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호
1988년 《문학사상》 신인발굴 당선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이어도공화국 序 - 백 년 동안의 꿈과 사랑』
『이어도공화국 01 - 땅의 뿌리 그 깊은 속에서』
『이어도공화국 02 - 잠시 머물다 가는 이 지상에서』
『이어도공화국 03 - 길 끝에 서 있는 길』
『이어도공화국 04 – 꿈섬』
『이어도공화국 05 – 우리들의 고향』
『이어도공화국 06 – 서천꽃밭 달문 moon』
1. 징검다리
2.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
3. 길이 있는 풍경
4. 사과꽃망울
5. 나무 발전소 1
6. 세한도
7. 덜컥
8. 시집과 갈치의 가격
9. 고구마 꽃
10. 다랑쉬(큐알코드 영상시)
<나의 시론>
눈물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시와 시론
하나
길이었다 덜 자란 몸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어머니는 방물을 파셨고 새벽 샛강의
입김 자욱한 안개 속으로 떠나시곤 했다
나는 담장 밑에 펼쳐놓은 꼬막껍질에
쑥국 끓이기 놀이를 하며 자랐다
노을만 어렵게, 어렵게 감아 들이던
바람개비가 스스로의 바람결을 가늠할 수 있을 때
물오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파랑 간짓대 들고
오리 떼를 몰아내던 골목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머니 뒷모습을 지우던 안개 속으로
하얀 꽁무니가 사라지고
나도 그 속으로 따라 날아가고 싶었다
둘
할아버지 산소가 보이는 징검다리 사이로 햇살이
주검처럼 부서지며 흘러갔다 하류에서
한 몸으로 몸을 섞기 위해, 취로사업 나가신
아버지가 무너진 둑에 묻히고 작업복이 천수답
허수아비에 내걸리던 날도 나는 그 저수지 둑에서
삐비 꽃을 뽑아먹고 돌아오는 길
가로수 구멍 속에 몇 개의 돌을 더 던져 넣었다
어머니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줄도 몰랐다
그 해 여름 장마는 담장의 발목을 적셨고
두꺼비 같은 우리 식구들은
한밤중에 회관으로 기어 올라갔었다
셋
학교 앞 코스모스로 기다리기를 즐겼다
하학종소리 사이로 보이는 형의 검정고무신 앞은
발가락이 먼저 나와 있었고 생활보호대상자
가족 앞으로 달려오는 옥수수빵과 건빵
나는 그것이 좋았다 우리는 뿔 필통 속 몽당연필로
흔, 들, 리, 며, 징, 검, 다, 리, 건, 넜, 다,
끈이 풀리는 소리로 흘러가는 여울물 소리는
우리를 다시 묶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징검다리를 잘도 건너 다녔다
넷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끼고 기차놀이하던
우리들은 그 새끼줄 속에서 자유로웠다
우리들의 기차는 징검다리를 비로소 건너 다녔고
오후의 서툰 기적소리 울리며
동구 밖까지 나가 놀던 소아마비 동생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찾다가 찾아보다가
어린 집배원이 된 큰 형도
동생의 소식은 가져오지 못하고 한 떼
건너가는 동네 아이들만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다섯
여울물 소리는 끈이 풀리는 소리였고
또다시 묶이는 소리였다 방직공장에 취직했던
누이가 파란 눈의 아이를 보듬고 돌아와
빨래터에는 방망이질 소리가 잠들지 않았고
헛발 짚은 어머니는 물속에 더욱 자주 빠지셨다
……………… 배고픔과 어머니 ………………
들판에 흐드러진 달맞이꽃 사이로 그렇게 어머니는
젖은 보름달을 이고 늦게 돌아오시곤 했다
― 어머니, 시인은 월급이 없어요
참으로 오랜만에 들길을 간다
두엄자리 곁에 세워진 아버지의
낡은 지게를 지고 저물녘을 간다
참깨 베러 가신 어머니의 산밭으로
늦은 마중을 간다 오랜만에
바람을 비껴 여름 한쪽 끝으로
산길을 오른다
노을이 차마 곱게 익는다
일찍부터 외항선을 탄 만수
뱃사람이 된 만수네가 새로 장만한
논을 바라보며 들길을 간다
일곱 번씩이나 떨어지고도 다시
행정고시공부를 시작했다는 현길이,
이미 기울어 버린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팔아넘긴 논배미를 지나
쓸쓸하게 걸어간다 새를 쫓는 깡통소리와
반짝이는 반짝이의 마음들이 노을 속으로
새를 날려 보내며 또 내일을 염려하는 가슴을
