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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Nov 23. 2023

정방폭포 3

― 나의 정방폭포는 너무 길다



정방폭포 3

― 나의 정방폭포는 너무 길다




나의 정방폭포는 너무 길다

나는 늘 욕심으로 망한다

정방폭포만 그리지 못하고

하늘과 한라산과 바다까지

끝도 없이 길게 늘어놓는다

나의 정방폭포도 이제는 꼭

정방폭포 하나만 남겨두고

미련 없이 싹 지워야만 한다


그래도 뿌리는 있어야 할까


윤동주와 송몽규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바닷물 주사를 맞았다는데

태평양은 지금도

하늘의 주사를 맞고 있다

아니다

다시 한번, 더 생각하니

하늘에 주사하기 위하여

태평양 주사기에

알 수 없는 주사약을

오래도록, 길게

빨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새로운 길 / 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 내일도 ······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1938년 5월 10일



1. 윤동주 시 '새로운 길' 읽기

 
새로운 길
 - 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가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 내일도 ······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윤동주 시집」(권일송 편저, 청목문화사)

 
8·15 해방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우리가 참으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윤동주 시인님(1917~1945)이 돌아가셨습니다. '독립운동'이라는 죄명으로 수감되었던 후쿠오카 형무소 안에서 말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만 27세 2개월이었습니다. 푸르른 소나무처럼 형형한 청년이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 형무소에 수감된 지 1년도 안 되어 그렇게 허망하게 절명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부친 윤영석 님과 당숙 윤영춘 님이 윤동주 시인님의 시신을 인도하러 후쿠오카 형무소에 갔을 때, 함께 수감되어 있던 윤동주 시인님의 사촌 송몽규 님으로부터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합니다. 윤동주 시인님의 유해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고향으로 돌아와 북간도 용정 동산(東山)의 중앙교회의 교회 묘지에 묻혔습니다.
 

2. 22세 청년 윤동주가 쓴 다짐의 시

 
오늘 만나는 시 '새로운 길'은 어떤 사연을 가진 시일까요?
 
만주 명동 땅에 있던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한 윤동주 시인님은 연희전문학교 입학시험 때 서울 나들이를 처음 했다고 합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 입학시험은 매우 어려웠다고 합니다. 국내에는 남자 인문계 전문학교로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해 북간도의 연희전문학교 문과 합격생은 윤동주 시인님과 그의 사촌 송몽규 시인님 둘 뿐이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행복했던 시간이었을까요?
 
특히 그때 연희전문학교에는 국문법의 대가 외솔 최현배 님을 비롯, 명수필 '신록예찬'의 이양하 님, 한국사의 정인보 님, 한국민속학 개척자 손진태 님 등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청년 윤동주 님의 가슴은 얼마나 설렜을까요?  


'새로운 길'은 이때 탄생했습니다. 윤동주 시인님이 22세 때인 1938년 5월 10일에 쓰인 것입니다. 그해 4월 9일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니 입학하고 한 달쯤 뒤네요. 그렇게 공부하고 싶었던 학교의 기숙사 방에서 미래에 대한 설렘을 누르며 만년필에 청색 잉크를 가득 채운 뒤 '새로운 길'의 시상을 원고지에 옮기는 청년 윤동주 님의 필기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나의 길 새로운 길

- 윤동주 시 '새로운 길' 중에서

 
항상 새로운 길을 가리라!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러하리라. 그렇게 다짐하는 새내기 윤동주 님의 각오가 느껴집니다. 말이나 행동에 거짓과 과장이 없고 언제나 조용한 성품이었던 그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울려 나오는 목소리였을 것입니다. 거짓 없고 과장 없는 마음의 우물에서 솟은 맑고 깨끗한 찬물 같은 다짐이었을 것입니다.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 오늘도 ······ 내일도 ······

- 윤동주 시 '새로운 길' 중에서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이라고 합니다. 남들이 간 길을 답습해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고 내일도 새로운 길을 지향하리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씩씩하고 호방한 기상으로 시작됐던 연희전문학교 문과 4년의 시간은, 일제 통치의 말기적 징후의 공포와 좌절 속에서도 그나마 윤동주 시인님의 27년 2개월이라는 짧은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윤동주 시 '새로운 길' 중에서 


3. 그의 장례식에서 낭독되었던 시

 
윤동주 시인님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1941년 12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윤동주 시인님은 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이던 1943년 7월 14일 독립운동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1944년 3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습니다. 그리고 수감 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45년 2월 16일 통탄스럽게도 옥사하고 말았습니다.
 
