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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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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Dec 13. 2023

4. 대기(大器)는 만성(晩成)이다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 함께 길을 찾는다

1. 윤동주 시인을 만나 함께 길을 찾는다

2. 윤동주 시인을 읽으며 길을 찾는다

3.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 함께 길을 찾는다


배진성 프로필

서른 살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다 왼쪽 가슴이 아팠다 남몰래 가슴을 안고 쓰러지는 들풀이었다 내려다보는 별들의 눈빛도 함께 붉어졌다 어머니는 보름달을 이고 징검다리 건너오셨고, 아버지는 평생 구들장만 짊어지셨다 달맞이꽃을 따라 가출을 하였다 선천성 심장병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나의 비밀은 첫 시집이 나오고서야 들통이 났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비후성 심근증, 심장병과 25년 만에 첫 이별을 하였다 그러나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바다는 나를 이어도까지 실어다 주었다 30년 넘게 섬에서 이어도가 되어 홀로 깊이 살았다 나는 이제 겨우 돌아왔다 섬에서 꿈꾼 것들을 풀어놓는다 꿈속의 삶을 이 지상으로 옮겨놓는다 나에게는 꿈도 삶이고 삶도 꿈이다 <꿈삶글>은 하나다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 함께 길을 찾는다


1. 윤동주 시인이 나를 읽는다


윤동주 시인을 다시 읽는다
윤동주 시인이 나를 읽는다


윤동주 시인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이제 꿈속에서도 윤동주 시인이 보인다. 눈을 뜨니 방 벽에서도 눈이 보인다. 눈들이 보인다. 윤동주의 눈이 보이고 송몽규의 눈이 보이고 강처중의 눈이 보이고 정병규의 눈이 보인다. 벽에 서있는 나무판자에 눈동자가 많다. 옹이들이 죽으면 저렇게 벽의 눈이 되기도 한다. 아예 눈알이 빠져서 뻥 뚫린 구멍도 있다. 


오늘은 자꾸만 <자화상> 생각이 난다. 나의 자화상을 어떻게 그릴까.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 제목은 처음에는 <외딴우물>이었다가 <우물속의자화상>이었다가 최종적으로 <자화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자화상은 최종적으로 어떤 자화상으로 남을 수 있을까. 나 자신도 나의 자화상이 궁금해진다. 나는 이렇게 다시 윤동주 시인을 읽는다. 아니, 윤동주 시인이 나를 읽는다. 東柱(동주)와 童舟(동주)와 童柱(동주)가 나를 읽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나서 함께 길을 찾는다.



연어의 종착역


        

고향집 바로 앞에 

연어의 종착역 표지석이 있다

나는 연어가 되어 

참으로 먼 길을 거슬러 돌아왔다

나도 이제 당신을 만나 

붉은 알을 낳아야만 한다  



고구마 꽃



고구마꽃이 피었다

고구마꽃이 젖을 물리고 있다

꼬리박각시나방이 젖을 빨고 있다

고구마가 땅 속에서 젖을 준다

땅 속에서 어머니는

아직도 나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이어도를 아시나요



서귀포시 해(海) 1번지

이어도를 아시나요

서귀포시 태평양로 1

이어도 섬을 당신은 아시나요 


아름다운 나라의 끝이 아니라

아름다운 나라가 시작되는 곳

당신은 이어도를 아시나요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섬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섬

하늘과 바다를 이어주는 섬


서귀포는 어디라도 문만 열면 태평양,

태평양으로 날아가는 이어도를 아시나요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제주도 사람들이 오래도록 꿈꾸어 오던 섬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뿌리 깊은 섬

이어도를 아시나요 이어도의 꿈을 아시나요



이어주는 섬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내 안에 섬들의 발이 있다

내 가슴속에 섬들의 발자국이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도가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주는 섬이 있다

