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사월은 이제 하루도 남지 않았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달력에 적혀있다.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 생일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음력으로 4월 8일은 후대 사람들이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여 인위적으로 만든 날일 가능성이 많다. 부처님 살아계실 당시에는 지금처럼 10진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0’이라는 숫자를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10진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부처님의 공(空) 사상이 없었다면 0이라는 숫자는 발명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인간이 공(空)이라는 개념과 0이라는 숫자를 발명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세상과는 엄청나게 다른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을 것이다.
부처님이 살아계실 당시에는 대부분 4진법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불교의 많은 경전들에는 4의 배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불교의 핵심사상이라 할 수 있는 4성제도 그렇고 8정도도 그렇다. 물론 8만대장경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불경에서 16이란 숫자는 특별한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4진법과 함께 7진법도 쓰이는 경우가 많이 있었는데 그 흔적이 남아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요즘도 많이 사용하는 일주일의 개념과 49재를 지내는 이유가 그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이면 생각나는 몇 장면의 그림이 있다. 나는 젊은 시절에 절에 가서 연등 만드는 일을 많이 했었다. 둥그런 연등에 종이로 만든 연꽃잎을 밤새 붙이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연과 수련을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연과 수련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나도 옛날에는 수련이 연꽃인 줄 알았다. 요즘도 절에서 만들어지는 연등의 모습은 연보다는 수련에 가깝게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철이 든 다음에는 영화에서 본 한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80년 5.18 당시 금남로에 설치되어있었던 ‘부처님 오신 날’ 대형 간판을 잊을 수가 없다. 물론 그날 금남로에는 십자가들도 많이 있었다. 우리들의 하느님과 우리들의 부처님은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코로나 19 이전과 이후로 많은 변화를 겪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도 참 궁금하다. 코로나 19를 함께 극복하면서 우리들의 생각들도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는 4월에 가장 시급하고 가장 중요한 의미 있는 날이 생겼다. 4월 27일은 판문점 선언 기념일이다. 우리들이 기필코 이루어야 할 통일의 발판이 마련된 날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사삼도 사일육도 사일구도 모두가 사이칠을 낳기 위해서 거처야만 했던 숙명이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너무 많은 희생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이렇게 중차대한 시기에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와 함께 사는 고양이들이 꿈속까지 따라서 들어온다. 낮에 보았던 고양이들이 이제는 내 꿈속까지 드나들기 시작한다.
검은 고양이와 호피무늬 고양이가 있다. 꼬리가 잘린 호피무늬 고양이가 두 마리 새끼들을 잘 기르고 있다. 작년에도 일곱 마리 새끼를 잘 낳아 잘 길렀던 고양이다. 올해도 다섯 마리 새끼를 낳았는데 나에게 아지트를 들켜 이사를 하는 바람에 세 마리의 새끼를 잃었다. 세 마리 새끼를 어디에서 잃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 새끼들이 아주 어릴 때 나는 청소를 하다가 그들의 아지트를 무심결에 건드리고 말았다. 그러는 바람에 어미가 어린 새끼들을 물고 어디론가 이사를 떠나고 말았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 새끼들이 좀 자란 다음에 내 곁으로 다시 이사를 왔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새끼들이 두 마리뿐이었다. 밖에서 그 고양이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작년과 달리 올해는 호피무늬 어미 고양이가 유난히 더 예민해져 있다. 평소에 잘 지내던 검은 고양이와도 자주 으르렁거린다. 새끼들과 함께 있다가 나를 보면 어미는 다른 쪽으로 뛴다. 나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다. 그 틈에 새끼들은 안전한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어미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자꾸만 내 앞에서 얼쩡거리며 나를 따라오라고 한다.
그 호피무늬 고양이를 따라가니 숲 같은 정원이 있는 아름다운 집이 나온다. 그 집 거실 창문 앞에는 길 고양이들 먹으라고 고양이 사료와 물그릇이 놓여 있다. 창문 안을 들여다보니 흰 고양이 한 마리가 빛나는 털을 다듬고 있다. 호피무늬 고양이와 그 흰 고양이는 서로 잘 아는 사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거실 창문 밖에는 다른 길고양이들도 몇 마리 더 있다.)
