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박물관 인근 자치경찰대 마당 남쪽 구석에는 마치 거대한 우산을 펼쳐놓은 것 같은 자태를 뽐내는 나무가 있다. 먼나무인데, 다른 나무의 방해 없이 독립수로 자라기 때문에 무척이나 화려한 수관을 뽐낸다. 사연을 알고 보면 이 나무도 도민의 아픔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 위로보다는 고통을 상징하는 나무다. 나무가 자라는 자치경찰단은 일제강점기 서귀면사무가 있던 곳이다. 제주 4·3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국군 병력이 제주도로 몰려들었다.
국군 제2연대 1대대 중대본부가 1948년 9월 이후 서귀면사무소에 주둔했다. 12월에는 1대대 2중대가 의귀초등학교와 상효 칡오름 서쪽에, 1대대 3중대가 안덕면 상창리 대난도에, 1대대 4중대가 서호리에, 1대대 5중대가 대정면 대촌병사에, 1대대 6중대가 서귀초등학교에 각각 주둔했다.
1대대 중대본부 소속 장병들은 중산간 일대에서 무장대를 소탕한 후 49년에 한라산에서 30년쯤 된 먼나무 한 그루를 이곳에 옮겨 심었다. 자신들이 이곳에 주둔한 사실을 기념한다는 취지였다. 처음에는 ‘공비 토벌’이라는 명분을 붙였지만, 사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얘기다.
이곳은 훗날 읍사무소, 서귀포시청 등으로 활용됐다. 그리고 나무는 1971년 8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됐다. 군사정권 시절이라 제주 4·3을 진압한 2 연대가 주둔했던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고, 먼나무의 수형이 수려하니 이 또한 높이 사려는 의도였다. 철거되어 지금은 없지만, 보호수를 알리는 안내 표지가 설치되기도 했다. 기록에 남아 있는 당시 안내표지의 내용이다.
제주도 기념물 제15호
소재지: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이 나무는 키 6.5m, 가슴높이둘레 1.4m로서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먼나무로서는 가장 큰 나무이며, 수관이 사방 4m 반경으로 고르게 퍼져 마치 우산을 펴서 세워 놓은 것 같이 보인다. 이 나무는 한라산에 있었던 것을 1949년 4·3 사건 당시 공비 토벌을 마친 기념으로 제2연대 병사가 주둔지인 이곳에 심은 것이다.
먼나무는 감탕나무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으로 본도의 난대림대와 전라남도 보길도에 자생한다. 껍질은 검은빛을 띠어서 이 지방 말로 ‘먹낭’또는 ‘개먹낭’이라 한다.
암ㆍ수꽃이 딴 나무에 달리며 이 나무는 암나무로써 열매가 둥글고 지름이 5~8mm이며 10월경에 붉게 익는다.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敎會堂 꼭대기
十字架에 걸리였습니다。
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수 있을가요。
鍾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휫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왓든 사나이
幸福한 예수 · 그리스도에게
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여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밑에
조용이 흘리겠읍니다。
一九四一、 五、 三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1941.5.31, 윤동주)
<십자가>는 윤동주 시인이 살아서 발행하려고 했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시로 윤동주 시인에게 매우 의미 있는 시 중 의 하나다. 어쩌면 이 시를 쓰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순간이 온다면 예수님처럼 행복한 마음으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겠다는 결심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의 인생은 죽음이 확정을 짓는다. 우리들의 삶을 확정 짓는 것은 죽음이다. 사람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삶을 확정 짓고 떠난다. 자신의 삶을 어떻게 마무리하느냐에 따라서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 결정이 된다. 하지만 또한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상황도 허다하다. 그래서 죽음 또한 운명이다.
윤동주 시인이 직접 쓴 육필 원고에는 시집 제목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아래 童舟(동주)라는 글씨가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東柱(동주)가 아니라 童舟(동주)라고 썼다. 윤동주의 본명은 윤동주(尹東柱)이지만 작품을 발표할 때는 주로 필명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童舟, 童柱, 東柱..., 이 중에서 윤동주가 살아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행했다면 어쩌면 童舟라는 이름으로 발행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육사도 다양하게 '육사'라는 이름을 변주하여 사용했는데, 윤동주 역시 자신의 이름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참고로 윤동주의 아호는 해환(海煥)이었다.
1. 정방폭포 윤동주를 읽는다
2. 정방폭포가 윤동주를 읽는다
3. 윤동주가 정방폭포를 읽는다
4·3과 평화가 정방폭포를 찾아간다
정방폭포는 윤동주를 읽고 있다
검은 주상절리의 서랍을 열어본다
새하얀 무명천이 하늘에서 끝없이 내려온다
무명천 할머니께서 수의를 만들고 계시는지
만가(輓歌)처럼 베 짜는 소리도 함께 들린다
주상절리 서랍에서 흑백사진 한 장 꺼낸다
수용소로 사용되었던 전분공장과 창고들이 보이고
멀리, 목호(牧胡)들의 범섬까지 뚜렷하게 보인다
물빛과 무명천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하얗고
발을 담그고 세수도 하였을 것만 같은 여울물소리
더 이상 발을 디딜 수 없는 노래는 비명(悲鳴)이 된다
길을 잃고 느닷없이 단애(斷崖) 아래로 떨어진 사람들
서귀, 중문, 남원, 안덕, 대정, 표선, 한라산 남쪽 사람들
태평양을 헤매다가 75년 만에 작은 집으로 돌아온다
불로초 공원에 만든 그 작은 공간으로 돌아오는 영혼들
타고난 제 삶도 끝까지 살지 못하고 벼락처럼 떠나버린
그 많은 정방폭포의 사람들
광풍에 느닷없이 길이 끊어져 허공에 발을 딛고
한꺼번에 바다로 추락해 버린 목숨들, 오늘도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바다에서 길을 찾고 있는 사람들
그중의 한 사람을 따라서 긴 순례를 다시 시작한다
윤동주를 읽던 정방폭포가 젖은 몸으로 따라나선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윤동주)
정방폭포는 한라산 남쪽 최대의 학살터였다. 75년 만인 2023년 5월에 비로소 서복 불로초 공원 한쪽에 작은 4·3 희생자 위령공간이 마련되었다.