나는 징검다리 같은 이어도가 된다



노인성이 유숙하는 섬



서귀포는 어디라도 문만 열면 태평양이다


서귀포혁신도시에서 중문관광단지까지

이어도 길을 걷다가 태평양으로 간다

설문대할망의 막내아들을 만나러 간다

남극노인성이 유숙하는 이어도로 간다


바다에서 해(海)를 본다 물이 아프다

인간들의 욕망이 낳은 쓰레기들의 섬

썩지도 않는 플라스틱 욕망들의 얼굴,


바다 해(海) 글자를 더 자세히 본다

어머니가 보인다 어머니가 아프다

아픈 어머니에게 방사능 오염수까지 먹인다

태평양의 수평선이 트로이목마를 끌고 온다

북극곰의 신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바다와 하늘이 함께 뜨거워지고 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막내아들이

뜨거운 어머니 이마에 물수건을 올린다

유숙하던 노인성도 곁에서 돕는다

서천꽃밭 꽃감관도 불사화를 가져온다


용궁으로 가는 올레에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노랫소리 들려온다 하늘에는 서천꽃밭이 있고 땅에는 마고성이 있고 바다에는 이어도가 있다


어머니를 살리려고 노인성과 꽃감관도 떠나지 못한다




2. 윤동주 시인의 거울을 보니


윤동주 시인의 거울을 보니 내가 보인다

송우혜 선생님의 <윤동주평전>을 읽는다. 윤동주 시인을 만나려면 먼저 간도로 가야만 한다. 간도는 좀 특별한 곳이다. 간도를 한문으로는, 간도(間島)라고 쓰기도 하고 간도(墾島)라고 쓰기도 한다. 청나라는 병자호란 뒤, 간도를  봉금(封禁) 지역으로 정하고 조선 사람이든 청나라 사람이든 아무도 들어가 살 수 없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간도라는 지명은 조선과 청나라 사이[間]에 놓인 섬[島]과 같은 땅이라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 후기에 우리 농민들이 이 지역에 이주하여 땅을 새로 개간하였다는 뜻에서 ‘간도(墾島)’라고 적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윤동주 시인을 만나려면 사이섬으로 가야 한다. 개간한 섬으로 가야만 한다.


"처음엔 두만강 위쪽 땅을 그냥 '간도'라고 했다. 그러나 후에 압록강 이북을 '서간도'라 하면서, 두만강 이북은 '북간도'로 구분해서 불렀다" 윤동주 시인은 북간도에서 태어났다.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명동촌이 또한 특별한 곳이다. 명동촌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마을이 아니다. 1899년 2월 18일에 생겨난 마을이라고 한다. "두만강변의 도시인 회령과 종성에 거주하던 네 명의 학자들 가문에 속한 22개 집안 식솔들로 이루어진 총 141명의 이민단이 그날 일제히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넜다"라고 한다. 그러니까 북간도 명동촌은 학자들 가문이 두만강을 건너 이국땅에 세운 개척마을이다. 윤동주 시인은 그런 특별한 마을에서 1917년 12월 30일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나는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3. 몸은 아래로 정신은 하늘로


윤동주 시인의 일생은
몸은 아래로 내려가고 정신은 하늘로 향했다

윤동주 시인은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명동촌의 명동소학교를 나와 용정의 은진중학교로 진학했다.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거쳐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했다. 그리고 1938년 4월 9일 드디어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또한 1942년 4월 2일 동경 입교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10월 1일 경도의 경도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편입학하였다. 다음 해 1943년 7월 14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윤동주 시인은 특별한 곳에서 태어나 평생 길을 찾다가 떠났다. 평생 공부를 하다가 길을 찾아 떠났다. 나는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태어났을까? 나는 전남 곡성군 삼기면에서 태어났다.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려고 밤새 나를 찾아 헤매었다. 인터넷으로 주민등록표 초본을 열람하였다. 옛날에 내가 보았던 초본과 많이 달라져 있다. 간편하게 변했다. 초본에는 나의 출생지가 나와 있지 않았다. 나의 주소지 변동사항이 29번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1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 원등리 957번지, 1975년 9월 23일 전입...., 나는 그 이전의 나의 행적을 찾고 싶었다. 1번의 주소지는 지금 내 고향집이 있는 주소지였다. 내 기억 속에는 그 고향집 징검다리 건너에 유년시절이 있었다.


