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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Jun 21. 2024

함양 방짜징, 운명처럼,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

0006 ~ 0008


0006 함양 방짜징


함양 방짜징 소리를 들은 다음부터 자꾸만 징소리가 들린다. 수천 번의 두드림으로 만든다는 방짜징, 그 땀나는 방짜징 소리가 해에서도 들리고 달에서도 들린다. 방정맞은 꽹과리 소리가 아니라 깊고도 멀리 가는 방짜징 소리, 징소리가 들린다. 지리산 같은 방짜징 소리가 들린다. 한라산 같은 방짜징 소리가 들린다. 오늘 아침에도 해에서 빛의 징소리가 쏟아지더니, 오늘 밤에는 달도 보이지 않는데 징소리가 쏟아진다. 나의 몸과 마음이 방짜징 소리를 달빛처럼 입는다. 


0007 운명처럼


권영민 교수님의 『우리 시 깊이 읽기』를 읽는다. 권영민 교수님은 최동호 교수님과 함께 나에게 시인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주신 분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그 큰 은혜에 보답을 하지 못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신경림 선생님과 김우창 교수님께도 빚으로 남아있다. 그리하여 이제라도 다시 처음부터 공부를 시작하려고 한다. 우리나라 현대시를 읽으려면 김소월 시인부터 읽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운명처럼 윤동주 시인부터 좀 더 깊이 읽기 시작한다. 윤동주 시인과 함께 순례를 하면서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눈다. 윤동주 시인의 모든 작품과 모든 삶을 읽고 기록할 작정이다. 다른 시인들도 좀 더 완벽하게 다시 읽고 다시 기록할 것이다.


얼마 전에 문학사상 문예지 휴간 소식을 들었다. 오래도록 주간을 맡으셨던 권영민 교수님 소식이 반가워서 이 책을 읽기 시작한다. 권영민 교수님의  『우리 시 깊이 읽기』 는 저자가 2014년부터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한국 현대시’를 강의하면서 미국의 대학생들과 함께 토론했던 내용을 간추려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유고 시인들을 객관적으로 평론한 내용으로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한국서정시의 대표적 시인 김소월(1902~1934)은 현재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대표적인 시인(진달래꽃 등)이다. 한용운(1879~1944)은 한국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 앞장섰던 승려이며 저항시인(님의 침묵 등)이다. 이상화(1901~1943)는 민족적 저항의 의지를 서정적 정조로 형상화했던 시인(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이다. 김동환(1901~?)은 향토색 짚은 소재를 찾아내어 낭만적 감정을 잘 표현했다. 그는 1949년 반민특위에서 친일문학자로 지목된 시인(국경의 밤 등)이다. 주요한(1900~1979)은 산문적 시적 진술을 통해 감각적 인상을 표현했다. 그러나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문단활동에서 멀아진 시인(불놀이 등)이다. 심훈(1901~1936)은 저항시인(그날이 오면 등)이자 소설가(상록수)이다. 그의 시 <그날이 오면>은 유일하게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던 바우라의 ‘시와 정치’라는 책에 상세하게 분석해 놓은 시이다. 한국의 문학작품이 서구인들에게 수준 높은 안목을 통해 소개된 최초의 시라 할 수 있다. 박세영(1902~1989)은 해방 전 한국에서 활동하다 북한으로 월북한 시인(산제비 등)으로 현실경험과 투쟁 의지를 결합시켜 서정적 어조로 형상화했다고 할 수 있다. 박팔양(1905~1988)은 궁핍한 현실의 고통이거나 왜곡된 근대 도시 문명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하여 시(태양을 등진 거리 위에서 등)를 썼다. 그는 해방 후 북으로 월북하였다. 임화(1908~1953)는 계급적 현실과 그 경험적 구체성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정황이 사실적으로 그려짐으로 시적 주제의 관념성을 넘어섰던 시인(우리 오빠와 화로 등 )이다. 해방 후 남한에서 활동하다가 좌익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자 북으로 월북하였고, 한국전쟁 때 다시 남한으로 왔다가 다시 월북하였다. 최남선(1890~1957)은 초기의 신시 실험과 시조의 창작을 통해 근대문학 성립과 한국의 역사문화등에 대한 폭넓은 활동을 통해 신문화운동을 주도했던 시인(해에게서 소년에게 등)이다. 그러나 광복 후 친일문학가로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이병기(1891~1968)는 시조의 현대화와 고문헌연구를 하였던 시조시인(파초 등)이다. 그는 1996년 초기작품을 포함하여 시조 93편과 시조론, 고전연구, 일기 등을 수록한 가람문선을 발간했다. 


