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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Mar 09. 2020

26. 우물 안 개구리

누에가 시계에 달라붙어 시간을 갉아 먹는 소리 들린다


 낮에는 온통 사마천만을 생각했다...
궁형을 자청했던 중년의 사내
 이릉을 변호하다 사형을 언도받고
 돈이 없어 궁형을 당하는 사내
(예나 지금이나 돈이 목숨을 구한다)



거기를 실로 묶을 때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거기가 없어지고 잠실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뽕잎 갉아먹는 누에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릉은 또한 사마천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음압병실로 파견근무 간다는 간호사 딸에게
 스물다섯 번째 생일에 갓김치만 보낸다는
 갓꽃 피는 3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오 마이 갓, 사마천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심장은 시한폭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잠 속으로 들어가 나는 비로소 살기 시작한다


 나의 무대는 역시 평면이 아니고 9층 이었다
 황룡사 9층탑을 닮은 무대였다 
 월정사 9층탑을 닮은 무대였다
 황룡사 9층탑 같은 고민사(高旻寺) 천중탑(天中塔)
목탑인지 전탑인지 석탑인지 잘 알 수 없지만
 하여간 9층이라는 사실이 나에게는 중요했다


 나는 공연 감독이고 배우이고 관객이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건물 바깥쪽에서 공연을 하였다
 난간을 오르면서 공연을 하였다 
 비의 공연이라고 하였다 
 관객들도 함께 따라서 올라오면서 보았다
 관객과 배우가 따로 없었다 늘 살아있었다
 하지만 옥상으로 가는 길이 없었다
 다시 내려오며 공연은 펼쳐졌고  오토바이도
 관객들도 함께 지하실까지 내려가 공연하였다


 공연장은 층마다 다른 인생이 펼쳐졌고
 관객들도 함께 온 몸이 달이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공연은 9층을 지나 옥상으로 이어졌고
 우리들은 모두가 황룡이 되어 하늘까지 올라갔다
 아, 나는 그렇게 꿈 속에서 비로소 삶을 살고있다


 나의 시한폭탄이 오늘도 째깍째깍 나를 먹는다


 아침에 일어나 울음소리 찾아보니
 물통에 빠진 개구리 한 마리 나를 빤히 쳐다본다
 물 속 하늘과 함께 자세히 보니 한 쪽 눈이 아프다





사기(史記)의 탄생


동양 역사서의 근간이자 인간학의 보고(寶庫)


사기 - 동양 역사서의 근간이자 인간학의 보고(寶庫)



동양뿐 아니라 세계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사기(史記)]는 사성(史聖) 사마천(司馬遷)이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의 유언에 따라 완성한 역사서로, 전설 상의 황제(黃帝) 시대부터 자신이 살았던 한 무제(漢武帝) 때까지 2000여 년을 다루었다. 특히 주나라가 붕괴되면서 등장한 제후국 50개 가운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전국칠웅(戰國七雄), 즉 진(秦)을 비롯한 한(韓)ㆍ위(魏)ㆍ제(齊)ㆍ초(楚)ㆍ연(燕)ㆍ조(趙) 등의 흥망성쇠 과정을 주축으로 한 인물 중심의 통사다. 역사 속에 명멸해 간 제왕과 제후 그리고 수많은 인물들과 각국의 생존사가 [사기]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춘추전국시대를 정점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려온 상고(上古) 시대는 역사상 가장 치열한 생존싸움이 서려 있었고, 그 아래에서 펼쳐진 개개인들의 힘겨운 삶은 [사기] 곳곳에 각인되어 있다. 역사상 많은 지식인들이 이 책을 인간의 본질을 가장 날카롭게 파헤친 인간학의 보고(寶庫)라고 보는 이유이다.


[사기]는 중국 고대사를 사관에 입각해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이는 사마천 개인이 보여 준 불세출의 통찰력과 날카로운 안목에 힘입은 바가 크다. [사기]는 ‘기전체’라는 형식에 바탕을 둔 정확한 기술과 투철한 역사관으로 동양 역사 서술의 기본이 되는 책일 뿐 아니라, 행간 행간에 작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문학서이자 학문의 전 분야를 아우른 백과전서이다. 이러한 [사기]는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고려사]도 기전체로 쓰였다.