정방폭포에서 베틀소리가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만가(輓歌) 소리도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아우성소리가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자장가소리도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원자폭탄 떨어지는 소리도 들린다. 일본이 항복하는 소리도 들린다.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왜 제주도의 폭포는 남쪽에만 있을까? 자세히 살펴보니, 북쪽의 폭포들은 낮은 포복으로 기어 오고 있었다. 윤동주 시인이 요즘 시인이라면 어떤 시를 쓰고 있을까? 나는 윤동주 시인을 생각하며 나의 꿈과 나의 삶과 나의 문학을 처음부터 다시 한번 점검하며 순례를 떠난다. 윤동주의 거울 하나 들고서 순례를 다시 시작한다.
"하늘을 보지 못해서 부끄럼이 너무 많다. 나는 지금껏 죽어가는 것들을 얼마나 사랑했을까? 나는 지금껏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했을까? 나는 이제라도, 나한테 주어진 길이 아니라,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길을 찾아서 걸어가고 싶다. 오늘 밤에도 나의 별들은 잠들지 못하고 추위에 떨고 있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1940년 12월 윤동주)
사실 윤동주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이 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제는 이 시 제목처럼 '병원'이었다고 한다. 윤동주의 사후에 고이 보관해 왔던 시들을 모아 세상에 내놓은 지인 정병욱은 당시의 그의 말을 이렇게 회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 인지 후에 시집의 제목은 우리가 익히 아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되어 출간되었다. (내가 홀로 추측해 보건대, 윤동주 시인은 아마도 처음에는 <병원>이라는 제목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마지막으로 '서시'를 쓰면서 책 제목을 바꾸지 않았을까 생각을 한다. 책 제목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서시의 핵심 단어들을 나열해 놓은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즉, 책의 제목은 서시의 키워드만 뽑아서 나열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병원이다. 지금은 어디가 가장 아픈 곳일까? 지금은 우리들의 어머니인 지구가 가장 아픈 병원이다. 윤동주 시인이 지금, 우리 시대에 우리들과 함께 살아있다면 아마도 아픈 지구를 먼저 노래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늙은 의사는 아직도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옛날에는 사람만 병들고 자연은 건강했지만 이제는 사람들 때문에 자연까지 병이 들었다. 이제는 사람과 지구를 함께 구해야만 한다."
오늘은 동광리 무등이왓으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날
3년째 오늘은 정방폭포 수박령(水縛霊)들 고향 가는 날
무등 타고 놀던 아이들 대신 지박령(地縛霊)들만 사는 곳
아랫마을 간장리 사람들과 예술가들이 함께 모여드는 날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 빈 집터에 조를 함께 심는 날
영귀소리에 불려 나온 조릿대밭 영혼들 술 한 잔 받는 날
오메기떡 만들어서 빚은 고소리술 한 잔 하는 날
그때의 사람들처럼 큰넓궤에서 50일 동안 살다 나온 술
3만 명의 영령들이 함께 맛을 본 고소리술 얻어 마시는 날
잃어버린 마을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해원과 상생과 평화의 바람이 되어 스스로 부는 날
75년 동안 한 곳에서만 붙들려 살았던
수박령(水縛霊)과 지박령(地縛霊)이 만나는 날
정방폭포의 물소리도 바람으로 함께 따라서 오는 날
75년 만에 마련한 정방폭포 4·3 위령 공간에 모였던
억울한 영령들이 무등이왓으로 한꺼번에 따라서 몰려오는 날
수박령(水縛霊)의 몸에서는 아직도 너무 많은 비가 내리는 날
안덕을 따라서 대정, 중문, 서귀, 남원, 표선이 따라오는 날
지박령(地縛霊)과 수박령(水縛霊)이 견우직녀처럼 만나는 날
'잃어버린 마을에서 보내는 선물'을 만들려면 오늘은 조 모종을 옮겨 심어야만 한다 새벽부터 비가 너무 많이 내린다 지난 5월에 만들어진 정방폭포 4·3 위령 공간 때문이다 물의 영혼으로 살았던 수박령들이 불로초 공원으로 한꺼번에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정방폭포 수박령들이 동광리 지박령을 만나려고 한꺼번에 귀향하여 얼싸안고 울기 때문이다
동광리 무등이왓 땅살림 코사를 복지회관 실내에서 지낸다 안개비로 가득한 조 밭으로 가서 영귀소리로 원혼들을 불러 모아 모시고 온다 함박 가득 담긴 생메 위의 청댓잎은 더욱 푸르고, 156개의 술잔이 더욱 빛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비는 문 밖에서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다 조 밭에서 해야 할 땅울림도 안에서 하고 말과 소도 안에서 울고, 김매기와 갈치잡이와 멜잡이도 안에서 하고 안개비는 멀뚱하게 쳐다만 본다
사람들은 점심으로 떡과 국수를 먹고 돌아가고,
나는 홀로 헛묘와 무등이왓으로 젖으며 걸어간다