나는 다시 제적초본을 열람하였다. 출생장소가 전남 곡성군 삼기면 원등리 1099번지로 되어 있었다. 나의 기억과 달랐다. 나는 지금껏 징검다리 건너 월경리 외딴집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전에 살았던 월경 2구 행정리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하였다. 내 무의식적인 기억 속에는 방 벽이 기울어져 있고 방바닥도 수평이 아니고 천정에서 빗물이 떨어져서 방에 세숫대야를 놓고 밤새 빗물을 받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껏 원등리 1099번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신고일은 1968년 10월 15일로 기록되어 있었다. 신고인은 아버지로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왜 2년도 더 지나서 출생신고를 하셨을까. 그리고 왜 2월 28일로 출생신고를 하셨을까? 어머니께서는 늘 내가 2월 24일 아침 6시에 태어났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태어나서 비로소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제적초본에 기록된 나의 출생지와 나의 기억 속의 출생지를 비교하며 밤새 고향의 길들을 둘러보았다.   



늦게 쓰는 일기



1966년 참꽃 불타는 2월 29일 새벽 두 시

그믐달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의 눈썹이

떨어지고 닭도 울지 않았다 개 한 마리가

어둠 속에서 컴컴한 어둠을 향해

컹컹 짖었다 그리고 나는 울지 않았다

울음 없는 아이로 태어나 누워만 있었다

송아지 울음소리가 걸어 나오는 물소리

가느다랗게 들리고 핑경 같은 별들이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잠들지 못하는 그 사이로

보이지 않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나는

별무덤을 파헤치고 다시 태어났다

그 자리에 나의 탯줄과 함께 누워있는 어머니

무덤가 어린 쑥 잎에도 향기가 오르고

나는 어머니가 누운 만큼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별똥별이 떨어지고 숲이 있는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 지상에

세상은 있었고 내가 태어나면서 같이 태어난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그러한 아침으로

때 아닌 비가 내리고 담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4. 대기(大器)는 만성(晩成)이다


윤동주 시인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송몽규
윤동주 시에 가장 중요한 촉매작용은 술가락


윤동주 시인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준 사람은 송몽규일 것이다. 또한 윤동주 시인의 시에 가장 결정적인 불을 지핀 문학적 자극은 1935년 1월 1일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술가락]이었을 것이다. 문익환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윤동주가 송몽규를 두고 "대기는 만성이다"라는 말로 벼르더라는 것이었다. 바로 이때 송몽규가 거둔 '작은 성공'이 전제된 것이다. 바로 그 무렵부터 윤동주 시인은 자신의 작품에 날짜를 기입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전에도 시를 쓰긴 했지만 송몽규의 신춘문예 당선을 계기로 윤동주 시인은 더욱 치열하게 시를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첫 번째 원고노트는 바로 이때부터 만들어졌다. 멋진 표지와 목차까지 꼼꼼하게 기록하였다. 표지 오른쪽에 밀로의 비너스상이 길게 인쇄되어 있고 중앙 하단에 <文藻>(문조)라는 글자가 인쇄되어 있다. 그런 멋진 문학노트에 비너스상 오른편에 세로로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고 작은 글씨로 썼으며 중앙 상단에 가로로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라고 각각 자필로 씌어 있다. 요즘 시대의 시집 표지 디자인으로 써도 좋을 만큼 멋진 시집 표지다. (26.6cm*19.1cm)