가다듬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허수아비는
쓰러지지 않고 동그랗게 질린 비닐 얼굴들이
하늘까지 닿으려는 마음으로 솟아오르곤 했다
콩밭으로 바람이 기어들어가고 밤은
들쥐처럼 숨어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어머니와 산길을 내려온다 가끔
고개 치켜드는 벼 포기 사이로 추억들이
발소리를 숨죽이며 기어 나왔다 나는 참깨를 지고
어머니는 토란대를 이고 오셨다 가슴조인
달빛이 풀어지고 우리는 하염없이 걸어 내려온다
― 어머니, 저 이제 시인이 되었어요
― 그래, 시인이 뭣 허는 것이다냐
― 예, 지금까지 제가 되고 싶었던 것이에요
밤낮을 밤으로만 지내면서 말이에요
― 그러냐, 그럼 이제 취직이 됐단 말이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것이 아니에요
― 그럼, 시인이 뭣 하는 것인디 그러냐
오랜만에 니가 웃기까지 하고 말이여
― 예, 앞으로
우리들의 고향을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노래? 그럼 인쟈 테레비에도 나온다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게 아니에요
― 그라믄, 시인 한 달 월급이 얼마나 된다냐
먹고 살만한 직업이다냐
요즘 시상에는 돈이 최고드라
봐라, 만수는 돈 있승께 다들 걱정허는
장개도 쉽게 간다드라
돈 많은 이쁜 색시가 낼 모레 온다드라
― 어머니, 하지만 저는 그렇지를 못해요
앞으로 어머니를 팔지도 몰라요
앞으로 고향을 팔아먹을지도 몰라요
시인은 가난한 직업이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잖아요
마음을 갈고닦아 영혼을 맑게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더욱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우리들의 이야기가 들판 가득 출렁일 때 달빛은 우리가 걸어온 들길을 따라오고 있었다 어머니, 저는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머니와 고향을 위하여 우리들의 생활을 팔아먹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땅의 눈물 같은 시 한 편으로 살고 싶습니다
나는 밭 가운데 너뷔바위에 앉아 있었다
아침 시선은
고춧대 하나에 꽂혀 있었다
외톨이처럼
뽕나무 가지 버팀목이 없었다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고춧대가 휘청거렸다
또 한 마리가 날아왔다
고춧대가 드디어 꼬꾸라졌다
새는 약속처럼
한꺼번에 떠났다
고추나무는
끝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그러한 밭에서 걸어 나온 길로
살벌한 평화처럼
젖은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득음을 위한 독공이 한창이다
사과나무 속에서
고려청자 굽는 소리 들린다
조선백자 깨뜨리는 소리 들린다
수없이 많은 사금파리들이 쌓인다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를 미리 빚어보고 구워보고 깎아본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벚꽃
성질 급한 봄꽃들이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도
사과나무는
진득하니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만을 만들고 있다
울컥, 울혈을 토해내고 있다
세상에는 돌아가는 것들 투성이다
스스로 모래시계 되는 겨울나무를 본다
하늘과 땅의 영혼이 뒤집힌다
발전소, 발전기와 터빈이 한 몸으로 돌아가고 거대한 보일러 속에서 파이어 볼이 돌아간다 그 속에서 사랑과 이별을 껴안은 계절이 돌아가고 물과 불이 돌아가고 해와 달이 돌아가고 삶과 죽음이 돌아가고 나와 하느님이 함께 돌아간다
온갖 것들이 돌아가는 발전소에서 나는
나무 조상들을 태워 별빛을 만든다
번쩍, 번개가 하늘의 소식을 전한다
하느님은 오늘도 야간근무 하고 계신다
땅속 오래 묻혀 있던 나무들
부관참시 지켜보던 별이 눈을 찔끔 감는다
나무의 뿌리에도 발전소가 있어
물관부를 타고 오르내리는 것들
나무 발전소가 세상을 돌리고 있다
심장내과 복도에는 어둠이 쌓여있다
나의 하느님이신 원장님께서 문을 열고 불을 켠다
잠시 후에 천사들이 들어오며 출근 체크를 한다
피를 뽑아 검사를 하는 동안 나는 세한도를 본다
늙은 한 그루는 소나무가 분명한데
