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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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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Jan 27. 2024

너에게 나를 보낸다 (01-10)





너에게 나를 보낸다 (01-10)




01. 나는 저 금잔에 무엇을 따라 마실까



독을 마시기에

좋은 금잔옥대

벌써

깨끗이 비워져 있다


독잔도 잘 씻으면

물 잔이 될 수 있고

술잔이 될 수 있고

꽃잔이 될 수 있고

꿈잔이 될 수 있다


나는 이제 눈물 잔에

무엇을 따라 마실까

나는 이제 금빛 잔으로

어떤 별빛을 담아볼까

죽어서 빛나기 위하여



02. 별빛은 아직도 오고 있는 중이다



별빛은 빛의 속도로 오고  있는 중

별빛은 아직도 쉬지 않고 오는 중


오늘 밤에 내가 본 저 별빛은 아주

머~언 옛날에 출발을 했다고 한다


나도 이제 너의 친구가 되고 싶어서

내가 먼저 너에게 내 눈빛을 보낸다


나도 이제 너를 만나기 위하여 떠난다

아주 머언 다음에라도 너를 꼭 만난다



03. 감씨 속에는 감나무가 들어있다



감을 먹으려고 감을 자르는데 씨까지 잘려나갔다. 잘린 씨앗을 보니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감 씨 속에 감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있다. 나는 감을 더 이상 먹지 못하고 씨앗을 땅에 묻는다. 나는 앞으로 감을 먹을 때마다 감나무를 생각할 것이다.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던 시절을 생각할 것이다. 우리들의 사랑도 그럴 것이다. 사랑의 씨앗에는 이미 사랑의 나무가 자라고 사랑의 열매가 열릴 것이다. 나는 너에게로 가서 묻힐 것이다. 너의 영토에서 우리들의 사랑의 나무가 자라고 사랑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릴 것이다.



04. 감귤꽃이 지고 감귤이 자라는 모습이 참 귀엽다

       - 감귤이 꽃을 벗으니 감귤의 알몸이 참 환하다



감귤꽃이 지고 감귤이 자라는 모습이 참 귀엽다. 감귤나무뿌리는 대부분 탱자나무뿌리다. 탱자나무뿌리에 감귤나무순, 접을 붙여서 감귤나무가 만들어진다. 탱자나무뿌리가 생명력이 강하기 때문에 대부분 탱자나무뿌리를 이용한다. 그래서 감귤나무꽃은 탱자나무꽃과 비슷하다. 탱자나무꽃보다 좀 더 풍성해 보인다. 물론 탱자나무에 무섭게 붙어있는 가시는 없다. 감귤나무에 영양상태가 좋지 못하면 뿌리의 힘 때문인지 탱자나무처럼 다시 가시가 돋아나고 탱자나무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감귤꽃이 피면 향기도 진하다. 지금은 그 향기를 머금은 감귤꽃 잎들이 지고 있다. 꽃잎이 다 진 다음에도 배꼽은 오래도록 남아있다. 감귤들의 배꼽을 보면서 나의 배꼽을 생각한다. 어머니 뱃속에서 어머니를 빨아먹고 자란 태아의 시절을 생각한다. 오래도록 어머니의 희생을 생각하라고 배꼽은 남아있다. 나도 누군가에게 나를 주고 싶다. 나를 빨아먹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나도 누군가의 배꼽이 되고 싶다. 그 누군가가 바로 당신이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당신에게 나를 보낸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나의 숨결을 보낸다. 


  

