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의 취약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나라의 취약점을 천하에 드러내고 있다
종교의 취약점을 똑똑히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미워도 다시 한 번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면
함께 죽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데
증오는 공멸을 낳는 씨앗인데
내가 너를 미워하면 너는 나를 미워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면 너는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길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길만 있는데
어찌하여 부질없이 다른 길을 찾으려고 하는가
아무리 찾아보아도 다른 길은 없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다른 사랑은 없는데
나의 베아트리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의 아프로디테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는 오늘도 나의 산목련을 찾아서
목련꽃 아래 나무의자에 앉아 그대를 생각한다
징검다리가 있는 강가 빨래터가 있었다
빨래터에서 오늘은 돼지를 잡고 있었다
축대 아래쪽에서 개를 꼬시르고 있었다
나는 그냥 징검다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개 털 타는 냄새가 내 곁을 휙 지나갔다
시커먼 개 한 마리가 내 앞으로 뛰어갔다
나는 그냥 궁금하여 뒤를 돌아다 보았다
털 벗겨진 돼지 한 마리 따라오고 있었다
주전자 뚜껑으로 털 벗기던 사람들과
짚불을 피워 개털 꼬시르던 사람들이
넋 나간 사람들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개를 따라가고 돼지는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시장에서 개와 돼지를 팔고 있었다
개와 돼지의 껍데기만 팔고 있었다
개 껍데기 한 마리가 나에게 안겼다
돼지 껍질 한 마리가 나에게 업혔다
개는 개개개개 짖으며 내 앞에서 가고
돼지는 돼지돼지돼지 울며 나를 따랐다
나는 꿈속에서도 짖거나 울지 않았다
목련꽃들
외투를 벗고 있다
속살이
환하게 보여도
외설스럽지 않은
봄이 있다
겨울을 벗고
봄이 환하게 온다
가까이서 보니
올해는 목련꽃도
마스크를 쓰고 있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간다
초승달이 서쪽 하늘
산방산 위에 떠 있다
저 달은
너무 빠른 것일까
너무 늦은 것일까
저 달은 어쩌면
해를 따라 왔으리라
해에게 들키지 않으면서
몰래 몰래 따라왔으리라
눈치 없는 해는 어쩌면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만 묵묵히 갔으리라
해가 바다 속으로 돌아간 다음
저 달은 비로소
주위를 돌아보았으리라
자신을 따라오는
별 하나 비로소 볼 수 있었으리라
오늘도 나는 야간근무 마치고 시를 썼다
돌보지 않아도 잘 자란 월동무 뽑아먹으며 시를 썼다
나는 요즘 종이에 시를 쓰지 않고 땅에 시를 쓴다
죽은 나무에 시를 쓰지 않고 살아있는 나무에 시를 쓴다
흙에, 따뜻한 어머니 가슴에 직접 시를 쓴다
연필로 쓰지 않고 호미와 손으로 시를 쓴다
나는 평생 딱 한 편의 시를 완성 하고 싶다
나의 무덤이 내 시의 마침표가 될 것이다
이어도공화국에는 아직 컴퓨터도 없고
텔레비젼도 없다
문화시설은
30년 넘은 라디오와
성능이 별로인 손전화가 전부다
나는 아직도 페이스북 기능을 잘 모른다
내가 글을 올리면
어떻게 바로 알고 찾아오셔서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달아주시는지 잘 모른다
참 부지런하고 고마운 분들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
그러지 못하는 제가 많이 미안 할 뿐이다
오늘은 특히 생일 축하 메시지가 많다
그런데 나의 생일은 음력이다
어머니께서는 2월 24일이라 말씀 하셨고
아버지께서는 2월 28일이라 말씀 하셨다
그래서 나는 아예
4년에 한 번 온다는
2월 29일을 생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생일은 나를 낳아준 부모님께 감사해야 하는 날인데
나의 부모님은 이미 내 곁에 아니 계신다
오늘 밤에는
나의 생일이 아니어도
꿈속에서라도 부모님께 찾아가 절 올려야겠다
* 이 모두가 다 아름다운 여러분 덕분이어서 고맙습니다
오감으로 읽어 낸 한 여인의 생
글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 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 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 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 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김혜순의 시는 늘 명료하지 않다. 그 혼돈과 모호함은 감각의 착란에서 나온다. 여러 겹의 감각들이 겹치고 뒤섞인다. ‘잘 익은 사과’ 역시 그런 감각의 중첩적인 모호함에 감싸여 있다. 분명한 것은 노망든 할머니뿐이다. 구멍가게 평상에 앉은 할머니는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먹는 중이다. 시인은 사과를 오물오물 먹는 할머니를 바라본다. 노망든 할머니는 일체의 생각을 놓아 버림으로 천진난만한 존재 즉,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으로 돌아간다. 동시에 그 할머니가 살아온 세월은 투시한다. 흘러간 세월은 추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이다.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 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놀라워라, 세월의 흐름을 소리로 치환해 내고 있다. 따지고 보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리를 낸다. 우리는 많은 부분 소리를 듣고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와 소통한다. 세월은 소리와 함께 흘러가는 그 무엇이다. 보랏빛 가을 찬 바람은 “정미소에 실려 온 나락들처럼” 빻아진다. 세월은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빻는 것이다. 백 마리 여치가 우는 소리나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그리고 가을 찬 바람이 정미소에 온 나락처럼 빻아지며 내는 소리들은 차라리 음악이다. 음악이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라면, 그걸 감싼 모든 공간은 소리를 내는 악기면서 악기의 일부다. 우주는 거대한 파이프오르간 음악을 연주하며 제 궤도를 돌아간다. 이렇듯 세월의 흐름을 구체적인 청각 이미지로 치환해 내는 것은 김혜순만이 할 수 있는 시적 능력이리라.