젊은 세 그루는 소나무일까 잣나무일까
나무들보다 둥그런 문이 더 궁금하다
보름달 안에서 반달이 보인다
초승달과 그믐달도 보인다
그 문에서 나의 반월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동맥판막 반월문에서 시계소리가 들린다
반월산에 나란히 누워계신 반달 두 개도 보인다
엎어놓은 반달의 잔디 위에도 눈이 쌓여 있으리라
아직은 나의 반달문이 잘 열리고 잘 닫히고 있으리라
금속으로 만든 반월 문짝이 빠지는 일도 있으리라
문짝이 칼이 되어 대동맥을 갈라버릴 수도 있으리라
문을 지나가는 피가 떡이 되어 핏줄을 막아버릴 수도 있으리라
혈전이 뇌로 가서 뇌졸중을 일으킬 수도 있으리라
비트코인처럼 빛나던 문이 악귀의 입처럼 변할 수도 있으리라
아, 나는 이제 심장에서 나가는 문이 가장 무섭다
아, 나는 이제 세상으로 나가는 달이 가장 무섭다
나는 나의 하느님에게 십계명을 받아 들고 나온다
세한도 밖으로 폭설은 멈출 줄 모르는데
늙은 소나무 한 그루 아직은 잘 살아가고 있다
장무상망(長毋相忘), 나의 묽은 피로 붉은 낙관을 찍는다
<몸>이라는 글씨를 써 놓고 들여다본다
두 개의 입 같기도 하고 창문 같기도 하다
좀 더 자세히 보니 두 장의 벽돌 같기도 하다
몸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것 같은데
나는 도대체 내 몸 안을 볼 수 없다
콘크리트 같은 내 몸 안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내 몸 안에서
암 덩어리라도 살림을 차린 것일까
이러다가 덜컥 내가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처음부터 아픈 몸으로 태어나
지금껏 잘도 버텨왔는데
이러다가 덜컥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덜컥 가게 된다면
가장 아쉬운 것이 무엇일까
이렇게 덜컥 떠나야 한다면
가장 슬픈 것이 무엇일까
구속과 단식을 반복하고 계시는
양윤모 선생님 영상을 보며
강정과 해군기지와 사삼과 평화와
그리고 삼월과 사월과 오월을 넘어
시와 시인의 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한다
나는 지금껏 건강을 핑계로 몸만 따라다녔다
내 마음이 주인이 되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덜컥 죽기 전에
나도 한 번쯤
몸이 마음을 따라가는 날이 오면 좋겠다
벽돌 한 장 내려놓으니
몸이 마음이 된다
창문 한 번 열어보니
몸이 마음으로 열린다
<몸> 글자를 지우고 <마음>이라는 글자를 덜컥 쓴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이 덜컥 보이기 시작한다
윤동주 시인의 시집과 전집과 관련 책들을 읽다 보니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을 사야만 했다 제주도 도서관에는 한 권도 없다 3년이 더 지났으니 희망도서로 신청할 수도 없다
1999년에 발행한 시집이
5만 원이면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고
오후에 산책을 나간다
윤동주 시인은 습작노트 2권과 자선 시고집 1권을 남겼다 윤동주는 송몽규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무렵부터 날짜를 명기해 가며 습작품을 보관했다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
『창(窓)』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월대천 징검다리에서 왜가리 한 마리
여울물을 바라보며 추위에 떨고 있다
왜가리의 식생활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징검다리 건너지 않고 외도포구로 간다
외도교 아래를 지나 대원암 쪽으로 간다
눈이 내리는 바다에는 바람까지 거세다
바다에 누워계신 관세음보살을 씻는 파도가
해안까지 멀리 날아와서 나를 적신다
안경과 입술에도 소금 맛이 스며든다
파도가 날아오르는 연대포구에서
청해수산 홍보영상을 촬영 중이다
통통한 갈치가 싱싱하게 빛나고 있다
파도처럼 바다로 뛰어들 것 같은 갈치가
한 마리에 5만 원씩이라고 한다
아, 갈치도 참으로 비싸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돌아서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한 생명이 겨우 5만 원 이라니!
한 시인의 삶이 겨우 5만 원 이라니!