05. 때죽나무는 떼로 종을 울린다



때죽나무는 떼로 종을 울린다. 하늘에서 하얀 종소리가 떨어져 땅을 울린다. 때죽나무 종꽃에서 들리는 소리를 찾아서 곶자왈에 간다. 종소리가 하늘에서 들리지 않고 나무 의자에서 들린다. 때죽나무 종꽃을 보려고 갔더니 벌써 다 떨어져 하늘의 종소리를 땅에서 울리고 있다. 때죽나무 종꽃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하여 집에 심으려고 하니 꽃집에서 그러지 말라고 한다. 때죽나무는 집안에 심는 나무가 아니라고 한다. 떼로 떨어질 수 있어서 불길한 나무라고 한다. 때죽나무는 독이 많아서 떼로 죽인다고 한다. 때죽나무 간 물을 냇물에 풀면 물고기들이 떼로 죽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도 '떼죽나무'라고 한다. 제주도에서는 사월에 떼로 죽고 광주에서는 오월에 떼로 죽었다고 한다. 봄에는 그렇게 떼로 죽었다고 한다. 땅에서 울고 있는 종꽃을 의자에 올려놓고 기도를 한다. 나무 의자가 조금은 따뜻해지고 따뜻한 가슴에서 다시 작은 종소리가 들린다.



06. 나는 언제 어디에서 왔을까

       -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나는 언제 어디서 왔을까?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똑, 똑, 똑, 제습기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내가 숨 쉬는 공기에 이렇게 많은 물방울이 숨어 있었구나. 내가 살아있는 목숨 안에 이렇게 많은 눈물방울이 숨어 있었구나. 밖에는 이미 6월 장마가 시작되었고 안에서도 역시 장마가 시작되었구나.     


6월 장마에 돌도 큰다,라는 속담이 있다. 6월 장마에 특히, 수국과 산수국 그리고 대나무들이 가장 크게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하고 있다. 그들 중에서 나는 오늘 산수국을 오래도록 본다. 산수국을 보며 아버지를 생각한다. 나는 언제 어디에서 왔을까, 깊이 생각한다. 아버지의 아버지를 생각하고 더 먼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그렇게 저 먼 곳으로 다시 찾아가 나의 뿌리를 생각한다.     


나의 아버지는 1931년 3월 26일에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 나는 그때부터 아버지 몸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아마 1965년 6월 장마가 시작되고, 산수국과 수국이 한창 피어나던 이 무렵에 아버지 몸 밖으로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나의 모든 전생을 한 번쯤 더 되풀이하여 생각했을 것이다. 물에서 살았던 시절부터 물 밖으로 기어 나왔던 경험까지, 그중에서 많은 것들은 생략하고 꼭 필요한 정거장들만을 거쳐서 돌아왔을 것이다. 아가미 시절과 허파 시절을 짧은 10개월 동안 다시 한번 속성으로 살아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1966년 어느 봄날에 힘차게 울면서 이 세상으로 나왔을 것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어도공화국에는 아버지 같은 산수국이 피어나고 어머니 같은 수국이 피어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어도공화국에는 아들 같은 큰 유리새도 함께 살고 있다. 나는 이제 마지막으로 나의 꿈과 나의 삶과 나의 글들을 점검하고 확정하여, 꼭 필요한 것들만 이 세상에 남기고 빈 몸으로 저 먼 곳으로 다시 한번 떠나야만 하리라.     



07. 산수국에서 수국으로 이사 가는 날

       - 떠남과 만남 그리고 부모



부모님 계시는 반월산에 밤꽃이 피어나고

제주도 길가에 구실잣밤나무꽃이 피어나고

이어도공화국에는 지금 수국꽃이 한창이다     


비는 어쩌면 하느님의 눈물인지도 모른다. 비는 어쩌면 하느님의 사랑의 씨앗인지도 모른다. 아니다. 비는 아마도 하늘일 것이다. 비는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비를 좋아하는 반월산의 밤나무와 비를 좋아하는 제주도의 구실잣밤나무와 비를 좋아하는 이어도공화국의 수국을 생각한다. 다시 한번 생각하니 밤나무는 암꽃과 수꽃이 만나 자식을 낳는데 수국은 씨앗을 낳을 수 없으니 어쩌면 속으로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날 아버지의 몸을 떠나고 싶었다. 밖에서 비는 오는데 자꾸만 아버지의 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나도 함께 뜨거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냥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내가 아직 모르는 바깥세상이 천 길 낭떠러지일지라도 나는 그냥 무작정 탈출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몸이 너무 뜨거워 나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다 탈출할 기회를 놓치면 나는 그냥 그곳에서 타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불이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무작정 밖으로 뛰어내렸다. 나를 닮은 수 없이 많은 놈들이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번개가 번쩍 하더니 천둥소리가 들렸다. 그날은 토성이 지구에 가장 가까이 오는 날이었다. 토성은 약 9.7Km/s의 속도로 공전을 하는데, 이는 지구 시간으로 대략 29.6년이나 걸린다. 그러니까 토성은 약 30년에 한 번씩 지구에 가깝게 접근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하필이면 내가 아버지 몸에서 탈출한 그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토성에서도 나를 닮은 놈들이 번쩍 뛰어내렸다.     


