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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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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Feb 08. 2024

초 한 대

윤동주 시인과 함께, 너에게 나를 보낸다 03



초 한 대



초 한 대 ㅡ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光明)의 제단(祭壇)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祭物)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生命)인 심지(心志)까지

백옥(白玉)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려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暗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풍긴

제물(祭物)의 위대(偉大)한 향(香) 내를 맛보노라.


_ (1934.12.24. 윤동주 18세) 



윤동주 시인은 1934년 12월 24일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시를 썼다. 어쩌면 그전에 쓴 시 중에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시 3편을 옮겨 적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경험으로 보아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했기 때문에 그전에 썼던 많은 작품 중에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시를 옮겨적고, 그날부터 날짜를 기록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송몽규의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술가락>이  1935년 1월 1일 자 신문에 실렸으니 당선 통보는 그전에 이미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 세 편의 작품 수준이 상당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습작은 이미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윤동주 시인의 시 이야기를 할 때, 이 세 작품을 윤동주 시인의 처녀작으로 인정하고 있다. 앞으로 또 다른 작품이 발굴될 수도 있으나 우선은 이 작품들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그중에서 <초 한 대>가 가장 앞부분에 실려있으므로 <초 한 대>부터 살펴본다.


이 시는 우선 제목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제목을 <초 한 대>로 해야 할지 <초대>로 해야 할지 먼저 결정할 필요가 있다.  <초 한 대>로 했을 때는 '초 한 자루'로 해석하면 되지만  <초대>로 했을 때는 '초하다'라는 의미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윤동주 시인이 <초대>라고 썼다는 점에 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초하다'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초하다 1抄하다 (초한대) 동사, 필요한 부분만을 뽑아서 적다.

초하다 2炒하다 (초한대동사, 노릇노릇하게 되도록 불에 약간 볶다. 주로 한의학에서 약재를 볶는 일이다.

초하다 3草하다 (초한대) 동사, 글의 초안을 잡다.

초하다 4憔하다 (초한대) 형용사, 몸이 마르고 낯빛이나 살색이 핏기가 전혀 없다.


나는 자의적으로 초 하나 혹은 초 한 자루 혹은 초 한 개 혹은 초 한 대로 이해하고 이 시를 읽는다. 이 시는 간단하게 생각하면 간단한 시일수도 있으나 깊이 생각하면 한없이 깊어지는 시가 될 수도 있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단어들이 있다. 광명, 제단, 제물, 염소의 갈비뼈, 심지, 피, 선녀, 매를 본 꿩, 암흑의 창구멍, 제물의 위대항 향내..., 이런 시어들을 보면 우리는 먼저 예수와 기독교와 십자가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윤동주 시의 출발은 십자가의 씨앗으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초 하나가 있다. 백의민족처럼 흰옷을 입은 초 하나가 있다. 몸도 마음도 온통 하얀 초 하나가 있다. 영혼까지 하얀 초 하나가 있다. 초 하나 때문에 내 방 안은 향기로 가득하다. 방안의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여야만 한다. 자신의 몸을 소신공양으로 바쳐야만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 초의 심지에 불을 붙인다. 초의 심지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먼저 결심이 필요하다. 심지(心志), 마음에 품은 의지가 필요하다. 세상을 밝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희생이 필요하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하여 세상을 구하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 자신이 스스로 무너져 내려야만 세상을 구할 수 있다. 스스로 무너짐으로써 무너지는 세상을 바로 세울 수 있다. 스스로 광명의 제단을 쌓고 깨끗한 제물이 되어야만 한다. 먼저 심지가 타올라야만 한다. 먼저 마음이 타올라야만 한다. 먼저 의지가 타올라야만 한다. 심지에 불이 붙으면 몸이 서서히 녹아내리면서 세상을 밝힌다. 어둠은 서서히 물러나고 암흑까지 녹아내린다. 환영처럼 그의 몸이 보인다. 환상처럼 염소의 갈비뼈 같은 예수의 몸이 보인다. 서서히 녹아내리는 자신의 몸과 서서히 물러나는 어둠이 보인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도 보인다. 그림자들이 너울거린다. 백옥 같은 눈물도 보이고 붉은 피도 보인다. 어둠과 함께 집착과 욕망과 거짓과 시기심까지 모두 불태워버린다. 나는 그렇게 초 한 자루가 되어 스스로 소신공양을 한다. 위대한 헌신과 지극한 미덕은 그렇게 초 한 자루가 되겠다는 심지(心志)에서 출발한다. 아낌없는 열정으로 자신을 불태울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숯덩이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연소할 수 있는 영혼은 아름답다. 재가 없는 사람은 맑고 투명하다. 죄가 없는 영혼은 가볍다. 그렇게 스스로의 생명을 불사르는 촛불이 있다. 나와 촛불이 하나가 되어 춤을 춘다. 선녀처럼 춤을 춘다. 아니, 도깨비처럼 춤을 춘다. 나와 촛불은 한 몸이 되어 도깨비처럼 함께 춤을 춘다. 물아일체가 된다. 한 몸이 되어 춤을 추며 날아오른다. 나는 촛불이 되고 촛불은 내가 되어 불꽃으로 타올라 춤추는 하늘이 된다. 우리들은 그렇게 완전연소를 꿈꾸며, 춤을 추며 불타오른다. 그렇게 한 생을 살다 보면 어둠은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은 창구멍으로 도망갈 것이다. 나의 방과 나의 세상은 드디어 환해질 것이고 우리들의 세상은 그런 제물들의 희생으로 더욱 향기로워질 것이다. 그런 위대한 제물이 되어 아름답게 사라지는 나는 행복할 것이다. 작은 초 한 자루는 우리들을 이렇게 아름다운 환상 속으로 여행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윤동주 시인은 아마도 자신의 젊음을 위해서, 사랑과 조국을 위해서 , 환하게 불타오르는 한 자루의 초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촛불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불태우고 싶은 열정과 기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 한 편의 시만 읽어도 윤동주 시인의 마음이 보인다. 윤동주 시인의 기도가 보인다. 윤동주 시인의 심지(心志)가 보인다. 윤동주 시인의 윤동주가 보인다. 윤동주 시인은 횃불을 노래하지 않고 촛불을 노래하고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송몽규의 삶이 횃불이었다면 윤동주의 삶은 촛불이었을 것이다.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횃불이기보다는 자신의 내면과 자신의 방을 밝히는 촛불이 되고자 했을 것이다.