육신을 찾지 못한 헛묘와 영혼을 찾지 못한 충혼묘지의 배롱나무꽃은 짙은 안개비로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니 발자국소리를 듣고 깨어난다 헛묘에서 깨어난 영혼들은 삼밧구석마을로 집을 찾아가고 나는 홀로 무등이왓으로 간다 양잠단지 가는 길가에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 검은 표지석이 있다 무등이왓은 입구부터 조릿대들의 세상이다 강귀봉 우영팟의 최초학살터에는 더덕 덩굴이 가득하다 더덕꽃은 아직 피지 않았고 푸른 조릿대들만 볕뉘라도 건져보려는 듯 뜨물 같은 안개비를 조리질하고 있다 최초 학살터 바로 곁에 광신사숙이 있다 아직도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는 지름길보다 에움길로 간다 말방에(연자방아)터를 지나 잠복학살터로 간다 말방아는 보이지 않고 태양광 패널들만 안개비를 맞고 있다 무너진 돌담과 조릿대들만 길을 비켜준다 아마도 이 오래된 팽나무가 있는 밭에서 마을 이름이 정해졌을 것이다 아이들은 이 팽나무를 오르며 열매도 따먹고 놀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밭을 매었을 것이다 이 팽나무 그늘에서 자치기 하며 놀았던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 대신 송악덩굴이 올라가 저물도록 내려오질 않는다 별아이비도 뒤늦게 따라서 올라간다 잠복학살터에서 짚더미와 멍석에 쌓여 불태워졌던 사람들은 지금도 뜨거워서 안개비 속에서도, 훌떡훌떡 뛰어오르고 있다 뒤늦게라도 불을 끄려는 듯 이곳에는 물탱크가 만들어져 있다 이제는 샘물 대신에 농업용수를 퍼올리고 있다 이 물탱크 뒤쪽에 조밭이 있다 잃어버린 마을에서 보내는 선물을 파종하고 키우는 오메기밭이 있다 오늘은 오메기밭 가득 안개비가 흘러넘친다 바람을 조리질하는 무등이왓 조릿대길에 볕뉘가 살짝 보이기 시작한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1938년 9월, 윤동주)
제주 4·3 당시 130여 가구가 거주한 무등이왓은 ‘잃어버린 마을’ 122곳 가운데 가장 큰 마을로, 조와 메밀, 콩 등을 재배했다. 1948년 11월 15일 토벌대가 무등이왓 마을로 진입해 주민 10명을 총살했으며, 21일에는 주민 3명을 총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동광리는 무등이왓(130여 가구)과 조수궤(10여 가구), 시장밧(3 가구), 간장리(10여 가구), 삼밧구석(45 가구) 등 5개 자연마을로 이뤄진 중산간 마을로 4·3 당시 최소한 172명이 희생됐으며, 인근에는 주민들이 피신 생활을 했던 큰넓궤가 있다. 큰넓궤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은 50일 만에 발각되어 볼레오름까지 도망을 갔으나 모두 붙잡혀 정방폭포에서 사살되었다.
우리 민족은 슬픈 족속이다. 탐라국의 족속은 더욱 슬픈 족속이다. 탐라국의 예술가들이 슬픈 족속을 위로하기 위하여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에서 봄부터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 하기 위하여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아니, 이미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도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탐라국의 윤동주를 위하여, 탐라국의 송몽규를 위하여 의미 있는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엘리베이터 속에서 폭포 소리가 들린다
엘리베이터 속에서 정방 모습이 보인다
정방폭포 절벽을 기어올라가는 다슬기처럼
한참을 멈췄다가 다시 올라간다
나를 끌어올리는 엘리베이터 로프도 보인다
나를 하늘로 인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수염이 아니라
기름이 잔뜩 발라진 검은 쇠줄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계단을 오른다
쇠줄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오른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스스로 올라간다
아파트 옥상에는 하늘타리꽃이 피어난다
별처럼 하얗게 피어나는 하늘타리의 꽃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독송하고 있다
반야심경(半夜心經)을 염불하고 있다
깊은 밤의 마음을 뚫고 만다라가 핀다
붉게 핀 칸나의 꽃들은 합장을 하고
도라지꽃들은 묵언수행을 하고 있다
푸른 고추들의 얼굴에 붉은빛이 돌고
토란잎에 매달린 취우들의 눈빛이 맑다
흙의 가슴에서는 고구마 순의 상처에서
이제 막 뿌리를 만들며 어둠을 뚫는다
땅속에서 반야심경(半夜心經) 소리
하늘에서 반야심경(般若心經) 소리
마음속으로 반야반야(半夜般若) 소리
저 멀리 보이는 드림타워에서도
정방폭포 소리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밤을 알아야 낮을 알고
달을 알아야 해를 알고
어둠의 그림자를 알아야 빛이 보인다
나는 이제 반야에서 천천히 줄을 타고 내려온다
260자의 윤슬이 마음의 경전으로 빛난다
마음의 경전 속에서 바다는
파도를 불러 오도송(悟道頌) 하나 읊고 있다
우리 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 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러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外國) 가잇는 내 안해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대게 이러한 뜻이엇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1935년 1월 1일, 송몽규,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 당선작)
윤동주에게는 송몽규가 있었다. 나에게는 누가 있을까. 윤동주에게 송몽규가 없었다면 과연 오늘날의 윤동주가 있을 수 있었을까. 나에게 과연 그런 사람이 있는가? 가만히 다시 생각하니 나에게도 송몽규 같은 그런 아름다운 사람이 곁에 있었구나!