나는 무작정 뛰었다. 거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나는 살기 위해서 무작정 뛰어야만 했다. 그렇게 무작정 뛰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땀을 흘리며 뛰었다. 그야말로 죽도록 뛰었다. 뛰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다. 나는 온 힘을 다하여 뛰고 또 뛰었다. 머리끝에서 꼬리 끝까지 온몸을 흔들며 뛰고 또 뛰었다. 사람들은 어쩌면 이런 나의 모습을 본다면 헤엄을 친다고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노를 저어서 배가 간다고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주선을 타고 날아왔다고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뛰고 또 뛰었다. 눈을 감고 뛰다 보니 내가 아버지 몸에서 탈출한 것인지 토성에서 뛰어내린 것인지 헷갈리기도 하였다.

     

내가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에 드디어 문이 열렸다. 정신없이 달리다가 그만 내 이마가 벽에 부딪쳤는데 짠 하고 문이 열렸다. 벽이 문이 되는 순간이었다. 벽이 글쎄 문이 되어 열리는 놀라운 순간이었다. 환하게 문이 열렸다. 그런데 그 문 안으로 들어선 것은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나와 동시에 또 하나의 내가 함께 도착한 것이었다. 나팔 모양의 길 끝에서 나팔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어머니를 만났다. 내가 아버지 몸에서 뛰쳐나온 놈인지, 토성에서 뛰어내린 놈인지 잘 알 수 없었지만 나는 하여튼 어머니를 만났다. 그리하여 나는 그날부터 어머니의 궁전 안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가 만난 어머니는 1937년 5월 27일에 태어나셨다. 아버지가 1931년 3월 26일 태어나셨으니 아버지보다 6년 늦게 태어나신 것이다. 그런 어머니 같은 수국 꽃이 지금 한창 이어도공화국에서 피어나고 있다. 이어도공화국은 삶과 죽음의 중간쯤에 있는 나라인데 나는 지금 많은 국민들과 함께 이어도공화국에서 살고 있다. 수국 꽃이 올해는 보라색으로 파마를 하고 있다. 어머니께서 곧 보라색으로 파마를 하시고 보라색 꽃 브로치를 하고 환하게 오실 것만 같다. 나는 그렇게 지금도 중음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08. 물 한 방울 눈물 한 방울

      - 이슬 한 방울 눈물 한 방울



이슬 한 방울을 본다

안개 한 방울을 본다

구름 한 방울을 본다  

   

태초에 사람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떤 사람은 흙에서 왔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바람에서 왔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불에서 왔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먼지에서 왔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없음에서 왔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말씀에서 왔다고 말한다. 나는 이슬 한 방울을 보면서 물을 생각한다. 나는 태초의 사람은 몰라도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물론 나는 아직 바다 이전의 나를 기억할 수 없다. 나는 다만 바다에서 출발한 나를 기억할 뿐이다. 나는 멀고도 먼 여행을 통하여 아버지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나는 아버지가 약을 드시다가 흘려버린 물방울 속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나는 이 지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눈물 한 방울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아니, 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 속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물방울 하나에서 출발하여 눈물방울 하나로 마무리를 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이 지상을 떠나 또 다른 세상에 태어나 새롭게 살아갈 것이다.   

