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보냅니다 06
지금의 수준이 가장 바람직한 폭과 깊이,
무엇보다도 오늘의 수다스러운 시세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상과 표현의 압축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수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바람이었다. 한 시도 가만히 앉아서 쉬어보지 않았다. 나는 책상에 앉아서 쓰는 시는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손으로 쓰는 시가 아니라 발로 쓰는 시가 진짜 시라고 생각했다.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홀로 싸돌아다녔다. 바람처럼 싸돌아다니는 날파람둥이였다. 나는 여천시 쌍봉동에서 살았다. 하지만 나는 여천시를 벗어나 주로 여수시 쪽을 돌아다녔다. 물론 나름대로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여천 쪽도 많이 돌아다녔다. 한하운 시인처럼 문둥병(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산다는 신풍애양원을 비롯하여 사화복지법인 시설이었던 동백원도 자주 들락거렸다. 그리고 소호동 바닷가를 비롯하여 소라면 바닷가를 많이 걸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께서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선소마을과 날마다 찾아가던 바닷가의 언덕 또한 나의 산책코스였다.
회사에 가지 않고 쉬는 날에는 주로 여수시로 나갔다. 그 먼 길을 걸어서 다녔다. 그 당시에는 길이 좀 단순했다. 여천시에서 여수시에 가려면 윗길과 아랫길이 있었다. 나는 주로 윗길로 가서 아랫길로 돌아왔다. 버스 노선도 윗길로 가서 아랫길로 돌아오는 노선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버스를 타지 않고 주로 걸어서 돌아다녔다. 그렇게 나는 밤새도록 걸어 다니곤 하였다. 숨이 차서 한꺼번에 걸을 수 없으니 자꾸만 쉬면서 다녀야만 하였다. 내가 주로 다니는 곳은 여수항과 서시장 그리고 여수역과 자산공원이었다. 그리고 여수어항단지와 돌산대교 등도 부지런히 싸돌아다녔다.
회색 바바리코트를 입고 밤낮없이 여수항 부근에 나타나서 자꾸만 무엇인가 메모를 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다니는 바람에 나는 간첩으로 오인받아 파출소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때 나는 철저히 미쳐 있었다.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그렇게 길에서 시를 찾아 헤매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홀로 쓴 시들을 모아 월간지와 계간지에 동시에 투고를 하였다. 월간지에서 먼저 발표하였다. 나는 그렇게 비로소 시인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는 너무 몰랐었다. 시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시인의 길이 얼마나 험한 길인지 미처 알지 못했었다. 월간지 신인상 발표가 있은 뒤 계간지에서도 연락이 왔다. 계간지에도 신인상에 당선되었으나 이미 월간지에 당선되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당선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우리나라 문단 상황에 대하여 지금만큼만 알았다면 나는 아마 월간지가 아니고 계간지 신인상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어떻게든 시인만 되면 다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시인만 되면 원고청탁이 줄을 이을 줄로 알고 있었다. 시인은 그저 시만 쓰면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문단활동이나 인간관계가 따로 있지 않아도 그저 시인만 되면 무조건 시만 쓰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특히 나처럼 지방에서 홀로 시만 쓰는 시인에게는 그런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나는 시 쓰는 방법만 알았지 진짜 시인이 되는 길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곧 실망하고 말았다. 그 당시 문학사상에서는 상패도 주지 않았다. 지금은 바뀌어서 상패도 주고 그러는 모양인데 그 당시에는 상패도 없고 시상식도 따로 없었다. 그래도 문학사상 신인상은 문단에서 꽤 전통도 있고 권위가 있는 등용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 당시에 그런 것들에 대하여 너무 모른 상태에서 그저 실망만 하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결심했다. 신인상 정도로는 나에게 관심이 없으니 이번에는 시집을 한 권 내야겠다, 라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동안 쓴 시들을 모아 시집을 발행하려고 준비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하고 당돌한 생각이었다. 시인으로 등단하고 1년도 되지 않아서 시집을 내겠다는 생각을 감히 할 수 있었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문단을 너무 몰랐고 몰라서 오히려 용감할 수 있었다.
나는 홀로 정리한 시집 원고를 가방에 넣고 문학사상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때까지도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한국문단의 상황이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문학사상 사무실에 가서 인사를 하고 차를 한 잔 마시고 나는 그냥 나왔다. 나는 말주변이 없어서 시집 이야기는 한 마디 꺼내보지도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때 시집 이야기를 꺼냈다면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얼마나 웃음이 나올 일인가. 신인상 당선되고 1년도 안된 놈이 불쑥 찾아와서 시집을 내달라고 떼를 쓴다고 생각해 보면 참으로 당돌한 놈이 아닌가.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는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걸으며 어깨가 축 처지고 있었다. 참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타자를 쳐서 나름대로 시집을 만들었는데 시집 이야기를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돌아오는 내 모습이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컴퓨터가 없는 시절이어서 타자기로 원고 정리를 하였다.) 여수에서 서울까지 그 먼 길을 일부러 찾아갔으면서도 정작 다른 일로 왔다가 잠시 들렀다고 둘러대는 나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그렇게 기운이 빠져서 털레털레 길을 걷고 있는데 길가 가판대의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신문에 신춘문예 응모 광고가 실려 있었다. 나는 그 신문을 1부 사서 여수로 돌아왔다. 어차피 버려질 원고였는데 차라리 신춘문예에 응모라도 해보자. 그래서 나는 시집 원고 표지만 바꾸어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게 되었다. 물론 기존에 발표한 몇 편의 시들은 당연히 빼고 보냈다.
아마도 신춘문예 사상 이런 응모자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런 심사평도 이례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같은 해 동아일보에 응모했던 다른 분들께 좀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이렇듯 생뚱맞게 응모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좋은 시인이 탄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또한 최종심에 올랐던 다른 분들의 심사평 한 줄 없었으니 내가 많이 야속했을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심사평 ― 두 심사위원은 별다른 이견 없이 배진성 씨를 당선 시인으로 정하는 데 합의하였다. 그는 두 권 정도의 시집이 될 만한 작품을 투고하였다. 오히려 어려움은 이 많은 작품 가운데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하느냐 하는 데 있었다. 결국 ‘길이 있는 풍경’과 ‘밤하늘은 반란이다’ 두 편을 골랐지만, 이 선정은 필연성이 있는 것이라고 자부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는 것은 배진성 씨의 작품이, 많은 작품 수에도 불구하고, 매우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의 시는 오늘의 범람하고 몽롱하고 막연한 서정시나 비분강개의 시의 언어에 비하여 괄목할 만한 탄탄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의 시가 오늘의 현실 ―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거기에 서정이나 판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느낌과 판단에도 흐릿함이 있고 탄탄함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수가 많은 만큼 또 고른 수준의 것인 만큼 그의 시가 믿을 만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수준의 한계가 이미 다 드러나 버린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지금의 수준이 가장 바람직한 폭과 깊이, 무엇보다도 오늘의 수다스러운 시세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상과 표현의 압축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심사위원 / 김우창, 신경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