정방폭포 암벽에 글자가 있었다 세월이 지워버린 화두가 있었다
정방폭포 소리에 울음이 있었다 바람이 지워버린 눈물이 있었다
정방폭포 가슴에 무지개 있었다 득음의 독공소리 끊이지 않았다
서복 일행이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추사선생은 탁본을 하고 있었다
백조 한 마리 날아와 목을 풀었다 흑조 한 마리 날아와 몸을 풀었다
울혈을 토하고 절창을 하는 백조와 살풀이춤으로 길을 터주는 흑조
한라산을 기어서 내려오는 용 한 마리, 바다를 향해 용트림을 한다
정방폭포 위에서 베틀소리 들린다 비단과 무명과 삼베가 흩날린다
무명천 할머니 베틀 노래 부르며, 베를 짜서 수의를 만들어 날린다
정방폭포 아래서 웡이자랑 들린다 비설상 적시는 폭포수 흩날린다
정방폭포 주상절리에서 피아노 소리 들린다 둥둥 북소리도 들린다
삐그덕 탁탁 베틀소리에 깨어나 수의를 입는다 바다가 날개를 편다
저녁노을에 반짝이는 윤슬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하늘 가득 빛난다
온몸에 바느질자국 선명한 선인장 마을 무명천 할머니의 선창 소리와
북촌리 옴팡밭 순이삼촌, 거친오름 비설상 변병생 어머니 후렴소리에
정방폭포 수박령(水縛霊)들 함께 밤새 부르는 아, 울음의 완창(完唱)
한라산에서 내려온 용 한 마리, 밤에도 쉬지 않고 베옷 입혀 흩날린다
쏴아아 쏴아아 쏴아아 오늘 밤에도 그날처럼 명령소리는 그치지 않고
으아아 으아아 으아아 오늘 밤에도 그날처럼 비명소리가 나를 울린다
季節(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색여지는 별을
이제 다 못헤는것은
쉬이 아츰이 오는 까닭이오、
來日(내일)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靑春(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追憶(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憧憬(동경)과
별 하나에 詩(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어머니、
어머님、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식 불러봅니다。 小學校(소학교) 때 冊床(책상)을 같이 햇든 아이들의 일홈과 佩(패)、鏡(경)、玉(옥) 이런 異國少女(이국소녀)들의 일홈과 벌서 애기 어마니 된 게집애들의 일홈과、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일홈과、비둘기、강아지、토끼、노새、노루、「프랑시쓰·쨤」 「라이넬·마리아·릴케」 이런 詩人(시인)의 일홈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北間島(북간도)에 게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러워
이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우에
내 일홈자를 써보고、
흙으로 덥허 버리엿습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버레는
부끄러운 일홈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一九四一、十一、五.)* 윤동주
그러나 겨을이 지나고 나의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여나듯이
내일홈자 묻힌 언덕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 할게외다。
* 원문에서는 이 날짜 표시가 이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이어지는 마지막 연은 정병욱의 평가를 듣고 나중에 윤동주가 추가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정방폭포 위에 감옥이 하나 있다
철창살로 만든 감옥이 하나 있다
깊은 밤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간다
스스로 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근다
정방폭포 감옥에서 책을 읽는다
달빛에 어리는 동백꽃을 읽는다
동백꽃이 진다고 슬퍼하지 마라
꽃 진 자리마다 열매를 낳는다
유채꽃을 노래하던 사람들에게
동백꽃 이름표를 달아주는 4월
동백꽃이 지면 지상에 피었다가
동백의 푸른 열매들로 익어간다
육지 것이었던 나는 30년이 지나
이제 겨우 스며들기 시작한다
정방폭포 물소리에 젖으며
달빛처럼 시나브로 스며든다
나도 이제 동백꽃 이름표를 달고
마음이 몸이 될 때까지 스며든다
달빛이 정방폭포에 스며들고
별빛이 제주바다에 스며든다
깊은 밤 함께 깊어져서 밤이 되면
여울물소리와 함께 깊이 스며들면
감옥도 물과 함께 흘러가고 말리라
태평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 되리라
나는 이제 겨우 육지 것이 아니다
나는 이제 겨우 섬사람도 아니다
나는 이제 겨우 정방폭포가 된다
나도 감옥도 정방폭포로 쏟아진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드려다 봅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펄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사나이가 미워저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사나이가 가엽서집니다。
도로가 드려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사나이가 미워서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펄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一九三九·九、윤동주
당신을 안고 하나가 되고 싶은데
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없을까
큰넓궤와 도엣궤가 하나였다고 하는데
왜 우리는 오늘도 만날 수 없을까
왜 우리는 늘 하나가 될 수 없을까
당신이 보고 싶어서 큰넓궤로 간다
당신을 안고 싶어서 도엣궤로 간다
길이 막혔을까 천장이 무너졌을까
왜 우리는 지금껏 만날 수 없을까
왜 우리는 오늘도 안을 수 없을까
동광 육거리를 돌고 돌아서 찾아간다
삼밧구석에는 삼나무 한그루 안 보이고
넓은 목장 풀밭에 엉겅퀴꽃만 무성하다
큰넓궤 앞에 학생들이 참나리처럼 모여 있다
엊그제 만났던 홍춘호 할머니도 계신다
동굴 입구의 비밀번호 자물쇠를 따고