연어의 종착역과 징검다리



내가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이다. “뭣이 중한디? 뭣이 중하냐고!”라는 대사로 유명해진 <곡성>이란 영화의 무대인, 바로 그 곡성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지금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부끄럽게도, 정말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잘 모르고 자랐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중학교까지 다녔던 고향집 바로 앞에는 ‘연어의 종착역’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곡성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에 나오면서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옛날의 곡성역이 그 영화에 나오고 기차마을로 조금씩 알려진 이후에 세워진 표지석이다. 나의 고향집 바로 앞에는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삼기천이 흐른다. 비가 많이 오면 삼기천의 물이 우리 집에까지 들이닥칠까 싶어서 잠을 이루지 못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된 다음에 가보니 ‘의동 마을, 원등 1구’라는 이름과 함께 ‘연어의 종착역’ 이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누가 지은 이름인지 몰라도 꼭 나를 위해서 지어준 이름인 듯, 하여 나는 개인적으로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내가 살았던 삼기천에서 아직껏 연어를 한 번도 직접 내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연어의 종착역’이라는 이름은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연어와 속성이 비슷한 은어는 많이 보았고 많이 잡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또한 연어와 은어와는 정 반대의 속성을 지닌 장어도 많이 잡아보았다. 연어와 은어는 강에서 태어나고, 연어는 먼바다에서 살고, 은어는 가까운 바다에서 살다가, 다시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서 새끼를 낳고 죽는다. 하지만 우리들이 민물장어라고 말하는 뱀장어들은 강에서 태어나지 않고 모두가 바다에서 태어난 놈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연어와 은어의 산란과 죽음에 대한 지식은 많은데, 장어의 산란과 죽음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민물에서 자라는 민물장어들의 산란 장소를 아직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까지는, 필리핀 인근의 깊은 바다에서 짝짓기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700~1,200만 개의 알을 낳고 죽는다고 알려져 있다. 알은 부화하여 렙토세팔루스라 불리는 버들잎 모양의 유생기를 거쳐 실 모양의 어린 실뱀장어로 탈바꿈하며, 2~5월 사이에 무리를 지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 민물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고 알려져 있다.  

  

주) 뱀장어

민물장어는 뱀장어라고 한다. 뱀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뱀장어는 뱀장어목 뱀장어과에 속하는 민물고기로, 장어류 가운데 유일하게 바다에서 태어나 강으로 올라가 생활하는 회류성 어류이다. 그러나 다양한 서식환경과 염분농도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때로는 일생을 강이나 바다 어느 한쪽에서만 보내는 경우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들이 식용으로 소비하는 뱀장어는 주로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실뱀장어를 그물로 잡아 양식을 통해 얻으며, 여름철 스태미나 음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몸에는 타원형의 미세한 비늘이 있지만 살갗에 묻혀서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래턱이 위턱보다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등지느러미와 뒷지느러미, 꼬리지느러미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끝이 뾰족하며, 배지느러미는 없다. 옆줄에 있는 감각공(감각을 느낄 수 있는 구멍)이 뚜렷이 보인다. 몸 색깔은 사는 장소나 시기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난다. 민물에서 바다로 이동할 때에는 짙은 검은색으로 변한다. 따뜻한 민물에서 살며, 육식성으로 게, 새우, 곤충, 실지렁이, 어린 물고기 등을 잡아먹는다. 낮에는 돌 틈이나 풀, 진흙 속에 숨어 있다가 주로 밤에 움직이는 야행성이다. 간혹 밤에 뭍으로 올라와 이동한다는 보고도 있다. 물의 온도가 낮아지면 굴이나 진흙 속에 들어가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에 다시 활동한다. 수컷은 3~4년, 암컷은 4~5년 정도 지나면 짝짓기가 가능해지고, 8~10월에 짝을 짓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다. 이때에는 생식기관이 발달하고 소화기관이 퇴화하면서, 굶은 상태로 산란장소를 찾아 이동한다. …,   


내가 나의 고향집이라고 말하는 그 집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식구들이 직접 지은 집이다. 마을 뒷산인 심산에서 소나무를 베어와 껍질을 벗기고 대패질로 다듬어서 서까래로 쓰고, 그전에 살던 집 뒤꼍에서 자라던 거대한 미루나무를 잘라 대들보와 상량 목으로 만들어 올렸다. 그 나의 고향집은 마당이 손바닥만 한 아주 작은 집이고 우리 식구들의 첫 번째 우리 집이었다.