제2부

정지용(1902~1950)은 일본어와 한국어로 시를 쓰는 이중 언어적 글쓰기로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임했다. 그의 시는 모더니즘이라는 커다란 문학적 조류 안에서 설명되기도 하고, 이미지즘의 특징으로 그 경향이 규정되기도 한다. 그는 시(바다와, 유리창 등)의 언어를 통해 음악적인 가락의 아름다움보다는 시적 이미지의 공간적 조형미를 창조하고 있다. 김영랑(1903~1950)은 그는 섬세한 언어와 아름다운 리듬은 정지용의 시가 날카로운 언어 감각과 선명한 이미지와 함께 ‘시문학파’가 도달한 당대 순수시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시(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언어를 통해 찬란했던 때를 지나 모든 것을 상실하고 뒤돌아보면서 그것을 새로운 시작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마치 우리들의 삶의 한 단면처럼, 삶이란 오르막과 내리막을 조화롭게 꾸려가야 하는 것처럼, 그의 시는 늘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게 하고 있다. 김기림(1908~?)은 시의 창작과 비평작업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그는 과거의 시들이 감상벽에 빠져들어 허무주의로 흐르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강하고 명랑한 ‘오전의 시론’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의 시(기상도 외)는 밝은 시각적 이미지들이 중심을 이루지만 회화성만을 추구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시대정신을 담아내개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상(1910~1937)은 사물에 대한 보다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접근법을 채택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인식방법과 주체의 시각 자체를 새롭게 변형할 수 있는 방법을 창출해 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문학과 예술을 가장 빛나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그의 시(오감도 등)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화가가 되기를 원했고, 그는 경성공업학교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며 현대 기술문명을 주도해 온 물리학과 기하학 등에 관한 수준 높은 지식을 터득했고, 그는 이에 관련된 작품을 남기는 데 크게 영향을 주게 되었다. 김광균(1914~1993)은 정지용, 김기림, 이상 등과 함께 193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을 실천했다. 그의 시(추일서정 등)는 서정적 정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섬세한 언어 기교와 감각적 이미지로 시적 대항을 형상화하고 있다. 다양한 이미지의 공간적 구상을 통해 확대하는 시의 내면 공간이라든지 감상적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동원하는 지적 언어 등은 그의 시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제3부