철문을 열고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나도 당신의 비밀번호를 알고 싶다
나도 당신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안전모를 쓰고 나도 따라서 들어간다
좁고 축축한 길을 기어서 따라 들어간다
들어갈수록 어둠은 짙어지고 공명이 울린다
할머니께서 멈추라고 한다 불도 끄라고 한다
그때 사람들처럼 불빛 없이 살아보라고 한다
학생들은 무서워서 할머니 품에 안겨서 운다
나는, 불을 끄니 당신이 더욱 잘 보인다
큰넓궤를 나와 도엣궤로 간다
입구는 오히려 도엣궤가 더 크다
‘도너리굴’이란 간판도 새로 세워져 있다
용암폭포가 있다 하니 정방폭포 소리가 들린다
큰넓궤에서 5개월을 살았다는 할머니는
이제는 울지 않는다 나도 겨우 울지 않는다
봄이 혈관(血管)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아 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1942년 6월. _추정, 윤동주)
우리 애기는
아래 발치에서 코올코올,
고양이는
부뚜막(가마목)에서 가릉가릉,
애기 바람이
나뭇가지에서 소올소올,
아저씨 햇님이
하늘 한가운데서 째앵쩨앵,
( 1936년 10월, 윤동주)
선물을 받았다. 야간근무 마치고 돌아오니, 윤동주 시인이 기다리고 있다. 아들이 모셔온 시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나의 잠은 없을 듯, 윤동주 시인과 대화를 시작한다. 우리들의 봄은 올 수 있을까? 이제 막 겨울이 시작되는데, 우리들의 봄은 올 수 있을까.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이 책상에서 봄으로 피어 있다. 이 책은 집필 순서로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나는 대강 훑어보고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나는 이미 다른 정본 전집에서 순서대로 읽은 뒤라서, 이번에는 거꾸로 읽는다.
앞표지에 <봄>이 노랗게 피어있다. 윤동주 시인의 남은 작품 중에서 가장 나중에 쓰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1942년 6월에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그 이후의 작품이 어딘가에 숨어있을 확률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들은 찾지 못했다.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으니 아마도 어딘가에서 우리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혈관 속에도 윤동주의 피가 흐르고 있을까? 겨울이 이제 막 시작 되었으나 우리들에게는 또한 동지가 멀지 않았다. 동지가 멀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들의 밤의 길이도 조금만 더 길어지면 정점을 찍고 다시 짧아질 것이다. 밤이 다시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면 우리들의 봄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자, 이제 우리들의 봄이 멀지 않았다. 봄이 오기 전에 나는 먼저 참회록을 써야만 한다.
무등산이 무등이왓으로 간다
무등을 타고 무등이왓으로 간다
입석대와 서석대는 정방폭포에 들러
수박령들 모시고 무등이왓으로 간다
동광 육거리 헛묘에도 둘러보고 간다
무등산 주상절리는 하늘로 떨어지는 폭포
정방폭포는 바다로 솟아나는 주상절리
하늘도 바다도 무등을 타고 춤을 추며 간다
우리는 누구라도 존재 자체로 귀한 사람들
누구라도 살아있는 자체가 눈부신 아름다움
정방폭포 수박령들 무등이왓 지박령들 만난다
무등이왓 입구 조릿대에 리본들이 펄럭인다
붉고 푸르고 노랗고 분홍의 마음들
집터에는 작물들만 해마다 기억을 되새긴다
자리 잡은 더덕꽃이 열매를 낳는다
잘 익은 콩들이 똘망똘망 눈을 뜬다
공고판이 있던 자리에 메밀밭이 백비처럼 누워있다
밤마다 달은 달빛으로 비문을 새겼다가 다시 지우고
날마다 해는 햇빛으로 비문을 새겼다가 다시 지우고
"통일의 첫걸음이었다"라고 썼다가 지우던 메밀밭
잊지 말자고 그날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볕뉘라도 건져 올려 밥을 짓는 복조리의 마음
하늘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영혼들
지상에서 더욱 아름답게 함께 살고 싶은 사람들
무등이왓이 무등산으로 간다
큰넓궤에서 잘 숙성된 고소리술을 들고 간다
헛묘에 들렀다가 정방폭포에도 들러 무등산으로 간다
무등이왓이 무등을 타고 무등산으로 춤을 추며 가고 있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1942.1.24,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속에
내얼골이 남어있는 것은
어느王朝의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懺悔의글을 한줄에 주리자。
― 滿二十四年一介月을
무슨깁븜을 바라 살아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어느 즐거운날에
나는 또 한줄의 懺悔錄을 써야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웨그런 부끄런 告白을 했든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보자。
그러면 어느 隕石 밑으로 홀로거러가는
슬픈사람의 뒷모양이
거울속에 나타나 온다。
一月二十四日。
(1942.1.24, 윤동주)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은 창씨개명을 하기 닷새 전에 지은 시이다.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서의 부끄러움, 반성과 성찰 등이 주제로 시를 읽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슬퍼지는 시이다. 요즘은 '나라'를 생각하는 시절이다. 요즘 <서울의 봄> 영화가 우리들의 겨울을 녹이고 있다. 시인의 임무에 대하여 생각하는 요즘이다. 어떻게 되찾은 나라인데, 우리는 지금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 언제까지 분단된 나라로 그냥 구경만 하고 있어야만 할까.