고구마 꽃이 피었다
고구마 꽃이 젖을 물리고 있다
꼬리박각시나방이 젖을 빨고 있다
고구마가 땅 속에서 젖을 준다
땅 속에서 어머니는
아직도 나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다랑쉬에는 다랑쉬마을이 들어있다
오름은 움푹해진 백록담도 품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평생 달과 함께 살았다
집들이 모두 불타고 굴속으로 들어갈 때에도
달과 함께 가재쑥부쟁이와 시호꽃을 피웠다
사람들이 다랑쉬굴 안에서 연기가 된 뒤에도
달은 잊지 않고 찾아와 섬잔대와 송장꽃을 피웠다
무쇠솥과 항아리와 놋수저와 신발만 남기고
열한 명이 들려 나와 바다로 떠난 이후에는
더 이상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어둠 속에는 아홉 살 아이가 울고 있는데
벗겨진 신발 찾으러 들어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잠겨버린 어둠은 열리지 않는다
달이 찾아와 소리쳐 불러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곁에 있는 용눈이오름 아끈다랑쉬오름 높은오름
돛오름 둔지오름이 힘을 합쳐도 문을 열 수가 없다
남아있는 늙은 팽나무가 그저 바라볼 뿐
무너진 돌담도 집터도 우물터도 안으로 눈물 흘릴 뿐
달을 따라서 달의 고향으로 온 나도 그저
서로의 얼굴만 바라다볼 뿐
나는 요즘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고 있다. 윤동주 시인은 시와 삶을 완벽하게 일치시킨 시인이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하여 삶과 시를 함께 성장시킨 시인이다. 윤동주 시인과 깊이 대화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나의 시와 나의 삶을 함께 성장시키고 싶다. 윤동주 시인은 아직도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나는 그 우물 속에서 막힌 물길을 다시 뚫고 있다. 나는 어릴 적에 아프신 아버지 대신 나가서 울력을 하곤 했다. 장마에 떠내려간 징검돌을 제자리로 옮겨서 징검다리를 다시 놓기도 하고 마을의 공동우물 청소도 정기적으로 울력으로 했다.
상수도 시설이 없었던 시절에는 공동우물이 참으로 소중했다. 지붕도 튼튼하게 잘 만들어 주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해마다 깊은 우물 속 청소를 하였다. 울력 나온 사람들 중에서 언제나 내가 가장 어렸다. 그래서 내가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평소에 우물물을 두레박으로 뜰 때에는 그냥 맨손으로 두레박줄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공동우물 대청소를 할 때에는 우물집 대들보에 도르래를 설치하고 큰 양동이를 매달아서 빠른 속도로 물을 퍼냈다. 우물 바닥이 보이면 가장 어린 내가 그 양동이를 타고 내려갔다. 혹시 막혀있는 물길이 있으면 다시 뚫어주고 이끼까지 깨끗하게 청소를 했다. 낙엽 등의 이물질을 제거하고 쌓인 뻘들도 걷어내고 나는 다시 양동이를 타고 올라왔다. 양동이를 탄다고 썼지만 사실은 양동이를 매단 밧줄을 붙잡고 올라왔다.
검불 같은 시가 많아지고 따개비 같은 시들이 많아지는 시대에 좀 더 의미 있는 시를 쓰기 위하여, 좀 더 치열하고 좀 더 생명력 있는 시를 쓰기 위하여 고민하는 요즘이다. 나의 꿈과 나의 삶과 나의 글이 하나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의 시와 나의 글에 <꿈삶글>이란 이름도 붙였다. 그리하여 나는 의미 있는 시인들을 처음부터 다시 깊이 만나고 있다. 올드포엠, 윤동주 시인부터 만나고 있는데 모던포엠에서 생각지도 못한 초대장이 왔다. 올드와 모던의 만남이다. 나는 아직 월간 모던포엠을 잘 모른다. 나는 아직 월간 모던포엠 발행인 전형철 선생님을 잘 모른다. 자신을 시 비렁뱅이로 자청하며 돈수백배 하시는 공손함을 나는 배운다.
나는 윤동주 시인에게 처음부터 다시 먼저 배운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하여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역사적 국면의 경험으로 확장시키는 방법을 배운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하는 능력을 배운다. 특정한 사회와 문화적 상황 속에서의 체험을 인간의 항구적 문제들에 연결함으로써 보편적인 공감에 도달할 수 있는 정체성을 배운다. 개인적 체험을 넘어, 깊은 통찰력으로 그것을 변용하고 조직할 수 있는 능력까지 배운다. 그리하여 시대의 아픔을 자기화하고 인간의 근본적인 고뇌를 형상화하여 지고지순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끝없이 성장하는 인간성을 배운다. 지금 우리 민족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일까? 지금 우리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무엇일까? 그리하여 나는 근본부터 다시 생각한다. 뿌리부터 다시 살핀다. 하나회보다 더 무서운 검찰조직이 무성하다. 통일조국을 이루지 못한 해방정국부터 다시 살핀다. 정방폭포가 나를 부른다. 정방폭포에서 사삼과 평화에 관한 서사시를 쓴다.