그 우리 집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삼기천 바로 맞은편 둑 너머에 불법으로 집을 짓고 살았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잘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하천 국유지에 불법으로 집을 짓고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기천을 경계로 하여 면소재지 쪽이 원등리이고 맞은편 마을이 월경리였다. 원등리는 삼기천과 바로 붙어 있었으며 1구에서 5구까지 마을 다섯 개가 모여 있었고, 월경리는 삼기천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호남고속도로 공사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모래방천에 붙어있는 왕산을 깎아내리는 공사가 가장 큰 난공사였는데 그곳에서 가져온 나무뿌리로 뿌리 탁자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포클레인이 없어서 앞바퀴와 뒷바퀴 사이에 가로로 장착된 긴 쟁기삽날로 흙을 밀어내는 방식이어서 더욱 공사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 불도저는 그 후로도 가끔 신작로 흙길을 판판하게 다듬어주는 공사를 하기도 하였다. 요즘에는 대부분 포클레인으로 흙을 푹푹 파내는 방식으로 공사를 하지만 그 당시에는 대부분 쟁기 형식으로 흙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공사를 하였다. 그러니 그 큰 산을 밀어낸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공사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진 호남고속도로는 월경리 쪽에 붙어 있었다. 또한 월경리는 1구와 2구가 있었는데 2구는 더 깊은 산속에 뚝 떨어져 있어서 따로 ‘행경’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다.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나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삼기천 둑 공사를 하면서, 물길을 반듯하게 만들면서, 둑 너머에 공터가 좀 생겼던 모양이었다. 정미소를 하시다가 잦은 고장과 큰 사고로 망한 아버지께서 그 공터에 불법으로 대강 슬레이트 지붕을 올리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 집은 외딴집이었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월경리에 속해 있었지만 거리상이나 생활상의 영역은 원등리 1구에 더 가까운 생활권에서 살았던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고향집과는 징검다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는 위치에 있었다. 지금은 그 옛날 집터도 둑 높이까지 매립이 되어 그 위에 새로운 남의 집이 지어져 있다.   

나의 기억은 징검다리 건너 그 옛날 집에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나는 또 그 바로 전에 살았었다는 ‘행경’이란 마을에서 정미소를 할 때 태어났다고 들었다. 원등리 2구에 있는 좀 큰 정미소에서 망하고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아주 작은 정미소를 하였는데 바로 그때 내가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월경리 1구 시절, 마당뿐만 아니라 집 전체가 깊은 외딴집이었던 바로 그 옛날집에서는 많은 기억들이 흘러넘친다. 마당의 높이는 둑 너머 삼기천 바닥과 같았다. 그러니까 둑이 무너지면 외딴집은 바로 물에 잠기게 되어있는 구조였다. 우리 식구들은 그렇게 위험하고 외로운 집에서 꽤 오래도록 쓸쓸하게 살았다. 그 시절 어머니는 튼튼하고 커다란 미원박스에 각종 생활용품을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시며 봇짐장사를 하셨다. 먼 마을까지 다니시는 바람에 밤늦게 돌아오시기 일쑤였고 다음날 돌아오시는 날도 많았다. 내가 아기였을 때에는 나를 등에 업고 머리에 봇짐을 이고 다니셨다고 하셨다. 멀리 장사를 나갈 때에는 잠자리가 불편하여 가장 힘이 들었다고 하셨다. 그래도 나는 비교적 잘 울지 않아서 다행이었으나 동생은 잘 우는 바람에 주인집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먼 밖으로 나가 동생을 안고 많이 울기도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장마철에는 둑이 자주 무너지기도 하였다. 월경리로 건너가는 다리 아래쪽이 자주 무너졌다. 그럴 때마다 무서운 물살이 넘어와 흙탕물이 우리 집을 덮쳤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들은 원등리 1구 회관으로 피신하여 며칠씩 지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외딴집에는, 대문도 없고 담장도 없어서 아무라도 쉽게 드나들 수 있었다. 특히 월경리에 사신다는 ‘꽃본듯이’라는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밤마다 우리 집 시멘트 마루에서 남몰래 주무시는 바람에 많이 무서웠다. 그 할아버지는 정신이 좀 이상해서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있어서 나에게는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어느 날, 동네 청년들에게 끌려가 산에서 얻어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아서 좋았는데 그때부터는 다시 동냥아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로 팔이 없거나 눈알이 없거나 다리가 없거나 쇠갈쿠리 손을 한 사람들이 많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불쌍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때는 어린 마음에 그저 무섭기만 하였었다.