  

처음에 나는 이슬방울이 나무속에서 나온 눈물인 줄 알았다. 처음에 나는 이슬방울이 땅 속에서 뿌리를 타고 올라와 나뭇잎에 매달려 있는 줄로 알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이슬방울이 풀잎 속에서 나온 영혼인 줄 알았다. 처음에 나는 이슬방울이 풀잎의 맑은 눈인 줄 알았다. 이슬방울 속에 들어있는 나를 보여주려고 나를 찾아온 만화경인 줄 알았다. 이슬방울이 공기 중에 있던 수증기들이 응결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지금도 나는 나의 숨결이라고 생각한다. 이슬방울이 안개방울이랑 구름방울과 같은 식구임을 알아버린 지금도 나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물방울 안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나는 또한 토성에서 날아온 먼지 하나에서 태어났다. 먼지라기보다는 차라리 소리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내가 아버지를 떠나 어머니의 자궁경부를 무사히 통과하고 수많은 백혈구들의 공격을 피해 양 갈래길 앞에서도 멈추지 않고 무작정 달려가 나팔관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바로 그때 번쩍, 하고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에 나는 나의 운명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비추는 번개 같은 한 줄기 빛이었고 천둥소리 같은 말씀이었다. 그렇게 나는 너를 만났다. 그렇게 나는 난소에서 오래도록 기다렸을 너를 만났다. 우리는 그렇게 운명처럼 만나서 38주 266일 동안의 긴 여행을 함께 떠났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기적은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들의 황홀한 여행은 그렇게 운명적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들이 흔히 삶이라고 말하는 이 지상의 여행은 그렇게 문득, 시작되었다. 우리들이 죽음이라고 말하는 저 세상으로의 여행 또한 그렇게 시나브로, 시작될 것이다. 나는 이슬 한 방울에서 눈물 한 방울을 본다. 눈물 한 방울에서 이슬 한 방울을 본다. 나는 그렇게 이슬 한 방울을 본다. 나는 그렇게 이슬 한 방울이 된다. 나는 그렇게 눈물 한 방울을 본다. 나는 그렇게 눈물 한 방울이 된다. 나는 그렇게 나를 보고 나는 그렇게 너를 본다. 나는 그렇게 또 다른 나를 보고 또 다른 너를 본다. 우리는 그렇게 나는 너고 너는 나다.    



09. 이슬처럼 혹은 취우처럼

      - 이슬과 취우는 어떻게 다른가



취우(翠雨) 푸른 나뭇잎에 매달린 빗방울

취우(醉友) 술에 잔뜩 취한 친구

취우(驟雨) 소나기와 같은 말 


이슬과 취우는 같다고도 할 수 있고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이슬과 취우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이슬은 그 자리에서 태어난 것이고 취우는 먼 곳에서 온 것이다. 나는 이슬도 좋고 취우도 좋다. 취우라는 말은 세 가지의 뜻을 품고 있다. 한자로 쓰면 다르지만 우리말로는 그냥 '취우'라고 쓴다. 취우(翠雨)와 취우(醉友)와 취우(驟雨)는 다른 말 같지만 다시 한번 생각하면 같은 말 같기도 하다.


나는 연꽃도 좋아하고 연잎으로 물방울 놀이를 하는 것도 좋아한다. 어린 시절에는 주로 토란잎으로 물방울 놀이를 하였는데 요즘에는 연잎으로 물방울 놀이를 자주 한다. 연잎은 물에서도 물에 젖지 않는다. 연잎은 아무리 오래 물방울과 함께 놀아도 물방울에 젖지 않는다. 나는 그런 연잎이 좋다. 연잎에서 함께 놀 수 있는 물방울도 참 좋다. 그 연잎의 물방울 속에서 물방울과 함께 살고 있는 나의 모습도 참 좋다.


취우의 고향이라 말할 수 있는 하늘에서 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빗방울의 크기는 지름 0.5∼5㎜로서 보통 1∼2㎜ 정도이고, 소나기의 경우에는 2∼7㎜ 정도가 된다. 빗방울이 매우 큰 경우에는 낙하 도중에 작게 갈라져 버리고, 0.5㎜ 이하인 경우에는 낙하속도가 매우 느려져 마치 안개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안개비를 형성한다.


구름을 형성하는 물방울의 크기는 지름이 0.004∼0.02㎜ 정도의 대단히 작은 것이며, 부력 때문에 작은 구름물방울이 그대로 떨어져 비가 되는 것이 아니고 구름물방울들이 서로 뭉쳐서 큰 덩어리가 되어야 하므로 10만∼100만 개 정도의 구름물방울이 합쳐져 비로소 1개의 빗방울이 형성되는 셈이다.