윤동주 시인님의 장례식은 북간도 용정 그의 집 앞뜰에서 거행되었는데(1945년 3월 6일), 그때 자신의 시 '우물 속의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낭독되었습니다. 봄 햇살 같았던 청춘이 언제나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사람이 되리라 다짐하며 썼던 봄 햇살 같았던 시가 시인의 장례식에서 낭독되어야 했던 이 기막힌 시간을 어찌해야 하는지요.
 
그의 장례식 장면이 찍힌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보아온 사각모를 쓴 윤동주 시인님의 사진이 담긴 영정을 둘러싸고 일가친지 20여 명이 서서 우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진입니다. 그들의 눈빛은 슬프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화나고 너무나 억울한 눈빛이었습니다. 그들은 78년의 시간을 넘어와 오늘의 우리를 향해, 이 시대를 향해 묻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하고요, 과연 그대는 '새로운 길'을 열어가고 있는가 하고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시집이라면은 평생 사본 적이 없는 분이라도 귀에 익도록 들어보셨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정시 바로 윤동주의 서시 중 한 구절입니다. 해마다 우리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꼽을 만큼 아름다운 시를 남긴 윤동주. 그런데 지금까지 형무소에서 옥사한 것으로만 알려진 그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의 죽음에 얽힌 의문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먼저 태평양 전쟁 말기 격동의 세월 조선인 청년 윤동주가 어떻게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까지 가게 됐는지 시간을 거슬러 생전에 그를 만나 보겠습니다. 



시인의 여동생, 그녀의 마지막 고향 여행 

지난 3일, 무더위가 한창인 북간도 용정 땅에서 올해 86살의 윤혜원 여사를 만났다. 그녀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윤동주의 여동생이며, 유일하게 살아있는 형제이다. 1년에 한 번은 고향땅인 중국 용정 땅을 찾는 윤혜원 여사, 그러나 이번 방문은 다른 때와는 다르다. 건강이 좋지 않은 그녀에게 이번 여행은 마지막 고향 방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빠 윤동주 시인의 묘 앞에 설 때마다 그녀는 오빠의 사망 소식을 접하던 64년 전 그날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버지가 오빠 시체를 가지러 갔을 때, 일본인 간수가 말하기를 하루만 늦게 왔어도 시체를 실험용으로 가져갔을 거라고 했대요.’ 하지만 가족들 누구도 오빠의 사망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아직도 오빠가 왜 죽어야만 했는지 궁금하다. 


일본, 윤동주를 기억하다. 

일본 교토의 거리에서 서명을 받느라 열심인 주부 곤타니 씨, 그녀가 받으려는 서명은 윤동주가 죽기 전 마지막 머물렀던 교토에 윤동주 기념비를 세우자는 것이다. 윤동주 시에 감명받은 그녀는 욘사마 배용준 보다 윤동주를 더 좋아한다고 말한다. ‘윤동주의 고향을 찾는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도쿄의 가와이 씨,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한국어를 공부하는 이유는 윤동주 시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다. 일본 곳곳에서 윤동주의 시를 읽고, 윤동주의 생애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일본 교과서에는 윤동주와 관련된 글도 실려 있다. 60여 년 전, 27살의 나이로 일본 땅에서 조선인을 일본인들이 기억하고 아껴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왜 윤동주를 기억하려고 하는 것일까? 



흔적을 찾는 사람들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42년 일본 유학길을 떠난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43년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윤동주가 일본에서 보낸 3년간의 행적에 대해선 기록을 찾기 어렵다. 그의 학적부와 성적표, 그리고 판결문만이 그가 보낸 시간을 말해준다. 윤동주가 일본에서 쓴 시도 고작 5편만 발견되었다. 이런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윤동주의 행적과 자료를 찾아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도쿄에 사는 야나기하라 씨는 릿교 대학시절 윤동주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내 세상에 알렸다. 동지사 대학의 우지고 교수는 윤동주 체포와 재판에 관련된 자료를 계속 찾고 있다. 윤동주 전집을 일본어로 최초 번역한 이부끼 고씨는 윤동주의 죽음에 관한 글을 자신의 번역 시집에 남겼다. 그들이 찾은 윤동주의 흔적은 무엇일까? 


