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것들을 생방송으로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전쟁도 생방송으로 볼 수 있고
재앙도 생방송으로 볼 수 있는 시대에
우리들은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옛날보다 얼마나 더 행복하게 살 고 있을까
2
수국을 보면 언제나
어머니의 파마머리가 생각났다
그런데
새 잎이 돋아나는 봄에까지
떨어지지 않고 있는
수국꽃을 보니
축 쳐진 수국꽃들이
축 늘어진 어머니 젖가슴 같다는
그런 생각이 달라붙는다
나의 어머니에게도
가슴 빵빵했던 시절이 있었으리라
샘가에서 어머니 등목을 해드리며 보았던
축 늘어진 가슴이 아니고
나 어릴 적
나에게 물렸던 젖가슴이 있었으리라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빵빵했던 젖가슴이 있었으리라
등록 :2020-03-05 18:26수정 :2020-03-06 02:08
세상 풍경이 너무도 생경하다. 늘 시끌벅적하던 도심에서도, 시장에서도 사람들이 사라졌다. 버스, 지하철의 승객도 현저히 줄었고, 거리의 행인들도 모두 마스크로 얼굴을 꼭꼭 감싼 채 빠른 걸음을 옮기고 있다. 조용한 동네 산책길에서도 사람들의 행동이 이상해졌다. 타인의 출현에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며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식당, 카페, 쇼핑몰, 영화관, 공연장을 포함한 거의 모든 공공장소들이 끔찍하리만치 적막해졌다. 늘 개방돼 있던 학교 운동장들도 일제히 닫혀버렸다.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라고 소문난 한국인들의 일상생활이 이토록 가라앉아버리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하기는 한국만 이런 게 아니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이란, 이탈리아, 일본,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우려가 있는 곳은 어디서든 비슷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뉴욕에서도 레스토랑에 손님이 끊어졌다는 소식이 들리고, 세계적인 관광 명소들이 폐쇄된 이탈리아에서는 식료품점의 파스타가 동나고, 심지어 마스크 한장을 구하는 데도 50~60유로라는 고액을 치러야 할 형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한국은 예외적으로 나쁜 경우가 아닌 모양이다(존스홉킨스대학의 한 연구소가 작년 10월에 발표한 ‘2019년도 세계보건안전성 지표’라는 것을 보면, 195개국 중 한국은 세계적 유행병에 대응할 준비가 가장 잘되어 있는 최상위 10개국에 속해 있다. 이 10개국에 포함된 비서구 국가는 타이(6위)와 한국(9위)뿐이고, 이탈리아도 독일도 여기에 들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한국의 코로나 사태가 이렇게 악화된 것은 물론 ‘신천지’ 탓이 크다. 하지만 ‘신천지’도 결국은 피해자이다. 이 점을 잊고 그들을 손쉬운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면, 그것은 매우 우둔한 짓이다).