살아있는 식물들은 대부분 비를 참 좋아한다. 하지만 동물들은 대부분 비를 피하는 경향이 많다. 물론 비를 좋아하는 동물들도 많지만 비에 젖지 않기 위하여 피하는 동물들이 많다. 그중에는 사람들도 있다. 비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비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비는 생명의 근원이고 생명의 양식이지만 직접 몸에 맞고 몸으로 젖는 것을 싫어하는 동물들이 많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잠시 피했다가 더 많은 물방울들이 뭉쳐져 있는 샘물이나 강물을 맛있게 마시는 동물들도 많다.  


태반처럼 둥근 연잎에서 물방울 놀이를 하며 생각한다. 우리들의 삶이란 어쩌면 연잎 위에서 뒹구는 물방울과 같은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어쩌면 신들이 좋아하는 물방울 놀이인지도 모른다. 물방울이 물방울을 만나고 물방울이 물방울과 헤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들은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쪼개지기도 하고 다시 합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물방울은 결코 물방울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태반과 탯줄을 보면 꼭 연을 닮았다. 연잎에는 숨구멍이 뚜렷하다. 그 숨구멍을 따라가면 비로소 내가 보인다. 이제 막 자궁벽에 착상된 배아가 보인다. 작은 씨앗 모양의 나는 이제 콩깍지 모양이 될 것이고 등 굽은 태아로 성장할 것이다. 연잎 아래서 연근이 자라나 듯 나도 그렇게 어머니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비를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양수 때문일지도 모른다. 양수의 커다란 물방울 속에서 작은 물방울로 태어나서 시작한 내 삶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태아가 양수를 마시듯 물방울이 물방울을 마시며 자란 따뜻한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이어도공화국 연못에 비가 내린다. 연잎에 비가 내려앉는다. 연잎 끝에 취우가 맺히고 나는 그 취우 속에서 나를 바라본다. 물방울 속의 나는 물방울 밖의 나를 보고 웃는다. 물방울 밖의 나는 물방울 안의 나를 보고 살짝 윙크를 한다. 태반 밖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연잎 밖에서 물방울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태반의 뿌리에서 꽃으로 피어날 것이고 나는 연근의 뿌리에서 연꽃을 피워 올릴 것이다. 그렇게 오늘도 우리들의 숨소리가 취우 속에서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될 것이다. 이슬처럼 시작될 것이다. 취우처럼 시작될 것이다. 푸른 나뭇잎에 빗방울이 맺히듯 시작될 것이다. 가끔은 소낙비처럼 만날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사랑에 완전히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언제나 늘 어딘가에 취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이다. 비에 취하고 하늘에 취하고 너에게 취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들은 서로에게 취하면서 취우가 되고 사랑이 되고 하늘이 될 것이다. 자, 이제 우리들은 푸른 나뭇잎에서 함께 뛰어내려도 좋을 것이다. 우리들이 함께 껴안고 떨어지는 그곳이 바로 어쩌면 우리들 사랑의 옹달샘이 될 것이다. 



10. 현미경으로 볼까 망원경으로 볼까

      ― 현미경으로 읽는 사람과 망원경으로 읽는 사람


현미경으로 세상을 읽는 사람이 있다

망원경으로 세상을 읽는 사람이 있다   

  

취우(翠雨) 한 방울에서 세상을 읽는 사람이 있다. 옹달샘에서 세상을 읽는 사람이 있다. 시냇물에서 세상을 읽는 사람이 있다. 강물에서 세상을 읽는 사람이 있다. 바다에서 세상을 읽는 사람이 있다. 모래알 하나에서 세상을 읽는 사람이 있다. 몽돌 하나에서 세상을 읽는 사람이 있다. 바위 하나에서 세상을 읽는 사람이 있다. 산에서 세상을 읽는 사람이 있다. 산맥에서 세상을 읽는 사람이 있다.     