유학생 윤동주는 왜 형무소에 수감되었나

1943년 초여름, 일본 교토 우지강 공원으로 동지사 대학의 영문과 동기들과 소풍을 갔던 윤동주는 건강한 20대 청년이었다. 그곳에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던 모리타 씨는 윤동주를 친절하고 멋있던 학생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날 우지강 아마가세 구름다리에서 찍은 사진은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소풍 한 달 후인 7월 14일,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윤동주는 일본 경찰에 붙잡혀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다. 그리고 1945년 2월 16일, 만 27살의 나이로 숨졌다. 운동과 산책을 즐기던 건강한 학생, 그런 젊은이가 수감된 지 1년 만에 절명한 일은 의혹을 남겼다. 그는 도대체 무슨 죄로 경찰에 붙잡혔으며, 실형 판결을 받았을까? 또한, 시인 윤동주가 죽음을 맞이한 후쿠오카 형무소는 어떤 곳이었으며,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시인 윤동주, 그 죽음의 미스터리를 밝힌다

시인 윤동주는 왜, 어떻게 죽어갔을까? 27살 조선 청년의 죽음에 밝혀진 것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그의 시체를 찾으러 갔던 가족들의 증언은 그의 죽음을 푸는 실마리가 되고 있다. 1945년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러 후쿠오카 형무소에 갔던 당숙 윤영춘은 당시 윤동주와 함께 잡혔던 송몽규를 면회했다. 그때 송몽규가 ‘저 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 윤영춘의 증언이다. 송몽규 또한 한 달 뒤 숨졌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형무소에서 맞게 한 주사’는 두 사람의 죽음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름 모를 주사... 후쿠오카 형무소를 둘러싼 이상한 사건들

그런데, 취재 중 윤동주가 당했다는 생체실험에 대해 구체적인 증언을 들려준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일본인 문학 평론가인 고노 에이지씨다. 그는, 윤동주가 맞았던 ‘이름 모를 주사’는 당시 규슈제대에서 실험하고 있던 혈장 대용 생리식염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근거는 있는 것일까? 또, 혈장 대용 생리식염수는 무엇이었을까? 취재진은 미국 국회 도서관에서 요코하마 전범 재판 기록을 확인했는데 여기에는 일제강점기 생체실험에 관한 재판 기록이 남아있다. 그중에는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제대에서 실시한 미군 대상 생체실험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었다. 규슈제대는 바닷물을 이용해 생체실험을 했다는데, 과연 그 실험과 윤동주의 죽음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지금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윤동주의 시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쓰여집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는 비켜 가지 않았습니다.





이듬해부터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이 극에 달했고. 일본 유학을 위한 도항증(渡航證)을 얻기 위해서 창씨개명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남긴 참회록에는 당시의 고뇌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문만 열면 태평양이다




정방폭포 서()

― 다시 시작하는 순례



<4·3과 평화> 여름의 얼굴이 된 정방폭포

상처가 깊을수록 많은 눈물을 쏟아서 더욱 하얗다

새하얀 무명천이 하늘에서 끝없이 내려온다

무명천 할머니께서 수의를 만들고 계시는지

만가(輓歌)처럼 베 짜는 소리도 함께 들린다


얼굴 안쪽에 그늘처럼 흑백사진 한 장이 숨어있다

수용소로 사용되었던 전분공장과 창고들이 보이고

멀리, 목호(牧胡)들의 범섬까지 뚜렷하게 보인다

물빛과 무명천은 여전히 하얗고

발을 담그고 세수도 하였을 것만 같은 여울물소리


더 이상 발을 디딜 수 없는 노래는 비명(悲鳴)이 된다

길을 잃고 느닷없이 단애(斷崖) 아래로 떨어진 사람들

서귀, 중문, 남원, 안덕, 대정, 표선, 한라산 남쪽 사람들

태평양을 헤매다가 75년 만에 작은 집으로 돌아온다


불로장생을 꿈꾸며 불로초를 찾아왔던 서복이 머문 곳

지금도 대궐 같은 집에서 불로초를 가꾸고 있는 곳

불로초 공원에 만든 그 작은 공간으로 돌아오는 영혼들

타고난 제 삶도 끝까지 살지 못하고 벼락처럼 떠나버린

그 많은 정방폭포의 사람들

광풍에 느닷없이 길이 끊어져 허공에 발을 딛고 

한꺼번에 바다로 추락해 버린 목숨들, 오늘도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바다에서 길을 찾고 있는 사람들


