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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러와 이어도공화국

꿈삶글 104

by 강산



바다의 열차를 타고 출발한다


이어도에서 출발한다. 윤동주 시인과 함께 순례길에 나선다. 바다의 열차를 타고 떠난다. 파도의 열차를 타고 출발한다. 바람의 기적소리 울리며 출발한다. 기관사는 보이지 않는다. 기관사가 비바리인지 늙은 해녀인지 알 수 없지만 창밖으로 숨비소리가 들린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노랫소리도 들린다. 기차에는 백미러가 없다. 그냥 앞만 보고 달린다. 한 번 출발한 시간은 돌아보지 않고 달린다. 우리는 이어도공화국에 도착한다.


이어도공화국을 아시나요


이어도공화국은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아름다운 나라다. 이어도공화국에는 자신들을 스스로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 있다. 하늘은 바다의 거울이고 바다는 하늘의 거울이다.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의 백미러이고 죽은 사람들은 산 사람들의 백미러다. 우리들은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깊은 거울이다. 시간 속에는 언제나 빛나는 백미러가 있다.


백미러


앞으로 잘 가기 위해서는

가끔 뒤를 보아야만 한다

백미러 속에 하늘이 있고

산이 있고 길이 있다

그리고 윤동주 시인이 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들은 비로소

앞으로 잘 갈 수 있다


나는 혼자 생각했다. 윤동주 시인은 모를 거라 생각했다. 일찍 죽은 윤동주 시인은 모를 거라 생각했다. 원자폭탄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삼팔선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제주사삼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여순항쟁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빨갱이라는 말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손가락총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육이오를 모를 거라 생각했다. 휴전선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사일구를 모를 거라 생각했다. 오일륙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오일팔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윤동주 시인은 모를 거라 생각했다. 컴퓨터를 모를 거라 생각했다. 휴대폰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인터넷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윤동주 시인은 다 알고 있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다 알고 있었다. 윤동주 시인은 죽어서도 시를 쓴다고 하였다. 다만 산 사람들이 읽을 수 없는 시를 쓴다고 하였다. 아, 사람들은 죽어서도 살아있는 사람들의 역사를 다 알고 있구나.


안소영 장편소설 <시인/동주>는 1938년 3월 23일 경성역에 도착한 경원선 열차에서 송몽규와 윤동주가 내리고, 북간도 용정의 고향 선배인 라사행이 마중 나온 모습으로 시작된다. 스물두 살 동갑내기 사촌인 윤동주와 송몽규의 연희전문학교 시절부터 시작된다. 신촌 연희전문학교 교정의 회갈색 석조 건물과 그 앞의 언더우드 동산과 돌계단, 백양나무 오솔길을 걷는 송몽규와 윤동주가 보인다. 최현배 교수님의 <우리말본> 강의하는 모습도 보인다. 송몽규와 윤동주와 강처중이 기숙사에서 정답게 대화하는 모습도 보인다.


연희전문학교를 생각하면 나희덕 시인 생각이 난다. 나희덕 시인은 연세대학을 나온 시인들 중에서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시인이다. 나희덕 시인은 윤동주 시인보다도 훨씬 좋은 시를 많이 쓴 시인이다. 인격 또한 윤동주 시인을 능가할 정도로 훌륭하다. 어쩌면 그의 스승이신 정현종 시인에게서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정현종 시인은 서울예술대학에서도 잠시 계셨다는데 나는 직접 배우지는 못했다. 인자하고 따뜻한 정현종 선생님 덕분에 우리나라에는 좋은 시인들이 더욱 많아졌을 것이다.


윤동주 시인과 함께 순례를 떠나기 전에 잠시 메모를 남긴다. 윤동주 시인과 나희덕 시인처럼 나도 좋은 시를 쓰기 위하여 먼저 메모를 남긴다. 이 메모들이 잘 발효되어 좋은 시를 낳을 수 있도록 시의 씨앗을 땅에 묻는다. 아름답고 의미 있는 시로 부화할 수 있도록 시의 알을 낳는다.


