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과 함께, 너에게 나를 보낸다 04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序曲)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 사람은 ―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
이 노래 끝의 공포(恐怖)를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하늘 복판에 알 새기듯이
이 노래를 부른 자(者)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 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 자(者)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勝利者) 위인(偉人)들!
_ (1934.12.24. 윤동주 18세)
삶과 죽음이라는 너무나 큰 관념 덩어리를 노래하고 있다. 시는 작은 사물이나 구체적인 정황을 노래할 때 성공을 거둘 확률이 높다. 시는 시의 특성상 앞 시에서 보았듯이 초 한 대처럼 아주 작고 구체적인 사물에 사람의 숨결을 불어넣을 때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이 시에서 처럼 삶이나 죽음처럼 근본적인 우리들의 관념을 함부로 노래하다 보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특히 초보자들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윤동주 시인은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 시는 시인이 쓰지만 독자가 완성하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이다. 특히 윤동주 시인의 시들은 자신이 직접 인쇄화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시인들이 자신들의 시를 노트에 쓸 때와 출판 과정에서 책으로 만들어지는 경우에 더욱 많은 손질을 하거나 수정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윤동주 시인의 시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따라서 윤동주 시인 사후에 이루어진 출판물들이 윤동주 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편집자들의 관점에 따라서 다양하게 인쇄된 경우가 많다.
이 시는 판본마다 연 구분이 조금씩 다르게 되어 있다. 나는 가능한 윤동주 시인의 자필 원고에 가깝게 해석하고 싶다. 그런데 자필 원고에는 수정한 표시와 함께 추가된 메모도 함께 있다. 2연과 3연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5행이 부기되어 있기도 하다.
( 나는 이것만은 알았다
이 노래의 끝을 맛본 이들은
자기(自己)만 알고
다음 노래의 맛을 가르쳐주지 아니
하였다 )
자, 그럼 이제 윤동주 시인의 <삶과 죽음>을 살마리 삼아서 우리들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자. 좋은 시는 우리들에게 한 번쯤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할 수 있어야 좋은 시일 것이다. 또한 좋은 시는 그 시를 읽고 자신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자신들에 맞는 또 다른 시를 쓰게 만들 수 있는 시가 좋은 시일 것이다. 따라서 이 시 자체가 스스로 완벽하게 좋은 시가 아니더라도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줄 수 있으면 독자에 의해서 더 좋은 시로 재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는 그런 오묘한 장르여서 더욱 매력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란 무엇일까. 죽음이란 무엇일까. 삶도 수수께끼이고 죽음도 수수께끼이다. 수수께끼라는 점에서는 삶과 죽음이 같을 것이다. 살아있는 우리들은 아직까지 삶을 다 살아보지 못해서 완벽하게 삶을 다 안다고 할 수 없다. 죽음 또한 살아있는 사람들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해서 죽음을 알 수 없다. 물론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안다고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과 자신이 직접 죽는 것은 다른 경험이다. 삶과 죽음은 어쩌면 우리들의 손바닥과 손등처럼 하나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백지 한 장의 앞면과 뒷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생명에는 삶과 죽음이 있다. 태어남이 있고 자라남이 있고 죽어감이 있고 사라짐이 있을 것이다. 무릇 생명에는 죽음과 조락이 있고 생명에는 리듬이 있다. 무엇이 바른 삶인지 무엇이 바른 삶의 길인지 스스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삶은 죽음의 시작이요 죽음 또한 삶의 연속이다. 생명이나 사물에는 본질이 있다. 사물의 본질이 지니는 엄숙성이 있다. 삶은 죽음의 서곡이라고 노래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에 따라서 삶을 희극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비극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조화와 초극에 있을 것이다. 삶이 죽음의 서곡이라면 어떻게 살면 좋을까. 노래를 잘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서곡을 잘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노래를 부르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서곡이 언제 끝날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우리들은 쓸쓸한 침묵과 공허의 의미를 미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들은 어쩌면 날마다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죽음은 어쩌면 우리들의 잠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밤마다 잠을 잔다. 어쩌면 우리들의 잠은 우리들의 죽음을 미리 살아보도록 만든 신의 배려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또한 잠을 자면서 꿈을 꾸기도 하고 꿈을 꾸지 않고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날도 있다. 어쩌면 우리들의 죽음도 그렇게 더 긴 꿈을 꾸거나 아무런 꿈 없이 편히 긴 잠 속으로 빠져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들이 잠들기 전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들의 잠 속의 꿈은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어쩌면 우리들의 삶보다 훨씬 긴 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죽음, 그 죽음 속에서 어떤 꿈을 꿀 것인가는 자신들의 삶이 결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은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취하여 춤을 추는 경우가 많다. 뼈란 무엇일까. 뼈는 우리들이 죽은 다음에도 가장 오래도록 남아있는 우리들의 증거가 될 것이다. 우리들이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추구했던 핵심 정신이 우리들의 뼈로 남을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될 수도 있고 미움이 될 수도 있다. 애증은 한 탯줄에서 태어난 두 아이와도 같다. 죽음의 본질을 알 수 없으면서도 사람들은 죽음에 접근하려고 한다. 