<참회록> 이 시의 주제는 투철한 역사의식을 동반한 끊임없는 자아 성찰이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는 구절은 바로 이러한 자아 성찰의 자세가 극명히 나타난 것으로, 온몸을 바쳐 자신을 꾸준히 되돌아보겠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그렇게 하여 절망과 암흑의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슬픈 사람'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화자는, 마침내 욕된 역사에 대한 책임 의식과 철저한 자기 참회의 실존적 자아 성찰을 통해 조국과 민족을 위한 삶의 좌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다음은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 속 참회록에 관한 내용이다.
윤동주는 1월 29일에 창씨개명계를 신고했다. 그런데 이 ‘1942년 1월 29일’이란 날짜는 반드시 그의 시 ‘참회록’이 쓰인 ‘1942년 1월 24일’이란 날짜와 연결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그가 창씨개명계를 신고한 날은 ‘참회록’을 쓴 지 닷새만이다. 그래서 그 시기와 작품의 제목과 내용, 그리고 상황을 볼 때, 그가 ‘참회록을 씀으로써 자신의 감정과 각오를 일단 정리한 뒤에 연전에다 창씨개명계를 신고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일본 유학을 결정하고 그걸 위해선 자신의 손으로 창씨개명계를 신고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각오했을 때, 그 뼈아픈 욕됨으로 인해 쓰인 것이 ’ 참회록이라는 주장이다.
우리는 통상 시인 윤동주를 '민족 문학'으로 표현한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식민지 조선은 우리말조차 쓸 수 없었다. 20대 청년 서정주를 비롯해 내로라하는 당대 문인들이 앞다퉈 일본어로 시를 쓰고 작품을 발표했다.
그런 암흑기에 20대 청년 윤동주는 아름다운 우리말 시어로 식민지 현실 속 자신의 내면을 절절하게 성찰했다. 실제로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시절 최현배 선생이 강의하는 조선어 수업 시간이 되면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경청할 정도로 우리말을 사랑했다.
일제강점기 우리말로 시를 쓰는 것 자체가 식민 지배 자체를 거부하는 불온한 행위였다. 일제 말기 터진 '언어독립투쟁', 조선어학회 사건(1942~1943)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름다운 토박이 우리말을 모으고 연구하며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려는 행위조차 잔혹하게 탄압한 자들이 바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다. 조선어학회의 실질적 목대잡이(지도자의 순우리말)였던 고루 이극로 선생은 함흥경찰서로 압송된 지 3일 동안 일곱 번이나 물고문을 당하고 혼절했다.
잔혹한 고문의 결과 손톱, 발톱이 모두 빠지는 고통 속에 탄압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지막지한 몽둥이질과 비행기 태우기, 통닭구이로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결국 악형 속에서 이윤재, 한징은 아예 예심재판도 열리기 전 감옥에서 옥사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 윤동주는 '저항 시인'임에 틀림없다. 제국주의 식민 통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 윤동주를 우리는 '민족시인'이라 일컫는다. 항일민족시인 반열에 이름자를 새겨도 전혀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동주와 인연을 맺었던 인물 가운데엔 코뮤니스트들이 있었다. 그것도 절친이자 친분이 매우 두터운 인물이었다. 바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라는 제목으로 윤동주 유고 시집을 펴낸 강처중이다.
윤동주가 일본 유학 시절 절친 강처중에게 보내온 편지 속 시, <쉽게 씌어진 시> 등 5편과 윤동주가 일본 유학을 떠날 때 강처중에게 맡긴 <팔복> <참회록> 등 7편, 그리고 종로구 누상동 하숙집에서 함께 생활했던 5살 어린 후배 정병욱(전 서울대 교수)에게 필사본으로 남긴 19편 등 모두 31편으로 최초 시집을 발간했다.
강처중이 발문을 쓰고 시인 정지용이 서문을 써서 1948년 정음사에서 세상에 처음으로 윤동주 시를 소개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정지용은 윤동주가 가장 흠모했던 시인이다. 유학 당시 윤동주가 도쿄에 있는 릿교대학을 그만두고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으로 옮긴 것도 정지용이 다녔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초판 발행 당시 남쪽 사회에는 '백색테러'가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윤동주의 절친 강처중은 당시 <경향신문> 창립 멤버이자 조사부 주임기자로서 남로당 언론계 주요 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 엄혹한 시절, 강처중이 앞장서 주도했기에 윤동주의 시는 당당히 생명의 빛을 보게 됐다. 그렇다면 강처중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1년 앞두고 개봉된 영화 <동주>(2016)에서 강처중(민진웅 분)은 재치 있는 인물로 잠깐 등장한다. 그는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부유한 한의사 집안에서 1916년 맏아들로 태어났다. 17살 청소년 시절인 1930년대 초반, 방학을 이용해 함경도에서 농민 100명을 모아 놓고 브나르드운동을 열성적으로 실천했던 항일독립투사였다.