윤동주 시인 1세, 1917년


윤동주의 집안은 증조부 윤재옥 때인 1886년에 함경북도 종성에서 간도의 자동으로 이주하였다. 조부 윤하현 때인 1900년에 명동촌으로 옮기어 살았다. 1910년에는 일가가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윤동주의 외삼촌 규암 김약연 선생은 1899년, 역시 종성에서 명동촌으로 이주한 한학자로서 1900년대 초에 명동학교를 세우고 많은 지사를 길러낸 선각자이며 1910년에 기독교에 입교하신 분으로 윤동주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12월 30일 당시 중화민국 동북부(만주)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본관이 파평인 부친 윤영석(1895~1965?), 모친 김룡(1891~1948)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해환이었다. 당시 조부 윤하현은 개척에 의한 소지주로서 기독교 장로였고, 부친은 명동학교 교원이었다. 후에 윤동주와 함께 옥사하게 되는 고종 송몽규는 외가인 윤동주의 집에서 같은 해 9월 28일에 태어났다(부친 송창희, 모친 윤신영, 아명은 한범). 송몽규와 윤동주는 유아 세례를 받았다(연도 미상). 호적상 윤동주 생년이 1918년으로 되어 있는 것은 출생 신고가 1년 늦었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의 국적과 본적


윤동주 시인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다. 하지만 윤동주 시인의 고향 생가터에는 '중국조선족 애국시인'이라고 쓰여있다. 중국의 애국 시인이라는 주장이다. 윤동주 시인은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났고 만주국 시절에 죽었다. 또한 윤동주 시인은 직계 후손이 없어서 호적이 없었다. 2022년 보훈처에서는 윤동주 시인처럼 호적이 없었던 156명의 독립유공자들에게 본적을 부여하였다. 독립기념관의 주소지인 천안 ‘독립기념관로 1’을 옛 호적법의 ‘본적’에 해당하는 등록기준지로 부여하였다. 그렇게 법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윤동주 시인의 본적지가 된 천안에 윤동주 생가가 복원될 예정이다. 윤동주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중국 용정 윤동주 생가는 지난 1981년에 허물져 1994년 8월에 (사)해외한민족연구소(소장 이윤기) 중심으로 복원했다. 그러나 생가 곳곳에 남겨진 한국인들의 지원 흔적이 최근 들어 모두 지워지고 중국의 동북공정 일환으로 생가가 폐쇄되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윤동주 시인의 본적지인 천안에 생가를 복원할 계획을 세웠다.


윤동주 생가를 천안에 복원하려는 사람이 있다. 생가의 복원이 평생의 꿈인 사람이 있다. 박해환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회장이 바로 그다. 윤동주 시인의 본적이 된 천안에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복원하려고 한다.


윤동주 생가의 천안 복원을 꿈꾸는 박해환 윤동주문학사상선양 회장은 올해 윤동주 문학 주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윤 회장 뒤로 중국 지린성에 있는 윤동주 생가의 사진이 보인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영원한 젊은 시인, 윤동주. 간절한 광복의 날을 6개월 앞두고 일본 형무소에서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시혼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그런 울림에 공명해 인생의 항로를 바꾼 사람이 있다. 박해환(65·천안)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회장이다.


유도대학교(현 용인대학교)에서 유도를 전공한 박 회장은 올해 가천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문학공부에 들어선 지 12년 만에 취득한 박사학위의 논문은 '윤동주 문학의 장소성과 문화 자원화 방안 연구.' 박 회장과 윤동주 시인의 인연은 작고한 올림픽 마라토너 손기정 옹과 교류에서 싹텄다. 박 회장은 "서울 올림픽공원 '메달리스트 전당'에서 사무총장으로 10년여 활동했다. 당시 손기정 선생 기념사업을 추진하려고 하니 선생께서 본인보다 윤동주 시인이 더 절실하다. 중국 지린성 윤 시인 생가가 방치되고 있다. 당신이 한번 배짱 있게 나서 보라는 말씀을 하셔서 1990년대부터 윤동주 시인 선양사업을 시작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박 회장은 중국 내 생가 보전을 비롯해 윤동주 시인의 선양사업을 다방면으로 전개했다.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인 '서시'에서 제호를 따 문학지를 창간해 정기 발간했다. 시인의 문학정신을 확산하고자 윤동주문학대상도 만들었다. 서울시 종로구 윤동주 시인의 언덕 조성과 윤동주 문학관 설치에도 앞장섰다.