유치환(1908~1967)은 그의 시에 등장하는 시적 대상이 곧바로 삶에 대한 지적 주체의 개인적 윤리 의식이나 가치문제와 직결되는 시를 썼으며, 자기 의지를 남성적 어조를 통해 직설적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시(깃발 등)는 존재에 대해 고뇌하면서도 생명에 대한 열애에 바탕을 두고 허무의 본질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이를 강인한 의지로 극복해보려고 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부터 생명파 시인으로 지칭되었다. 김광섭(1905~1977)은 ‘지성과 감성이 융합하여 흐르는 논리를 놀라운 형상 속에 넣으려고 했다’며 자신의 시의 방향을 밝히기도 했고, 일제 말기인 1941년 중동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반일민족사상을 고취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되어 3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60년 중반 뇌출혈로 쓰러진 후 병마를 극복하고, 다시 펜을 든 후 발간한 것이 시집(성북동비둘기 등)을 통해 자신의 시 세계를 병고를 견디면서 얻어낸 삶에 대한 긍정적 시선과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되었다. 특히, 삶의 현실 속에서 파괴되고 있는 자연의 섭리라든지 인간성의 상실 등과 같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신석정(1907~1974)은 현대문영의 잡담을 멀리 피한 채 한 개의 유토피아를 흠모하는 묵가적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의 시(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등)에는 본질적으로 부조리에 현실에 대한 거부와 함께 초월적이고 본원적인 실재에 대한 강한 희구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전원적, 자연친화적 이상향에 대한 시적 열망으로 그려졌다. 서정주(1915~2000)는 초기 시에서 인간의 본능과 생명의 근원을 탐미주의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러나 전통적인 토속세계로 관심을 돌리면서 인간의 운명과 그 영원성으로 회귀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신라’라는 상상력의 거점을 발견하고 불교적인 영원회귀의 정신을 시적 주제로 내세우기도 했다. 그의 시(동천 등)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면서 시 형태의 균형과 함께 토착적인 언어의 지적 세련을 달성하였다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일제 말기에 다쓰시로 시즈오로 창씨개명한 후 태평양전쟁을 성전으로 미화하고 일제의 시민정책을 적극 지지하였던 대표적인 친일문학인이었다. 오장환(1918~(1951?))은 시적 주체로서 그 존재를 가능하게 했던 고향으로부터 출발한다. 그에 있어 고향은 단순한 회고 취향의 산물이 아니며, 감상적인 동경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삶의 근원을 다스리는 영역이었다. 그의 시(고향 앞에서 등)의 가장 근원적인 공간은 고향이었다. 그는 1945년 좌익문단 조직인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했고, 1947년 무렵 월북했으며, 모스크바에서 1951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석(1912~1995)은 그의 시적 공간을 대부분 고향의 토속적인 풍물로 채웠다. 이것은 고향이라는 공간과 갖가지 풍물에 대한 체험이 그만큼 시인의 의식 속에 강렬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는 고향의 풍물과 토속적인 인간미를 그의 시(국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등)를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면서 현실의 삶 가운데 훼손된 인간적 가치와 그 회복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육사(1904~1944)는 고통의 현실 속에서도 시를 통해 민족 주체의 정립과 자기 확인을 수행하였으며, 투철한 저항 의식을 실천적 행동으로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그는 시작 활동뿐만 아니라 항일 독립투쟁에 헌신하여 전 생애에 열일곱 번이나 투옥되었다. 이와 같은 활동을 그대로 대변한 듯 그의 시(광야 등)는 식민지하에서 우리 민족의 비운을 바탕으로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내고,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그는 고통스러운 식민치하에서 강하게 현실에 맞섰고, 또한 맞서고자 했던 의지적인 시를 많이 발표했다. 이에 반해 청포도는 고향을 배경으로 밝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드러낸 시라고 할 수 있다. 이용악(1914~1971)은 그의 시(북쪽 등)에서 궁핍한 삶의 고난과 역경, 현실의 참담한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식민지 시대 민중의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였다. 문학활동을 하다 함경북도 경성 고향에서 칩거하다, 1945년 광복 직후 상경하여 좌익문단 조직인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였으며 ‘중앙신문’ 기자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1947년)에 일제의 강점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채 유랑하던 우리 민족을 오랑캐꽃에 비유하여 노래한 ‘오랑캐 꽃’을 발간하였으며, 일제의 강압적인 정책 아래 고뇌하는 지식인의 자의식을 담은 ‘두메산곬’을 발간하였다. 좌익문화활동에 연루되었다가 한국전쟁 당시 출옥하여 월북 후 1971년에 사망하였다. 노천명(1911~1957)은 뛰어난 언어 감각과 서정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시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는 시(사슴 등)에서 자기 존재의 시적 탐구와 함께 감각적인 서정시를 많이 남겼다. 그러나 역사의 격변기를 거치며 보여준 친일 행적 등에 대한 비판이 여전히 문제적인 상태로 제기되고 있다. 모윤숙(1910~1990)은 1934년 유치진, 서항석 등이 주도했던 극예술연구회에 가담하여 1938년까지 활동했다. 1940년 친일적 성향의 조선문인협회에 관여하면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지지하고 전쟁을 찬양하는 글을 발표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다시 문단에 나왔고, 1949년 월간 ‘문예’ 지를 창간했으며,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이후 많은 활동을 하며 1969년 여류문인협회 회장을 맡았다. 윤동주(1917~1945)는 동심 지향과 실향의식, 그리고 속죄양 의식 등으로 그 시적 경향을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많은 작품에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자아에 대한 ‘부끄러움’이 내재되어 있다. 그의 시(별 헤는 밤 등)는 억압적인 현실에 대한 불안감을 바탕으로 자아의 내면에 대한 성찰과 함께 민족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뚜렷한 자기 문학의 특징을 살려내게 되었다. 그는 이육사와 함께 일제 말기 민족문학의 부재상태, 이른바 암흑기를 정신적으로 극복한 민족시인으로 손꼽을 수 있다.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옥사했다.