그리고 많은 집들이 함께 모여 있는 동네에는 이미 전기가 들어왔는데 외딴집이었던 우리 집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면 불법건축물이어서 전기 신청도 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때가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날마다 징검다리를 건너 다니며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는 원등리 아이들과 어울려야 하는지 월경리 아이들과 어울려야 하는지 혼란스럽기도 하였다. 나의 위치와 소속이 애매해서 나는 외톨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여러 가지 짐승들을 기르기 시작했는데 특히 물가에서 사는 바람에 오리를 많이 길렀다. 오리뿐만 아니라 닭과 토끼와 염소 그리고 나중에는 돼지와 소와 말까지 길렀다.


그런데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느 날부터인가 나의 오리가 한 마리씩 없어지기 시작했다. 오리는 낮에 냇물에 나가서 먹이를 잡아먹고 밤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알도 낳고 잠도 자고 또다시 새벽에 물가로 나가 놀았다. 오리는 닭보다 훨씬 빨리 자랐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자꾸만 동네사람들을 불러와 오리를 잡아서 함께 드시기 시작하셨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빨래 줄에 오리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오리 피가 몸에 좋다고 오리를 산 채로 빨래 줄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목을 잘라서 오리 피를 그릇에 받아내고 계셨다. 그때 정말 화가 많이 났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가 많이 울었다. 


그리고 또한 어느 날 아침에는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내가 사서 내가 기른 돼지를 잡아가버렸다. 그 전날 밤 아버지께서, 노름판에서 내 돼지를 잡히고 돈을 빌려 노름을 하시다가 다 잃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 많은 이야기들은 평생 말해도 다 말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식구들은 물가에서 살아서 그런지 물고기들을 많이 잡아서 먹었다. 장어를 잡아먹고 미꾸라지를 잡아먹고 참게를 잡아먹고 자라까지 잡아서 먹었다. 물론 피라미와 붕어와 중태기와 민물새우도 많이 잡아서 먹었다. 특히 저수지 물을 빼는 날이면 그야말로 물고기 천지였다. 저수지 바닥이 드러나면 장어와 잉어들이 수두룩했고 미꾸라지는 처치가 곤란할 정도로 너무 많았다. 그리고 가끔 아버지께서는 섬진강에 가셔서 은어들을 잡아오시곤 하셨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투망질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었다. 나도 아버지를 닮아 투망질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불법이어서 함부로 할 수가 없다. 투망질뿐만 아니라 어른들은 자동차 배터리를 등에 짊어지고 대나무 끝에 장착한 구리선으로 전기를 관통시켜서 물고기를 잡았고 아이들은 자전거 바퀴로 돌리던 작은 발전기를 이용하여 물고기들을 잡았다. 그 당시에는 아이들까지 민물낚시는 기본으로 하였고 겨울에는 주로 해머로 물속의 돌을 두들겨서 물고기를 잡곤 하였다. 그리고 족대라고 하는 작은 그물로도 잡고 맨손으로도 돌 속이나 풀 속을 뒤져가며 물고기들을 잘도 잡아서 먹곤 하였다. 그때는 워낙 식량이 부족한 시절이어서 물고기들 뿐만 아니라 새들이며 산짐승들도 닥치는 대로 잡아서 먹곤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동물학대죄로 모두 잡혀갈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뱀이며 개구리까지 잡아서 먹고, 고라니며 산토끼며 꿩들까지 잡아서 먹던 시절이었다. 