2013년부터는 천안시 광덕면 무학리 산 131 무학산 자락으로 터전을 옮겨 '윤동주문학산촌'을 조성중이다. 윤동주문학산촌에는 야외에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시인 윤동주, 영혼의 터'라고 4개 국어로 새겨진 표지석 주변에는 시인의 묘지에서 담아 온 흙이 뿌려져 있다. 우물목판 등 박 회장이 수집한 윤동주 생가 자료들도 문학촌은 소장하고 있다. 윤동주문학산촌에서는 '윤동주시낭송대회' 등 윤동주 시인을 계승하는 다채로운 행사도 해마다 열린다.


박해환 회장의 평생 꿈은 '윤동주 시인 생가 복원'이다. 박 회장은 "무호적 상태였던 윤동주 시인의 본적이 정부 결정으로 2022년 독립기념관 주소인 '독립기념관로 1'이 됐다"며 "천안의 윤동주문학산촌에 시인의 생가를 복원하면 전국의 더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윤동주 시인의 삶과 문학을 손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회장 혼자의 소망은 아니다. 올 초 33인이 윤동주생가복원추진위원회 발기인 모임을 가졌다. 박 회장은 "생가 복원을 위해 10만여 평 문학산촌 터 가운데 필요한 부지를 무상 제공할 용의도 있다"며 "윤동주를 품은 독립도시 천안시가 될 수 있도록 지자체는 물론 각계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천안시 광덕면 무학산 자락의 윤동주문학산촌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와 그 옆에 선 박해환 회장.

2229789_675481_2848.jpg 중국 용정 윤동주 생가는 지난 1981년 허물져 1994년 8월에 (사)해외한민족연구소(소장 이윤기) 중심으로 복원했다.


선양회는 생가 복원 시 시인의 문학 혼을 지키고 윤동주 문학을 체험알 수 있는 전당 건립에 초점을 두고 있다. 또 생가 복원으로 시인의 생가 유품과 문학 혼을 전시해 완전한 대한민국 시인임을 민족사에 남긴다는 설명이다. 특히 윤동주 시인 본적지 천안시에 생가가 복원되면 윤동주 문학 순례지와 역사 문화 관광 자원화 연계로 지역경제 활성화에 획기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박해환 회장은 "민족의 옛 땅 북간도 용정 명동촌 폐쇄된 윤동주 생가 복원은 빼앗긴 나라의 역사를 되찾는 제2 광복운동으로 여기고 독립지사들의 원혼이 살아 숨 쉬는 독립기념관이 소재한 천안에 윤동주의 생가를 복원할 계획이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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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선양회는 1998년 한국인이 복원했던 윤동주 생가를 40년간 임대해서 방치돼 비가 새는 윤동주 생가와 그의 유년시절 주일학교 명동교회 지붕과 담장을 보수하고 시인이 마시고 자란 우물을 복원했으며 윤동주문학대상 민족상 평화상 해외동포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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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몽규 옛집.png 송몽규 옛집


다시 백미러

앞으로 잘 가려면 뒤도 함께 보아야만 한다


백미러 속에 길과 산이 보인다

백미러 속에 강과 산이 보인다

백미러 속에 강산이 보인다

백미러 속에 이어도가 보인다

백미러 속에 그림자가 보인다

백미러 속으로 앞날이 보인다


앞으로 잘 가려면

앞만 보아서는 안 된다

앞으로 잘 가려면

뒤도 함께 보아야만 한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잘 뒤돌아 보아야만 한다

내가 걸어온 나의 길이

내가 걸어갈 나의 길을

뒤에서 잘 밀어줄 것이다


나는 앞으로 잘 가기 위하여 뒤를 자꾸 본다


나는 세상을 모른다

나는 세상을 읽는다

그리고 나는

작고 아름다운 나라

세상 하나를 만든다


저는 아주 오래전에 시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오랫동안 시를 쓰지 못했습니다. 이제 다시 시를 쓰고 산문을 쓰고 싶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브런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발행했던 시집들이 모두 절판이 되었습니다. 인연이 된다면 선집을 발행하거나 한 권으로 통합해서 다시 발행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쓰게 될 산문들과 함께 <꿈삶글>로 발행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이어도공화국]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좋은 인연이 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의미 있는 동반자를 꼭 만나고 싶습니다. 좋은 인연을 기다리며 먼저 제가 걸어온 지난날의 흔적들을 조금은 알려드리는 것이 예의라 생각하여 발자국 몇 개 찍습니다.