제4부

박목월(1916~1978)은 초기의 시에는 자연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많다. 1950년 한국전쟁을 겪은 후 박목월의 시는 일상의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박한 생활인의 자세를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그의 시(나그네 등)는 자연에 대한 친화적 접근법에서 벗어나 생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소박하게 담아낸다. ‘가정’이라든지 ‘밥상 앞에서’ 등과 같은 작품을 보면 소박하면서도 인정미를 담고 있는 생활의 단면들이 시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박두진(1916~1998)은 그가 노래하고 있는 자연은 시적 자아와 거리를 두고 있는 대상이 아니다, 자연은 언제나 시적 자아와 동일시된다. 그의 시는 자연의 친화력에 의해 대상과 주체가 하나가 되고 있으며, 거기서 오는 영원한 생명력이 시적으로 구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그(해 등)의 시들은 존재의 심연을 헤매는 기도로 나타나기도 하고, 생명에의 경외감으로 채워지기도 한다. 그의 시에 과감하게 활용되고 있는 의성어, 의태어나 직유적인 표현, 파격을 이루는 형태의 시적 진술 등은 격렬한 정서의 충동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데 기능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조지훈(1920~1968)은 절제와 균형과 조화의 시를 통해 자연을 노래하고 전쟁의 고통 속에서 역사와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는 변화의 시인은 아니었지만, 그가 가지고 있던 절제의 목소리, 균형 잡힌 시 형식, 그리고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인식은 그의 시(승무 등)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그는 ‘풀잎 단장’이라는 시집에서 한국전쟁의 혼란을 겪은 뒤에 시대의 고통을 견뎌내는 의지를 시적으로 표현하였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풍설, 풀, 바위, 구름, 사람 등이 각각 존재 의미를 부여받고 자연적 질서 속에서 그 가치를 실현한다는 자각을 보여 주었다. 김현승(1913~1975) 은 고독의 시인이다. 그는 스스로 키워온 청교도적인 신앙과 사상에 입각하여 인간의 내면, 인간 조건의 본질을 끈질기게 추구하였다. 그가 그려내고 있는 고독은 투철한 자기 인식에 근거함으로써 철저한 윤리의식으로 확대되기도 하고 존재의 내면에서 더욱 견고한 인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의 시(눈물 등)는 고독과 자연에 대한 주관적 서정과 감각적 인상을 노래한 시들이 많다. 그가 즐겨 그려낸 자연은 가을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낙엽, 꽃잎, 바람 등의 현상적인 것들과 열매, 뿌리, 보석 등의 본질적인 것의 대조적인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김수영(1921~1968)의 시는 현실 참여의 경향이 강하며 자유의 개념을 표출하고 있다. 그는 한국 문화의 다양성과 활력을 깨치는 무서운 폭력을 정치적 자유의 결여라고 규정하였고, 자유의 참뜻이 군사정권에 의해 좌절되는 것을 보면서 깊은 회의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의 시(풀 등)는 자기 풍자의 극단적인 산문적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시 ‘풀’에서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을 노래하였고, 자연과 생명을 중시하는 생태적 상상력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우리가 사회학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풀’이라는 의미를 확장하여 보면 풀은 곧 외부적 세력의 억압과 횡포를 견디며 살아가는 ‘민초’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김춘수(1922~2004)의 시(꽃 등)는 첫 번째 단계에서는 ‘꽃(1952)’과 같은 작품에서처럼 존재에의 탐구를 수행하던 시기로 존재와 언어의 관계가 강조되는 시기, 두 번째 단계는 1950년대에서 1960년대의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로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를 지향하던 묘사적 세계인 ‘타령조’ 같은 시들로 언어유희가 두드러졌다. 셋째 단계는 ‘처용 단장’을 중심으로 탈이미지의 세계가 강조되었다. 넷째 단계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로 종교 또는 예술에 대한 성찰이 그의 시를 통해 강조되었다. 박재삼(1933~1997)의 시(울음이 타는 강 등)는 1950년대에 새롭게 부각된 모더니즘 시의 이국적인 취향과 관념적 요소와는 달리 토속어에 대한 친화력을 바탕으로 깊이 있게 서정성을 추구하였다.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어체의 어조와 잘 조율된 율격은 서정시의 격조와 그 아름다움을 살려내는 데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연을 통해 삶의 위로와 지혜를 얻으면서도 때로는 완벽한 아름다움과 인간과의 거리 때문에 절망하기도 하였다. 조오현(1932~2018)의 시(무설설 등)는 불교적인 선의 세계를 시조의 시적 형식과 결합해 낸 특이한 상상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적인 깨달음의 과정을 서사화하여 연시조 형식으로 완성한 ‘무산 심우도’ 10수는 불교시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진리는 문자로 표시할 수 없다는 ‘간화선’의 대표적인 공안을 시화한 연시조 ‘무자화’ 부처나 깨달음을 스스로 체득함으로써만 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에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다는 ‘무언무설’의 선의 경지를 노래한 연시조‘무설설’등은 선의 세계와 불교적 연기와 공 사상에 관한 시적 탐구에 해당한다.

