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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Mar 06. 2020

25. 두보와 이백

나는 

아폴론인가

디오니소스인가


나는

두보인가

이백인가


나는 

낙타인가

사자인가

어린아이인가


나는 별을 보는 사람인가

별을 잉태 하는 사람인가


나는

위험하게 살고 있는가

실험적으로 살고 있는가


나는

머리로 살고 있는가

가슴으로 살고 있는가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먹던 독수리는

오늘도 우리들의 간을 쪼아먹고 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독수리는

오늘도

우리들의 뇌를 쪼아먹고 심장을 파먹고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


내가 가야 할 길은

시경 속에 있는가

불경 속에 있는가

성경 속에 있는가


돌에 새겨진 <시경>의 일부


아폴론

그리스 신화의 광명·의술·예언·가축·궁술의 신.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로, 제우스와 레토의 아들이다. 여신 아르테미스와는 쌍둥이 동기간이다. 레토는 제우스의 아내 헤라의 질투로 출산할 장소를 찾지 못하다가 델로스섬으로 도망쳐 가 그곳에서 아폴론을 낳았다고 한다. 그리스계(系)의 이름이 아닌 것으로 보아 동방의 소(小)아시아나 북방민족으로부터 이입(移入)된 신이며, 본래는 목자(牧者)의 수호신으로 생각된다. 노미오스(목축의), 리카이오스(이리의), 스민테우스(쥐의) 등의 호칭을 갖고 있는 것은 이리나 쥐로 인한 피해를 막는 힘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나중에는 그리스적 성격과 문명의 대표적 신이 되어 국가에 있어 중요한 도덕이나 법률을 주관하여, 특히 살인죄를 벌하고 그 더러움을 씻어 주는 힘을 갖고 있다.

또한 예언의 신이기도 하여 델포이를 중심으로 그의 신전(神殿)이 세워져, 무녀(巫女)를 통해 신탁(神託)을 받는 일이 성행하였다. 아폴론은 태양의 신이라고도 하나 이것은 비교적 나중의 일이다. 신화에서는 아폴론신이 태어난 후 얼마 안 되어 델포이에서 거대한 구렁이 피톤을 사살하였다고 하여, 활과 화살이 그의 특징적 무기이다. 사랑의 신화도 많아, 예를 들면 다프네는 아폴론의 구애(求愛)를 피하여 월계수가 되었고, 카산드라는 그의 사랑을 받아 예언의 힘을 얻었으며, 하천신(河川神) 페네이오스의 손녀 귀레네를 사랑하여 아리스타이오스를 낳았고, 테사리아의 왕녀 코로니스와의 사이에서는 아스클레피오스를 얻었으며, 또한 미소년 히아킨토스도 아폴론의 사랑을 받았다.

이 아폴론 숭배는 에트루리아를 거쳐, 남(南)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로부터 직접 로마로 들어와, 일찍이 로마에는 그의 신전이 세워졌고, 훗날 아우구스투스제(帝)가 아폴론을 특별히 신봉하여 파라티누스의 언덕에 대신전이 세워졌으며, 아폴론 숭배가 성행하였다. 로마신화에서는 아폴로와 동일시된다.    



디오니소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술의 신.      


로마 신화에서는 바카스라고 한다. 바카스·바쿠스·바커스 등으로도 불린다. 어머니가 둘인 자라는 뜻이다. 제우스와 세멜레의 아들이다. 제우스의 사랑을 받는 세멜레를 질투한 제우스의 아내 헤라가 세멜레를 속여서 제우스가 헤라에게 접근할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해 달라는 소원을 하도록 세멜레에게 권하였다.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 주기로 약속한 바 있는 제우스는 본의는 아니지만 번개의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세멜레는 그 자리에서 타죽었다.

그러나 태내에 있던 디오니소스는 살아나 제우스의 넓적다리 속에서 달이 찰 때까지 자란 끝에 태어났다. 이렇게 태어난 디오니소스는 니사의 요정(님프)의 손에서 자란 후로 각지를 떠돌아다녔는데, 이것은 헤라가 그에게 광기(狂氣)를 불어넣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먼저 이집트로 갔고, 이어 시리아로 옮겼다가 아시아 전역을 떠돌아다니면서 포도재배를 각지에 보급, 문명을 전달했다고 전한다. 또한 그는 지옥에서 어머니인 세멜레를 데리고 나와 천상(天上)에 있는 신들의 자리에 앉혔다.


