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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Feb 15. 2024

이별(離別)

윤동주 시인과 함께, 너에게 나를 보낸다 14




이별(離別)



눈이 오다, 물이 되는 날.

잿빛 하늘에 또 뿌연 내, 그리고,

커다란 기관차는 빼―액―울며,

쪼끄만, 가슴은, 울렁거린다.


이별이 너무 재빠르다, 안타깝게도,

사랑하는 사람을,

일터에서 만나자 하고――,

더운 손의 맛과, 구슬 눈물이 마르기 전

기차는 꼬리를 산굽으로 돌렸다.


 _ (1936.3.20.영현군(永鉉君)을 —, 윤동주 20세) 



친구와의 이별에 따르는 페이소스가 기적소리와 함께 설핏한 여운을 풍긴다. 만남과 헤어짐은 어길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회자정리의 원칙 위에서만 인간의 생존은 가능하다. 만나면 기쁘고 헤어지면 슬프다. 인간의 원초적 감정이다. 이별은 또한 만남에 대한 희미한 기대를 안겨 준다. 지금은 소리도 없는 디젤기관차가 드나들게 됐지만 그 당시만 해도 빽빽 우는 증기기관차가 나그네를 실어 날랐다. 이별의 애수는 이 배경적 상황으로 해서 더욱 짙은 것이었다. 영현 군과의 이별의 순간이 하나의 판토마임처럼 아로새겨진다. 그런데 헤어진 영현군(永鉉君)은 누구일까. 그가 누구이길래 사랑하는 사람을 일터에서 만나자고 했을까. 어떤 일터에서 만나자고 했을까.


애별리고(愛別離苦)는 불교에서 말하는 팔고(八苦)의 하나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을 말한다. 부모ㆍ형제ㆍ처자ㆍ애인ㆍ친구 등과 생별(生別) 또는 사별(死別)할 때 받게 되는 고통을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애별리고를 겪게 된다.    


윤동주 시인의 나이 20세인 1936년 3월 20일에 만든 작품으로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화자의 심정이 솔직히 표현된 작품이다. 헤어짐의 아쉬움으로 인해 더 짧게 느껴지는 이별의 순간과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하게 달려가는 기차의 모습은 화자가 느끼는 정인과의 이별이 얼마나 안타까운지를 잘 보여준다.


시의 원문을 보면 작품 말미에 '一九三六年三月二十日 永鉉君을 —'이라고 쓰여져 있다. 


윤동주는 본문의 '빼―액―'과 같이 소리 가락을 맞추기 위해 모음 음절을 더하거나 줄표를 써서 소리를 늘이는 표현법인 '소리 늘임법'을 즐겨 사용했다. 이 같은 표현법은 시인의 다른 작품인 <산림>, <황혼>, <개>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원문표기

- '잿빛 하늘' -> '재ㅅ빛하늘'

- '커다란' -> '크다른'

- '쪼그만' -> '쪽그만'

- '이별' -> '리별'

- '안타깝게도' -> '안탑갑게도'

- '돌렸다.' -> '돌럿다.'          


https://youtu.be/yQ6e8Uainls?si=w3A5RW1VNqC2wvhy

시인 김응교   (제작 박민규 대위) (youtube.com)

https://youtu.be/pfW8oLzcaOQ?si=kh-BrE2Lcn5BUJqS


최진석의 장자 철학 제2강 (youtube.com)


신에서 인간으로

믿음에서 생각으로

천명에서 도로

세계는 변한다


탈레스 

철학의 출발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신으로 가득 차 있다.”


발밑의 웅덩이도 못 보는 사람


탈레스(Thales, 기원전 624?~기원전 546)는 흔히 ‘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은 한 분야에서 가장 존경받는 원조이게 마련이다. 탈레스도 그렇다. 탈레스는 살아 있을 때 이미 고대 그리스의 7현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유명인의 우스꽝스러운 실수는 재미있는 화젯거리가 되는 법.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도 오늘날까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위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우주의 이치를 탐구하느라 하늘을 보면서 정신없이 걷다가, 그만 발밑의 웅덩이를 미처 보지 못하고 꼴사납게 넘어지고 만 것이다. 이것을 본 트라키아(발칸 반도 남동부 지역) 출신 하녀가 큰 소리로 비웃으며 말했다.


“우주의 이치를 탐구한다는 분이 발밑의 웅덩이도 못 보다니요!”


철학의 아버지가 완전히 스타일 구긴 이 일화는 고상한 문제에만 매달리느라 현실에는 어두운 철학자들을 비판할 때 흔히 인용된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 이야기를 오히려 철학자들의 진정한 면모를 내세우려고 자랑스럽게 소개하곤 했다. 발밑의 웅덩이도 보지 못했던 탈레스처럼 철학자란 재판이나 흥정, 일상의 세세한 일에는 어수룩하고 둔한 사람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삶과 세계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이 같은 고민을 통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더 가치 있고 보람 있게 만든다. 무작정 아무 직장이나 들어가기보다, 자신의 삶과 목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직업을 고를 때 더 많은 것을 얻듯이 말이다.