어쩌면 그 둘은 서로를 부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호피무늬 고양이는 집 안에 사는 흰 고양이의 안락함을 부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집 안의 흰 고양이는 호피무늬 고양이의 자유를 더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흰 고양이 혼자 있는 거실에 글쎄 텔레비전이 켜져 있다. 집안의 흰 고양이가 글쎄 ‘자현 스님과 떠나는 붓다 로드’를 시청하고 있다.
나는 꿈속에서 꿈인지 생시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컨테이너 지붕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검은 고양이와 호피무늬 고양이가 또 다투고 있는 듯, 밤하늘을 물어뜯고 있다.
고양이들의 다급한 발자국 소리에 깨어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꿈의 무대가 서울 남대문시장이다. 남대문시장 길거리에 침대가 나란히 있다. 병실처럼 침대 사이에 커튼이 쳐져 있다. 장도 보지 않고 함민복 시인이 누워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장을 본 이진명 시인이 침대에 누워 시를 읽는다. 시장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안개가 자욱하다. 죽음을 생각하며 쓴 시라며 백호를 노래한다. 배호야 배호야 노래 한 번 불러보렴. 나는 백호를 배호로 듣는다. 그런데 안개가 갑자기 백호가 되어 달린다. 백호를 부르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며, 백호야 백호야 힘차게 달려오렴. 백호야 백호야 힘차게 나에게로 달려오렴. 안개 자욱한 남대문 시장의 아침이 백호 발자국으로 가득하다. 나는 느닷없이 김기택 시인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하지만 나는 시인의 안부를 물어보지 못하고, 나의 휴대폰에 충전을 시켜보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러다가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백호 발자국 소리 속에서 나희덕 시인과 정끝별 시인이 함께 나온다. 시장바구니를 든 나희덕 시인이 별을 든 정끝별 시인을 나에게 소개한다. 그리고 나의 침대 곁 의자에 앉아 나의 손을 잡는다. 그러자 갑자기 나의 몸에서 산목련 꽃이 피어난다.
꿈에서 깨어나 나는 얼른 꿈속에서 보았던 것들을 그리고 적는다. 고양이 꿈은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시인들 꿈은 왜 꾸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단서를 찾을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엉뚱한 꿈이다. 더구나 나는 이진명 시인과 정끝별 시인을 직접 만나본 기억이 없다. 나희덕 시인과 김기택 시인은 아주 오래전에 인사동 평화만들기에서 몇 번 만난 기억이 있지만 왜 갑자기 꿈속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알 수 없다. 그 시인들은 왜 내 꿈속으로 들어왔을까? 그 원인을 나는 도저히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또한 이렇게 나의 꿈 이야기를 그 시인들 허락도 없이 쓰는 것이 실례가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시인들이 내 꿈속에 나타난 원인을 찾아보기 위해서 일단 사실대로 기록해두기로 한다. 대강 기록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니 연못에서 연의 뜬 잎들이 물 위로 올라오고 있다. 연꽃을 보려면 좀 더 기다려야만 한다. 목련꽃도 이미 다 지고 없으니 오늘은 산목련을 보기 위해 산으로 가야겠다. 산목련 나무 아래서 나 홀로 함박꽃으로 피어 보고 싶다.
연꽃이 불교의 상징으로 굳어지게 된 데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이른바 부처님의 '염화시중(拈華示衆)'의 고사라고 할 것이다.
《무문관(無門關)》이란 책에는 부처님이 그의 후계자를 선정하는 방법으로 어느 날 영산(靈山)에서 제자들을 모아 놓고 그들에게 꽃을 꺾어 보인다. 아무도 그 행위의 뜻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오직 가섭(迦葉)만이 부처님이 든 꽃을 보고 빙긋이 웃었다. 꽃과 웃음이 동일한 의미라는 것이다. 그때 부처님이 가섭을 향해 "네가 법이 무엇인지를 아는구나"라고 말하고 그에게 법통을 이양했다는 이야기다. 흔히 이 광경을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