디오니소스에 대한 신앙은 트라키아 지방으로부터 그리스로 흘러들어온 것으로 생각되며, 디오니소스는 대지의 풍요를 주재하는 신인 한편, 포도재배와 관련하여 술의 신이 되기도 한다. 이 술의 신에 대한 의식(儀式)은 열광적인 입신(入神)상태를 수반하는 것으로, 특히 여성들이 담쟁이덩굴을 감은 지팡이를 흔들면서 난무하고, 야수(野獸)를 때려죽이는 등 광란적인 의식에 의해 숭배되는 자연신이었으나, 그리스에 전해져서는 이 신의 제례에서 연극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시되고 있다. 로마 시대에 와서도 이 신앙은 계속되어 점차 비교적(秘敎的) 경향이 강해졌다.    



두보


[ 杜甫 ]

요약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던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 널리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주요 작품에는 《북정(北征)》,《추흥(秋興)》 등이 있다.            


자 자미(子美). 호 소릉(少陵).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본적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샹양[襄陽]이지만, 허난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기(初唐期)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 ·고적(高適) 등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肅宗)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돌아와 조정에 출사(出仕)하였으나 1년 만에 화저우[華州]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며, 그것도 1년 만에 기내(畿內) 일대의 대기근을 만나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식량을 구하려고 처자와 함께 간쑤성[甘肅省]의 친저우[秦州] ·퉁구[同谷]를 거쳐 쓰촨성[四川省]의 청두[成都]에 정착하여 시외의 완화계(浣花溪)에다 초당을 세웠다. 이것이 곧 완화초당(浣花草堂)이다.


일시적으로는 지방 군벌의 내란 때문에 동쓰촨[東四川]의 쯔저우[梓州] ·랑저우[閬州]로 피난을 한 일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 동안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 무렵에 청두의 절도사 엄무(嚴武)의 막료(幕僚)로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이로 인해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게 되었다.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청두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하행하여 쓰촨성 동단(東端)의 쿠이저우[夔州]의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협곡에서 나와, 이후 2년간 후베이 ·후난의 수상(水上)에서 방랑을 계속하였는데,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둥팅호[洞庭湖]에서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단시정형(短詩定型)의 금체(今體)는 특히 율체(律體)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六朝) ·초당(初唐)의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또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典型)으로 조술(祖述)되어 왔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中唐期)의 한유(韓愈) ·백거이(白居易)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확정은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대표작으로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병거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등이 있다. 그 밖에 북송(北宋) 왕수(王洙)의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주석서(註釋書) 중에서는 송의 곽지달(郭知達)의 《구가집주(九家集註)》는 훈고(訓뭍)에 뛰어났으며, 청(淸)의 전겸익(錢謙益)의 《두시전주(杜詩箋注)》는 사실(史實)에 상세하며, 구조오(仇兆鰲)의 《두시상주(杜詩詳註)》는 집대성으로서 편리하다.


그의 시 작품과 시풍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 고려시대에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 채몽필(蔡夢弼)의 저작인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황학(黃鶴) 보주(補註)의 《두공부시보유(杜工部詩補遺)》 등이 복간(複刊)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특히 높이 평가되었는데,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5차례나 간행되었고, 성종(成宗) 때는 유윤겸(柳允謙)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전역서(全譯書)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杜詩諺解)》를 간행하였으며, 또 이식(李植)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 26권은 두시(杜詩)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유일한 전서(專書)이다. 현대의 것으로는 이병주(李丙疇)의 《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註)》(1958), 양상경(梁相卿)의 《두시선(杜詩選)》(1973) 등이 알려져 있다.    



