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으로 돌아간 포구, 서귀포라 하였는데
또다시 돌아왔으니 무엇이라 해야만 할까
정방폭포가 더 좋아서 또다시 돌아온 서복
정방폭포와 소남머리 사이에 집을 지었다네
전분공장과 단추공장이 있었던 자리에 글쎄
터를 잡고 아예 살림을 차리고 살아간다네
해방이 되고 3.1절 발포 사건이 일어나고
4.3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초토화 작전으로
단추공장과 전분공장으로 끌려간 사람들
정방폭포 아래로 눈물 떨어뜨려 죽일 때
‘서복과지’글씨에 매달린 영혼들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정방폭포로 돌아왔다네
가족들은 무서워서 시체도 찾아가지 못하여
동남동녀들과 영혼들과 함께 살림을 차렸다네
무서운 단추공장과 전분공장의 기억을 지우고
죽은 사람들과 함께 불로초를 기르며 살아가네
용왕님도 가끔 찾아와 머물고 가는 이곳에는
소나무 가지에 용왕님의 그림자가 걸려있고
하늘에는 남극성이 피고 땅에는 황근꽃이 뜨네
뼈아픈 고통도 억울함도 원망도 잘 익으면 저렇게
용 같은 소나무로 자라고 남극성으로 빛나고
노랗게 피어나는 무궁화, 황근꽃으로 떠오르는구나
더 깊은 곳으로 떨어진다
아스팔트 다리 위에는
오늘도 사람들이 지나가고
내일도 자전거가 지나가고
모레도 자동차가 지나가리라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폭포
바다보다 더 깊은 곳으로 떨어져
다시 한번 높이 솟아오르는 물소리
바다로 가는 물소리가 있다
바다로 가는 발소리가 있다
더 이상 디딜 바닥이 없을 때
우리는 모두 정방폭포가 된다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 낮은 곳으로 떨어져서
시체도 찾을 수 없는 영혼들이 있다
늘 낮은 곳에서만 사는 바다는
더 높은 곳을 꿈꾸며
날고 싶어서 날아보고 싶어서
오늘도 파도의 날개를 펼쳐본다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서복과 서귀포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 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
조선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복
서복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 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의 고향이라 전해진다.
서복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
서복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진시황의 칙서(勅書)를 받는 서복
진시황의 1차 동도 칙서와 서복의 1차 동도 상서문
진시황의 2차 동도 칙서와 서복의 2차 동도 상서문
https://culture.seogwipo.go.kr/seobok/index.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