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과 함께, 너에게 나를 보낸다 02
윤동주 시인과 함께, 너에게 나를 보낸다 02
한 시인의 시적 세계는 유년시절의 경험과 청소년 시절의 경험이 많은 영향을 끼친다. 윤동주 시인의 인격 형성과 시적 세계의 구축은 만주와 디아스포라와 명동 마을과 김약연의 독립정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고토회복과 이상촌 건설과 인재교육을 위하여 만주로 건너갔던 선각자들의 후손, 민족운동과 기독교 민족교육의 본거지가 되어가는 명동촌, 이토 히로부미를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한 안중근이 천주고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부당한 뒤 김약연의 도움으로 몰래 권총으로 사격 연습을 한 곳도 명동촌의 뒷산이었다고 한다. 조연현 선생님의 <해방의 등불 된 '간도의 대통령'>이란 글에서도 잘 증언하고 있다. 그리하여 장로가 된 김약연 선생님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일찍부터 시작된다. 특히 <무오독립선언서>에서 밝혔듯이 일제에게 독립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육탄혈전'으로 독립 '전쟁'을 해서 무력으로 일제를 몰아내야 한다는 더욱 적극적인 의지를 피력했기 때문에 일제의 입장에서는 무장투쟁의 본거지를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다.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은 북간도 민족운동의 근거지로 자리 잡았던 명동학교를 불태우고, 무장투쟁을 주장해 온 교장 김약연을 체포한다. 김약연은 1920년 쉰둘의 나이에 체포되어 2년 동안 옥살이를 한다. 1923년 출옥해 폐허에 임시 건물로 지어진 명동학교를 유지했지만 이듬해 흉년으로 운영난에 시달린다. 1925년 용정의 은진중학교와 통합하여 명동중학교는 문을 닫는다. 윤동주 시인은 1925년 4월 그대로 유지되었던 명동소학교에 입학한다.
1929년 예순한 살의 나이로 김약연은 평양신학교에 다니며 목사 안수를 받는다. 목사이면서도 사회주의자 이동휘와 손을 잡았으며 서일 등 대종교 지도자들과도 협력했다. 중국인들이 그를 '간도의 한인 대통령'이라고 부를 만치 포용력 있는 지도자였다. 1930년 예순둘의 김약연은 명동교회 목사로 돌아온다. 당시 열세 살이던 윤동주와 송몽규는 이때부터 규암 김약연에게 <맹자>와 <성경> 등을 배우고 1931년 3월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한다. 1932년부터 1934년까지 규암 김약연은 은진중학교에서 성경과 한문을 가르친다. 그리고 1938년 2월에 용정의 은진중학교와 명신여고의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규암은 이미 존경받는 목사이며 민족지도자였지만 말이 아니라 삶 자체로 모범을 보였다. 교장이면서도 천 평쯤 되는 밭농사를 직접 지었고 거름을 등에 지고 다니면서 황무지를 개척했다. 가을에는 농군들과 함께 밤새워 타작을 하는 등 제자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마치 공자가 제자들에게 도를 행하는 것과 흡사했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많다. 1942년 10월 29일 용정시 자택에서 돌아가셨는데 "내 모든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일흔넷의 일기로 별세하셨다.
『나의 습작기(習作期)의 시(詩) 아닌 시(詩)』에는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 입학 전, 중학생 시절에 쓴 글들이 담겨 있다.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생정도일 것이다. 1934년부터 1938년 사이에 쓴 윤동주 시인의 습작기의 시들이 담겨있다. 윤동주 시인이 1917년 12월 30일생이니 18세에서 22세 사이에 쓴 글들이다. 그 나이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너는,
『나의 습작기(習作期)의 시(詩) 아닌 시(詩)』를 읽어보면 윤동주 시인은 그전부터 시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전에도 계속 시를 쓰고 있었으나 이 노트를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시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시를 썼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앞의 글에서도 거론했듯이 그 결정적이 계기는 아마도 친구 송몽규의 이른 등단이었을 것이다.
『나의 습작기(習作期)의 시(詩) 아닌 시(詩)』에는 59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주로 동시가 많다. 그리고 제목이 없는 시도 있고 제목만 있는 시도 있다. 또한 윤동주 시인이 자필로 쓴 목차에는 36편의 제목만 적혀있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윤동주 시인 개인의 습작노트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윤동주 시인이 살아생전에 공식적인 등단 절차를 밟아서 등단한 시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습작노트도 더욱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아니, 우리 독자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런 자필 습작노트를 볼 수 있어서 더욱 의미 있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노트의 표지에 인쇄된 밀러의 비너스 때문에 자꾸만 나의 아프로디테 생각이 난다. 그리고 어머니 생각이 난다. 나는 사실 밀러의 비너스보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더 좋아한다. 나는 어쩌면 지금도 나의 아프로디테보다 나의 어머니가 더 보고 싶은지도 모른다. 아마도 눈물의 양과 눈물의 깊이 때문일 것이다. 아니, 다시 한번 더 깊이 생각하니 오래된 것일수록 더욱 좋아하는 나의 취향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윤동주 시인에게 청년문사 송몽규가 있었다면 나에게는 누가 있을까? 나는 지금 누구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을까? 나는 지금 누구를 부러워하고 있을까? 문득 생각나는 이름들이 있다. 이병률 시인과 정끝별 시인과 나희덕 시인과 김기택 시인과 …, 이병률 시인은 1987년에 같이 출발을 하였고, 정끝별 시인은 1988년에, 나희덕 시인과 김기택 시인은 1989년에 같이 출발을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너무 먼 곳에 있다. 이병률 시인은 예대문학상에 나는 예장문학상에 각각 당선되었고 정끝별 시인은 문학사상 신인발굴로 함께 등단을 하였으며 나희덕 시인과 김기택 시인은 같은 해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나의 삶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구석기시대 조각으로, 오스트리아 다뉴브강에 있는 빌렌도르프에서 1909년 철도 공사 때 발견된 돌로 만든 여인상(女人象)이다. 높이 11Cm의 조그만 계란형 돌에 유방·배(腹)·둔부·성기(性器) 등을 과장되게 표현한 특징을 갖고 있다. 이 조각상은 출산(出産)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만들었다는 추정이 전해지는데, 이에 '출산의 비너스'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