따라서 철학은 오래전부터 엘리트들이 배우는 필수 과목이 되어 왔다. 철학은 작은 이익에 매달린 나머지, 삶의 근본적인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 준다. 크고 넓게 세상의 의미를 탐구하고 바람직한 삶의 방향을 찾는 작업, 탈레스는 이러한 철학의 임무를 삶을 통해 보여 준 사람이었다.


철학의 탄생지, 밀레투스


새로운 일이 일어나는 데에는 주변 환경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탈레스는 밀레투스(Miletus) 사람이었는데, 밀레투스는 그리스 본토가 아닌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지방) 개척지에 있던 도시 중의 하나였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도시보다는 새롭게 태어난 도시의 분위기가 자유로운 법, 밀레투스에서는 인습에 얽매인 그리스 본토 도시보다 훨씬 자유분방한 생활과 사고가 이루어졌다.


그뿐 아니라, 밀레투스는 다양한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항구 도시이기도 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의 무역 중심지로 물자가 풍부했고 엄청난 부자도 많았다. 아마도 밀레투스의 분위기는 지금의 뉴욕과 비슷했을 것이다.


철학은 이런 분위기에서 태어났다. 생계에 쫓기는 사람은 삶과 세상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다. 하루하루 닥치는 일들을 해결하기에도 벅찬 탓이다. 또한, 일상에 너무 찌든 까닭에 현실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따라서 삶과 세상의 진정한 의미를 고민하기 위해서는 절박한 일상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을 만큼 물질적 · 정신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을 할 수 있는 조건으로 ‘여유(scholē)’를 꼽은 이유이다. 밀레투스의 경제적 성공은 이러한 ‘여유’를 가능하게 했다.


나아가, 항구 도시 밀레투스는 자유롭고 합리적인 생각을 중시하는 곳이었다. 항해를 하려면 날씨에 대한 지식과 배 모는 기술을 바탕으로 한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 또한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을 상대로 이익을 남기려면 자신들만의 관습에서 벗어나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세상사를 신에게 기대어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밀레투스 사람들은 스스로 곰곰이 생각하여 일어난 일들의 원인을 밝히고 해결책을 구하곤 했다. 이처럼 철학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일 만한 근거와 증명을 통해서만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 밀레투스 사람들 특유의 비판적인 태도에서 시작되었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엉터리지만, 철학 역사 최초로 '세계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에 답한 본질적인 주장이었다. 탈레스는 세상을 관찰한 결과를 종합하여 결론짓는 철학적인 사고를 했다.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지금 사람들이 탈레스의 출생과 성장 배경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란 고작 조상이 페니키아(오늘날의 레바논을 중심으로 하여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의 고대 지명) 사람이라는 점, 그리고 밀레투스의 명문가 출신이라는 것 정도이다. 탈레스의 시대와 150년 남짓 차이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탈레스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는 사실을 보면, 애초부터 그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았던 듯싶다.


탈레스가 ‘7현인’ 중에서도 으뜸이었음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여겨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지식인들의 생활 태도를 보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다. 요즘의 이름난 지식인들은 언론에 끊임없이 얼굴을 들이밀고 떠들어대지만, 그 당시 지식인은 오히려 ‘침묵’을 미덕으로 여겼다.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한두 마디 던진 말들은 곧 ‘금언(金言)’이 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텔레비전, 라디오뿐 아니라 종이조차 없던 시대였으니, 긴 주장보다는 차라리 한두 마디의 의미심장한 말이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데 더 효과적이었을 터다.


탈레스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철학의 아버지라는 그가 남긴 철학적 주장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와 ‘지구는 물 위에 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신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세 마디뿐이다.


그를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한 말은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 주장이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에 와서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는 주장은 의미 없는 엉터리일 뿐이다. 그러나 철학 역사로 볼 때 이 주장은 매우 가치 있다. 철학 역사에서 최초로 던져진, 눈에 보이는 여러 사물과 변화를 넘어 세계는 과연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에 답하는 본질적인 주장이기 때문이다.


종교도 세상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해답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철학은 주장을 내놓는 데 그치지 않는다. 논리와 합리적인 근거에 비추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 보이려 한다. 이 점에서 철학은 종교와 다르다. 종교는 ‘신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라고 선언해 버리고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권하지만, 철학에서는 받아들일 만한 합리적인 설명이 없으면 어떤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탈레스도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는 주장에 대해 나름대로 증명을 시도했단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증명을 해냈는지는 아리스토텔레스도 잘 알지 못했다. 학자들은 탈레스가 내놓았을 법한 증거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곤 한다.