오늘 아침에 특별한 떡국을 먹었다. 밤새 떡집에서 아르바이트하고 돌아온 막내가 가래떡을 가져왔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을 나간다. 곁에 월대천이 있다. 월대천과 어시천과 도근천이 만나 바다로 간다. 한라산에서 내려온 물길이 바다가 된다. 이 물길을 경계로 외도와 내도로 나누어진다. 오늘은 다리를 건너 내도로 간다. 내도 알작지로 간다. 알작지의 돌들은 오늘도 제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있다.


나도 이제는 내 마음을 가다듬고 떠나야 한다. 새로운 길을 찾아서 떠나야만 한다. 내가 아는 어느 나라는 자식들이 성장하면 스스로 떠난다고 한다. 세상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수행자의 길을 걸어간다고 한다. 나도 이제 그 아름다운 길로 가야겠다. 아니, 아름다운 길 하나 만들어야겠다. 세상 사람들이 삶에 지쳤을 때 찾아올 수 있는 아름다운 쉼터 하나 만들어야겠다. 알작지의 돌들이 한쪽에서 잘 말라가고 있다.


알작지의 돌들을 보면 태생이 다른 돌임을 알 수 있다. 고향이 다른 돌들이 모여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한라산 높은 곳에서 온 돌들도 있고 낮은 곳에서 굴러온 돌들도 있으리라. 깊은 바다에서 온 돌들도 있고 낮은 바다에서 떠밀려온 돌들도 있으리라. 그리고 이 해변이 고향인 돌들도 있으리라. 얼굴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고 피부도 다르지만 이 돌들은 사이좋게 잘 지낸다. 바다가 밀려오면 함께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춘다. 바람이 불면 서로 어깨를 기대고 서로의 가슴을 안아주기도 한다. 비가 오면 함께 젖고 눈이 오면 함께 덮을 줄도 안다. 그리고 해가 뜨면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함께 따뜻해지기도 한다. 


나는 어쩌면 저 바다에서 왔으리라. 나는 어쩌면 저 하늘에서 왔으리라. 나는 어쩌면 토성에서 왔으리라. 하지만 나는 선천성 심장병 환자로 태어났다. 나는 어쩌면 전생에 죄를 지었으리라. 가족들 몰래 심장병을 알아버린 나는 가출을 하였다. 그때는 심장병 환자 하나 있으면 집안 말아먹는 시대였다. 육영수 여사님께서 심장재단을 만들어 홍보하던 시절이었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편지 속에서 나는 언제나 건강한 아들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서른 살까지 버틸 수 있기를 기도하였다.


저 돌들도 언젠가 모래가 되리라. 나도 언젠가 흙이 되리라. 하지만 서른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았던 나는 벌써 오십을 넘었다. 어쩌면 나는 앞으로도 더 오래도록 살 수 있으리라. 이제는 두 아들 모두 참으로 잘 성장하였으니 나는 편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으리라. 오래도록 꿈꾸어왔던 길을 갈 수 있으리라. 어느 전직 대통령의 잘못된 자식 사랑을 지켜보면서 생각한다. 우리들이 진정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물려줄 것은 무엇일까?


반질반질한 돌을 보니 문득, 컬링 경기가 생각난다. 돌이 돌을 밀어내고 때로는 돌이 돌의 엉덩이를 가볍게 밀어 동그라미 안으로 밀어 넣어주는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들의 삶과 죽음도 어쩌면 그럴 것이다. 시와 스포츠에 대하여 생각한다. 스포츠는 정해진 룰에 맞추어 열심히 하면 된다. 하지만 시는 정해진 법칙이 따로 없다. 열심히 시를 살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 가장 아름다운 시가 될 수 있으리라. 가장 아름다운 죽음은 가장 아름다운 삶에서 시작한다. 정정당당한 시와 삶을 생각한다. 삶과 죽음이 아름답게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꿈꾼다. 아직은 몽돌이 되지 못한 바위에서, 살아있는 미역을 뜯어먹는다.


나의 배아는 이제 미토콘드리아처럼 암모나이트처럼 염소의 뿔처럼 전갈의 꼬리처럼 등이 휘어진 태아로 자라나고 있다. 나는 이제 전생과 후생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나는 지금 현미경으로 세상을 읽고 있는가? 망원경으로 세상을 읽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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