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묘에 묻혀있는 주인공들의 눈물도 섞여 있으리라
무등이왓에서 큰넓궤로, 볼레오름으로, 단추공장으로
소남머리로, 정방폭포로 걸어갔던 발자국도 있으리라
정방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속에는
어찌하여 그것들 뿐이겠는가
백록담에 잠시 머물렀던 물은
바다에서 하늘로 다시 올라간 구름이었으며
또다시 지상으로 내려온 빗물이 아니었던가
그 속에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당신이 언젠가 흘렸을 눈물도 조금은 섞여 있으리라
아, 그리하여 오늘은 이렇게 정방폭포로 떨어지고
바다의 윤슬로 반짝이며 서로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우리들은 함께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고 말리라
정방도 아니고 폭포도 아니고 정방폭포라니
차라리 나무라면
끝까지 붙들고 있으면 언젠가는 자라겠지만
하필 붙잡은 화두가 정방폭포라서
붙잡을수록 자꾸만 아래로 떨어지기만 하는구나
정방에 앉아서 참선이라도 하려 해도
자꾸만 떨어지는 폭포수에 마음까지 젖는구나
그래도 한 번 잡은 화두는 끝까지 잡아야만
무엇인가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나는 오늘도 정방폭포 속에서 살아간다
정방폭포 하나 붙들고 날아오를 꿈에 젖는다
하늘과 바다를 뻥 뚫고 빛 속으로 날개를 편다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6) 동광리 헛묘 - 한라일보 (ihalla.com)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6) 동광리 헛묘시신을 못 찾아 혼을 불러 묻었네 입력 : 2007. 05.15(화) 00:00
▲헛묘의 대표적인 곳이 동광리 6 거리 검문소 맞은편에 있는 임문숙 씨 일가의 헛묘(왼쪽)와 동광리 마을공동목장 안에 있는 김여수 씨 가족의 헛묘다. 병악과 원수악 오름 등으로 둘러 쌓인 동광리는 안덕면의 대표적인 중산간 마을이다. 최근에는 평화로의 동광 육거리로 상징화되면서 교통의 요지가 되어, 점점 아름다운 마을로 변모하고 있다. 동광 육거리 근처에는 두 곳의 헛묘가 유족들에 의해 조성되어 4·3 당시 비극적인 죽음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시신이 없어 헛묘라네
시신이 없는 무덤이라 헛묘라 부르는 것이다. 동광리는 4·3 당시 140여 가호(무등이왓 80여호, 삼밭구석 40여호, 조수궤 10여호, 간장리 10여호)에 살던 주민들 중에서 200여명의 인명피해(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는 205명으로 기록)를 냈다.
1948년 11월 중순 이후 중산간 마을에 대한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이 이루어 지면서 마을은 거의 전소됐고,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4·3 이후 동광리는 동광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간장리 만이 복구되어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에서 주민 희생의 시작은 1948년 11월15일에 시작되었다. 군인토벌대들이 들이닥쳐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강신학(姜辛鶴·60), 김을돌(金乙乭·58), 강군봉(姜君鳳·52), 고만석(高萬石·52), 고윤재(高允才·49), 고군욱(高君旭·47), 고재언(高在彦·44), 이임길(李壬吉·35) 등 10여 명을 강귀봉 댁 우영팟에서 총살한 것이다. 이날 간장리 마을의 10여호의 집도 군인들에 의해 불태워 졌다.
영실, 볼레오름까지 피신
11월21일에는 '무등이왓'과 '삼밭구석'이 전부 소개되었다. 집들이 모두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한 동광리주민들은 마을 근처에 숨어지냈다. 삼밭구석 사람들은 마을 서쪽에 있는 큰넓궤 주변으로 피신했다. 큰넓궤가 토벌대에 의해 발각되자, 주민들은 한밤 중에 굴에서 나와 눈이 무릎까지 차오른 산길을 걸어 영실부근의 볼레오름까지 올라가 피신했다. 토벌대는 피난민들의 남긴 눈 위의 발자국을 따라 산을 에워싸며 올라왔다. 토벌대는 눈 덮인 한라산을 누비며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체포하거나 총살했다. 볼레오름 근처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동광리 사람들만이 아니라 인근의 감산리 등지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1949년 1월경 거의 붙잡혔다. 토벌대는 붙잡힌 주민들을 서귀포 정방폭포 인근의 단추공장 건물에 일시 수용했다가, 옥석을 가리지도 않고 정방폭포 위에서 집단학살했다. 그 중에는 동광리 주민들이 가장 많았다.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가 발간한 '제주도4·3피해조사보고서'에는 이와 관련된 김복남(1940년생·동광리 조수궤 출신)씨의 증언서가 있다. "토벌대는 우리들을 서귀포 정방폭포 입구 위쪽 지하실에 가뒀다. 거기 가서도 어른들을 한사람씩 불러다가 마구 때렸다. 나는 겁 먹고 우니까 시끄럽다고 하면서 개머리판으로 때려서 눈왼쪽이 병신이 되었다. 거기서 삼일간 갇힌 뒤, 삼일째 되던 날 아침 주먹밥 반쪽을 들고 아이들과 86명의 어른들을 정방폭포 옆에 세우고 죽이는 걸 보라고 하여 지켜 보았다. 보는 거리는 약 200m였다. 나는 똑똑히 봤다. 시체는 정방폭포에 많이 깔려 있었다. 나는 누나 손을 잡고 한없이 울었다."