돌이켜보면, ‘사스’나 ‘메르스’가 유행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바이러스에 실제로 감염된 사람들은 논외로 하고, 보통의 생활인들이 행하고 있는 이 ‘자가 격리’에는 좀 과도한 측면이 있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의료계의 견해로는 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감염력이 강하기는 하지만 치사율도 그리 높지 않고, 대부분은 가벼운 증세를 유발할 뿐이라는데, 왜 우리는 이토록 공포에 질려 있을까. 그러나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일절 중단된 이 상황을 우리가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아마도 오래가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 지금은 버티고 있겠지만, 사태가 장기화되면 어떻게 될까. 심각한 경기침체로 인한 시련 이외에도, 장기간의 고립에 따른 우울증이나 스트레스 등, 정신적 고통의 광범한 확산이라는 또 다른 큰 재난을 우리는 겪어야 할지 모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번의 코로나 사태는 어떻든 종료되는 날이 오겠지만, 이와 같은 신종 바이러스들은 앞으로 더욱더 빈번히 창궐할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사태의 근본적 원인으로 과학자들이 지목하는 현상, 즉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서식지를 잃은 야생동물들이 인간사회 가까이로 접근해올 확률은 매우 높고, 그 과정에서 야생동물과 인간의 접촉을 통해서 바이러스들이 인체로 건너오는 현상이 더욱 빈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끊임없이 출현할 신종 병원체들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즉 항구적인 비상상황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생태계가 광범하게 파손된 상황에서는 바이러스만 인간을 괴롭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기후변화에 의한 가공할 재난들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갈수록 극성스러워지는 홍수, 태풍, 가뭄, 기근, 물 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생물종의 대량 멸종 사태에 따른 재앙 등등, 생각만 해도 끔찍한 지뢰밭들이 우리 모두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 아직도 기후위기라고 하면 기껏 에어컨이나 전기 자동차를 떠올리는 도시인들이 적지 않지만, 이제는 자동차의 유리창에 부딪히는 곤충들마저 확연히 줄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면서 막연하게나마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작년 7월 이후 전례 없이 혹심한 산불로 대재난에 봉착했던 오스트레일리아(호주)는 최근 쏟아진 대량의 비 덕분에 전면적 참화는 모면했다. 그 산불로 인해 원시림을 포함한 호주의 광대한 삼림지대가 잿더미가 되고, 토착민들의 삶터가 붕괴되고, 10억 마리가 넘는 동물들이 목숨을 잃었다. 생태계의 균형이 돌이킬 수 없이 깨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아름답고 평화로운 경관으로 명성이 높았던 이 나라의 생존의 자연적 토대는 엄청난 손상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뉴욕 타임스>의 최근 르포기사에 의하면, 지금 호주인들 중에는 이 끔찍한 사태를 통해서 그동안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던’ 기후변화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는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할 때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즉, 화석연료를 그만두고 재생 에너지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하는 것은 물론, 종래의 온갖 제도와 관행 그리고 생활방식과 사고습관의 근본적 전환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휴가라면 으레 항공여행이나 크루즈 따위를 생각하는 습관을 버리고, 사람이 행복하게 산다는 게 과연 무엇인지 깊이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끔찍한 재난을 겪고 난 호주인들이 지금 생각하는 것은 정치·경제적 변혁과 동시에 더욱 근원적인 변혁, 말하자면 ‘문화혁명’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깨달음은 왜 꼭 처참한 비극을 겪은 다음에야 오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호주인들의 이 통절한 깨달음에 담긴 메시지는 인류사회 전체를 위해 시사해주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제임스 쿤슬러라는 미국의 작가가 쓴 <장기 비상상황>(2005, 번역본은 <장기비상시대>·2011)이라는 책이 있다. 이것은 현대문명이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있는 한, 급진적인 전환 없이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 인류는 적어도 수백년 이상 ‘비상상황’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상세히 논증하고 있는 책이다. 쿤슬러의 예견은 별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선구적인 생태사상가들이 줄곧 해왔던 이야기다. 다만 이 책은 좀 더 과감하게 발언하고, 종합적인 그림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는데, 저자는 우리가 비록 늦었다고 생각될지라도 시골의 작은 공동체들로 돌아가 자립성을 기를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생각에 공감을 하든 않든, 우리가 냉정히 인정해야 할 것은 온갖 정황으로 봐서 우리는 지금 장기적인 비상상황에 이미 들어섰다는 사실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이 갑갑한 상황은 그 신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김종철 ㅣ <녹색평론> 발행인