하나는, 탈레스의 이집트 유학 경험에서 근거를 찾는 입장이다. 이집트는 천문학 · 기상학 · 수학 · 항해술 등 모든 분야에서 문화 선진국이었다. 유능한 젊은이는 시대의 중심지로 모여들게 마련이다. 탈레스도 젊은 시절 이집트에서 배우고 활동했다. 이집트는 풍요로운 나일 삼각주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삼각주의 비옥한 토양은 나일 강의 홍수가 해마다 얼마만큼 대지를 적셔 주는가에 따라 넓이가 결정되었다. 따라서 이집트에 널리 퍼져 있던 물에 대한 숭배가 자연스럽게 그의 생각에 젖어들었으리라 추측할 만하다. (그리스의 창조 신화도 물의 신 오케아노스에서 출발하지 않는가!)


다른 학자들은 탈레스가 일상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탈레스는 신화에 기대어 세상을 해석했던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가능한 한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만물의 근본 원리를 찾아보려 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성실하게 관찰해 볼 때,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는 결론은 당연하다. 살아 있는 모든 동식물의 성장과 생명을 좌우하는 것은 물이다. 습기를 잃으면 모두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에 와서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철학 역사에서 의미 있는 점은 오직 그가 논리를 따져 사회에 퍼져 있는 믿음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관찰 결과를 종합하여 세상의 근본적인 모습에 대해 결론 내리는 ‘철학적인 사고’를 했다는 사실뿐이다.


철학자도 돈을 벌 수 있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본 원리를 깊이 있게 탐구한 철학자였지만, 결코 탁상공론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대단히 실용적인 지식인이었다. 그 실용성은 현실 생활과 별 상관없어 보이는 수학 · 지질학 · 천문학 등과 같은 순수 학문에서 나왔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일찍이 트라키아 하녀에게 망신을 당한 탈레스는 ‘철학자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사업을 벌였다. 한겨울에 올리브기름 짜는 기계를 모조리 싼값에 빌린 것이다. 사람들은 올리브 수확철도 아닌 한겨울에 기름 짜는 기계를 빌리는 덜 떨어진 인간에게 비웃음을 보냈다. 하지만 이듬해 큰 풍년이 들어 기름 짜는 기계의 임대료가 크게 올라 탈레스가 큰 이익을 보자, 사람들은 그의 식견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또, 탈레스는 큰 곰자리를 보고 항해를 하던 그리스 뱃사람들에게 작은 곰자리가 방향을 잡는 데 더 낫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도 했다. 이것은 천문학과 기상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아가 탈레스는 기하학과 수학을 연구해 피라미드의 높이를 재기도 했다. 이때 그는 그림자의 높이와 실제 사물의 크기를 비교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정치적으로도 대단한 수완가여서, 페르시아의 위협에 맞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연합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을 정말 탈레스가 했는지는 의심스럽다. 탈레스 시대 그리스인들은, 유명한 발명품들은 자신이 이름깨나 들어 본 현자가 만들었으리라 단정했던 탓이다. 분명한 사실은 탈레스가 결코 일상생활에 대해 무지하고 무능한 철학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를 지금에서 평가하자면, 돈 못 버는 학문이라며 외면받는 순수 학문이 어떻게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지를 잘 보여 준 실용적 지식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치열한 일상에서 한 발 물러서기


탈레스의 삶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듯,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다. 다른 이들의 풍자 시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운동 경기장에서 경기를 구경하던 중 숨을 거둔 듯하다. 더위를 먹고 죽었다는 설도 있지만 군중에 깔려 죽었다는 주장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초연하게 독배를 들이켠 것에 비하면, 철학의 아버지의 죽음은 그다지 철학적이지도 극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탈레스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아버지 같은 훈계를 준다. 많은 현대인들은 정신적 근시로 살아가고 있다. 끝없는 경쟁 가운데 상대를 이기려고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정작 세상의 의미는 무엇이고 진정 바람직한 삶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 결과 치열한 노력과 경쟁 끝에 돌아오는 것은 대개 공허함과 허탈감뿐이다. 선진국 사람들의 삶의 만족도가 못 사는 나라들보다 훨씬 낮다는 사실은 정신적 근시들의 영리함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탈레스는 철학의 아버지답게 우리에게 충고를 건넨다. 치열한 일상에서 한 발 물러서서 넓고 깊게 세상과 삶에 대해 통찰해 보라. 무엇이 진정한 세상의 모습인지를 고민하고 나름의 결론을 내릴 때, 우리는 다람쥐가 쳇바퀴 위에서 경쟁하는 듯한 생활에서 벗어나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 탈레스는 우리에게 철학적 반성의 가치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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