그는 '영어도사'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영어에 능통했던 인물로 연희전문 문과 전교 1~2등을 다툴 정도로 총명했다. 리더십도 뛰어나 연희전문학교 '문우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핀슨홀 기숙사 총사가 바로 윤동주, 송몽규, 강처중 셋이다.
그들은 서로 시작(詩作) 비평을 같이하며 깊은 우정을 나눴다. 강처중이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 발문에 쓴 내용을 보면 온순한 성품을 지닌 윤동주와 둘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이 마주 앉아 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중략)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곧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 전당포 나들기를 부지런히 하였다.
(중략)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에서 죽었다. 이역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히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하더니! 그는 나의 친구이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 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 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스러지고 말았다.
(중략)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였건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절친 윤동주와 송몽규의 안타깝고 원통한 죽음을 슬퍼하는 친구 강처중의 애달픈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강처중은 절친 윤동주가 남긴 유품을 잘 간직했다가 월남한 동생 윤일주에게 넘겨준 인물이다.
그런 연유로 절친 강처중이 없었다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 유고 시집에 담을 시를 직접 선정하고 시집 편집 자체를 강처중이 오롯이 도맡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윤동주 문학을 이야기할 때 강처중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미군정 탄압이 집중되던 엄혹한 시절, 강처중은 남로당 지하활동을 수행하는 와중에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펴냈다. 오로지 절친 윤동주를 추모하며 윤동주의 나라 사랑과 우리말 사랑을 기리고 세상에 알리고자 애썼다.
다시 말해 시인 윤동주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한국 문학사에서 윤동주의 위상을 정립한 인물이 바로 강처중인 셈이다. 강처중을 통해서 윤동주가 시인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처중은 해방 공간 남로당 언론계 비선 책임자였다. 이육사 동생 이원조는 좌파언론 <현대일보> 편집국장이었으며 박치우는 <현대일보> 발행인 겸 편집주간이었다. 그들 셋은 해방 공간 남로당 언론계 거물급 인물이었던 셈이다.
강처중의 죽음에 대한 명확한 자료는 없다. 일설에 따르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보도연맹원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양주동, 정지용, 황순원과 함께 출옥했다고 한다. 출옥 후 집에서 두 달을 요양한 뒤에 아내에게 공부를 하겠다며 소련으로 갈 것이라며 떠났다 한다.
그런가 하면 이승만 정권에서 1953년 언론인 '정국은 간첩 사건' 배후로 연루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한국전쟁 시기 월북한 뒤에 북쪽에서 김일성이 남로당을 숙청할 때 비슷한 시기 숙청당했을 거라는 일설도 있다.
분명한 역사 사실은 강처중이 윤동주의 절친이었다는 사실과 그가 해방 공간 남로당 언론계를 담당한 주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강처중에 의해서 윤동주 시인 최초의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발간됐다는 점이다.
물론 1955년 증보판을 발행할 때는 강처중의 발문과 정지용의 서문은 완전히 삭제됐다. 반공 파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이승만 정권 1950년대를 생각하면 '납북' 문인 정지용조차 불온한 인물로 대중의 기억에서 애써 지워버렸던 시절이었으니까.
요컨대 윤동주가 한국 현대 시문학사에 혜성처럼 나타나 샛별 같은 존재로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결정적인 인물이 바로 절친 코뮤니스트 강처중이라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말기 사방에서 탄압이 죄어오던 그 시기 윤동주가 친하게 친분을 쌓았던 인물이 철학자 박치우였다. 박치우는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한 1세대 철학자다. 한국 철학계 거두인 박종홍(전 서울대 교수)과 신남철(전 김일성대 교수) 그리고 박치우는 서양 철학을 함께 공부한 철학 1세대에 속한다. 경성제대 재학 시절 박치우는 일본인 철학 교수로부터 '천재 철학자'로 높게 평가받았던 인물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서울대 철학 교수로서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한 박종홍은 알아도 일찌감치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했던 신남철은 잘 모른다. 아니, 신남철은 어느 정도 알아도 박치우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구나 박치우가 윤동주와 친분이 두터웠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전무하다.
이는 아마도 찰학자 박치우가 코뮤니스트로서 해방 공간 박헌영이 북쪽 김일성을 만나러 갔을 때 세 번이나 수행했던 비서로 남로당 핵심이론가였다는 이념 문제 때문일 가능성이 짙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동안 윤동주와 친분이 두터웠던 철학자 박치우가 아예 대중의 기억에서 배제된 이유는 그런 배경을 안고 있다.
박치우와 윤동주가 교분을 쌓게 된 계기는 윤동주가 숭실중학교를 다닐 당시 박치우는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임했던 시기와 연관이 깊다. 윤동주는 숭실중학 시절인 1935년 6월 <동아일보>에 박치우가 소개한 '국제작가대회' 행사에 큰 관심을 보였다. '국제작가대회' 행사는 1930년대 중반 무솔리니, 히틀러, 프랑코 등 유럽 파시즘이 대두하자 국제사회 명성이 자자했던 작가 업튼 싱클레어, 버나드 쇼, 막심 고리키, 토마스 만, 로맹 롤랑 등 38개국 230명 작가들이 참석해 파시즘에 반대한 행사였기 때문이다.
둘의 깊은 친분은 1935년 9월에서 1936년 3월까지 숭실학교 '학생 YMCA 문예부'가 발간했던 <숭실 활천>을 통해서 이뤄졌다. 박치우도 윤동주도 황순원도 이 잡지에 글을 쓰면서 교류가 시작되었다. 숭실학교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굽히지 않으면서 학교는 강제 폐교 조치를 당했다.