[사기]의 쉼 없는 생명력의 원천은 처절한 인간적 고뇌를 통해 이루어진 산물이라는 데 있다. 사마천이 [사기]의 완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것은, 그것이 깊은 절망의 늪에 빠진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세에서 받은 치욕과 오명을 사후의 언제라도 씻어 버릴 수 있다고 믿었던 그였기에 모든 것을 [사기]의 완성에 내걸었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



[사기]는 다른 역사서들과는 달리 국가가 아닌 개인의 노력으로 탄생한 대작으로서, 저자 사마천의 삶과 [사기]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명나라 때의 백과사전 삼재도회(三才圖會)에 실린 사마천의 모습.




사마천의 출생 시점에 관해서는 설이 분분한데 대체적으로 한 경제(漢景帝) 중원(中元) 5년인 기원전 145년에 태어났다고 본다. 자는 자장(子長)이며 용문(龍門,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한성시(韓城市))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한 무제 때 사관인 태사령(太史令)에 임명된 역사가였다. 사마천은 아버지가 받들었던 황로(黃老) 사상의 영향을 받아 성장하면서 천문과 지리, [주역] 및 음양의 원리 등을 어깨너머로 배우기도 했다. 그러다 10살 때 아버지를 따라 수도인 장안(長安)에 오면서 새로운 세계에 더욱 눈을 뜨게 된다.


사마천은 스무 살 때인 한 무제 원삭 3년(기원전 126년)부터 3년 가까이 전국을 유람하여 오늘날의 호남성, 강서성, 절강성, 강소성, 산동성, 하남성 등을 두루 돌아다녔다. 이때의 유람은 훗날 [사기]의 현장성을 높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돌아오고 나서 20대 후반까지는 경학대사인 공안국(孔安國)에게 고문을 배워 유학에 대한 식견도 쌓았다. 청나라 학자 왕국유(王國維)의 고증에 의하면 바로 무제 원수(元狩) 5년(기원전 118년), 나이 스물여덟에 사마천은 낭중(郎中)이 되었다. 낭중은 한나라 관료 체계에서 낮은 등급에 속했는데도 한 무제는 순행(巡幸- 임금이 나라 안을 살피기 위해 돌아다님)과 봉선(封禪- 중국의 천자가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던 일) 의식에 사마천을 데리고 다녔으니 사마천이 무제의 총애를 상당히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원봉(元封) 원년(기원전 110년) 사마천의 나이 서른여섯이 되던 해, 한 무제는 동쪽 태산에 봉선 의식을 거행하러 순행했는데, 그를 수행하던 태사령 사마담이 낙수에서 병으로 쓰러졌다. 그때 사마천은 무제의 사신으로 파촉 이남 지역에 새로운 군(郡) 설치 문제를 처리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위독해진 아버지 사마담은 사마천에게 유언을 남겼으니 그 핵심은 역사를 집필하라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사마천은 원봉 3년(기원전108년)에 아버지의 대를 이어 태사령이 되니 이때 그의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사마천이 태사령이 된 지 5년 후 한 무제는 태초력(太初曆)이라는 새로운 역법을 발표하고 연호를 바꾸고는 봉선 의식에 참여하게 되는데, 대개 이 무렵 그가 [사기] 집필을 시작했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그가 [사기]를 온전히 혼자 힘으로 저술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아버지 사마담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미 [사기]의 체계를 어느 정도 세워 두었고, 서른일곱 편 정도는 이미 거의 완성 단계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은 본래 [사기]를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불렀으니, 이는 태사공이 지은 책이란 의미로서 아버지에 대한 존칭을 드러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었음을 보였다.




사마천의 고향인 중국 섬서성(陝西省) 한성시(韓城市)에 있는 사마천 동상




그런데 사마천은 한 무제의 눈 밖에 나면서 크나큰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천한(天漢) 2년(기원전 99년) 한나라의 장수 이릉(李陵)이 군대를 이끌고 흉노와 싸우다가 흉노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두고 이씨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한나라 조정의 체면도 깎아내린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마천만은 그의 투항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이릉을 변호하여 결국 무제의 노여움을 사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 중 하나였다. 첫째, 법에 따라 주살될 것, 둘째, 돈 오십만 전을 내고 죽음을 면할 것, 셋째, 궁형을 감수할 것. 사마천은 두 번째 방법을 취하고 싶었으나 중인(中人)에 불과했던 그가 그런 거액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결국 마지막 것을 선택했다. 목숨만이라도 부지하여, 역사서를 쓰라는 부친의 유지를 받들기를 택한 것이다.