이 시와 관계없이 나는 초에 대하여 깊이 생각한다. 초는 보통 희생정신이나 자기희생을 상징한다. 자신의 몸을 불태워 세상을 밝히는 등신불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십자가와 통한다. 또한 우리의 일상과 우리나라의 촛불집회를 연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앞서 나의 가난이 먼저 떠오른다. 우리 집에서는 돈이 없어서 촛불도 마음 놓고 켜지 못했다. 촛불보다 훨씬 어두운 작은 등잔불을 켜고 겨우 저녁밥을 먹었다. 그 등잔불에 들어가는 석유도 아깝다며 빨리 불 끄고 자라는 말을 귀에 말뚝이 박히도록 듣고 살았다. 또한 초를 생각하면 학교 교실과 복도의 나무 바닥이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초를 칠하고 걸레질을 하던 생각이 자주 난다.


그리고 나는 요즘 산방굴사에 자주 올라간다. 산방굴사에는 언제나 많은 촛불이 켜져 있다. 기도발이 좋다는 소문이 퍼져서 자정 무렵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촛불을 켜고 기도를 한다. 하얀 초의 몸통에 검은 소원과 이름과 날짜까지 적어놓고 손을 싹싹 비비며 기도를 한다. 나는 예수님과 부처님을 공평하게 함존경한다. 하지만 예수님만 믿는 사람들은 양초를 예수님 몸으로 생각할 것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양초를 또 다른 무엇으로 생각할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특히 그는 예수님의 삶에 깊이 젖어있었던 시인이었다. 기독교의 무조건적인 믿음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생애와 예수님의 삶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자기 자신도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몸이신 양초, 소의 갈비뼈도 아닌  염소의 갈비뼈 같은 연약한 인간으로 오셨던 사람, 초의 생명의 심지처럼 아낌없이 먼저 타올랐던 사람, 자신의 맑은 피와 따뜻한 눈물로 온몸을 불살라 환하게 타올랐던 사람, 자신의 생명까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주신 위대한 사랑 예수님, 고통의 끝을 보면서도, 선녀처럼 촛불은 천상의 춤을 춘다. 이를 본 꿩이 매를 본 듯, 매의 눈빛을 본 듯 도망하고, 암흑 같은 어둠이 창구멍으로 도망한다. 제물의 위대한 향내..., 멋지고 위대하게 예수님의 희생제물을 촛불로 비유하고 있는...., 마지막의 "맛보노라"만 없으면 더욱 좋았을 것 같은....,   


이 시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윤동주 시인의 소년 시절을 좀 알면 좋을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1925년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에 입학하여 재학 시절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새 명동》을 발간하였다. 6년 뒤인 1931년, 14세에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를 졸업하고, 화룡현립 제일소학교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하였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여,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했다. 그리하여 윤동주 시인은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이 시 <초 한 대>를 썼을 것이다.