나는 최인훈 선생님과 오규원 선생님께 문학을 배웠다. 최인훈 선생님께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를 배웠고 오규원 선생님께 “진정성”을 배웠다. “장식을 걷어내고 진정성으로 승부하라” 그리하여 나의 평생 화두는 “진정성”이 되었고 최인훈 선생님의 가르침은 내 문학의 방법론이 되었다. 시 한 편을 쓸 때마다 시론이 하나씩 추가되는 셈이다. 자기 복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거듭나야만 한다. 자기만의 독특한 시론을 개발하여 자신이 쓰는 시에 끊임없이 새롭게 적용시켜야만 한다. 시론은 어느 하나에 고정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쓰고 싶은 시의 주제와 형식에 따라서 다양한 시론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나는 비교적 다양하고 많은 시론을 배웠고 또한 다양하게 적용하려고 한다. 주제와 양식에 따라서 다양하게 옷을 입힐 필요가 있다. 요즘 활발하게 발표되는 디카시에도 관심이 많고 모덤포엠에서 적극적으로 발표하고 있는 큐알코드 영상시에도 관심이 많다. 시대가 변하면 시와 시론도 함께 변해야만 한다. 멀티 디지털 시대이므로 멀티포엠으로 가는 길은 더욱 자명할 것이다. 하지만 유의할 점이 있다. 아무리 시대에 맞게 옷을 갈아입혀도 근본이 변해서는 안 된다. 먼저 탄탄한 시가 된 다음에 다양한 옷을 입혀야만 한다. 미숙하거나 함량미달을 감추기 위하여 위장해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다.
나의 시론을 쓰려고 하니 김준오 선생님의 <시론>이 먼저 떠오른다. 나는 오규원 교수님께 시를 배웠는데, 시 창작은 우리들이 써서 제출한 시를 책으로 만들어서 합평을 하면서 배웠고 이론은 김준오 선생님의 <시론>을 기본 교재로 활용하고 다른 많은 시론들을 곁들여서 다양하게 배웠다. 시의 생명은 비유와 은유와 상징에 있으며 압축과 진정성만이 좋은 시를 완성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런 시론을 쓰기에는 지면이 너무 부족하다. 그래서 나는 시 창작자의 입장에서 어떤 생각으로 시를 쓰고 있으며 또한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를 간단하게 말하려고 한다. 나의 체질에 맞는 시는 어떤 시이며 내가 쓰고 싶은 시는 어떤 시인지 말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시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하려고 한다. 시론은 시인들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달라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새로운 시를 쓸 때마다 자신의 시론 또한 그에 걸맞게 성장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시를 생각한다. 시인에게 시는 삶이다. 시인에게 시는 꿈인 동시에 삶이다. 나는 언제나 시인이 되기 위하여 시를 찾고 있다. 나는 언제나 시인으로 살기 위하여 시를 살고 있다. 나는 언제나 ‘詩’라는 글자를 생각한다. ‘詩’라는 글자는 재미가 있다. ‘詩’라는 글자 속에는 입과 발과 손이 모두 들어있다. 나는 발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삶으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가슴으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피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땀으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눈물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나도 시를 쓰기 시작한 초반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시는 산사에서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시는 산사의 종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한 때 시를 찾아서 산사에 들어가 살기도 하였다. 절 사(寺)에 말씀 언(言)이 함께 붙어 있는 것이 시(詩)이므로 시는 산사에서 들려오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풍경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범종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운판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법고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목어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목탁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죽비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염불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는 어느 순간부터, 신이 자연에 숨겨놓은 말씀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늘의 빛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늘의 별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늘의 달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바람이 시가 아닐까, 바다가 시가 아닐까, 강이 시가 아닐까, 여울물 소리가 시가 아닐까, 나무가, 풀이, 꽃이, 가시가, 개구리가, 개구리밥이, 여치가, 버들치가, 은어가 ……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조금만 눈을 떠봐도 세상에는 보석 같은 신의 말씀들이 