궁형의 처절한 고통을 체험한 사마천은 한 무제에 대한 원망을 [사기] 전편에 스며들게 했고,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을 통해 역사란 결코 왕후장상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다. 후에 무제에 의해 중서령(中書令)을 제수 받아 다시 무제의 곁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이때 [사기] 저술 작업은 상당히 진척된 상태였다. 사마천이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를 쓴 기원전 91년경에는 [사기]가 거의 마무리되었으니, 아버지의 유언을 받든 지 20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이었다.


사마천의 가족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많지는 않다. 같은 마을 출신의 아내 양씨(楊氏)가 있다고 전해지며 사마천이 겪어온 길을 함께 동고동락한 현명한 조력자였다고 한다. 아내 이외에 첩도 한 명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마림(司馬臨)과 사마관(司馬觀)이라는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사마천이 죽은 시기도 불분명한데, [사기]를 집필하고 나서 바로 그 해 혹은 그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사기]라는 명칭의 유래



‘사기(史記)’라는 글자는 [사기] 중 [주 본기(周本紀)], [십이 제후 연표(十二諸侯年表)], [천관서(天官書)], [진섭 세가(陳涉世家)], [공자 세가(孔子世家)], [유림 열전(儒林列傳)] 등에 등장한다. 여기서 ‘사기’는 춘추전국시대 각국의 ‘사관의 기록’이라는 의미와 한대의 문장학(文章學)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을 일컫는 [사기]라는 명칭은 사마천이 붙인 것이 아니다.

[사기]의 후기 격인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사마천이 “무릇 130편에 52만 6500자이니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한다.”라고 밝혔듯, 본래 [사기]는 ‘태사공서’ 또는 ‘태사공기(太史公記)’라고 일컬어졌다. 이 ‘태사공기(太史公記)’의 약칭이 바로 ‘사기(史記)’다. 위(魏)나라 건안(建安) 연간에 순열(荀悅)이 지은 [한기(漢紀)]라는 책의 권30에 ‘태사공사마천사기(太史公司馬遷史記)’라는 구절이 등장함으로써 정식으로 ‘사기’라는 말이 ‘태사공서’라는 명칭을 대체하게 되었으니, 사마천이 세상을 떠난 지 대략 30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사기]의 집필 과정



[사기] 집필을 가능케 한 사마천의 자료 취재 범위는 어떠하며 그는 그러한 방대한 자료들을 어떻게 얻은 것인가? 사마천이 사료를 수집하여 그의 책에 반영한 방식은 그 이전과 그 이후 대부분의 역사가들의 작업과는 달랐다. 그가 사료를 채집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사마천이 자료로 참고한 ‘태산석각’ 탁본의 일부




① 사마천은 황가에 소장되어 있는 도서나 문서를 열람했다. 예를 들어 [오제본기]의 ‘태사공왈(太史公曰)’에서는 [춘추(春秋)], [국어(國語)] 등 자신이 본 도서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사기] 전체에서 언급된 참고 도서를 통계 내 보면 사마천이 열람한 책은 모두 103종이며, 그 중에서 육경(六經)을 비롯한 서적이 24종, 제자백가서가 52종, 역사ㆍ지리 및 한나라 왕실의 문서가 20종, 문학서가 7종이다. 따라서 사마천이 문헌과 전적에 대해서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다.


② 금석문(金石文)과 문물(文物), 회화(繪畫), 건축 등에서 자료를 찾았다. [진시황 본기]를 보면, ‘태산석각(泰山石刻)’, ‘낭야석각(琅邪石刻)’, ‘지부석각(之罘石刻)’ 등의 글을 모두 그대로 수록했다.


③ 돌아다니며 방문하거나 실지 조사를 했다. [태사공자서]에도 사마천이 스무 살 남짓부터 남쪽으로 유람하는 길에 올랐다고 적혀 있다. 그는 동서남북으로 전국을 유람하면서 상고 역사에 관한 전설을 수집했고, 서주 건국 경영의 상황을 탐구했으며 학자들이 그에게 전해 준 오류도 바로잡았다. 그는 전국 시대의 이야기, 한나라 초기의 이야기, 옛 전쟁터의 형세, 역사 인물의 삽화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는 일반 백성의 말이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중시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사기]의 모든 편에 걸쳐 나타난다. 예를 들어, [오제 본기]와 [주 본기]를 보면 본인이 실지 답사를 통해 얻은 구체적 정보가 생동감 있게 살아 있다.