그중의 한 사람을 따라서 긴 순례를 다시 시작한다



* 정방폭포는 한라산 남쪽 최대의 학살터였다. 200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75년 만인 2023년 5월에 비로소 서복불로초공원 한쪽에 작은 4·3 희생자 위령공간이 마련되었다.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윤동주




* 정방폭포에서 베틀소리가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만가(輓歌) 소리도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아우성소리가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자장가소리도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원자폭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일본이 항복하는 소리 들린다.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대한민국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에 윤동주와 송몽규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었다. 그전에 이육사도 감옥에서 죽었다. 해방은 원자폭탄처럼 떨어졌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던 원자폭탄의 위력은 제주도까지 휘몰아쳤다. 해방에서부터 한국전쟁까지 제주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아니, 어떻게 죽었을까? 산에서 죽고 바다에서 죽고 감옥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왜 돌아오지 못했을까? 윤동주와 송몽규는 시체라도 돌려받았는데, 어찌하여 제주도 사람들은, 대전 골령골에 암매장이 되거나 어느 깊은 바다에 수장이 되고 말았을까.


왜 제주도의 폭포는 남쪽에만 있을까? 자세히 살펴보니, 북쪽의 폭포들은 낮은 포복으로 기어 오고 있었다. 윤동주 시인이 요즘 시인이라면 어떤 시를 쓰고 있을까? 나는 윤동주 시인을 생각하며 나의 꿈과 나의 삶과 나의 문학을 처음부터 다시 한번 점검하며 순례를 떠난다. 윤동주의 거울 하나 들고서 순례를 다시 시작한다.


"하늘을 보지 못해서 부끄럼이 너무 많구나! 나는 지금껏 죽어가는 것들을 얼마나 사랑했을까? 나는 이제라도 나한테 주어진 길이 아니라,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길을 찾아서 걸어가고 싶다. 오늘 밤에도 나의 별은 잠들지 못하고 추위에 떨고 있구나."



1. 25세의 청년 윤동주가 쓴 '서시'


지금 저는 '서시'의 육필 원고를 보고 있습니다. 200자 원고지에 검은색 잉크로 한 자씩 또박또박 세로로 글자를 쓰고 있는 청년 윤동주의 고요한 숨결이 느껴지는 것만 같습니다. 마치 하늘의 별을 보려 까치발을 한 듯, 글자는 길쭉하고 세로획들이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네요.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윤동주의 삶과 문학」(고운기 지음, 산하) 중에서


2. '서시'로 들어가는 열쇳말은 '별'


그는 1941년 어느 날, 자신의 첫 시집에 들어갈 시 18편을 고르고 그 앞에 '서시'의 원고를 쓴 뒤 서명처럼 '1941. 11. 20.'이라고 썼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는 원래 제목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시집 맨 앞에 들어갈 서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서문이 그의 사후 시집이 나오면서 '서시'로 탄생했습니다.

서문은 시집 전체를 아우르는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시인 자신의 문학과 삶을 응축적으로 보여주고, 시집에 든 낱낱의 시들을 하나의 큰 주제 아래로 모여들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서문을 수필 쓰듯 붓 가는 대로 쓴 때문인지 '서시'는 막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글 속에는 누구보다 절망적인 당대를 살다 간 시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높은 도덕성을 지향하는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염결 한 자세가 스며 있습니다.


저는 '서시'를 읽고 윤동주 시인님이 이 시에 '별'을 열쇳말로 심어두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에 있는 '별'의 역할에 주목하면 시 속으로 즐겁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 '별이 바람에 스친다.'라는 구절이 있지요? 이 두 구절의 모호성 때문에 '서시'의 아우라가 넓어지기도 하고, 그래서 더욱 독자들의 애를 태우게도 합니다.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독일 철학자 임마뉴엘 칸트의 묘비명을 아시는지요?


