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과 함께, 너에게 나를 보낸다 01
윤동주 시인과 함께, 너에게 나를 보낸다 01
내가 지금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는 것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와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문이다. 아, 그런데 김응교 교수님께서도 이 두 문장이 윤동주 시인을 연구하게 만든 문장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아름다운 <서시>가 탄생하기 위해서 윤동주 시인은 어떻게 태어났으며 또한 어떻게 살았을까.
시인의 탄생, 명동마을에서 김응교 교수님은 만주와 명동마을과 김약연 선생님에 대하여 자세하고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나는 독자들에게 윤동주 시인의 작품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윤동주 시인이 직접 쓴 습작노트와 시집 원고와 기타 편지로 보냈던 시 등을 차례대로 쓰고 가능한 나의 이야기는 줄이려고 한다. 나중에 이어도와 제주도에서 백두산을 거처 윤동주 시인의 고향까지의 순례를 함께 쓰려고 하는데 우선은 자료 수집 차원에서 1차적으로 기록하는 단계이다.
김응교 교수님은 폭넓은 지식과 뜨거운 열정으로 윤동주 시인의 시뿐만 아니라 백석 시인이나 정지용 시인 그리고 문익환 목사님 등의 많은 글들도 함께 인용하여 글이 매우 풍요롭고 유익한 많은 정보들을 알려주고 있다.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곳은 만주다. 만주의 명동마을이다. 그 '만주'란 단어가 나오는 시는 <오줌싸게 지도>와 <고향집>이 있다.
1931년 일제의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을 세운다(1932~1945) 만주국은 일본인, 조선인, 한족, 만주족, 몽골족 등 오족을 협화 한다는 명목으로 세워졌다. 따라서 만주에 거하고 있던 조선인은 국제법으로 만주국인이 되었다. 재만조선인은 한일합방으로 일본 국적의 신민이 되었는데, 1932년에 만주국이 세워지고 조선계 일본인으로 귀속되었다. 디아스포라는 '씨 뿌리다'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디아스포라는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그리스와 로마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을 가리킨다고 한다. 유대인에게 쓰였던 이 단어는 이후 특정 민족이 흩어져 살 때 쓰인다고 한다. 그러니까 윤동주 시인은 '조선인 디아스포라'라고 할 수 있다.
김응교 교수님은 만주에 대하여 주변성, 디아스포라, 혼종성에 대하여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 만주땅에 자리한 명동마을 공동체의 특수성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윤동주 시인과 명동마을의 소년들에게 잉걸불을 일의 켰던 규암 김약연(1868~1942) 선생님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한다. 관북의 대표적인 선비 집안의 장남이었던 그는, 1899년 2월 기골이 장대했던 서른한 살의 김약연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신천지 간도로 향했다. 나라가 망해가는데도 부패와 수탈이 심해지자 문재린의 증조부인 문병규, 문재린의 장인인 김하규의 가솔 등 백사십여 명과 함께 북간도 화룡현 불굴라재로 이주했다고 한다.
명동촌은 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 김약연 선생을 비롯해 윤하현, 문병규, 남위언, 김하규 이렇게 다섯 가문 140여 명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마을이다. 이들은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1899년 2월 18일 고향을 떠나 두망강을 건넜다고 말한다. '명동'이란 중국보다 동쪽에 있는 조선을 밝게 하자 라는 의미로 십여 개 부락을 합친 총칭이라고 한다. 명동촌은 1905년에 거의 완성이 되었고 선바위골, 장재촌, 수남촌 등 명동을 중심으로 한 오십 리 안팎에 잇따라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1917년 12월 30일에 윤동주는 태어났다. 부유한 농부였던 할아버지 윤하현, 명동학교 선생이었던 아버지 윤영석(1895~1962), 어머니 김용(1891~1947)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결혼 당시 아버지는 열여섯 살, 어머니는 스무 살, 어머니가 네 살 연상이었다. 1919년에 할아버지 윤하현은 교회 장로가 되었고,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불과 열여덟의 나이에 베이징에 유학을 다녀와 명동학교 교원이 되었고, 1923년에는 도쿄로 유학을 가서 영어를 배우다가 '관동대진재'를 경험하기도 했다. 이때 조선인 학살이 일어났는데 '네버 마인도(Never Mind)'라는 일본식 발음으로 엽서를 써서 집으로 보냈다고 한다. 게다가 교회에서 공중 기도를 할 때 특출한 언어 감각을 발휘하는 시인다운 기질도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윤동주 시인의 인문학적 식견은 이러한 인텔리 아버지의 토양에서 비롯된 듯싶다고 송우혜 선생님은 윤동주 평전에서 밝히고 있다.