성명 : 이어도, 강산, 성인해

본명 : 배 진 성 ( 裵 鎭 星 )


1966년 출생

1988년 《문학사상》 신인 발굴 당선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서울예대 졸업, 방송대학 졸업

동국대학 대학원 중퇴


『이어도공화국 序 - 백 년 동안의 꿈과 희망』

『이어도공화국 1 - 땅의 뿌리 그 깊은 속에서』

『이어도공화국 2 - 잠시 머물다 가는 이 지상에서』

『이어도공화국 3 - 길 끝에 서 있는 길』

『이어도공화국 4 - 꿈섬』

『이어도공화국 5 - 우리들의 고향』

『이어도공화국 6 - 서천꽃밭 달문 moon』




징검다리


하나
길이었다 덜 자란 몸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어머니는 방물을 파셨고 새벽 샛강의
입김 자욱한 안개 속으로 떠나시곤 했다
나는 담장 밑에 펼쳐놓은 꼬막껍질에
쑥국 끓이기 놀이를 하며 자랐다
노을만 어렵게 어렵게 감아 들이던
바람개비가 스스로의 바람결을 가늠할 수 있을 때
물오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파랑 간짓대 들고
오리 떼를 몰아내던 골목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머니 뒷모습을 지우던 안개 속으로
하얀 꽁무니가 사라지고
나도 그 속으로 따라 날아가고 싶었다


할아버지 산소가 보이는 징검다리 사이로 햇살이
주검처럼 부서지며 흘러갔다 하류에서
한 몸으로 몸을 섞기 위해 취로사업 나가신
아버지가 무너진 둑에 묻히고 작업복이 천수답
허수아비에 내걸리던 날도 나는 그 저수지 뚝에서
삐비 꽃을 뽑아먹고 돌아오는 길
가로수 구멍 속에 몇 개의 돌을 더 던져 넣었다
어머니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줄도 몰랐다
그 해 여름 장마는 담장의 발목을 적셨고
두꺼비 같은 우리 식구들은
한밤중에 회관으로 기어 올라갔었다


학교 앞 코스모스로 기다리기를 즐겼다
하학종소리 사이로 보이는 형의 검정고무신 앞은
발가락이 먼저 나와 있었고 생활 보호 대상자
가족 앞으로 달려오는 옥수수 빵과 건빵
나는 그것이 좋았다 우리는 뿔 필통 속 몽당연필로
흔, 들, 리, 며, 징, 검, 다, 리, 건, 넜, 다,
끈이 풀리는 소리로 흘러가는 여울물 소리는
우리를 다시 묶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징검다리를 잘도 건너 다녔다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끼고 기차놀이하던
우리들은 그 새끼줄 속에서 자유로웠다
우리들의 기차는 징검다리를 비로소 건너 다녔고
오후의 서툰 기적소리 울리며
동구 밖까지 나가 놀던 소아마비 동생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찾다가 찾아보다가
어린 집배원이 된 큰 형도
동생의 소식은 가져오지 못하고 한 떼
건너가는 동네 아이들만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다섯
여울물 소리는 끈이 풀리는 소리였고
또다시 묶이는 소리였다 방직공장에 취직했던
누이가 파란 눈의 아이를 보듬고 돌아와
빨래터에는 방망이질 소리가 잠들지 않았고
헛발 짚은 어머니는 물속에 더욱 자주 빠지셨다
……………… 배고픔과 어머니 ………………
들판에 흐드러진 달맞이꽃 사이로 그렇게 어머니는
젖은 보름달을 이고 늦게 돌아오시곤 했다