 

시인은 어쩌면 천형을 갖고 태어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그가 시를 씀으로써 삶의 기쁨을 느끼고 세상에 희망을 주는 것이란 자랑스러움에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물질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신적인 만족이다. 시인은 그런 점에서 신의 대리인 다음으로 아마도 가장 정신적인 만족도가 높은 사람이 아닐까? 시인은 가장 낮은 연봉을 받는 사람가운데 하나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그는 시 한 편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만으로도 배부르다며 웃기도 한다. 시인은 시를 씀으로써 행복하지 않다고도 하지만, 시를 읽는 사람은 행복해하고 미소 짓는 것, 그것이 아마도 시인이 자신은 고통스럽지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그것을 기쁨으로 여긴다고 어느 시인의 쓸쓸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삶에서 우리는 시인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시를 읽자, 그들에게 아름다운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들의 시를 소리 내서 읽자. 그리고 우리들의 힘들고 지친 손을 모아 박수를 치며 오늘도 시 한 편을 필사해 본다면 그것 또한 우리들의 행복이 아닐까?


0008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

― 어머니, 시인의 월급은 가난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길을 간다

두엄자리 곁에 세워진 아버지의

낡은 지게를 지고 저물녘을 간다

참깨 베러 가신 어머니의 산밭으로

늦은 마중을 간다 오랜만에

바람을 비껴 여름 한쪽 끝으로

산길을 오른다

노을이 차마 곱게 익는다


일찍부터 외항선을 탄 만수

뱃사람이 된 만수네가 새로 장만한

논을 바라보며 들길을 간다

일곱 번씩이나 떨어지고도 다시

행정고시공부를 시작했다는 현길이,

이미 기울어 버린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팔아넘긴 논배미를 지나

쓸쓸하게 걸어간다 새를 쫓는 깡통소리와

반짝이는 반짝이의 마음들이 노을 속으로

새를 날려 보내며 또 내일을 염려하는 가슴을

가다듬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허수아비는

쓰러지지 않고 동그랗게 질린 비닐 얼굴들이

하늘까지 닿으려는 마음으로 솟아오르곤 했다


콩밭으로 바람이 기어들어가고 밤은

들쥐처럼 숨어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어머니와 함께 산길을 내려온다 가끔

고개 치켜드는 벼 포기 사이로 추억들이

발소리를 숨죽이며 기어 나왔다 나는 참깨를 지고

어머니는 토란대를 이고 오셨다 가슴조인

달빛이 풀어지고 우리는 하염없이 걸어 내려온다


― 어머니, 저 이제 시인이 되었어요

― 그래, 시인이 뭣 허는 것이다냐

― 예, 지금까지 제가 되고 싶었던 것이에요

   밤낮을 밤으로만 지내면서 말이에요

― 그러냐, 그럼 이제 취직이 됐단 말이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것이 아니에요

― 그럼, 시인이 뭣 하는 것인디 그러냐

   오랜만에 니가 웃기까지 하고 말이여

― 예, 앞으로

   우리들의 고향을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노래? 그럼 인쟈 테레비에도 나온다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게 아니에요

― 그라믄, 시인 한 달 월급이 얼마나 된다냐

   먹고 살만한 직업이다냐

   요즘 시상에는 돈이 최고드라

   봐라, 만수는 돈 있승께 다들 걱정허는

   장개도 쉽게 간다드라

   돈 많은 이쁜 색시가 낼 모레 온다드라

― 어머니, 하지만 저는 그렇지를 못해요

   앞으로 어머니를 팔지도 몰라요

   앞으로 고향을 팔아먹을지도 몰라요

   시인은 가난한 직업이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잖아요

   마음을 갈고닦아 영혼을 맑게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더욱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우리들의 이야기가 들판 가득 출렁일 때 달빛은 우리가 걸어온 들길을 따라오고 있었다 어머니, 저는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머니와 고향을 위하여 우리들의 생활을 팔아먹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땅의 눈물 같은 시 한 편으로 살고 싶습니다


