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과 함께, 너에게 나를 보낸다 13
안아보고 싶게 귀여운
산비둘기 일곱 마리
하늘 끝까지 보일 듯이 맑은 공일날 아침에
벼를 거두어 빤빤한 논에서
앞을 다투어 요를 주으며
어려운 이야기를 주고 받으오.
날씬한 두 나래로 조용한 공기를 흔들어
두 마리가 나오
집에 새끼 생각이 나는 모양이오.
_ (1936.2.10. 윤동주 20세)
1936년 2월 10일에 창작한 예사높임말인 '하오체'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시인은 산비둘기 일곱 마리의 모습을 담담하고 평범하게 묘사하였는데, 새끼를 위해 창공을 가르는 어미새와 아비새로 보이는 두 비둘기의 모습은 윤동주의 <오줌싸개 지도>나 <창구멍>과 같은 작품들에서 표출된 가족애를 떠올리게 한다.
비둘기는 윤동주가 자주 다루는 시적 대상이다. 비둘기가 등장하는 시들로는 <별 헤는 밤>과 <사랑스런 추억>이 있다.
흔히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새로 유명하다. 오늘날에도 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전쟁은 공멸의 지름길이다. 인간들의 헛된 욕망, 특히 권력욕에 눈이 먼 일부 권력자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전쟁은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미치광이들이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그런 권력자들은 반드시 몰아내어 우리들의 소중한 평화를 지켜야만 한다.
요즘에는 비둘기도 시끄러운 새로 인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평화는 평화를 잃었을 때 비로소 평화의 소중함을 알아차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만 할까. 평화와 순결의 상징 비둘기, 현실적으로 어둡고 답답한 환경과 심정을 비둘기에 빗대어 카타르시스 하고픈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상상의 자유를 위해서도 날개를 펼쳐야만 한다. 사람에겐 그런 날개가 없다. 새의 날개를 빌려서라도 날고 싶었을 것이다. 잠재의식의 간접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새의 날개를 빌려서라도 날아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라. 새의 날갯짓은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새들은 오늘도 생존을 위하여 날아야만 한다. 새들은 자유롭게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구하기 위해 오늘도 힘찬 날갯짓의 노동을 해야만 한다. 새의 날갯짓은 결코 한가로운 춤사위가 아니라 오늘도 살아남기 위하여 날개가 부서지도록 바람 속을 날아야만 한다. 또한 집에서 간절히 기다리는 새끼들을 돌보기 위해서라도 지친 날개를 펼쳐, 있는 힘을 다하여 하늘 속으로 몸을 던져야만 한다. 날개가 부서지도록 흔들지 않으면 나와 가족들의 안위를 보살필 수 없는 새들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을 한다. 그리고 새들과 인간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하여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만 할까. 좀 더 깊이 생각하는 밤이다.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새들과 인간들이 있다.
- '공일날'은 '일을 하지 않고 쉬는 날'을 말한다.
- '빤빤한'은 '남은 것이 없이 말끔한 모습'을 뜻한다.
- '요를 주으며'의 '요'는 '모이'의 함북 방언이다.
- '나래'는 윤동주의 <남쪽 하늘>이나 <종달새> 같은 다른 시들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시어로, '날개'를 뜻한다.
https://youtu.be/5tzWq-FvjHU?si=HTmdhl3k-5WfS6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