1988년 나의 글은 징검다리에서 출발하였다 그 해에는 올림픽의 해이기도 하였다


경운기


들판에서는 늘 보리타작하는 소리가 들린다

정미소 주인이셨던 아버지가

벨트에 물려 끌려가던 날부터 축이 헛도는

천장에서 다시 떨어지듯 우리 식구들은

빈 들판으로 내쫓겼다 발동기 같은 큰 형은

발동기를 뜯어 짊어지고 논둑길을 넘어 다녔다

타맥기도 부서진 아버지 갈비뼈처럼 풀어

옮겨 맞추곤 했다 경운기들이

손쉽게 해치우고 들어가 쉬는 동안에도 우리는

들판에서 밤늦도록 이슬에 젖어야 했다

카바이드 불빛 아래서 카바이드를 녹이는 물처럼

우리 식구들의 가슴은 애타게 들끓었다

불이 꺼진 뒤에도

카바이드 깡통 속에는 몸살 나게 아름다운

사랑이 숨 쉬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보리 한 됫박 퍼내어 바꿔온 복숭아를

보리 창고에서 나눠먹곤 했다 큰 형 몸에서는

늘 기름 냄새가 났고 바뀐 논에 말뚝을 박을 때마다

우리들의 들판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함부로

골병들어 거덜 난 보릿대를 곁에 쌓는 작은 형

보리 무덤에 검불을 쓸어내는 누이는

갈퀴와 고무래처럼 한없이 슬픔을 후볐다

가마니 한 장 크기의 그늘 속에서 조용히

기어 다니다 잠들곤 하던 나는 자연 숙제로 기르던

거꾸로 매달린 형의 무

그 속에서 싹트는 콩 거꾸로

자라던 허약한 순만 바라보며 그렇게 자랐다

그리고 많은 날들 다음으로 오는 오늘

털털털 탈탈탈 털털털털털 탈탈탈탈탈

들판을 온통 뒤집어엎어버리던 경운기가

골목마다 들쑤신다

추곡수매 공판날 줄서가는 아침

하곡수매처럼 저 멀리 노인들이 손수레 밀고

끌고 오신다 빈 들판에 바람이 껍질을 벗고

지나간다 그 길가로 바람의 껍질이 차갑게 쌓여

있다 월경리 사람들의 깊은 사랑을 실어 나르는

경운기는 힘센 들짐승이다 그러한 아침

나는 다른 계절 속으로 떠나 눈길에 경운기

발자국을 만들며 고향으로 가는 길을 걸어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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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고향


길이 있는 풍경


나는 밭 가운데 너뷔바위에 앉아 있었다

아침 시선은

고춧대 하나에 꽂혀 있었다

외톨이처럼

뽕나무 가지 버팀목이 없었다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고춧대가 휘청거렸다

또 한 마리가 날아왔다

고춧대가 드디어 꼬꾸라졌다


새는 약속처럼

한꺼번에 떠났다

고추나무는

끝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그러한 밭에서 걸어 나온 길로

살벌한 평화처럼

젖은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밤하늘은 반란이다


고향의 밤 별들이 싸운다 밤하늘은

반란이다 바람이 분다 쓰러진다 다시

넘어진다 별은 쌈질하는 입이다 주점

젊은 여자의 열린 자궁 속이다 길들이

제 골목을 찾아 들어가도 동네는 앞으로도

시끄럽다 물소리도 밤하늘을 쥐어뜯으며

이어져 흐른다 그래도 사랑하는 고향 우리 집은

골목 끝으로 몰렸다 동네의 개들은 무리 지어

일제히 짖어댔다 끝에 매달린 우리는 건너로

이어지는 길을 보았다 바람에 쓰러진 곡식들이

줄기로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솟아올랐다

태풍의 눈이 다시 무섭게 쏘아보았다 우리들의

다리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포식한 어둠은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악을 썼다 몽둥이질

낫을 들고 휘둘렀고 쇠스랑으로 후려

갈겼다 검은 까마귀는 떼로 몰려와 무덤을

만들었다 무덤 속에도 하늘이 있었다 떠가는

흰 구름 변두리에 걸린 빛의 폐곡선에

갈라진 고향의 고샅길들이 감기고 있었다 그

하늘 속에는 메마른 공동우물이

파헤쳐져 있고 동네 사람들은 거꾸로 매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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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왜 이런 메모들을 했을까



방황과 여행과 순례는 나에게


여행은 돌아올 곳을 여기에 두고 떠난다

방황은 돌아올 곳을 박차고 떠나 버린다

그리하여 여행이 끝나면

처음 있었던 곳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방황이 끝나면

나는 반드시

새로운 곳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여행보다 오히려

방황의 길의 더욱 의미 있고 아름다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순례는 나에게 무엇일까?