가족관계를 볼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김약연과 송몽규라고 한다. 먼저 김약연은 윤동주의 어머니 김용의 오빠였다. 그러니까 그 유명한 김약연은 윤동주 시인의 외삼촌이었다. 윤동주 시인은 김약연의 조카이자 제자였다. 만주 지역의 민족지도자였던 김약연의 외삼촌이었다는 사실은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윤동주 시인을 형성한 배경에는 규암 김약연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간도의 한인 대통령'이라고 불렀던 규암 김약연 선생님은 아쉽게도 해방 3년을 앞둔 1942년 10월 29일 용정시 자택에서 "내 모든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일흔넷을 일기로 돌아가셨다. 지금도 명동마을 명동교회 건물 바로 옆에 비석이 있다.
명동마을로 이주한 이들의 목표는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토지를 사면 제일 좋은 땅을 학교 밭인 학전으로 떼어놓고 서당을 차렸다. 서당에서 먹을 감자며 옥수수를 학전에서 키웠다. 도착하자마자 공부할 곳을 세우고 학전을 일구었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인 디아스포라들이 새로운 땅으로 향했던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온 제주도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학교부터 짓기 시작한 이유와도 비슷한 일일 것이다. 그 교육의 중심에 바로 규암 김약연 선생님이 계셨다.
문익환 목사의 부모님이신 문재린 목사와 김신목 사모의 회고록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을 보면 간도 이주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선조들의 땅에 들어가 땅을 되찾는 것, 둘째는 북간도의 넓은 땅을 활용해 이상촌을 건설하는 것, 셋째는 추락하는 조국의 운명 앞에서 인재를 교육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고토회복, 이상촌 건설, 인재 교육이라는 세 가지 목적이 그들로 하여금 두만강을 건너게 했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북방 지역은 실학의 전통이 흘렀다. 명동마을로 이주한 실학적 유학자들은 서당 세 곳을 만들었다. 김하규의 소암재, 남위언의 오룡재가 있었고, 김약연은 1901년 자신의 호를 따서 '규암재를 지어 가르치기 시작했다. 1908년까지 규암은 <맹자>를 가르쳤다. 윤동주 시인도 김약연에게 <맹자>를 배웠다. 그래서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 <맹자>의 영향을 많이 느낄 수 있다.
1906년 북간도 용정에서 이상설의 주도로 서전서숙이 설립된다. 하지만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떠나면서 서전서숙은 일 년 만에 문을 닫는다. 명동마을에서도 신학문 교육이 필요하자 1908년 4월 27일 규암재, 소암재, 오룡재를 합하고 서전서숙을 계승해 신학문을 가르칠 명동서숙을 개교한다. 1909년 4월에는 명동서숙을 명동학교로 확대 발전시켜 김약연이 초대 교장에 취임한다. 명동학교에 부설되었던 명동중학교는 1910년 3월에 세워졌다. 이후 1925년까지 발전하면서 15년간 유지되었다. 신학문을 가르쳐야 하니 젊은 선생을 스카우트해야 했다. 그래서 서울 기독교청년학교를 나온 정재면 등 우수 교사를 초빙했다. 당시 정재면은 원산의 장로교 교회가 파견한 북간도교육단의 일원으로 용정에 있던 독실한 신자였다. 김약연은 교사 정재면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렇게 명동촌은 민족운동과 기독교 민족교육의 본거지가 되어갔다.