2010년 개봉한 중국영화 <조씨고아>는 [조 세가]의 조씨고아 이야기를 극화한 원나라 희곡을 바탕으로 영화화한 것이다.




그러나 [사기]에 사료적 엄밀성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많은데, 서술이나 인물 설정에 있어 소설적 색채를 가미했다는 것이다. 대표적 예로 [조 세가(趙世家)]를 들 수 있다. 이 편은 네 명의 군주가 꾼 꿈을 통해 조나라 발전사를 서술하는데, 사마천이 주로 의지했던 [좌전(左傳)]이나 [전국책(戰國策)]에는 없는 내용들도 수록되어 있다. 특히 널리 알려진 ‘조씨고아(趙氏孤兒)’에 관한 대목은 역사적 사실과는 부합되지 않지만, 이 편의 백미라고 할 만큼 상당한 비중으로 서술되어 있다. [육국 연표(六國年表)] 서문에서 진나라가 분서를 단행하면서 모든 사료들이 소실되었다고 언급한 데서 보이듯, 역사가 제대로 보존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소설적 구성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태사공왈(太史公曰)’이라는 부분을 보면 사마천 자신의 주관적 감정이나 생각이 상당 부분 개입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론(史論) 체계가 사마천의 책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좌전], [국어], [전국책] 등에도 ‘군자왈’이라는 말이 있으며, ‘군자위(君子謂)’라든지 ‘군자이위(君子以爲)’라는 식의 논평이 84가지나 있다. 이러한 형식의 평론은 사론(史論)의 원형임에 틀림없고 사마천이 ‘태사공왈’이라고 한 것도 [좌전]의 ‘군자왈’을 모방한 것으로 생각된다. ‘태사공왈’에서 사마천은 고대 역사에서 증거를 찾아 제시하거나 사적을 유람하면서 얻어들은 것을 서술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인물을 포폄(褒貶- 옳고 그름이나 선악을 판단하여 결정함)하기도 하고 또는 역사적 사실을 풍자하기도 했다. 이렇듯 역사가의 존재가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태사공왈’은 [사기]를 읽는 진정한 묘미를 주며, 역사가의 일관된 평가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책 전체를 혼연일체가 되게 만드는 매개의 구실을 한다.


주목할 점은 사마천의 생애와 집필 시기가 한 무제의 통치 시기와 겹쳐 있다는 사실이다. [사기]는 당시로는 현대사라고 말할 수 있는 무제 시대의 사건과 인물을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한 무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황제이고 사마천 자신은 그의 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사 기록은 무제와 그의 치세를 비판적으로 그려내는 일과 연관되었으며, 여기에는 사마천 개인이 무제에 대한 사적인 감정도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21) 김경주, <무릎의 문양>

(《기담》, 문학과지성사, 2008)

청년 랭보를 닮은 재기 발랄한 시인

글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1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것이어서
 저녁에 무릎을 내려놓으면
 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돌아온다

 누군가 내 무릎 위에 잠시 누워 있다가
 해골이 된 한 마리 소를 끌어안고 잠든 적도 있다
 누군가의 무릎 한쪽을 잊기 위해서도
 나는 저녁의 모든 무릎을 향해 눈먼 소처럼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다

“내가 당신에게서 무릎 하나를 얻어오는 동안 이 생은 가고 있습니다
 무릎에 대해서 당신과 내가 하나의 문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서 잊혀질 뻔한 희미함을 살 밖으로 몇 번이고 떠오르게
 했다가 이제 그 무릎의 이름이 당신의 무릎 속에서 흐르는 대기로
 불러야 하는 것을 압니다 요컨대 무릎이 닮아서 사랑을 하려는
 새들은 서로의 몸을 침으로 적셔주며 헝겊 속에서 인간이 됩니다
 무릎이 닮아서 안 된다면 이 시간과는 근친 아닙니다”

2
그의 무릎을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잊혀진 문명의 반도 같았다
 구절역 계단 사이,
검은 멍으로 한 마리의 무릎이 들어와 있었다
 바지를 벌리고 빠져나온 무릎은 살 속에서 솟은 섬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무릎을 안고 잠들면서
 몸이 시간 위에 펼쳐 놓은 공간 중 가장 섬세한 파문의 문양을
 지상에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무릎으로 내려오던 그 저녁들은 당신이 무릎 속에 숨긴
 마을이라는 것을 압니다 혼자 앉아 모과를 주무르듯 그 마을을
 주물러주는 동안 새들은 제 눈을 찌르고 당신의 몸속 무수한 적도(赤道)
들을 날아다닙니다 당신의 무릎에 물이 차오르는 동안만 들려옵니다
 당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바람의 귀가 물을 흘리고 있는 소리가”

