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더미에 깔려 죽기 직전에 겨우 눈을 떴다. 방 안에 너무 잡동사니가 많다. 방 밖에도 너무 많은 잡동사니들이 있다. 집안 가득 쓰레기를 산처럼 쌓아둔 사람을 텔레비전 화면에서 본 기억이 난다. 내가 꼭 그 모양 그 꼴이다. 동네 사람들의 신고를 받고 찾아온 동사무소 직원의 설득으로 겨우 쓰레기를 치우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집안 구석구석 온통 쓰레기들로 가득하여 밥 먹을 공간도 없어진 그야말로 쓰레기 산을 본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나의 방 안이 꼭 그 꼴이 되어있다. 내가 사는 방이 그러니 당연히 내 마음속도 그렇게 잡동사니로 가득하여 숨이 막힌다.
그런 방에 글쎄 개개비 둥지도 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둥지들은 지붕이 없다. 밥그릇처럼 생긴 빈 반달이 나뭇가지 사이에 얹혀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지붕이 있는 둥지도 있고 입구가 아래쪽에 있는 둥지들도 있다. 어느 나라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수없이 많은 둥지들이 아파트 대단지처럼 나무 가득 매달려있는 모습을 텔레비전 화면에서 본 기억도 있다.
저 개개비 둥지는 가까운 화순항 입구 갈대밭에서 가져왔다. 지금은 대부분 없어지고 말았지만 꽤 넓은 갈대밭이 있었다. 나는 그 갈대밭에 들어가 놀기를 좋아했었다. 개개비들은 그 연약한 갈대들 사이에 둥지를 틀곤 하였다. 적당한 거리의 갈대와 갈대들을 연결하여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그 작은 둥지 속에서 서너 개의 알을 낳고 부화한 새끼를 잘 길렀다. 개개비 어미는 지붕이 없는 둥지에서 알과 새끼들의 지붕이 되어 주었다. 새끼들이 스스로 날고 먹이를 스스로 잡아먹기 시작하면 미련 없이 둥지를 버렸다. 그렇게 버려진 둥지를 나는 하나 가져왔었다. 사람들은 새들을 생각한다고 새집을 지어주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대부분 지붕 있는 새집을 지어주는 경우가 많다. 새들이 좋아하는 숲이나 갈대밭을 파괴하고 대신 지붕 있는 새집을 지어주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새들에게는 숲이나 갈대밭만 있어도 좋을 것이다. 새들은 어쩌면 지붕이나 창고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새들은 지붕이나 창고가 없어도 인간들보다 더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의 주인은 어쩌면 인간들이 아니라 새들일 확률이 더 높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 빈 개개비 둥지를 나는 왜 가져왔을까? 개개비의 따뜻한 가슴을 담아주던 개개비 둥지, 개개비가 떠난 다음에도 하늘을 담고 별빛을 달고 달빛을 담고 파도소리와 바람소리까지 담아주던 저 작은 개개비 둥지. 나는 어쩌면 진작 나의 병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새처럼 가볍게 날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들만 남기고 모두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붕도 없는 저 개개비 둥지를 보면서 나도 새처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창고가 따로 없어도 굶어 죽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개개비가 나는 어쩌면 부러웠을 것이다. 아니, 나는 어쩌면 그런 개개비를 나의 도반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개개비가 나에게 유산으로 남긴 둥지를 나는 어쩌면 내 마음을 먹여 살리는 발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동안 나의 병을 고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새벽 네 시가 조용히 눈을 뜬다. 뻐꾸기가 울고 휘파람을 길게 잘 부는 어떤 새가 길게 휘파람을 불고 있다. 나의 방문 앞 나무 위에 둥지를 틀고 사는 까치 식구들의 잠꼬대 소리도 들린다. 가까운 산사에서 종소리가 내려와 나를 다시 한번 깨운다. 산방산에서도 내려오고 월라봉에서도 내려온다. 산사의 빈 방을 생각한다. 꼭 필요한 것만 있고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산사의 빈 방을 생각한다. 가장 깨끗하게 비울 수 있을 때 가장 넓게 살 수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고, 새벽부터 방을 치우기 시작한다. 나는 그동안 내가 모아 온 쓰레기들 때문에 나를 잃어버리고 살았었구나. 쓰레기들에 묻혀 나는 보이지 않고 오직 쓰레기들만 보이는구나. 나는 그동안 철저한 ‘저장강박증’ 환자로 살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