에서 프로듀서로 일하는 이 젊은 시인이 보여주는 언어 풍경에서는 오래된 먼지와 식초 냄새가 뒤섞인 독특한 냄새가 난다. 옛것의 냄새다. 과연 이 시인의 언어 풍경에는 오래 묵은 고리궤짝의 안쪽에 괸 시간에서 나온 듯 종갓집 묵은 장(醬)맛과 같은 말과 사람과 풍습이 잘 어울려 있다. 사람과 풍습을 한데 아우르는 그 태도가 징그러울 정도로 의젓하고 천연덕스럽다. 시인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적 사람마냥 토속성이 짙은 풍물과 그 풍물 속에서 진득하니 나이를 먹어 가는 사람들의 정서를 염탐한다. 이 염탐질은 생래적인 것인가, 아니면 후천적 학습으로 얻은 것인가. 알 수 없다. 묵은 것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이 찬찬한 시선이라니! 시인은 옛것, 작은 것, 여린 것, 고요한 것, 아픈 것들의 페로몬에 홀린 듯 그것에 속수무책으로 끌린다. 한반도 남쪽에서 태어난 시인은 순도 높은 평북 토박이말과 음식들에서 자기정체성을 찾은 한반도 서북 변두리에서 나고 자란 일급 시인 백석에 비견할 만하다. 백석과 문태준의 정서적 친연성은 매우 끈끈하다. 문태준은 해방 뒤에 북에 남아 거기서 무명의 삶을 마친 백석의 현신이라고 할 만하다.

보라.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 어두워지려는 때에는 개도 있고, 멧새도 있고, 아카시아 흰 꽃도 있고, 호미도 있고, 마당에 서 있는 나도 있고…. 그 모든 게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 개는 늑대처럼 오래 울고, 멧새는 여울처럼 울고, 아카시아 흰 꽃은 쌀밥 덩어리처럼 매달려 있고, 호미는 밭에서 돌아와 감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마당에 선 나는 죽은 갈치처럼 어디에라도 영원히 눕고 싶고…. 그 모든 게 달려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 개는 다른 개의 배에서 머무르다 태어나서 성장하다 지금은 새끼를 밴 개이고, 멧새는 좁쌀처럼 울다가 조약돌처럼 울다가 지금은 여울처럼 우는 멧새이고, 아카시아 흰 꽃은 여러 날 찬밥을 푹 쪄서 흰 천에 쏟아 놓은 아카시아 흰 꽃이고…. 그 모든 게 이력이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어두워지는 순간〉) 이 박모(薄暮)의 한때는 이승과 저승이 엇갈리는 시간이다. 개와 늑대가 분간이 안 된다 하여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도 한다. 시인은 개와 늑대의 시간 속에 안겨 있는 개, 멧새, 아카시아, 호미… 들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그것들이 시간의 경과를 거쳐 우연히 이 어둠 속에 머무르게 된 내력이 함께 드러난다. 개는 어미 개의 뱃속에서 나와 다른 새끼들을 뱃속에 품은 어미 개이고, 멧새는 좁쌀에서 조약돌로, 다시 여울처럼 울음을 바꿔 온 멧새이며, 아카시아 흰 꽃은 찬밥을 쪄서 흰 천에 쏟아 놓은 꽃이다. 문태준의 언어들은 백석을 연상시키면서도 거뜬하게 백석을 넘어간다. 현재를 말할 때조차 그 현재는 생명과 생명이 고리로 이어지며 시간들은 파랗게 이끼가 돋은 듯 고색창연하다.


* 《topclass》2008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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