별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조금만 귀를 기울여 봐도 세상에는 여울물소리처럼 아름다운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조금만 눈을 뜨고 다시 보면 세상에는 온통 시 투성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드디어 반짝이는 아이들의 눈빛을 찾았고 꿈결 같은 아이들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드디어 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시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이며, 시는 아이들의 고요한 숨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시가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시는 결국 그 생명을 낳게 만들어주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 이제 시는 생명이다. 나에게 이제 시는 사랑이다. 그리하여 나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시인은 어머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생명을 낳아 길러주신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고 세상에서 가장 생명력이 강한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비록 어머니는 될 수 없지만,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사랑을 도와서 고귀한 생명을 함께 낳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에게도 나의 대표작이 있다. 전생에 낳은 두 아들이 나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가장 생명력이 강한 나의 대표작이다. 나는 어떤 시인들보다도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을 존경하며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생명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는 비록 내가 직접 어머니는 될 수 없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가질 수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인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또한 나에게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글이 있다. 짧은 글이지만 언제나 나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글이 있다. 어머니의 마지막 글이 있다. 어머니의 마지막 편지가 있다. 아마도, 광주에 있는 병원을 몰래 빠져나오셔서 고향집에서 농약을 마시고 쓰신 것 같다. 그 농약이 온몸으로 퍼지는 순간에 쓰셨을 것만 같다. 신음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수건을 입에 물고, 치아가 다 으스러지도록, 입을 앙다물고 쓰신 듯하다. 자식인 나는 평생 용서를 받지 못할 것 같다. 내가 부모님께 유일하게 받은 유산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래도록 눈물의 왕으로 살았다. 이어도에서 이어도공화국을 만들며 이어도로 살았다. 이어도에 살면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나무였다. 나 또한 나무처럼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오래도록 하늘을 보고 바다를 보고 땅을 보며 나무가 되어 나무로 살았다. 나무는 시와 산문으로 존재한다. 산문이 나무라면 시는 나무의 나이테일 것이다. 산문은 나무 전체를 설명하지만 시는 나무를 톱으로 켜서 나이테만 척 보여주는 형식이다. 그래서 시가 어렵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이테만 보고 나무와 만났을 바람이며 햇빛이며 별빛을 상상하는 행위는 우리들을 더욱 깊고 넓은 세상으로 인도할 것이다.
나는 사실, 서른 살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왼쪽 가슴이 아팠다. 남몰래 가슴을 안고 쓰러지는 들풀이었다. 내려다보는 별들의 눈빛도 함께 붉어졌다. 어머니는 보름달을 이고 징검다리 건너오셨고, 아버지는 평생 구들장만 짊어지셨다. 달맞이꽃을 따라 가출을 하였다. 선천성 심장병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나의 비밀은 첫 시집이 나오고서야 들통이 났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비후성 심근증, 심장병과 25년 만에 첫 이별을 하였다. 그러나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바다는 나를 이어도까지 실어다 주었다. 30년 넘게 섬에서 이어도가 되어 홀로 깊이 살았다. 나는 이제 겨우 다시 돌아왔다. 섬에서 꿈꾼 것들을 풀어놓는다. 꿈속의 삶을 이 지상으로 옮겨놓는다. 나에게는 꿈도 삶이고 삶도 꿈이다. <꿈삶글>은 하나다.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서 함께 길을 찾아 나선다. 나의 <세상 읽기와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는 이렇게 모던포엠 가족들과 구독자님들께 먼저 인사를 올리고 함께 새롭게 출발할 수 있어서 영광이다.
대량생산과 대량 복제품들의 시대에 수공업자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오직 하나만 존재하는 자신만의 특별한 시 한 편 쓸 수 있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가난한 수공업자인 모든 시인들의 문운을 빈다.