Two things awe me most, the starry sky above me and the moral law within me.

나를 가장 경외심에 들게 하는 두 가지, 내 위의 별 총총한 밤하늘과 내 안의 도덕률.


밤하늘의 별들은 어쩌면 그리도 조화로울까요?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 숭고해지려는 도덕률이 인간 안에 있다는 것 또한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칸트는 이 분명한 두 가지가 자신에게 가장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고 하네요. 별들의 조화롭고 화려한 운행처럼 인간을 품격 있고 인간답게 만드는 도덕률이 우리 내면에 빛나고 있습니다. 하늘의 질서가 땅 위 인간의 내면에 그대로 연결되어 있네요. 이 무변광대함 속에 내재한 이 어김없는 자연의 법칙!  


윤동주 시인님의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이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별의 운행처럼 엄정한 내 속의 도덕률을 상기하며 존엄한 인격을 가꾸고 지키면서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런 마음은 쉬이 잊히는 마음이어서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면서 그런 나의 다짐을 일깨워주는군요. 공자의 '중성공지(衆星共之)'도 떠오릅니다. '모든 별들이(衆星) 북극성(之:북극성 지칭)을 에워싸듯(共) 한다'는 뜻입니다. 덕(德)이 있으면 가만히 그 자리에 있어도 사람들이 그를 향한다는 말입니다. '서시'를 통해 언제나 높은 도덕성을 지향하며 살아가고자 했던 윤동주 시인님의 순정한 삶의 자세를 배우고 싶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운동주 서시 중에서


3. 못다 쓴 시 보려 밤하늘을 올려다보다


윤동주 시인님을 앗아간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 형무소 앞을 찾아가 본 적이 있습니다. 규슈의 하늘은 흐렸고 우리 일행의 마음도 낮게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밖에서 보이던 철창살의 어느 방에서 그는 겨우 29세에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서시'가 쓰인 지 4년 후였습니다. 우리 일행은 높은 담벼락을 따라 형무소 건물을 한 바퀴 돌면서 그의 '서시'를 속으로 되뇌면서 그를 그리워했습니다.

그가 못다 쓴 많은 시들, 별처럼 빛났을 시들이 보고 싶어 깜깜하고 차가운 하늘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는 밤입니다.


https://interestingtopicofconversation.tistory.com/114

https://brunch.co.kr/@yeardo/1585



정방폭포 1

― 노인성이 유숙하는 섬



서귀포는 어디라도 문만 열면 태평양이다


서귀포혁신도시에서 중문관광단지까지

이어도 길을 걷다가 태평양으로 간다

설문대할망의 막내아들을 만나러 간다

남극노인성이 유숙하는 이어도로 간다


바다에서 해(海)를 본다 물이 아프다

인간들의 욕망이 낳은 쓰레기들의 섬

썩지도 않는 플라스틱 욕망들의 얼굴,


바다 해(海) 글자를 더 자세히 본다

어머니가 보인다 어머니가 아프다

아픈 어머니에게 방사능 오염수까지 먹인다

태평양의 수평선이 트로이목마를 끌고 온다

북극곰의 신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바다와 하늘이 함께 뜨거워지고 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막내아들이

뜨거운 어머니 이마에 물수건을 올린다

유숙하던 노인성도 곁에서 돕는다

서천꽃밭 꽃감관도 불사화를 가져온다


용궁으로 가는 올레에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노랫소리 들려온다 하늘에는 서천꽃밭이 있고 땅에는 마고성이 있고 바다에는 이어도가 있다