윤동주 시인의 첫 번째 시작노트를 본다.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를 본다. 앞표지가 참 고급스럽다. 지금 보아도 아름답다. 앞표지 오른쪽에 밀로의 비너스상이 있다. 두 팔이 없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참 아름답다. 사람이 죽으면 손과 팔이 가장 먼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밀로의 비너스상은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조각상 가운데 하나로 기원전 130년에서 1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과 미를 관장하는 여신인 아프로디테를 묘사한 대리석상이라고 한다. 길이는 203cm라고 하며 헬레니즘 시대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 조각상은 1:1.618의 황금 비율이며 8등신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두 팔이 없지만 전문가들의 다양한 연구로 어느 정도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고 한다. 왼팔은 사과를 꽉 잡고 있는 형태였고 오른팔은 배에 있는 흔적으로 보아, 흘러내리는 옷을 잡고 있는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도 밀로의 비너스상이 좋아서 이 노트를 구입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노트 표지에는 <문조>라는 글자가 인쇄되어 있다. 중앙 하단에 인쇄되어 있는데 밀로의 비너스상 발의 높이에 위치하고 있다. 더구나 <문> 자는 아프로디테의 발등에 얹어져 있는 형상에 가깝다. 윤동주 시인이 살았던 시대에는 이런 문집을 만들 수 있는 노트가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문조(文藻)란 문장의 멋 혹은 글을 짓거나 글씨를 쓰는 재능이라 할 수 있으니 요즘말로 하면 <문집>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런 표지에 윤동주 시인은 중앙 상단에 가로로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라고 자필로 적었다. 아마도 이 노트의 제목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이 시집의 제목을 그렇게 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흔히 예술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을 비너스상 오른편에 썼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고 세로로 썼다. 대부분의 예술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염원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예술이 길게 살아남지는 못할 것이다. 인생보다 더 길게 살아남을 수 있는 예술을 위하여 오늘도 예술가들은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을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아마도 송몽규의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에 자극을 받아서 이 노트를 만들고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윤동주는 동갑내기 친구이며 고종사촌이기도 했던 송몽규와 아주 가깝게 지냈다. 그런 송몽규가 덜컥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던 것이다. 1934년 12월, 중학교 3학년 18세 나이로, 콩트 《술가락》을 써서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던 것이다. 투고는 아명인 송한범으로 했다. 지금도 문인으로서는 가장 선망받는 등단 루트인 신춘문예, 그 당시 기준으로는 중앙일간지 숫자 자체를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었고 다른 등단 경로가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높은 권위를 가졌을 것이다. 아주 가까운 친구인 송몽규는 어린 나이에 그렇게 빼어난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이는 윤동주에게 큰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 밀로의 비너스[ Vénus de Milo ]
고대 그리스의 조각으로, 1820년 키클라데스 제도의 하나인 밀로(메로스) 섬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된 대리석 아프로디테(비너스) 상이다. 여신은 앞으로 내민 왼발을 약간 위에 올려 놓고, 오른쪽 발에 체중을 싣고 서 있다. 하반신은 옷으로 가려졌고 상반신은 나체이며 두 팔은 없어졌다. 온갖 경위를 거쳐 터키 주재 프랑스 대사 드 리비에르(Marquis de Riviére) 후작이 이 상을 구입하여 국왕 루이 18세(Louis XⅧ, 재위 1814~15,1815~24)에게 증여했다. 현재는 루브르 박물관의 지보(至寶)다. 발견 당시는 B.C.5세기의 원작이라 했으나 현재에는 B.C.5세기 후반의 아프로디테를 표본으로 B.C.130~ B.C. 120경에 제작되었다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