그 후 윤동주 시인은 1935년에 소학교 동창인 문익환이 다니고 있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다. 그해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가 간행한 학우지 숭실활천( 崇實活泉 ) 제15호에 시 공상(空想)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35년 12월, 숭실학교 학생들이 '등불참배'를 거부한 사건이 발생했고 이듬해 1936년 1월 18일 학교장 '조지 S. 맥퀸'( 한국명 윤산온 )이 신사참배를 최종적으로 거부함으로써 1월 20일 교장직에서 파면된 후 미국으로 추방될 뻔했다. 이후 숭실중학교가 무기휴교로 폐교되어, 문익환과 함께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였다. 


나는 오늘 밤에 또 다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촛불을 켠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위하여 기도를 한다. 지금 이렇게 인연이 닿아 서로의 호흡을 주고받을 수 있는, 세상의 단 한 사람, 당신을 위하여 나의 숨결과 나의 기와 나의 불꽃같은 마음을 보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지나간다. 초 하나, 가치 전도, 돈의 위력, 사고의 유연성, 지혜의 활용성, 언어의 사고력, 사고의 언어력, 어둠도 필요한데 밝음을 더욱 좋아하는 사람들, 추위도 필요한데 따뜻함을 더욱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


수선화, 동백, 복수초, 매화, 무꽃, 배추꽃, 광대나물꽃...., 저마다의 가슴에 촛불을 켜고, 어둠을 불사르고 추위를 데워서, 따뜻한 봄을 부르는 2월, 더 많은 꽃들이 횃불 같은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아가서, 다시 함께 모여서 촛불을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는, 설날을 앞둔 오늘 밤에도 나는 윤동주 시인을 만나서 따뜻하고 환하게 촛불 하나 켠다.


대한민국 정부는 규암 김약연에게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했다. 그의 어록비가 천안 독립기념관에 세워졌다. 명동학교에서 김약연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김약연에게 배운 소년들은 그 시간들을 의미 있게 살리고 자신을 갈고닦아 명동학교 응원가에 쓰여 있듯 "후일 전공"을 세운다. 윤동주 시인과 명동학교에서 육 년을 함께 공부한 문익환(1918~1994) 목사는 <태초와 종말의 만남>에서 명동마을과 김약연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북간도에서 동만의 대통령이라고 불린 김약연 목사님이 자리 잡고 계시던 명동이 바로 윤동주와 내가 자란 고향이다. 나는 그 명동소학교에서 동주와 육 년을 한 반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명동에서 삼십 리 떨어진 곳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서 삼 년을 같이 공부했다. 우리는 교실과 강당과 운동장에서 태극기를 펄럭이며 '동해 물과 백두산이...., '를 소리 높여 불렀다. 일본 사람들에게 돈을 안 준다고 동경 유학 시절에 전차를 타지 않고 꼭 걸어 다녔고, 기차를 안 탄다고 용정에서 평양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 온 백발이 성성한 명희조 선생에게서 국사 강의를 들으며 우리는 민족애를 불태웠던 것이다. 하지만 동주의 민족애가 움튼 곳은 명동이었다. 국경일, 국치일마다 태극기를 걸어놓고 고요히 민족애를 설파하시던 김약연 교장의 넋이 어떻게 동주의 시에 살아나지 않았겠는가! 어떤 작품이던 조선 독립이라는 말로 결론을 내지 않으면 점수를 안 주던 이기창 선생의 얽은 모습이 어찌 잊히랴!


그런데, 아, 조선 독립이란 말로 결론을 내지 않으면 점수를 주지 않았다는 이기창 선생의 얼굴이 제주 4.3을 이끌었던 유격대 제2대 사령관 이덕구와 겹쳐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 소화(昭和) 9년 12월 24일

윤동주 시인은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3편의 시 말미에  소화(昭和) 9년 12월 24일이라는, 일본 천황의 연호로 날짜를 썼다. 소화(昭和)는 일본 124대 천황의 연호이다.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히로히토() 천황의 연호가 바로 소화(昭和)이다. 소화(昭和) 9년 12월 24일을 서기로 바꾸면 1934년 12월 24일이 된다. 윤동주 시인도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일본 청황의 연호를 썼다. 하지만 이후에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서기로 쓰기 시작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서귀포 서천꽃밭 019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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