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제주도

제주도, 길이 보인다 12

― 서귀포의 마음

by 강산




제주도, 길이 보인다 12

― 서귀포의 마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이중섭로 29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동 512-1

여기에서 이중섭 가족은 1년을 살았단다

1951년 1월부터 12월까지 살았다 한다

1951년 1월이면, 6·25 전쟁 1·4 후퇴

아, 그 어려운 시기에 여기에서 살았구나

이중섭에게는 여기가 바로 천국이었구나

1.4평의 아주 작은 방 한 칸이 천국이구나

그 방을 빌려준 사람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모두가 어려운 시기에 마음을 내어준 사람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이 시인의 마음 아닐까

시인의 따뜻함이 바로 서귀포의 마음 아닐까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방 한 칸 내어주는

그런 서귀포의 마음으로 함께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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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거주지 www.visitjeju.ne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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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거주지는 이중섭이 서귀포로 피난을 와서 정착한 곳이다. 집주인이었던 송태주, 김순복 부부는 이중섭 가족에게 4.6㎡(1.4평) 정도의 아주 작은 방 한 칸을 내주었습니다. 성인 한 명이 눕기도 비좁은 공간이었지만, 이중섭 가족의 추억이 담긴 장소이자 이중섭 화백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또한 일대 거리는 이중섭 거리로 지정, 천재 화가 이중섭의 그림에 대한 열정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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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구석구석

이중섭 거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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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불운한 시대의 천재화가, 미친듯한 필치로 역동적인 모습을 화폭에 담으면서 화풍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이중섭.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그의 41년 생애만 보더라도 불우한 예술가의 생애를 살다 갔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의 작품 대부분이 빈곤했던 그의 생애가 마감된 이후에야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고 명작의 대열에 올라서는 것을 보면 이런 것 또한 아이러니한 예술의 본질이 아닌가 한다. 화가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태어났다. 지주의 아들로서 어렸을 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청년기에는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기도 하면서 그의 기질을 펼쳐나갔다. 하지만 6.25 전쟁은 그에게 고난과 빈곤의 삶의 시작이었다. 1951년 동란기에 이중섭은 삶과 예술의 자유를 찾아 남하, 제주 서귀포로 향한다. "서귀포가 더 좋소, 서귀포 칠십리에 물새가 운다는 노래도 있지 않소. 임자는 그리 가오"라는 낭만적인 권유가 그를 자극했다고 하지만, 그것도 잠깐, 제주도에서 1년이 채 못되어 부산으로 돌아와 겪게 되는 가족과의 이별. 이후로 그는 더욱더 파란만장하고 곤궁했던 삶을 살다가 급기야는 정신이상 증세와 영양실조, 마침내 1956년 불우한 삶을 마감하고 영면에 들어갔다.

그의 생애를 보면 한마디로 파란과 불운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 나타나는 힘과 역동적인 움직임은 이러한 역경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그 자신의 내면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편, 파란 게와 아이들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의 작품은 그가 제주 서귀포에 머무를 때 남긴 것으로 서귀포의 아름다운 풍경과 넉넉한 인심 등을 소재로 한 목가적인 작품들이다. 사실 제주에 도착해 여러 날을 걸어서 도착한 서귀포에서조차도 생계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불행했던 가족사 중 이곳에서의 1년은 행복했던 한 때가 아니었나 싶다. 특히 <파란 게와 아이들은 그의 두 아들과 숱하게 잡아먹었던 게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그렸다는 점이 재미있다. 이후 제주도를 떠난 후의 작품에서도 그 절을 그린 그림이 많은 것을 보면, 짧은 기간 그의 서귀포 체류는 대향 이중섭의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제주 서귀포시에서는 천재화가 이중섭과 그의 작품세계를 기리기 위해 그가 잠시 살다 간 서귀포 정방동 거주지를 당시 모습으로 복원, 정비하고 정방동 매일시장 입구부터 솔동산까지 360m를 '이중섭 거리'로 지정하여 그의 서귀포 체류 시절을 기념하고 있다. 1995년 11월 이중섭 거주지기념표석이 세워졌고, 이듬해 2월 말 그가 자주 거닐곤 했던 길가는「이중섭 거리」로,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97년 4월 그가 기거했던 집과 부속건물을 복원, 정리하여「이중섭 거주지」와 그의 호 "대향"을 따라서「대향전시실」로 꾸며 놓고 소개하게 되었다. 이로써 제주 서귀포시의「이중섭 거리」는 한국 최초로 화가의 이름이 붙여진 거리가 되었으며, 더불어 매년 10월 말 그의 사망주기에 맞추어 "이중섭 예술제"를 이곳에서 거행, 그의 예술혼을 기리는 행사를 하고 있다. 이중섭과 그의 가족 4명이 기거했던 방은 1.3평 정도의 아주협소한 공간으로 명성에 비하여 얼마나 그의 인생이 초라했고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전시실은 8평 남짓한 공간에 그의 서귀포 생활이 담긴 작품을 중심으로 서귀포의 추억물고기 등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담배 은박지에 그린 은지화 작품으로 6.25 전쟁 후 생활고로 인한 그림재료의 열악함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흥미 있는 사실은 당시 이중섭에게 세를 준 할머니가 아직까지 그 거주지에서 살고 있다는 점이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삶을 산 예술가 이중섭은 이미 떠나고 없다. 다만 잠깐이나마 그가 머물렀던 이곳 서귀포에서 그의 그림과 삶의 흔적들을 둘러보면서 그의 예술관을 느껴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더불어 화가 이중섭의 인간적인 내면의 모습까지도 그려볼 수 있다면 남쪽 멀리 여기 제주까지 내려온 예술기행에 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 화가’ 이중섭 부인이자 뮤즈 ‘이남덕’ 별세