이백


[ 李白 ]

요약 중국 당나라 시인.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되며 시선(詩仙)으로 불린다.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의 대표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隴西縣]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장난[江南] ·산둥[山東] ·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안릉(安陵:湖南省) ·남릉(南陵:安徽省) 동로(東魯:山東省)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孟浩然) ·원단구(元丹邱)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이백은 당시 부패한 당나라 정치에 불만이 많았고 자신의 정치적 재능으로 발휘할 기회를 바랐다. 그가 43세 되던 해인 742년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창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라는 관직을 하사 받았다. 하지만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현종의 곁에서 시만 지어 올렸다.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정치적 야망과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역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창안을 떠나게 되었다. 창안을 떠난 그는 허난[河南]으로 향하여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高適)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石門:陝西省)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 ·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廣陵:현재의 揚州) ·금릉(金陵:南京)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會稽:紹興)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宣城: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尋陽:江西省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그 후 그는 금릉 ·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當塗:安徽)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 ·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宋代)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元代) 소사빈의 《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청대(淸代) 왕기(王琦)의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 등이 있다.    



시경


[ 詩經 ]

요약 춘추 시대의 민요를 중심으로 하여 모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시집.  

황허강[黃河] 중류 중위안[中原] 지방의 시로서, 시대적으로는 주초(周初)부터 춘추(春秋) 초기까지의 것 305편을 수록하고 있다. 본디 3,000여 편이었던 것을 공자가 311편으로 간추려 정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전하는 것은 305편이다. 시경은 풍(風),아(雅),송(頌) 셋으로 크게 분류되고 다시 아(雅)가 대아(大雅), 소아(小雅)로 나뉘어 전해진다. 풍(國風이라고도 함) 은 여러 나라의 민요로 주로 남녀간의 정과 이별을 다룬 내용이 많다. 아(雅)는 공식 연회에서 쓰는 의식가(儀式歌)이며, 송은 종묘의 제사에서 쓰는 악시(樂詩)이다.

각부를 통하여 상고인(上古人)의 유유한 생활을 구가하는 시, 현실의 정치를 풍자하고 학정을 원망하는 시들이 많은데, 내용이 풍부하고, 문학사적 평가도 높으며, 상고의 사료(史料)로서도 귀중하다. 원래는 사가소전(四家所傳)의 것이 있었으나 정현(鄭玄)이 주해를 붙인 후부터 ‘모전(毛傳)’만이 남았으며, 그때부터 《모시(毛詩)》라고도 불렀다. 당대(唐代)에는 《오경정의(五經正義)》의 하나가 되어 경전화하였다.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20) 김경미 〈겹〉

진화하기를 멈춘, 끝나 버린, 그래서 아픈 사랑

글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1
저녁 무렵 때론 전생의 사랑이 묽게 떠오르고
 지금의 내게 수련꽃 주소를 옮겨 놓은 누군가가 자꾸
 울먹이고

 내가 들어갈 때 나가는 당신 뒷모습이 보이고
 여름 내내 소식 없던 당신, 창 없는 내 방에서 날마다
 기다렸다 하고

2
위 페이지만 오려 내려 했는데 아래 페이지까지 함께 베이고

 나뭇잎과 뱀그물, 뱀그물과 거미줄, 거미줄과 눈동자, 혹은 구름과 모래들, 서로 무늬를 빚지거나 기대듯
 지독한 배신밖에는 때로 사랑 지킬 방법이 없고

3
그러므로 당신을 버린 나와
 나를 버린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청순하고 가련하고

 늘 죽어 있는 세상을 흔드는 인기척에 놀라 저만치
 달아나는 백일홍의 저녁과
 아주 많이 다시 태어나도 죽은 척 내게로 와 겹치는
 당신의 무릎이 또한 그러하고


‘겹’은 전생의 사랑과 현생의 사랑이 포개져 생긴 겹이고, 그의 몸과 나의 몸이 포개져 생긴 겹이다. 이렇듯 ‘겹’은 몸의 겹침이 먼저겠지만, 그 겹은 몸을 넘어서서 몸 아닌 것의 겹침을 불러 들인다. 사랑은 몸의 겹침이며 동시에 몸을 버린 마음의 겹침이다. 열애에 빠진 연인들은 몸과 몸을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주 포개 겹치려고 한다. 연인들은 볼과 볼을 비비며 겹치고, 입술과 입술을 마주쳐 겹친다. 애무는 몸과 몸의 겹침이고, 몸이 만든 욕망과 욕망의 겹침이다.