3
무릎이 말을 걸어오는 시간이 되면
 사람은 시간의 관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햇빛 좋은 날
 늙은 노모와 무릎을 걷어올리고 마당에 앉아 있어본다
 노모는 내 무릎을 주물러주면서
 전화 좀 자주 하라며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다
 그 무렵 새들은 자주 가지에 앉아 무릎을 핥고 있었다
 그 무릎 속으로 가라앉는 모든 연약함에 대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음절을 답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서 나눈 무릎의 문명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생은 시간과의 혈연에 다름 아닐진대 그것은 당신이 무릎을
 안고 잠들던 그 위에 내리는 눈 같은 것이 아닐는지 지금은 제 무릎
 속에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나는 무릎의 근친입니다”


〈무릎의 문양〉을 읽는다. 시인의 화법에 따르면,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 살을 맴도는 자리”, “잊혀진 문명의 반도”다. 〈무릎의 문양〉은 무릎에 관한 시가 아니라 무릎이라는 음성기호가 발화되는 순간 불러일으키는 섬광, 혹은 “무릎 속으로 가라앉는 모든 연약함”, 그 희미한 이미지들에 관한 시다. 무릎은 신체의 일부이며, 무릎과 아무런 의미론적 관련이 없는 그 무엇들에 대한 기호다. 당신과 나무와 시간에게 그 무릎이 있다. 이 무릎은 무릎의 내포를 가졌지만 그 외연은 우리가 아는 그 무릎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는 저녁의 모든 무릎을 향해 눈먼 뼈처럼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다”는 구절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릎은 당신, 당신 안에 있는 짐승 - “그래, 누구나 자신과 가장 가까운 짐승 한 마리 / 앓다 가는 거지”(〈짐승을 토하고 죽는 식물이거나 식물을 토하고 죽는 짐승이거나〉) - 이고, 죄책감이며, 사람이 아닌 다양체이고, 의미가 고갈된 의미의 껍데기이며, 시인이 ‘무릎’이란 언어체 속에 불러 모으고 싶은 그 모든 무엇이다. 그것이 하나의 의미라면 이 시는 영원히 요령부득인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김경주의 “무릎”에 가려면 언어에 대한 관습적 이해에서 나와야 한다. “무릎”의 문자적 전언을 버리고 상징적 전언을 읽어야 한다. 그 “무릎”의 명시적 의미의 기표는 무릎이 내포로 품은 명시적 기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로지 무릎이라는 다양체들을 대체하는 우연한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는 개념과 청각 인상의 총체다.
소쉬르는 개념에는 기의(Se), 청각 인상에는 기표(Sa)라는 용어로 분리해서 쓴다. 이때 Se와 Sa 사이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기호가 본질적으로 자의적 산물이라 하더라도 화자나 청자가 자기 입맛대로 언어를 만들어 쓸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기의(Se)와 기표(Sa) 둘 사이에 아무런 유사성 없이 단지 언어공동체의 관습이나 사회적 약속에 따라 설정된 것임을 말한다. 그러니까 “무릎”은 무릎이 아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무릎 하나를 얻어오는 동안 이 생은 가고 있습니다”라는 구절을 다시 “무릎”이라는, 당신이 알고 있는 언표에 기대어 읽으려고 한다면 또다시 당신은 소통 불능이라는 벽과 마주친다.
당신은 이 구절을 읽기 위해 다시 “무릎”으로 돌아와야 한다. “무릎”은 최소의미 단위의 ‘무릎’이라는 어휘에서 애초의 언표를 지워 낸 무릎이다.

신체의 한 부분을 지시하는 이 어휘는 기호의 장에서 새로운 약호로 튕겨져 나온다. 하나의 사물을 지시하는 의미체가 아니다. 무릎은 리얼리티를 버리고 추상화의 영역으로 빨려 들어가 다양성이라는 몸을 갖는다. “당신의 무릎으로 내려오던 그 저녁들은 당신이 무릎 속에 숨긴 마을이라는 것을 압니다”라는 모호한 구절은 당신에게 무릎이 있다는 최소한도의 전제 하에 성립한다. 무릎에 관한 독자의 경험은 중요한 이해의 변수다. 그런 맥락에서 시인이 의미의 1차적 생산자이지만 독자는 의미의 2차적 생산자이다. 이 구절을 산문으로 풀면, 당신에게 무릎이 있고, 저녁들은 그 무릎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그 저녁들은 무릎 속에 숨긴 마을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안다, 라고 읽을 수 있다.