   


징검다리



하나
길이었다 덜 자란 몸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어머니는 방물을 파셨고 새벽 샛강의
입김 자욱한 안갯속으로 떠나시곤 했다
나는 담장 밑에 펼쳐놓은 꼬막껍질에
쑥국 끓이기 놀이를 하며 자랐다
노을만 어렵게 어렵게 감아 들이던
바람개비가 스스로의 바람결을 가늠할 수 있을 때
물오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파랑 간짓대 들고
오리 떼를 몰아내던 골목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머니 뒷모습을 지우던 안갯속으로
하얀 꽁무니가 사라지고
나도 그 속으로 따라 날아가고 싶었다


할아버지 산소가 보이는 징검다리 사이로 햇살이
주검처럼 부서지며 흘러갔다 하류에서
한 몸으로 몸을 섞기 위해 취로사업 나가신
아버지가 무너진 둑에 묻히고 작업복이 천수답
허수아비에 내걸리던 날도 나는 그 저수지 뚝에서
삐비 꽃을 뽑아먹고 돌아오는 길
가로수 구멍 속에 몇 개의 돌을 더 던져 넣었다
어머니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줄도 몰랐다
그 해 여름 장마는 담장의 발목을 적셨고
두꺼비 같은 우리 식구들은
한밤중에 회관으로 기어 올라갔었다


학교 앞 코스모스로 기다리기를 즐겼다
하학종소리 사이로 보이는 형의 검정고무신 앞은
발가락이 먼저 나와 있었고 생활 보호 대상자
가족 앞으로 달려오는 옥수수 빵과 건빵
나는 그것이 좋았다 우리는 뿔 필통 속 몽당연필로
흔, 들, 리, 며, 징, 검, 다, 리, 건, 넜, 다,
끈이 풀리는 소리로 흘러가는 여울물 소리는
우리를 다시 묶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징검다리를 잘도 건너 다녔다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끼고 기차놀이하던
우리들은 그 새끼줄 속에서 자유로웠다
우리들의 기차는 징검다리를 비로소 건너 다녔고
오후의 서툰 기적소리 울리며
동구 밖까지 나가 놀던 소아마비 동생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찾다가 찾아보다가
어린 집배원이 된 큰 형도
동생의 소식은 가져오지 못하고 한 떼
건너가는 동네 아이들만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다섯
여울물 소리는 끈이 풀리는 소리였고
또다시 묶이는 소리였다 방직공장에 취직했던
누이가 파란 눈의 아이를 보듬고 돌아와
빨래터에는 방망이질 소리가 잠들지 않았고
헛발 짚은 어머니는 물속에 더욱 자주 빠지셨다
……………… 배고픔과 어머니 ………………
들판에 흐드러진 달맞이꽃 사이로 그렇게 어머니는
젖은 보름달을 이고 늦게 돌아오시곤 했다



1987년 나의 글은 징검다리에서 출발하였다 그다음 해에는 1988년 올림픽의 해이기도 하였다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집은 구멍가게를 하기 위해 화장실 자리에 지은 아래채, 안채는 지붕만 살짝 보인다
나는 어린 시절 집 앞에 있었던 징검다리를 잘도 건너 다녔다 
내가 어린 시절 날마다 건너 다녔던 징검다리는 이제 물안개에 싸여 희미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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