사랑은 그 겹침을 욕망을 넘어서서 마음의 겹침으로 진화하도록 한다. 이 시 〈겹〉에서 보여주는 사랑은 진화하기를 멈춘, 끝나버린, 그래서 아픈 사랑이다. 그 아픔은 “지독한 배신밖에는 사랑 지킬 방법이 없고”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버리고 뒤돌아섬으로써 그 사랑을 끝내 지키려는, 지독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당신을 버린 나와 / 나를 버린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청순하고 가련하고”에 따르자면 이 겹은 어긋난 겹이다. 이 어긋남은 애초의 의도와 기대를 배반한다. 어긋남으로 인해 기획이나 기대와는 다른 결과를 불러온다. 이를테면 “위 페이지만 오려 내려 했는데 아래 페이지까지 함께 베이고”와 같은 상황이 그렇다. 대개의 사랑은 의도와 기대대로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랑은 의도하지 않는데 오고, 더 많은 사랑은 기대와 다른 곳에서 시작한다. 보라, “내가 들어갈 때 나가는 당신 뒷모습이 보이고 / 여름 내내 소식 없던 당신, 창 없는 내 방에서 날마다 / 기다렸다 하고”라는 구절을. 내가 들어갈 때 당신은 나가고, 내가 나갈 때 당신은 들어온다. 내가 없는 저곳에서 당신은 하염없이 기다리니, 내가 있는 이곳에 당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 엇갈림! 그래서 사랑은 맥락 없음과 혼선과 오류투성이고, 미몽(迷夢)이라고밖엔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인기척에 놀라 저만치 달아나는 백일홍의 저녁”은 관능의 열락으로 몸이 불꽃같던 저녁이었거나, 누군가를 기다림으로 그 관능적 열락에의 기대만으로도 황홀했던 저녁이었음을 암시한다. 백일홍은 백일 동안 그 붉음을 잃지 않는다는 뜻과 백일을 기다려 만개하는 꽃이라는 중의(衆意)를 갖는다. 백일홍은 불의 원소를 가진 불의 꽃답게 타오르는 몸의 사랑, 그 성적 몽상을 불러일으키는 꽃이다.

붉은 빛을 의기양양하게 뿜어내는 백일홍은 사랑의 현전(現前)에 대한 강력한 은유다. 서정주는 〈백일홍 필 무렵〉에서 “칠월이어서 보름나마 굶어서 / 백일홍이 피어서 / 밥상 받은 아이같이 너무 좋아서 / 비석 옆에 잠시 서서 웃고 있었지”라는 구절이 얼른 떠오른다. 보름나마 굶은 아이가 밥상을 받고 웃는 웃음이 어떻겠는가! 사실은 굶은 것은 아이가 아니다. 백일홍 핀 것을 보고 웃으며 비석 옆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 사람이 바로 보름나마 사랑에 굶주렸던 것이다. 이 사람은 붉은 백일홍같이 성적인 열락에의 갈망과 그 열락이 가져올 환희에 대한 기대에 휩싸여 설레는 사람이다. 그 백일홍의 저녁은 저만치 달아나 버려 이미 과거지사가 되어 버렸다. 그 저녁은 붉은 꽃을 피운 백일홍의 기쁨을 가져다 주던 그 사람이 지금 여기에 없어서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만 허무하고 쓸쓸한 저녁이다.

이 사랑이 “청순하고 가련”해진 것은 어긋났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한편으로 흔적만 남기고 지나간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내상(內傷)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다. 헛디딘 발이 허방에서 잠시 아찔할 때와 마찬가지로 〈겹〉은 어긋난 사랑과 그 상처를 핥고 가여워하는 시다. 그 가여움 때문에 “아주 많이 다시 태어나도 죽은 척 내게로 와 겹치는 / 당신의 무릎”에 몸과 마음을 내주는 것이 아닐까. 그게 다정이다. “당신은 세상 몰래 죽도록 다정하겠다, 매일 맹세하죠. 거짓말이죠. 세상 몰래가 아니라 세상 뭐라든이 맞죠. 아시죠. 이것도 거짓말. 사실은 매일이 아니고 매시간이죠.”(〈다정이 병인 양〉) 사랑은 서로를 다정으로 끌어안는 것이다.

