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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Jun 22. 2024

0009 눈사람 자살 사건


0009 눈사람 자살 사건


최승호 시인의 『눈사람 자살 사건』을 읽는다. 책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오랫동안 절판되었던 책 『황금털 사자』(해냄,1997)를 다시 내게 되었다. 책 제목을 『눈사람 자살 사건』으로 새로 정하고, 작품도 부분적으로 수정하였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


서울의 대형 출판사 해냄에서 출판했을 때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최승호 시인의 고향 춘천에 있는 작은 출판사에서 새로 발간한 동일한 책은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우리들의 시대와 책이 맞아떨어져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책을 만든 편집자의 정성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동안 쌓아온 최승호 시인의 높아진 지명도 때문일까.


책 표지 디자인부터 많이 신경을 써서 만들었다는 느낌이 든다. 또한 글과 함께 배치한 유명한 그림들도 책 판매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에는 많은 시인들이 자신의 책을 팔기 위해서 여러 곳에 강의도 다니고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이 그만큼 많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로부터 시도 멀어지고 종이책도 많이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눈사람 자살 사건』을 읽으며 나의 절판된 책도 복간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책으로 나의 첫 번째 시집을 복간하면 어떨까 깊이 생각한다. 『땅의 뿌리 그 깊은 속』을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로 제목도 바꾸고 시들도 좀 손을 보면 어떨까 생각 중이다. 그보다 먼저 나의 지명도를 높이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를 고심하고 있다.


두 출판사가 발행한 각각의 책 표제작을 함께 읽어보자.


 눈사람 자살 사건 / 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황금털 사자 / 최승호


암고양이가 황금털 수사자에 반한 것은 늠름한 자태 때문이었다. 황금털 수사자에게는 기백이 있었고 기품이 있었다. 그는 결코 가볍게 처신하지 않았으며 걸을 때면 앞발로 대지를 누르듯이 당당하고 느긋하게 걸었다.


게으름조차 그에게선 멋을 풍겨댔다. 황금털 수사자가 하품하는 모습은 하늘을 삼켰다가 토하는 것 같았고 벌렁 드러누워 낮잠에 빠진 모습은 천하의 일을 다 한바탕 꿈으로 여기고 내버려 둔 채 홀로 태평스러운 듯하였다.


고독한 수사자에게 어느 날 암고양이가 교태를 부리며 사랑을 고백하였으나 황금털 수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도도했고 그럴수록 암고양이는 그의 풍모에 매혹되었다.


"참 귀여운 암컷이로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사자는 암고양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자신에게는 없는 가벼움의 아름다움이었다. 친근해진 뒤에 황금털 수사자는 안고양이에게도 발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격이 없어지자 암고양이는 사자의 수염을 뽑기도 하고 머리 위에 올라가 장난을 치며 황금털 갈기를 꽈배기처럼 땋아 예쁜 사자를 만들어 보려는 무모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착하기만 하다간 내가 쥐 꼴이 되겠구나."


황금털 수사자는 더 이상 암고양이의 가벼운 행동들을 참을 수가 없었다. 수사자가 한 번 크게 포효하자 벼락에 뇌가 찢어진 듯 암고양이가 비틀거리며 멀리 달아났다. 


최승호, 눈사람 자살 사건       


책 소개


최승호 우화집 『눈사람 자살 사건』에 나오는 우화들은 대개 짧다. 웬만한 산문시보다도 짧다. 그런데 그 짧은 문장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결코 녹록지 않다. 또한 처음 책이 나온 지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최승호 선생이 들려주는 한 편 한 편의 우화는 지금의 세상과 빗대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고전이 그렇듯이 좋은 글은 세월의 풍화를 이겨내는 법이다.


출판사 서평


시 같은 우화, 우화 같은 시
― 최승호 우화집 『눈사람 자살 사건』 편집 후기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절판되었던 최승호 선생의 우화집 『황금털 사자』(해냄, 1997)를 복간하였다.

이번에 복간하면서 선생께서 제목도 “눈사람 자살 사건”으로 바꾸셨고, 내용도 상당 부분 바꾸셨다. 박상순 시인의 북디자인이 또한 책을 새롭게 만드는 데 큰 몫을 했다. 표지 디자인은 물론 본문의 그림도 다 바뀌었다. 따라서 복간이라기보다는 개정판에 가깝다고 하겠다.

우화집이라고 하였지만, 한 편 한 편을 들여다보면 우화(산문)라고 하기에는 오히려 시에 가깝다. 한 편 한 편 최승호 선생 특유의 시적 문장과 문체로 그려냈는데, 독자 입장에서는 굳이 산문이다 시다 구분 지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가령 우화 「거울의 분노」를 보자.

그 거울은 무심(無心) 하지 못하였다. 날마다 더러워지는 세상을 자신으로 여긴 거울은 혐오감을 참지 못하고 분노의 힘으로 온몸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일종의 자살이었다. 그러자 조각조각마다 보기 싫은 세상의 파편들이 또다시 비쳐오는 것이었다.
― 「거울의 분노」 전문

이 짧은 우화를 두고 과연 산문이라 할 것인가 아니면 시라고 할 것인가. 무어라 한들 어떠할까 싶다. 짧지만 그 울림은 길고 넓지 않은가. 다음의 우화 「고슴도치 두 마리」는 또 어떤가.

고슴도치 두 마리가 가시를 상대방의 몸에 찌른 채 피투성이가 되어 함께 죽어 있었다. 그들은 서로 너무 깊이 사랑했던 모양이다.
― 「고슴도치 두 마리」 전문

최승호 우화집 『눈사람 자살 사건』에 나오는 우화들은 대개 짧다. 웬만한 산문시보다도 짧다. 그런데 그 짧은 문장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결코 녹록지 않다. 또한 처음 책이 나온 지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최승호 선생이 들려주는 한 편 한 편의 우화는 지금의 세상과 빗대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고전이 그렇듯이 좋은 글은 세월의 풍화를 이겨내는 법이다.

삶이란 무엇인지, 인간관계란 무엇인지, 생태계 속에서 인간과 자연은 어떻게 함께하는지 등등 주옥같은 우화를 만나보기 바란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이런 우화는 없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시 같은 우화, 우화 같은 시”
“시집 같은 우화집, 우화집 같은 시집”
어떻게 불러도 좋을 최승호 선생의 우화집 『눈사람 자살 사건』이 독자들에게 큰 울림과 위로를 줄 것이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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