등록 2022-08-30 20:17 수정 2022-09-01 11:38


일본문화학원 후배 야마모토 마사코
1945년 원산서 결혼… 제주 피난살이
1953년 일본서 남편과 마지막 1주일
두 아들 키우며 평생 홀로… 향년 101



2012년 11월 1일 제주도를 방문해 남편 이중섭이 생전에 쓰던 팔레트를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에 기증한 야마모토 마사코. 다산책방 제공


황소 그림과 은지화로 유명한 ‘국민화가' 이중섭(1916~1956)의 일본인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사진)가 최근 일본에서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전해졌다. 향년 101. 고인과 계속 연락해 온 전은자 제주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학예사는 일본 도쿄에서 살아온 야마모토 여사가 지난 13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유족들이 보낸 전자우편을 통해 확인했다고 30일 언론에 밝혔다. 그는 “장례식은 지난 18일 도쿄 세타가야 교회에서 가족들만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라고 전했다. 고인은 1921년생으로 이중섭보다 다섯 살 아래다. 1938년 이중섭이 유학 중이던 일본 문화학원 미술과에 입학하면서 선후배로 만나 함께 작업을 같이하며 연인이 됐다. 1940~41년 연인 시절 이중섭이 야마모토 여사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보낸 수십여 통의 ‘그림엽서'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이건희컬렉션특별전: 이중섭’ 전에서 선보이고 있기도 하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이중섭’에 나온 그림 편지. 개인전을 앞둔 1954년 11월 이중섭이 일본에 있는 부인 이남덕에게 보낸 것이다. 부인과 두 아들을 붓질하며 그리는 작가 모습이나 서로 얼싸안은 가족 모습을 그려 넣었다. ‘우리 가족과 선량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진실로 새로운 표현을, 위대한 표현을 계속할 것’이란 다짐의 글도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이중섭’에 나온 그림 편지. 개인전을 앞둔 1954년 11월 이중섭이 부인 이남덕에게 보낸 것이다. 부인과 두 아들을 붓질하며 그리는 작가 모습이나 서로 얼싸안은 가족 모습을 그려 넣었다. ‘우리 가족과 선량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진실로 새로운 표현을, 위대한 표현을 계속할 것’이란 다짐의 글도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고인은 1945년 일제의 패전 직전 배를 타고 부산에 들어와 원산에서 이중섭과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결혼 직후 이중섭은 고인에게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란 뜻의 이남덕(李南德)이란 한국 이름을 새로 지어줬다. 이후 아들 태현과 태성을 낳아 기르면서 한국전쟁 피난시절까지 가족의 생계를 떠안았고 남편의 유화, 은지화 등의 단골 모델이 되면서 이중섭 사후 작가의 ‘뮤즈’로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

1945년 5월 함경남도 원산에서 전통혼례를 올린 이중섭(오른쪽)과 야마모토 마사코. 이중섭미술관 제공


야마모토 여사는 1952년 부친이 숨지자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고, 1953년 7월 도쿄로 찾아온 이중섭과 일주일간 함께 지낸 것을 마지막으로 영영 이별하게 된다. 이중섭이 1956년 영양실조 등으로 무연고자가 되어 요절한 뒤 그는 재혼하지 않고 두 아들과 함께 살아왔다. 고인은 2012년 한국을 방문해 남편이 생전 쓰던 팔레트를 이중섭미술관이 있는 제주 서귀포시에 기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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