어머니를 살리려고 노인성과 꽃감관도 떠나지 못한다



* 2003년에 태어난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가 성인이 되었다

* 인간들의 욕망은 바다에 쓰레기섬을 만들고 핵폐기물도 버린다

* 서귀포시 도로명주소에 '이어도로'가 있다




병원 /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1940년 12월


* 사실 윤동주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이 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제는 이 시 제목처럼 '병원'이었다고 한다. 윤동주의 사후에 고이 보관해 왔던 시들을 모아 세상에 내놓은 지인 정병욱은 당시의 그의 말을 이렇게 회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 인지 후에 시집의 제목은 우리가 익히 아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되어 출간되었다. (내가 홀로 추측해 보건대, 윤동주 시인은 아마도 처음에는 <병원>이라는 제목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마지막으로 서시를 쓰면서 책 제목을 바꾸지 않았을까 생각을 한다. 책 제목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서시의 핵심 단어들을 나열해 놓은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즉,  책의 제목은 서시의 키워드만 뽑아서 나열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병원입니다. 지금은 어디가 가장 아픈 곳일까. 지금은 우리들의 어머니인 지구가 가장 아픈 병원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지금, 우리 시대에 우리들과 함께 살아있다면 아마도 아픈 지구를 먼저 노래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늙은 의사는 아직도 젊은이의 병을 모릅니다."



18. 윤동주 문학관 (brunch.co.kr)

정방폭포 1 (brunch.co.kr)




정방폭포 2

 ― 잃어버린 마을에서 보내는 선물




오늘은 동광리 무등이왓으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날

3년째 오늘은 정방폭포 수박령(水縛霊)들 고향 가는 날

나도 따라서 육거리 헛묘 지나 무등이왓으로 가는 날

무등 타고 놀던 아이들 대신 지박령(地縛霊)들만 사는 곳

아랫마을 간장리 사람들과 예술가들이 함께 모여드는 날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 빈 집터에 조를 함께 심는 날

영귀소리에 불려 나온 조릿대밭 영혼들 술 한 잔 받는 날

오메기떡 만들어서 빚은 고소리술 한 잔 하는 날

그때의 사람들처럼 큰넓궤에서 50일 동안 살다 나온 술

3만 명의 영령들이 함께 맛을 본 고소리술 얻어 마시는 날

잃어버린 마을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해원과 상생과 평화의 바람이 되어 스스로 부는 날

75년 동안 한 곳에서만 붙들려 살았던 

수박령(水縛霊)과 지박령(地縛霊)이 만나는 날

정방폭포의 물소리도 바람으로 함께 따라서 오는 날

75년 만에 마련한 정방폭포 4·3 위령 공간에 모였던 

억울한 영령들이 무등이왓으로 한꺼번에 따라서 몰려오는 날

수박령(水縛霊)의 몸에서는 아직도 너무 많은 비가 내리는 날

안덕을 따라서 대정, 중문, 서귀, 남원, 표선이 따라오는 날

지박령(地縛霊)과 수박령(水縛霊)이 견우직녀처럼 만나는 날


'잃어버린 마을에서 보내는 선물'을 만들려면 오늘은 조 모종을 옮겨 심어야만 한다 새벽부터 비가 너무 많이 내린다 지난 5월에 만들어진 정방폭포 4·3 위령 공간 때문이다 물의 영혼으로 살았던 수박령들이 불로초 공원으로 한꺼번에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정방폭포 수박령들이 동광리 지박령을 만나려고 한꺼번에 귀향하여 얼싸안고 울기 때문이다


동광리 무등이왓 땅살림 코사를 복지회관 실내에서 지낸다 

안개비로 가득한 조 밭으로 가서 영귀소리로 원혼들을 불러 모아 모시고 온다

함박 가득 담긴 생메 위의 청댓잎은 더욱 푸르고 

156개의 술잔이 더욱 빛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비는 문 밖에서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다