경운기 외 6편

1988년 문학사상 신인발굴 당선작


경운기



들판에서는 늘 보리타작하는 소리가 들린다

정미소 주인이셨던 아버지가

벨트에 물려 끌려가던 날부터 축이 헛도는

천장에서 다시 떨어지듯 우리 식구들은

빈 들판으로 내쫓겼다 발동기 같은 큰 형은

발동기를 뜯어 짊어지고 논둑길을 넘어 다녔다

타맥기도 부서진 아버지 갈비뼈처럼 풀어

옮겨 맞추곤 했다 경운기들이

손쉽게 해치우고 들어가 쉬는 동안에도 우리는

들판에서 밤늦도록 이슬에 젖어야 했다

카바이드 불빛 아래서 카바이드를 녹이는 물처럼

우리 식구들의 가슴은 애타게 들끓었다

불이 꺼진 뒤에도

카바이드 깡통 속에는 몸살나게 아름다운

사랑이 숨 쉬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보리 한 됫박 퍼내어 바꿔온 복숭아를

보리 창고에서 나눠먹곤 했다 큰 형 몸에서는

늘 기름 냄새가 났고 바뀐 논에 말뚝을 박을 때마다

우리들의 들판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함부로

골병들어 거덜 난 보릿대를 곁에 쌓는 작은 형

보리 무덤에 검불을 쓸어내는 누이는

갈퀴와 고무래처럼 한없이 슬픔을 후볐다

가마니 한 장 크기의 그늘 속에서 조용히

기어 다니다 잠들곤 하던 나는 자연 숙제로 기르던

거꾸로 매달린 형의 무

그 속에서 싹트는 콩 거꾸로

자라던 허약한 순만 바라보며 그렇게 자랐다

그리고 많은 날들 다음으로 오는 오늘

털털털 탈탈탈 털털털털털 탈탈탈탈탈

들판을 온통 뒤집어 엎어버리던 경운기가

골목마다 들쑤신다

추곡수매 공판날 줄서가는 아침

하곡수매처럼 저 멀리 노인들이 손수레 밀고

끌고 오신다 빈 들판에 바람이 껍질을 벗고

지나간다 그 길가로 바람의 껍질이 차갑게 쌓여

있다 월경리 사람들의 깊은 사랑을 실어 나르는

경운기는 힘센 들짐승이다 그러한 아침

나는 다른 계절 속으로 떠나 눈길에 경운기

발자국을 만들며 고향으로 가는 길을 걸어서 간다 

 


   



우리들의 고향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우리들의 고향



길이 있는 풍경


나는 밭 가운데 너뷔바위에 앉아 있었다

아침 시선은

고춧대 하나에 꽂혀 있었다

외톨이처럼

뽕나무 가지 버팀목이 없었다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고춧대가 휘청거렸다

또 한 마리가 날아왔다

고춧대가 드디어 꼬꾸라졌다


새는 약속처럼

한꺼번에 떠났다

고추나무는

끝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그러한 밭에서 걸어 나온 길로

살벌한 평화처럼

젖은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밤하늘은 반란이다


고향의 밤 별들이 싸운다 밤하늘은

반란이다 바람이 분다 쓰러진다 다시

넘어진다 별은 쌈질하는 입이다 주점

젊은 여자의 열린 자궁 속이다 길들이

제 골목을 찾아 들어가도 동네는 앞으로도

시끄럽다 물소리도 밤하늘을 쥐어뜯으며

이어져 흐른다 그래도 사랑하는 고향 우리 집은

골목 끝으로 몰렸다 동네의 개들은 무리 지어

일제히 짖어댔다 끝에 매달린 우리는 건너로

이어지는 길을 보았다 바람에 쓰러진 곡식들이

줄기로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솟아올랐다

태풍의 눈이 다시 무섭게 쏘아보았다 우리들의

다리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포식한 어둠은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악을 썼다 몽둥이질

낫을 들고 휘둘렀고 쇠스랑으로 후려

갈겼다 검은 까마귀는 떼로 몰려와 무덤을

만들었다 무덤 속에도 하늘이 있었다 떠가는

흰 구름 변두리에 걸린 빛의 폐곡선에

갈라진 고향의 고샅길들이 감기고 있었다 그

하늘 속에는 메마른 공동우물이

파헤쳐져 있고 동네 사람들은 거꾸로 매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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