그러나 1938년 4월 윤동주가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할 당시 조선일보 학예부에 작품을 써 보냈는데 그 당시 박치우는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서 친밀한 교류는 계속되었다. 둘만의 친밀한 관계는 연희전문 문과 시절 내내, 그리고 1942년 봄 윤동주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윤동주와 박치우의 친밀한 관계는 윤동주가 남긴 유품에서 추정해 볼 수 있다. 윤동주가 남긴 유품 가운데 박치우가 1941년 7월 17일 윤동주에게 보낸 엽서가 있다. 그 엽서에는 제기동 "(자신의) 집으로 찾아올 때 집에 있는 개를 조심하라"며 자상하게 주의를 당부한 글귀가 남아 있다.
실제로 누상동 하숙집 당시 하숙집 주인이자 소설가 김송이 <인문평론>에 쓴 희곡작품과 박치우의 평론을 윤동주는 애독했다. 1942년 윤동주가 일본 유학을 떠나고 박치우 역시 항일독립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향했다. 1943년 봄 박치우는 사회주의자 이육사와 함께 경성콤그룹 관련 모종의 항일혁명활동을 실천하고 있었다. 몇 개월 후인 1943년 7월엔 윤동주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본인 형사 고오로기에게 체포돼 투옥된다.
그나마 강처중은 송몽규의 조카 송우혜 작가로 하여금 조금은 그 존재가 알려졌던 인물이다. 그렇지만 박치우의 존재는 3년 전 김성연 교수의 연구논문 <윤동주 평전의 질료와 빈 곳 - 윤동주와 박치우의 서신, 그 새로운 사실과 전망>을 통해 조금 실체가 드러났을 뿐이다. 이 모든 게 분단이 자초한 굴곡진 현대사와 관련이 깊다. 민족 문학이든, 항일투쟁이든, 역사 연구든, 우리말 연구 등 모든 게 반쪽짜리였으니까 말이다.
강처중과 박치우, 윤동주의 벗을 아십니까, 분단 질서가 낳은 '반쪽짜리 한국문학사' ① (23.03.01, 하성환)
시의 씨앗
바다가 하늘의 서랍을 열었다
하늘의 서랍 안에는
하늘의 눈물이 가득 담겨있다
눈물과 함께 담겨 있을
하늘의 비밀문서를 찾으려고
오늘도 바다는 서랍을 열고 있다
정방폭포 서랍이 끝없이 열린다
하늘도 바다의 서랍을 열었다
바다의 서랍 안에는
바다의 어둠이 가득 담겨있다
어둠과 함께 담겨 있을
바다의 비밀문서를 찾으려고
오늘도 하늘은 서랍을 보고 있다
주상절리 서랍이 여러 곳에 있다
바다는 마래터널 서랍도 열어보고
하늘은 무등산 서랍까지 열어본다
* 우리는 이제 다 함께 힘을 모아서, 숨어 있는 서랍을 열어야만 한다. 숨어 있는 마지막 서랍을 찾아서, 우리는 이제 태평양을 건너가야만 한다.
* 나는 당신이 잃어버린 마을이다. 잃어버린 마을에서 나는, 무너진 돌담을 짚고 일어선다. 흔들리는 조릿대를 붙잡고 일어선다. 바람에 섞여있는 정방폭포 소리에 젖으며 일어선다. 멀리서 들려오는 당신의 향기로운 목소리가 나의 그림자를 일으켜 세운다. 당신의 무지개는 잊지 않고 잃어버린 마을까지 찾아온다.
부마에서 그랬고
광주에서 그랬고
사람들은 지금도 사람들에게 총을 쏜다
윤동주 시인은 습작노트 2권과
자선 시고집 1권을 남겼다
윤동주는 송몽규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무렵부터
날짜를 명기해 가며 습작품을 보관했다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
『창(窓)』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불빛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별빛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꽃빛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월라봉 아래에서 산방산을 향하여
나누리 파크에 꽃으로 피어납니다
언제라도 스위치만 올려 주십시오
그리움의 전깃줄 속으로 달려가서
환하게 켜지는 사랑이 되겠습니다
사랑은 날마다 꽃으로 피어납니다
당신은 날마다 꽃으로 피어납니다
당신은 언제나 꽃길만 걸으십시오
아름다운 나라에는 공원이 많습니다. 공원이 많은 나라는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국립공원이 많은 나라, 도립공원이 많은 나라, 시립공원이 많은 나라, 민간공원이 많은 나라, 크고 작은 공원들이 많은 나라가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서귀포는 공원이 많은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들은 아름다운 공원의 주인입니다. 문만 열고 나가면 공원들이 펼쳐져 있고 아름다운 자연이 황홀하게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 이제 우리 함께 공원을 걸어볼까요. 마음 한 번 돌이키면 우리들은 모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의 주인이 됩니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정원은 언제나 우리들을 주인으로 모시고 기다립니다. 소유와 소비를 넘어 우리들은 이제 공유와 상생의 길을 함께 가야만 합니다.
고구마꽃이 피었다
고구마꽃이 젖을 물리고 있다
꼬리박각시나방이 젖을 빨고 있다
고구마가 땅 속에서 젖을 준다
땅 속에서 어머니는
아직도 나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