조 밭에서 해야 할 땅울림도 안에서 하고 말과 소도 안에서 울고

김매기와 갈치잡이와 멜잡이도 안에서 하고 안개비는 멀뚱하게 쳐다만 본다


사람들은 점심으로 떡과 국수를 먹고 돌아가고 

나는 홀로 헛묘와 무등이왓으로 젖으며 걸어간다


헛묘와 충혼묘지 사이에 있던 검문소는 오래전에 떠났다 출입을 통제하던 검문소는 사라졌다 동광육거리는 이제 세월처럼 돌아간다 회전식 로터리로 바뀌어 차들도 돌아간다 나도 따라서 돌아간다 이제는 이곳도 거치지 않고 평화로를 달릴 수 있다 육신을 찾지 못한 헛묘와 영혼을 찾지 못한 충혼묘지의 배롱나무꽃은 짙은 안개비로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니 발자국소리를 듣고 깨어난다 헛묘에서 깨어난 영혼들은 삼밧구석마을로 집을 찾아가고 나는 홀로 무등이왓으로 간다 양잠단지 가는 길가에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 검은 표지석이 있다 무등이왓은 입구부터 조릿대들의 세상이다 강귀봉 우영팟의 최초학살터에는 더덕 덩굴이 가득하다 더덕꽃은 아직 피지 않았고 푸른 조릿대들만 볕뉘라도 건져보려는 듯 뜨물 같은 안개비를 조리질하고 있다 최초 학살터 바로 곁에 광신사숙이 있다  아직도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는 지름길보다 에움길로 간다 말방에(연자방아)터를 지나 잠복학살터로 간다 말방아는 보이지 않고 태양광 패널들만 안개비를 맞고 있다 무너진 돌담과 조릿대들만 길을 비켜준다 아마도 이 오래된 팽나무가 있는 밭에서 마을 이름이 정해졌을 것이다 아이들은 이 팽나무를 오르며 열매도 따먹고 놀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밭을 매었을 것이다 이 팽나무 그늘에서 자치기 하며 놀았던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 대신 송악덩굴이 올라가 저물도록 내려오질 않는다 별아이비도 뒤늦게 따라서 올라간다 잠복학살터에서 짚더미와 멍석에 쌓여 불태워졌던 사람들은 지금도 뜨거워서 안개비 속에서도 훌떡훌떡 뛰어오르고 있다 뒤늦게라도 불을 끄려는 듯 이곳에는 물탱크가 만들어져 있다 이제는 샘물 대신에 농업용수를 퍼올리고 있다 이 물탱크 뒤쪽에 조밭이 있다 잃어버린 마을에서 보내는 선물을 파종하고 키우는 오메기밭이 있다 오늘은 오메기밭 가득 안개비가 흘러넘친다 첫해에는 온통 돌밭이었다 오메기를 심을 수 있는 조 밭은 반도 안 되던 밭이 이제는 흙을 돋아서 오메기밭을 두 배로 늘렸다 갈수록 더 늘어날 것만 같다


오래도록 젖으며 홀로 걷다 보니 바람을 조리질하는 무등이왓 조릿대길에 볕뉘가 살짝 보이기 시작한다



* 제주 4·3 당시 130여 가구가 거주한 무등이왓은 ‘잃어버린 마을’ 122곳 가운데 가장 큰 마을로, 조와 메밀, 콩 등을 재배했다. 1948년 11월 15일 토벌대가 무등이왓 마을로 진입해 주민 10명을 총살했으며, 21일에는 주민 3명을 총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동광리는 무등이왓(130여 가구)과 조수궤(10여 가구), 시장밧(3 가구), 간장리(10여 가구), 삼밧구석(45 가구) 등 5개 자연마을로 이뤄진 중산간 마을로 4·3 당시 최소한 172명이 희생됐으며, 인근에는 주민들이 피신 생활을 했던 큰넓궤가 있다. 큰넓궤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은 50일 만에 발각되어 볼레오름까지 도망을 갔으나 모두 붙잡혀 정방폭포에서 사살되었다.





슬픈 족속(族屬) / 윤동주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1938년 9월) 



* 우리 민족은 슬픈 족속이다. 탐라국의 족속은 더욱 슬픈 족속이다. 탐라국의 예술가들이 슬픈 족속을 위로하기 위하여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에서 봄부터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 하기 위하여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아니, 이미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도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탐라국의 윤동주를 위하여, 탐라국의 송몽규를 위하여 의미 있는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정방폭포 1 (brunch.co.kr)






나무들의 거리는 적당하다(메모)




나무들은 함부로

남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무들은

한평생 한 자리를 지킨다

그림자도 평생

멀리는 떠나가지 않는다

그렇게 모여사는 

나무들의 숲은 참 아름답다


나무의 가지들은 함부로

남들의 하늘을 욕심내지 않는다

다른 가지들을 배려해서

빈 허공에만 손을 뻗는다

신중하지 못해서 엉켜버린 가지들은

아픈 사람들처럼 상처가 많다


사람들은 거리를 지키지 못해서

서로에게 상처를 많이 준다

가족들은 거리가 없어서

오히려 상처를 더 많이 입는다

연인들 또한 거리 때문에 싸운다

가장 적당한 거리는

서로가 보이는 곳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서로를 지켜주는 친구들의 거리다


딱 나무들의 거리만큼

친구들의 숲은 적당하다

홀로 떨어져서 바라보는

나무의 거리도 때로는 필요하다



*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백석. 그리고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동시대를 살다 간 이 두 분 모두 우리에게 별처럼 찬란한 시들을 남겨주셨습니다. 오늘은 이 두 분의 성품에 대한 글로 독서 목욕을 하며 마음 씻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1. 윤동주가 흠모한 시인은 누구?