빛과 어둠의 조화를 터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중용을 강조하셨다. 인생은 관념이 아니라 체험이다. 그런 알 수 없는 죽음 때문에 종교가 태어났다. 종교는 죽음의 자식이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에는 어둠을 알 수 없다. 밤을 알 수 없다. 죽음의 서곡이 끝나면 어떤 노래를 불러야만 할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이 노래 끝의 공포를 체험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또한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다. 오늘을 잘 사는 것이 오늘을 잘 죽는 일일 것이다. 또한 오늘을 잘 죽는 일이 오늘을 잘 사는 일일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삶과 죽음>의 시에서 "하늘 복판에 알 새기듯이"라는 표현이 참 재미있다. 하늘 복판에 알을 새긴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하늘 복판에 알 새기듯이 노래를 부른 자는 또한 누구일까?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 같이 노래를 그친 자는 또한 누구일까? 알을 낳는 것도 아니고 알을 새기는 자는 누구일까? 그렇다면 나는 노래를 부르는 자일까 노래를 그친 자일까.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노래를 부르는 자일까 노래를 그친 자일까. 우리들은 아직 삶이 끝나지 않았고 죽음의 서곡 또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 위인들을 노래하고 있다. 아름다운 뼈를 남기기 위해서 미리 죽음을 생각하고 의미 있는 죽음을 위해서 삶을 더욱 의미 있는 삶으로 승화시킬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즘에는 죽으면 뼈도 남지 않는다. 죽으면 며칠 만에 화장을 해서 뼈까지 모두 부수어서 재로 만든다. 사람들이 죽으면 영혼만 남아서 하늘로 올라간다. 하늘로 올라가서 반짝이는 별빛이 된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서 한동안 따뜻한 온기가 되거나 차가운 눈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살아있는 동안 죽음의 서곡을 부르면서 하늘의 복판에 각자의 알을 새길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들이 죽은 다음에 그 알에서 별이 부화할지 달이 부화할지 태양이 부화할지, 그것은 하늘의 뜻이지 우리들의 운명은 아닐 것이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시는 또한, 죽음에 승리한 위인들은 삶이 뼈를 녹여내는 듯한 죽음의 서곡임을 알고 이상을 추구하면서 죽음의 공포를 이겨낸 사람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삶과 죽음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 끝날 것인가? 세상 사람은 뼈를 녹여내는 듯하게 힘든 삶의 노래에 죽음을 느끼지 못하고 춤을 춘다. 그리고 해가 넘어가기 전에는 죽음의 서곡 끝에 존재하는 공포를 생각할 사이가 없이 살고 있었다. 하늘 복판에 죽음의 서곡을 아로새기듯이 이 노래를 부른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와 같이 이 노래를 딱 그친 자가 누구인가? 그들은 죽고 뼈만 남아 죽음에 승리한 위인(偉人)들이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삶과 죽음>에 대한 화자의 인식을 담은 시이다. 일반적으로 ‘삶과 죽음’은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는데 화자는 삶이 죽음의 서곡이라고 한다. 삶과 죽음이 같은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래서 화자는 삶을 살아가면서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산다.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 이 노래가 언제 끝나랴’는 오늘도 삶을 살면서 삶이 죽음을 향해가는 것을 인식하였고 삶이 언제 끝날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았다는 말이다. 죽음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삶은 죽음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가까이 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죽음이 다가올 날은 멀었지만 죽음을 행하여 가고 있으므로 ‘죽음의 서곡’을 노래한 것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세상 사람은 - /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 춤을 춘다 / 사람은 해가 넘어가기 전 / 이 노래 끝에 공포를 /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는 위인들과 달리 세상 사람들은 삶에서 죽음을 보지 못하고 삶이 뼈를 녹여내는 듯한 것임을 생각하지 않고 즐겁다고 춤을 추는데 그 이유는 삶의 끝에 있는 죽음의 공포를 생각하지 못해서란 말이다.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 춤을 춘다’는 세상 사람들은 삶이 죽음의 서곡인 줄 모르고 즐거워서 춤을 주는데 화자는 삶이 죽음의 서곡이고 이 노래 끝에 있는 공포를 생각하면 뼈를 녹여내는 듯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화자의 삶에 대한 관념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막상 죽음이 닥쳤을 때에 공포에 빠져 두려움에 떨며 죽지만 화자와 ‘죽음의 승리자 위인들’은 죽음을 맞이했을 때에 삶 속에서 미리 준비를 했기에 죽음을 이기는 위인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해가 넘어가기 전’에서 ‘해가 넘어가기 전’은 살아있을 때를 말한다. ‘이 노래 끝에 공포를 /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는 세상 사람들은 삶을 즐겁게만 생각하기에 죽음의 공포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늘 복판에 알 새기 듯이 / 이 노래를 부른 자 누구뇨 /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 같이도 / 이 노래를 그친 자가 누구뇨 // 죽고 뼈만 남아 / 죽음의 승리자 위인(偉人)들!’에서 ‘하늘’은 ‘이상, 꿈, 희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늘 복판에 알 새기듯이’는 이상을 추구하면서 이상 속에서 뚜렷하게 ‘삶이 죽음의 서곡’이라는 인식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 ‘소낙비 그친 뒤 같이도’는 직유로 소나기가 한순간에 그치는 것처럼 확실하게 그친 것을 말한다. ‘죽음의 승리자 위인(偉人)들!’은 이미 ‘죽고 뼈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들은 ‘삶’이 ‘죽음’의 노래임을 알고 ‘뼈를 녹여내는 듯’하다는 것을 알고 ‘죽음’의 ‘공포’를 분명하게 알면서도 ‘이상’을 추구한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공포’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낸 사람들로 ‘위인(偉人)’이라 할 만한 사람인 것이다.
* 나는 죽기 전에 북간도에 살았던 윤동주 시인과 함께 백두산에 갈 생각을 한다. 윤동주의 고향 명동에 함께 갈 생각을 한다. 윤동주 시인이 고향에 갔던 그 길을 따라서 기차를 타고 갈 생각을 한다. 아, 백두산!
https://youtu.be/DMANm_7NYF4?si=W0FocAzB9QYMdZp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