〈무릎의 문양〉은 차라리 저녁의 무릎들에 관한 시, 당신과 내가 일군 무릎의 문명에 관한 시다.
너무나 사소한 무릎은 그 모든 저녁들과 문명과 당신과의 사랑을, 아니 그 기억들을 불러오는 우연한 기호다. 이 시는 역설적으로 무릎이라는 기호가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무릎에 관한 시다. 무릎은 “살속에 숨은 섬”이며, 제 무릎을 안고 잠드는 사람은 “몸이 시간 위에 펼쳐 놓은 공간 중 가장 섬세한 파문의 문양을 / 지상에 드러”낸다. 이 문양은 무엇인가. 기어코 몸으로 살아낸 삶의 흔적이 아닌가.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서 나눈 무릎의 문명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생은 시간과의 혈연에 다름 아닐진대 그것은 당신이 무릎을 안고 잠들던 그 위에 내리는 눈 같은 것이 아닐는지 지금은 제무릎 속에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나는 무릎의 근친입니다”

나는 이 구절을 이렇게 읽는다. 당신은 무릎을 안고 잠든다, 그 위에 눈이 내린다, 그것은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서 나눈 무릎의 문명이다, 지금 내 무릎에도 눈이 내린다, 내 무릎에도 눈이 내리기 때문에 나는 틀림없는 무릎의 근친이다. 나는 타자의 타자고, 내 무릎은 타자의 무릎의 타자다. 저녁의 무릎들은 다 안녕한가? 내 무릎이 안녕하다면 모든 저녁의 무릎은 다 안녕할 것이다. 시인은 무릎의 문명 안에 묶인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의 무릎에도 눈이 내리고 있는가.


김경주(1976~ )는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서른이 넘은 그의 얼굴에는 퇴거하지 않은 스무 살의 동정(童貞)과 고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하다. 시와 연극, 그리고 갖가지 인디문화를 넘나드는 재기 발랄한 시인이다.

갑자기 키만 훌쩍 커 버린 사춘기 소년 같은 신체에 내장된 무진장의 에너지로 그는 그 모든 작업들을 능히 감당해 낸다.

김경주에게서 청년 랭보를 연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방랑의 봉헌물로 바친 발이 날개라면 생은 물신과 망상이 교접하는 난바다와 같은 이 세상을 떠 가는 한 척의 ‘취한 배’다.

시집 《기담》은 연극의 형식을 빌려 온다.

시집 전체가 3막으로 이루어진 한 편의 정교하게 꾸민 언어극이다. 시집 안에 때와 공간과 등장인물과 암전과 자막과 연출의 변이 있다.

심지어는 시집 안에 ‘흡연 구역’조차 숨어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시를 낯설게 하는 장치다.

의도적으로 기표와 기의의 부조화를 꾀하면서 시를 시와 먼 것, 가능한 한 이질적인 요소들로 무장한 채 그것을 비시(非詩) 쪽으로 한껏 밀어붙인다. 여기서 생겨나는 것은 피상적 의미 작용에서 멀어짐이고, 그 효과는 시와 독자 사이의 서먹함, 이질감, 불편함이다. 아울러 소통의 최소화, 시의 정서적 환기력 반감시키기라는 효과가 생겨난다.

김경주의 시적 수사학은 언어와 그 내포적 의미의 불화 위에서 세워진다.

김경주는 시라는 이름의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해 불가능의 상자를 던져 주고 독자의 반응을 살핀다. 김경주의 언어 실험은 그 투철함이 첫 시집보다 더 단단해졌다.

그리하여 《기담》은 언어를 소통불능의 기호로 만들고 그 기호로 낯선 풍경을 그려 낸다.

글쓴이 장석주님은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고, 같은 해 동아일보에 문학평론이 입선되어 시인과 문학평론가의 길을 함께 걸어온 사람이다. 그동안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붉디 붉은 호랑이》, 《절벽》 등의 시집을 내고, 《20세기 한국문학의 모험》(전 5권) 등 50여 권의 책을 냈다. 지금은 국악방송에서 생방송 <장석주의 문화사랑방>을 진행하고 있다. 

2009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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