윤동주 시인이 백석 시인을 흠모하고 존경하고 닮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백석(1912~1996)과 윤동주(1917~1945)는 다섯 살 차이의 선후배 사이입니다. 윤동주는 선배 백석 시인이 첫 시집 <사슴>을 100부 한정판으로 냈을 때, 이 시집을 구하지 못하자 연희전문학교 도서관에서 이 시집을 빌려 통째로 베껴서 필사본을 들고 다니며 읽었을 정도로 백석 시인을 흠모했습니다.

백석도 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 <사슴>(1936년)을 남겼습니다. 윤동주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년)라는 단 한 권의 유작시집을 남겼습니다. 이 시집들은 80년이 넘도록 문학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독자들에게 감동과 위로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 두 분의 보석 같은 시들의 움이 튼 시인들의 성품은 어떤 토양이었을까요? 이 두 시인의 공통적인 성품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2. 두 시인의 공통적인 성품은?


백석의 연인이었던 자야는 백석의 성품을 이렇게 돌이켰습니다.

(백석은) 비록 밖에서 화난 일이 있어도 혼자 가만히 참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언제 화를 내고 있었는지조차 모를 때가 많았다. 그만큼 당신은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말수도 적었고, 어떤 경우에도 남의 결점을 화제로 떠올리는 법이 없었다. 이런 당신의 성격은 다소 까다로웠던 편이라고나 할까. 물 한 방울, 종이 한 장조차도 타인에게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했으며, 또한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걸 가장 싫어했다.
- 「백석평전」(안도현 지음, 다산책방 발간) 중에서

윤동주의 후배 정병욱은 윤동주의 성품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그는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2년 후배입니다. 윤동주와 같이 하숙을 했던 인물이니 누구보다 윤동주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윤동주는) 술자리에 어울리는 일은 별로 없었다. 가끔 영화관에 들렀다가 저녁때가 늦으면 중국집에서 외식을 했는데 그때 더러는 배갈을 청하는 일이 있었다. 주기(酒氣)가 올라도 그의 언동에는 그리 두드러진 변화는 없었다. 평소보다 약간 말이 많을 정도였다. 그러나 취중일지라도 화제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의 성격 중에 본받을 일이 많았지마는 그중에서도 가장 본받을 장점의 하나는 결코 남의 헐뜯는 일을 입 밖에 내지 않는 일이었다.
-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고운기 지음, 산하 발간) 중에서

두 사람의 공통적인 성품을 가려내 보면, 둘 다 남의 결점을 화제로 떠올리는 법이 없고 남을 헐뜯는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에게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 면모가 있었네요.

어떤 경우에도 남의 결점을 화제로 올리는 법이 없었다. 이는 백석과 윤동주의 공통된 성품이다.

3. 착하디 착한 성품의 소유자


지인들의 회고를 읽으니 두 시인 모두 성품이 참으로 착하디 착하다는 점이 느껴집니다. 박각시나 거미나 가자미, 노루새끼에게도 한없는 연민을 보냈던 백석입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고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던 윤동주입니다.

이는 바로 세상 만물을 내 몸처럼 여기고 나를 사랑하듯 만물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모든 존재가 각자 외따로이 있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두 분의 마음에는 언제나 상대를 위하는 자비로움이 충만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라면, 상대가 없는 자리에서 그 사람을 낮추거나 나쁘게 말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혹시, 그런 좌중에서도 그들은 약에 쓰이려고 주인을 따라 시장에 팔려나온 노루새끼의 눈동자나 작은 바람에도 파르르 흔들리는 잎새 생각에 몰두해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분의 이런 높은 성품을 한없이 우러르며 닮고 싶은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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