여덟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와 함께 잡혀가 부모들이 희생되는 모습을 바라보는 김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정방폭포에서 혼을 불러오다
정방폭포에서 학살된 사람들 중에 동광리 주민은 최소 40명이 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하지만 시신을 거둬 온 사람들은 한사람도 없었다. 유족들이 시신이나마 찾으려고 수소문을 해서 찾아간 정방폭포 주변에는 이미 시신들의 살이 녹아 뼈가 엉겨서 누구의 시신인지를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부의 시신은 바다로 떠내려갔다.
1956년경 동광리 마을이 재건된 후 주민들은 시신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으나 허사였다. 비석을 세워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도 있었고, 일부는 헛봉분을 만들기도 했다. 헛묘의 대표적인 곳이 동광리 6거리 검문소 대각선 맞은편에 있는 임문숙씨 일가의 헛묘와, 동광리 마을공동목장 안에 있는 김여수씨 가족의 헛묘다. 시신을 찾으려고 정방폭포 학살현장까지 갔었던 임문숙(81)씨는 시신을 구분할 수 없어서 포기하고 대신에 헛묘를 만들기로 했던 것이다.
"시신은 찾지 못했지만 죽은 이들의 혼을 불러다 헛 봉분을 쌓고 묘지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나중에 내가 사는 한림에서 굿을 하고, 죽은 사람들이 저승에 가서 잘 살도록 길도 쳤습니다. 나중에 시신들이 있던 곳에 가보기도 했습니다. 그 곳은 집들이 들어서 있어서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동광리 마을공동목장에 있는 헛묘를 조성한 김여수(77세)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때 동광리에서는 시신을 찾지 못한 사람이 천지였습니다. 우리 집안에서도 시신을 찾지 못한 사람이 다섯 분이었습니다. 작은 아버님네 내외분하고 사촌형 내외분, 셋째 형님의 시신을 찾지 못해서 헛봉분을 만들었습니다. 작은아버지와 사촌형은 합묘 형태로 했고, 사촌형은 따로 해서 세개의 봉분으로 시신을 찾지 못한 다섯분을 모셨습니다."
헛묘가 전하는 말
임문숙씨의 헛묘는 동광리 육거리에서 동광리 마을 방면 왼쪽으로 밭을 하나 건너면 정성스레 가꾸어진 헛묘 7기(2기는 합묘)가 있다.
비문은 4·3사건 시 정방폭포에서 비통하게 희생되었으며, 사체를 확인하지 못하여 묘소를 이곳에 설정하니 자손들이 지성으로 성묘하며 영세불망 하시라는 내용이다. 이곳에는 2006년에 제주도와 제주4·3연구소에 의해 안내표석을 세웠다.
또 하나의 헛묘인 김여수 일가 헛묘는 동광리 목장 입구 300m 지점 길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현재 잘 가꾸어진 봉분 3개가 나란히 있다.
제주도와 4·3사건처리지원단에 따르면 4·3희생자들 가운데 시신을 거두지 못한 사람은 4천여명에 이른다. 바다에 돌을 메달아 수장되어버린 희생자들, 정뜨르비행장 등 제주산야에 역사의 원한을 품고 백골로 누워 있을 시신들, 형무소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그 숱한 행방불명 희생자들의 시신들을 찾지 못해, 혼을 불러다가 모시고자 했던 유족들의 아픔의 표현인 헛묘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4·3의 현주소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4·3연구소 이사 osk4843@hanmail.net>
[현자아에서 만난 사람/임문숙씨]"헛묘 조성은 희생자 위한 살아 남은자들의 도리"
4·3의 광풍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죽은 자들을 위해 헛묘를 만들어야 했던 임문숙 할아버지(81세·사진)는 억울하게 희생된 영혼들을 향한 살아남은 사람의 도리라고 했다. 그 역시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다.
"가족들은 같이 숨어다녔어요. 큰넓궤에도 같이 있었죠. 가족들은 볼레오름쪽으로 가고 전 가족들과 떨어져 큰넓궤 근처에 숨어 살다 49년 봄에 귀순했습니다. 예비검속에도 잡혀서 죽을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가족들은 서귀포 단추공장에 수용되어 있다가 정방폭포에서 희생당했습니다. 1948년 음력 12월24일입니다. 같은 날 희생자가 많습니다. 저에겐 두분 어머님이 계셨는데 두분어머님과 사촌형수님, 5촌분들도 함께 돌아가셨습니다."
7년이 지나서야 시신을 찾으러 나설 수 밖에 없었던 참담한 시대를 곱씹어 가던 할아버지의 얼굴은 이내 어두워졌다.
"시신을 찾아온 사람은 아예 없습니다. 폭포 근처에 시신이 있었는데 유골은 하나도 수습이 안된채 있었어요. 군대 갔다가 제대를 하고 온 후에 처음에는 비석만 세우기도 했는데 집안 어른이 비석만 세우면 안된다고 해서 혼이라도 불러다가 묘지를 만든 것입니다."
팔순을 훌쩍 넘긴 임옹은 국가차원에서 상징적인 유적지로 헛묘를 지켜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헛묘가 있는 밭을 외지인에게 팔 수 밖에 없었던 어려운 시절을 못내 안타까워하며, 당시 두 살 짜리 사촌조카의 죽음을 이야기 하며 눈물을 머금치 못했다.
<오승국/4·3연구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