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가만히 있어도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는 선이다
행주좌와 어목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무시선 무처선(無時禪 無處禪)
정방폭포는 천제연폭포, 천지연폭포와 더불어 제주도 3대 폭포라고 불린다. 높이 23m, 너비 8m에 깊이 5m에 달하며, 국내에선 유일한 뭍에서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폭포다. 서귀포 시내에서 버스로 15분 거리에 있다. 입구의 매표소에서 표를 구매하고 소나무가 있는 계단을 따라 5분 정도 내려오면, 햇빛이 비쳐 은하수 빛깔로 변하는 정방 폭포를 볼 수 있다. 멀리서도 시원한 폭포 소리가 들리고, 폭포 양쪽으로 주상절리가 잘 발달한 수직 암벽도 볼 수 있다. 한라산에서 내려와 서귀포 시내를 관통하고, 바다 앞으로 하얗게 떨지는 정방폭포의 모습은, 외국의 거대 폭포처럼 웅장하진 않지만, 자연과 조화롭게 어울리며 단정하게 떨어지는 모습이 전통 수묵화를 감상하는 느낌을 준다.
1995년 제주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국가 명승 제43호로 승격되었다.
정방폭포의 한쪽 석벽에는 '서불과차'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다음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아주 옛날 중국 진시황은 세상을 모두 자기의 손아귀에 넣고 권세를 누리며 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 그런데 그 부러울 것 없는 진시황에게도 어쩌지 못하는 고민이 있었으니, 그건 자신의 나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왕으로서의 위엄이나 왜적을 막아내는 장수로서의 용맹스러움은 나무랄 데 없었으나 점점 늙고 쇠약해져가는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음에 늘 진시황은 고민하였다. 늙지 않고 영생을 누리고 싶었던 진시황이 하루는 모든 신하를 불러 놓고 명을 내렸다. “이 세상에서 불로장생 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자가 없느냐?” 서불이라는 꾀 많은 신하는 진시황의 앞으로 나서서 또박또박 그 물음에 대답을 하였다.
“소인이 듣기로는 저 동쪽 나라 작은 섬 영주라는 곳에는 영산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불로초가 있다고 합니다. 제가 그곳에 가서 그 불로초를 캐오겠습니다.” 자신의 큰 소원이 이루어지게 된 진시황은 서불이 원하는 동남동녀 각 500명을 뽑아주고, 큰 배와 먹을 것을 잔뜩 내려주었다. 동쪽의 거친 바다를 건너오던 서불 일행은 깊은 바다 속 큰 용을 만나 큰 위기를 맞으나 서불의 쩌렁쩌렁한 호령으로 금방 물리쳤다. 제주에 도착하자 서불은 데리고 온 동남동녀 500쌍에게 제주의 영산 한라산에 가서 불로초를 캐오라고 명한다. 동남동녀 500쌍은 한라산에서 불로초를 찾아 온 산을 헤매었지만 결국 불로초를 찾지 못하고, 한라산의 특이한 식물 시로미를 캔 뒤 정방폭포 서쪽 절벽에 ‘서불과지’라는 마애각을 남기고 서쪽으로 돌아갔다.
정방폭포 ‘소남머리’는 4.3사건 당시 정보과에서 취조 받은 주민들 중, 즉결처형 대상자들 대부분이 희생 당한 곳이기도 하다. 흔히 정방폭포에서 희생 당했다고 하는 희생자 대부분이 정방폭포 상당과 이어지는 이곳에서 총살 당했다. ‘소남머리’는 동산에 소나무가 많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서귀중학교 학생이었던 송세종씨는 "그때 당시 어디 여자인지는 모르지만, 도망가다가 절벽으로 떨어졌는데 노송에 걸렸어. 그 여자가 임신을 하고 있었지. 떨어지니까 군인들이, 이건 하늘이 도운 사람이라 해가지고 살려줬어. 사람 두 번 죽인다는 것이 없으니까. 나도 직접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 이라고 회고했다. 서귀리 및 서귀면, 중문면 일대뿐만 아니라 남원면, 안덕면, 대정면, 표선면 주민에 이르기까지, 정방폭포 희생자들은 산남 지역 전체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