삶에 지친 영혼들이여


삶에 지쳐서

자살을 꿈꾸는 영혼들이여

이어도공화국으로 오라

나는 그대와 함께

오래도록 바다를 볼 것이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올라

그대와 나란히 앉으리라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히

그대의 손을 잡고 바다를 보리라

그냥 그대로 저 바다의

반짝이는 윤슬이 되리라

붉은 저녁노을이 되리라

환한 달빛에 젖으리라

별빛으로 옷을 갈아입은

반짝이는 윤슬에 젖으리라

그리하여 우리들의 마음은

함께

어둠까지 환하게 볼 수 있으리라


삶에 지쳐서

어깨가 무거운 영혼들이여

바다가 보이는 언덕으로 오라

나는 그대를 언제라도 환영하리라


장마철 습기


화순은 습기가 많아서

식물은 좋아라 하지만

사람은 살기가 어렵다

장마철 습기는 무섭다

성현이 동현이 와보고

에어컨 설치해 주었다

고맙다 성현아 동현아


무화과나무 잎


하필

무화과나무 잎이

이브의

팬티로

사용되었는지

그대가

직접

보면

알 수 있으리라


누나


오늘은 새벽부터 참 많이 바빴다

누나 환갑을 부모님 산소에서 시작했다

벌초를 하고 절을 하고

연어의 종착역에서 다시 출발했다

빛고을 광주로 다시 돌아와

찜통더위 속에서 에어컨을 찾아다녔다

오토바이 사고로 정신줄을 놓아버린

매형을 수시로 입원시키려고

종합병원 응급실 앞에서 곰탕집을 하시는 누나

박복한 어머니를 닮아 평생

땀과 눈물로 곰탕을 끓이시는 하나뿐인 누나

에어컨이 고장 난 줄도 모르고

찜통보다 더 뜨거운 여름을 끓이고 계시는 누나

오늘 돌아가기 전에 반드시

에어컨 만은 고쳐주고 돌아가리라

에어컨 냉매를 보충하려고 기사님을 불렀더니

실외기에서 냉매가 흘러나온 흔적이 선명하구나

용접을 하고 냉매를 완충하고 다시

에어컨을 켜보니 압축기에서 분수를 이룬다

어쩔 수 없이 하이마트에 가서 알아보아도

일주일 후에나 설치가 가능하다고 한다

다시 중고를 알아보려고 돌아다닌다

거기서도 며칠 뒤에나 설치할 수 있다고 한다

곰탕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다닌다

다행한 일이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동안 쌓아온 공덕으로

겨우 에어컨 설치를 하고

나는 공항에 와 있다

나는 광주 전철을 타보고 싶어서

기어이 누나의 호의를 뿌리치고

추어탕 한 그릇 깨끗이 비우고

전철을 타고 광주 공항에 와 있다

공항은 떠나는 곳이 아니고 쉬는 곳이로구나

광주공항에서 나는 고향의 그림 속에서 쉬고

누나는 드디어 시원한 에어컨 바람 속에서

아들 딸 손주들과 함께 시원한 저녁을 먹을 수 있으리라

오늘은 참 많은 땀을 흘렸지만 참으로 가볍구나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날아오를 듯 날개가 돋는구나


하느님이 너무 바빠서


육지는 비가 많은 모양인데

제주도는 가뭄의 나날이다

이제는

하늘도 지역감정이 심한 것인지

하느님이 너무 바빠서

골고루 비를 뿌리지 못하고

그냥 한 곳에 쏟아붓고 쉬는 모양

어쩔 수 없다

우리 인간들이 하느님을

꼭 도와드려야만 하겠다

오늘은 찜통더위에

이틀째 연못을 만들고 있다


해바라기 젖꼭지


무심한 바위도

다르게 보일 때가 있다


미나리 꽃도

자세히 보면 예쁘다


나는

해바라기의 해보다

해의 가슴속

별들의 젖꼭지를

더 좋아한다



02화 인연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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