추석(秋夕), 가을 저녁이 참 좋다
가을 저녁이란 말이 참 좋다
내가 아마
가을 저녁쯤 되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가을의 한가운데란 말보다
8월의 한가운데란 말보다
나는 왜 가을 저녁을 더 좋아하는 것일까
나는 어쩌면
가위를 무서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위라는 말을 무서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들의 머리를 자르는 전단가위
우리들의 머리카락 자르는 이발가위
애끓는 마음까지 잘라버린 인연가위
배 속에 넣은 채로 봉합해 버린 수술가위
천의 피부를 싹둑, 싹둑 자르고
인연의 실을 뚝, 뚝 끊어버리는 바느질가위
붉은 피 똑똑똑 흘리며 사지를 절단하는 부엌가위
마늘 모가지 따는 농업가위, 공업가위, 어업가위
아, 담벼락에서 거시기를 노리던 그 큰 거시기 가위
사마천의 거시기까지 잘라버린 그 크고 무서운 가위
그리하여 나는 아직도 한가위보다 추석이란 말이 좋다
가을밤 보름달 속에서 큰 가위 하나 보인다
가을 저녁을 가위질하며 큰 보름달 하나 하늘을 가른다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칡과 등나무가
서로를 미워하며 키만 키우고 있었다
소나무는 목숨에 대하여 말해 주었으나
가슴속으로 흐르는 물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소나무는 길을 알려주려고 숲과 숲을 이어주는
외나무다리가 되었다
뒤늦게 칡과 등나무는 서로의 강을 보았고
소나무가 말해주는 아름다운 길을 보았다
다투어 하늘로만 향하는 길을 틀어 강을 건넌다는 것은, 낭떠러지의 아득함과 절벽의 막막함으로 가는 길, 그래도 가야만 하는 우리들의 길
칡과 등나무는 외나무다리를 부여잡고 돌고 돌아
으르렁거리는 물살 위에서 겨우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서로에게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으나
칡과 등나무는 서로를 안으면서 길이 되었다
먼 훗날 소나무 다리가 먼 길 떠난 뒤에도
칡과 등나무는 든든한 서로의 다리가 되리라
갈등(葛藤)의 다리가 강을 건너고 있다
https://youtu.be/M9oi4JGL5D0?si=d1yYcu1iXeY6VZFh
배진성 (裵鎭星)
1988년《문학사상》 신인발굴 당선
1989년《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이어도공화국 序 - 백 년 동안의 꿈과 사랑』
『이어도공화국 01 - 땅의 뿌리 그 깊은 속에서』
『이어도공화국 02 - 잠시 머물다 가는 이 지상에서』
『이어도공화국 03 - 길 끝에 서 있는 길』
『이어도공화국 04 – 꿈섬』
『이어도공화국 05 – 우리들의 고향』
『이어도공화국 06 – 서천꽃밭 달문 moon』
yeardo @ naver.com
추석(秋夕), 가을 저녁이 참 좋다
가을 저녁이란 말이 참 좋다
내가 아마
가을 저녁쯤 되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가을의 한가운데란 말보다
8월의 한가운데란 말보다
나는 왜 가을 저녁을 더 좋아하는 것일까
나는 어쩌면
가위를 무서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위라는 말을 무서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들의 머리를 자르는 전단가위
우리들의 머리카락 자르는 이발가위
애끓는 마음까지 잘라버린 인연가위
배 속에 넣은 채로 봉합해 버린 수술가위
천의 피부를 싹둑, 싹둑 자르고
인연의 실을 뚝, 뚝 끊어버리는 바느질가위
붉은 피 똑똑똑 흘리며 사지를 절단하는 부엌가위
마늘 모가지 따는 농업가위, 공업가위, 어업가위
아, 담벼락에서 거시기를 노리던 그 큰 거시기 가위
사마천의 거시기까지 잘라버린 그 크고 무서운 가위
그리하여 나는 아직도 한가위보다 추석이란 말이 좋다
가을밤 보름달 속에서 큰 가위 하나 보인다
가을 저녁을 가위질하며 큰 보름달 하나 하늘을 가른다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칡과 등나무가
서로를 미워하며 키만 키우고 있었다
소나무는 목숨에 대하여 말해 주었으나
가슴속으로 흐르는 물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소나무는 길을 알려주려고 숲과 숲을 이어주는
외나무다리가 되었다
뒤늦게 칡과 등나무는 서로의 강을 보았고
소나무가 말해주는 아름다운 길을 보았다
다투어 하늘로만 향하는 길을 틀어 강을 건넌다는 것은, 낭떠러지의 아득함과 절벽의 막막함으로 가는 길, 그래도 가야만 하는 우리들의 길
칡과 등나무는 외나무다리를 부여잡고 돌고 돌아
으르렁거리는 물살 위에서 겨우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서로에게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으나
칡과 등나무는 서로를 안으면서 길이 되었다
먼 훗날 소나무 다리가 먼 길 떠난 뒤에도
칡과 등나무는 든든한 서로의 다리가 되리라
갈등(葛藤)의 다리가 강을 건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