열에 들떠 끙끙 앓게 하는 전갈글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봉투를 열자 전갈이 기어 나왔다
나는 전갈에 물렸다
소식에 물렸다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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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나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빙그레 웃곤 하였다
축축한 그늘 속 아기버섯도 웃었다 곰팡이들도 따라 웃었다
근사하고 잘생긴 한 소식에 물려 내 몸이 붓고 열에 들떠 끙끙 앓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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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당신이 내게 등이 푸른 지독한 전갈을 보냈으니
그 봉투를 그득 채울 답을 가져오라 했음을 알겠다
긴 여름을 다 허비해서라도
사루비아 씨앗을 담아 오라 했음을 알겠다
〈전갈〉을 읽어 보자. 봉투를 열자 전갈이 기어 나온다. 시의 화자는 그 전갈에 물렸다. 소식/독충이라는 전갈의 동음이의어에 착안한 말놀이다. 체험의 깊이보다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싱그러운 시다. 여기 아닌 저기에 있는 “당신(은) 내게 등이 푸른 지독한 전갈”을 보낸다. 누가 사랑을 숭고하다고 하는가? 나는 전갈에 물린다. 전갈/소식이 무는 것이라면, 사랑은 그 본질에서 무는 것이고, 물리는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재난이다. 당신은 여기가 아닌 저기의 시간, 내가 겪지 않은 무한한 시간을 전갈로 보낸다. 나는 그 전갈을 통해 여기가 아닌 저기의 무한한 시간을 살며 전갈의 볼모가 된다. 사랑에 대한 정열은 기꺼이 누군가의 볼모가 된다는 것이다. 그 볼모가 된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게 혼자 빙그레 웃곤” 하는 것이고, “근사하고 잘생긴 한 소식에 물려 내 몸이 붓고 열에 들떠 끙끙 앓”는 것이다. 사랑은 나 혼자서는 얻을 수 없는 타자를 통한 기쁨이며, 열망이고, 꿈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사랑으로부터 자기를 닫아 버릴 수 있다. 사랑의 정열은 곧 저를 억압하는 정열이며, 그것이 아닌 모든 것을 거부하는 힘이다.
나는 류인서의 〈전갈〉을 사랑의 시로 읽는다. 사랑에는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갖고 주의 깊이 바라보는 타자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사랑은 내 안의 본질적인 결여인 타자에 대한 의존이다. 사랑은 언제나 타자라는 표적이 필요하다. 내가 타자를, 혹은 타자가 나를 보는 것에서 사랑은 시작한다. 본다는 것만으로도 근본적 변화가 일어난다. 타자의 시선이 내게 날아와 꽂힐 때 나의 투명함, 나의 타고난 존재의 형질은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타자의 시선 아래에서 나는 새로운 자아를 갖고 태어난다. 사랑은 타자에게 저를 내주는 것이며, 그 이타적 헌신과 동시에 타자의 욕망 속에서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타자는 뚫어질 듯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骨髓(골수)를 다 먹어 치운다.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여인들이 헛된 사랑의 미혹에 빠져 제 존재의 가능성을 탕진해 버리는가! 훔쳐 가기만 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여인들은 마침내 저를 잃고 이내 시들어 버린다. 그런 까닭에 사르트르는 “타인은 나의 존재를 훔쳐가는 사람인 동시에, 나의 존재라고 하는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사랑은 먼저 타자의 얼굴로 나타난다. 얼굴은 주체의 속성을 모으고 집약하고, 자아가 출현하는 표면이다. 나는 타자의 얼굴에 나타난 이방성에 경의와 찬사를 바친다. 사랑은 타자의 이방성이 출현하는 “얼굴에 대한 신앙”(알렝 핑켈크로트)이다. 그런데 정작 그 얼굴은 그 신앙으로부터, 그 밖에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난다. 끝없이 달아나기 때문에 사랑은 붙잡을 수 없다. 달아나기 때문에 영원히 내안의 부재로 남고,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소유했다고 믿는 ‘얼굴’은 강박증적 집착과 욕망이 만들어 낸 착각일 뿐이다. 타자는 소유할 수가 없고, 오직 환대만이 가능하다. 붙잡힌 ‘얼굴’은 주인의 재산에 지나지 않는 노예의 얼굴이다. 그것은 주인의 動産(동산)의 일부이고, 소유 품목 중의 하나다. 사랑하는 얼굴은 붙잡을 수 없는 현존이다. 그것은 놓아 주면 돌아오고, 붙잡으면 달아나는 그 무엇이다.