사람들 몰래가 아니라 사람들 뭐라고 하든 당당하게. 매일이 아니고 매시간 하염없이. 그 당당하게와 하염없음도 끌어안을 그 사람이 없다면, 허공을 가르는 복서의 주먹처럼 무용한 정열이 되고 마는 것이다.


김경미(1959~ )는 경기도 부천 사람이다. 한양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1983년에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비망록〉이 당선했다.

그즈음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한 안도현, 고운기, 김백겸 등의 시인들과 함께 ‘시힘’ 동인으로 활동했다.

저 스물 몇 해 전 푸릇하던 그 젊은 시인들과 안양 어딘가에서 시와 소주에 취해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김경미 시인이 눈물로 빵을 먹어 본 적이 있는지 없는지, 혹은 뒤척이는 밤들을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울며 보낸 적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김경미 시인이 천국의 힘을 아는지 모르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 두 가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천국의 힘을 알지 못한다고 한 사람은 괴테다. 하루치의 고달프고 비루한 노동을 임금으로 환전(換錢)하는 삶의 실상을 “수놓은 천의 뒤쪽, 무늬도 못되는, 지저분한 실밥들, / 터진 스웨터 올 끝없이 풀어 되감는, 두툼한 실패(失敗)”(〈해 진다 어디에나〉)라고 알몸의 상징으로 드러낼 때 김경미의 시들은 풍성한 생기를 얻는다.

시를 쓰며 스물 몇 해가 넘도록 라디오 프로그램의 원고를 쓰는 방송작가 노릇을 하다가 최근에 그만두었다 한다.

새로 나온 김경미 시집 《고통을 달래는 순서》를 휘리릭 넘기다가 “가짜를 사랑하긴 / 싫다 어디든 손톱을 대본다” (〈생화〉)는 구절에 눈이 꽂힌다.

앉은 자리에서 그 시집 전체를 다 통독해 버리고 만다.

시집에는 작은 것들, 이를테면 나비, 동백꽃, 들국화 닮은 새끼고양이들이 출현하고, 유독 다정에 예민하고 취약하여 “누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다정이 나를〉)고 말하는 서슴없음과 기척을 하며 다가오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 반응하는 여린 마음의 자취들이 채집되어 있다.

마음의 집이 몸이 아니라 몸의 집이 마음이다. 그런 까닭에 시인은 “세상에 정 주고 저물녘, 마음 허물어지지 않은 날 / 하루도 없으니”(〈해질녘〉)라는 구절처럼 자주 마음이 허물어지는 걸 겪는다.

재속(在俗)의 삶이란건 누구에게나 남루하고 비천하다. 그 남루와 비천에 진절머리 치며 “나를 혹 다른 사람한테 잘못 집어넣었거나 / 나누군가를 잘못 입은 건 아닐지”(〈혼선〉) 의심해 보고, “밤한 시에 갓난애처럼 열 번 스무 번 깨어 울거나”(〈눈물의 횟수〉), 아니면 “고층건물 창밖으로 마음 던지고 따라 도망가려 했던 적도 있었다 / 흙투성이 바닥에 팽개쳐진 그 얼굴 거둬와 / 사과 깎아 먹인 적도 있었다”(〈만유인력〉)고 고백하는 것이 아닐까.

사진 : 이창주글쓴이 장석주님은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고, 같은 해 동아일보에 문학평론이 입선되어 시인과 문학평론가의 길을 함께 걸어온 사람이다. 그동안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붉디 붉은 호랑이》, 《절벽》 등의 시집을 내고, 《20세기 한국문학의 모험》(전 5권) 등 50여 권의 책을 냈다. 지금은 국악방송에서 생방송 <장석주의 문화사랑방>을 진행하고 있다.


2009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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