세월의 흐름은 다시 큰 사과가 깎이는 모양으로 형상화된다. 둥글게 깎인 사과 껍질은 자전거가 돌고 있는 길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치환한다. 본다는 것은 항상 빛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뇌는 빛이 망막세포에 일으키는 세포 변화를 감지할 뿐이지 빛을 직접적으로 관측하지 않는다. 본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내부의 관측이다. 그러므로 한 물리학자는 “관측자가 무엇을 보는가 하는 것과 관측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뗄 수 없는 문제”(보이치에크 주렉)라고 말한다.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 내고 있어요”. 고향 마을의 골목의 모퉁이를 도는 자전거 바퀴는 과도가 사과에서 껍질을 깎아 내듯 길을 깎는 중이다. 큰 사과 껍질이 벗겨지듯 세월이 흘러가는 사이, 처녀는 어느덧 노망든 할머니가 되었다. 덧없이 가 버린 저 세월 뒤에는 처녀 엄마의 눈물과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가 숨어 있다. 아가를 먼 나라로 입양 보낸 뒤 눈물을 흘린 저 처녀가 노망든 할머니와 동일인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잘 익은 사과’는 감각의 향연을 보여 준다. 형상적 진실(노망든 할머니) 위에 감각적 생존(큰 사과 씹어먹기)을 덧씌워 놓은 것이 바로 이 시다. 세월은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를 내거나 자전거 바퀴가 도는 소리를 내며 청각을 자극한다. 하늘의 한 송이 구름은 내려와 내 손등을 쓰다듬고, 그 구름에서는 영원히 나이 먹지 않는 아가의 냄새가 난다.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이 구절은 두 겹으로 읽힌다. 그 아가의 냄새는 천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냄새다, 라는 뜻과 그 아가는 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가였던 그 시절의 냄새를 갖고 있을 것이다, 라는 뜻이 겹쳐 있다. 냄새로 각인된 정보는 가장 오래간다. 아가를 입양 보낸 처녀 엄마에게 아가 냄새는 어떤 경우에도 잊지 못할 기억의 시원(始原)일 것이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촉각과 후각의 세례를 한 뒤에 마침내 크고 잘 익은 사과의 과육을 숟가락으로 파내 이 없이 잇몸으로 오물오물 먹는 미각의 세계로 이끈다. 그 사과는 맛있는가? 그 사과의 맛은 슬픈 맛인가, 혹은 황량한 삶의 맛인가? 어쩌면 인생은 노망든 할머니가 먹는 잘 익은 사과의 맛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빛과 소리와 냄새, 우리의 감각에 비벼지는 이 모든 것들은 전기적 에너지로 변환되어 우리 마음에 황홀경을 자아낸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빛, 소리, 촉감, 맛, 냄새가 한데 어울려 만들어 낸 판타지아를 통과하는 것이다. ‘잘 익은 사과’에 나오는 “노망든 할머니”는 현실과 판타지아의 경계 위에 서 있다.
김혜순(1955~ )은 경상북도 울진 사람이다. 본디 성정이 밝고 쾌활한 사람이다. 김혜순은 최승자, 김옥영 등과 함께 1970년대 말에서 1980년 초반으로 이어지는 시간들을 공유했던 오래된 친구다. 네 사람이 닮은 점은 모두 시를 쓰고, 젊은 날 한때 출판사에서 밥벌이를 하며 암중모색을 했다는 점이다. 김혜순은 평민사에, 최승자는 홍성사에, 김옥영은 문장사에, 나는 고려원에서 일했다. 화염병이 날고 최루탄 가스가 자욱한 거리에는 조용필이 부르는 ‘창밖의 여자’가 울려 퍼졌다. 우리는 슬금슬금 세월이 결코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다. 아무도 말은 안 했지만 젊은 낭만 가객(歌客)들의 상처받은 가슴에는 저마다 슬픔의 황홀경이 한둘쯤 숨어 있었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 쾌활한 척했고, 더 위악적인 말들을 툭툭 내뱉었다. 마치 쾌활과 위악이 위험하고 거친 이 세계에서 자기를 방어하는 해자(垓子)나 되는 듯이. 우리는 함께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연극도 보고 누군가의 집으로 우르르 몰려가 밤을 새웠다. 밤을 새워 무슨 얘기를 했던가. 세월은 수사슴처럼 껑충껑충 뛰어 저 숲 속으로 달려 나갔다. 스무 해 넘는 세월은 우리를 각각 다른 기착지로 데려다 놓았다. 최승자는 출판사를 그만둔 뒤 번역으로 밥벌이를 하더니 나중에는 점성술로 망명하고, 김옥영은 출판계를 떠나 방송계로 가더니 이윽고 최고 다큐멘터리 작가 반열에 올라서고, 김혜순은 출판계를 떠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한 뒤 서울예술대학의 문예창작과 교수가 되었다.글쓴이 장석주님은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고, 같은 해 동아일보에 문학평론이 입선되어 시인과 문학평론가의 길을 함께 걸어온 사람이다. 그동안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붉디 붉은 호랑이》, 《절벽》 등의 시집을 내고, 《20세기 한국문학의 모험》(전 5권) 등 50여 권의 책을 냈다. 지금은 국악방송에서 생방송 <장석주의 문화사랑방>을 진행하고 있다.
2008년 0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