나는 류인서의 〈전갈〉을 사랑의 존재 방식에 대한 탐구로 읽는다. 시의 화자는 홀로 웃는다.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시의 화자는 새끼 밴 암소와 같이 사랑을 잉태한다. 타자는 얼굴을 내밀지 않고, 멀리서 전갈/소식만을 보낸다. 그동안 나의 샘은 마르고 꽃들은 진다. 사랑의 그늘 아래에 웅크린 나는 멀리서부터 오는 그 전갈/소식에 쏘인다. 전갈/소식은 타자에게서 내게로 오는 것이다. 타자는 발신자고, 나는 수신자다. 타자는 영원히 부재의 현존이다. 사랑은 침입자의 무리와 같이 갑자기 들이닥치지만, 사랑하는 타자는 부재의 현존으로만 저를 드러낸다. 함께 있을 때는 저를 드러낼 이유가 없기 때문에 드러내지 않는다. 여기에 부재하는 타자는 저기에서 내게 전갈/소식으로 나를 조종한다. 나의 피동성은 무덤 안의 부장품처럼 확고해진다. 사랑하는 자는 유령 같은 타자의 목소리에 조종을 받으며, 웃는 자, 사루비아 씨앗을 준비하는 자다. 사랑하는 것은 “최고의 수동성이고, 모든 피난처를 버리고 자기를 드러내서 몸을 바친 후 항복하는 것”(알렝 핑켈크로트)이다. 시의 마지막 구절을 곰곰이 읽어 보라. “긴 여름을 다 허비해서라도 / 사루비아 씨앗을 담아 오라 했음을 알겠다”. 사랑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제 존재를 탕진하는 것이다. 탕진된 나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타자에게 물리고, 마침내 타자의 배(腹) 속으로 떨어진다. 그 지옥으로, 웃으며, 자발적으로. 그게 사랑의 비극이고, 사랑의 역설이다.
류인서(1960~ )는 대구에서 태어났다. 2001년 계간 <시와 시학>에 〈꽃 진 자리〉 등 여섯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20대에 등단한 시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문단에 나온 셈이다. 40대 후반을 막 넘어서 50대로 들어서는 이즈막에 류인서는 두 번째 시집 《여우》를 냈다. 첫 시집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2005)를 낸 지 네 해만이다. 그의 시는 “백 개의 눈 백 개의 혀를 가진 꽃”(<알리바이>)이다. 기억의 영지에 파릇하게 돋은 이야기들을 품은 이 시들은 낯설고 기이하고 아름답다. 시인은 민담·설화·동화·영화·소설의 젖을 빨고 그 자양분으로 상상세계를 꽃피운다. 거기서 얼음접시, 물배꼽, 유리구두, 접시거미, 그늘하숙, 울음더위, 종이거울, 그늘나비, 고담시, 세상의 동쪽 끝방, 깜빡죽음 저 나라, 구름 난전들이 주르륵 쏟아진다. 삶의 지루함과 비루함을 견디려는 유희 본능이 빚은 것들. 시인은 누추한 기억들, 그 천일 야화에 상상의 도금을 입힌다. 그것은 “추억의 봉합사로 감쪽같이 꿰매 붙여 다시없는 변종품으로 세간”에 내놓는 것, “일종의 도굴 프로젝트”이자 “일종의 연금술”(〈추억 마케팅〉)이다.
시인은 “세상 가득 떠다니는 글자들의 파편”(〈몽상을 찢다〉)을 모아 몽상을 꽃피우고, 사물들 “사이에서 넘쳐흐르는 낯선 세계의 즐거운 멜로디”(〈사물의 말〉)를 연주한다.
그의 시들은 푸른 수염의 거인에게 붙잡혀 가 돌아오지 않은 처녀들의 노래, 그 “세상의 동쪽 끝방”에서 부르는 슬픈아리아다(〈처녀들의 램프〉).
사진 : 김선아
글쓴이 장석주님은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고, 같은 해 동아일보에 문학평론이 입선되어 시인과 문학평론가의 길을 함께 걸어온 사람이다. 그동안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붉디 붉은 호랑이》, 《절벽》 등의 시집을 내고, 《20세기 한국문학의 모험》(전 5권) 등 50여 권의 책을 냈다. 지금은 국악방송에서 생방송 <장석주의 문화사랑방>을 진행하고 있다.
2009년 0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