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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Jun 23. 2024

너에게 나를 보낸다

― 전자책, 너에게 나를 보낸다 | 강산 | 강가 -교보 ebook



여기 브런치에 올리는 <꿈삶글>은 나의 꿈과 나의 삶과 나의 글의 모든 것이 될 것이다. 종합연습장이며 일기장이며 창작노트가 될 것이다. 나의 푸른색 노트이며 나의 자료창고이며 나의 창작실이 될 것이다. 나는 여기 브런치에 수시로 생각나는 메모들과 그날그날의 일상과 앞으로의 계획과 작품 구상 등을 모두 쓸 것이다. 그리고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작품을 완성해 가는 과정까지 쓸 것이다. 나는 이제 내 삶의 모든 것을 내 시와 내 문학의 텍스트로 내놓을 것이다. 정직한 시인이 될 것이다. 나를 감추지도 않을 것이며 과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야만 오직 나만의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인생은 그동안 제대로 하지 못했던 시와 문학에 온전히 내던질 것이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시인으로서의 꿈과 삶과 글이 있을 뿐이다.



0010 너에게 나를 보낸다


2024년 1월 9일에 출판사 등록을 한, 이제 막 시작하려는 강가 출판사 이지성 대표가 전자책 출판을 하였다. 나도 공부 삼아서 지켜보았다. 전자책 출판은 간단하다. 언제라도 전자책 출판은 할 수 있을 듯하다. 이제 연습을 하였으니 본격적으로 쓰는 일에 집중을 하자. 자, 이제 너에게 나를 보낸다. 너에게 나를 보내기 위하여 내가 더욱 의미 있고 아름다운 시인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 | 강산 | 강가 - 교보 ebook (kyobobook.co.kr)


강산  지음

강가  2024년 06월 24일 출간

        2024년 06월 22일부터 구매 가능

소장  8,500원


작품소개

이 상품이 속한 분야

eBook > 시/에세이 > 시 > 한국 시


시대가 잃은 무언가를 우리는 강산 시인에게서 찾는다. 누군가는 그것을 서정이라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인간이라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시라, 누군가는 고향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맑은 물이 흐른다. 서정, 인간, 시, 고향,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가 흐른다.

강산 시인의 시집이다.
...............................


가시나무새와 누란의 양파꽃

당신과는 발가락도 닮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고백하면서 해는 서산마루를
붉게 걸어가고 나는 잠을 깬다
밤에만 피는 꽃잎 속에서 나는
살아있다 어둠은 나의 집이다
그 집에는 천년을 열어도 다
열지 못할 많은 문이 있다
천년에 딱 한 번 한꺼번에
잠깐 어둡게 열렸다가 스스로 잠긴다
그 속에는 발가락도 닮지 않은
사랑하는 당신이 있다
고백한다 그리하여 나는 살아있다
살아있다 그리하여 나는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리하여 나는 고민한다
고민한다 그리하여 나는 불러본다
불러본다 그리하여 나는 울어본다
울어본다 그리하여 나는 웃어본다
웃어본다 그리하여 나는 도망친다
도망친다 그리하여 나는 쓰러진다
쓰러진다 그리하여 나는 돌아본다
돌아본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살아난다
사랑하기 위하여 저만치
저만치 피어있는 꽃 한 송이
.......................................

사람이 사람을 벗는 시대에

벗는다 사람들이 서둘러 벗는다
하늘을 벗고 산을 벗고 바다를 벗고
강을 벗고 강물소리까지 벗는다
벗는다 여자들이 벗고
남자들도 서둘러 벗는다
겉옷을 벗고 속옷을 벗고 살을 벗고
속살을 벗고 뼈를 벗고
목숨까지도 쉽게 벗어던진다
벗어야 할 것은 벗지 못하고
자꾸만 입으면서 욕심을 입으면서
자꾸만 자꾸만 죄를 껴입으면서
이데올로기 전쟁 종교전쟁 폭력
현실과 거짓 그리고 빚더미와 어둠
벗어야 할 것과 벗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생각을 벗어 버리고
자꾸만 자꾸만 성급하게 벗어던져
버린다 우리의 몸을 벗어던져
버린다 우리의 넋을 벗어던져
버린다 우리의 양심을 벗어던져
버린다 우리의 부끄러움을 벗어던져
버린다 우리의 고향을, 땅을, 인정을,
이웃을, 뿌리 뽑아 내팽개쳐 하수구에 버린다
쉽게 벗고 쉽게 다시 입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벗어던져 버린다 떠나버린다
사람이 사람됨을 벗어던져 버리는 시대에
나는 고향 여울물 소리를 추억처럼 입는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윤동주 시인과 함께




0000 프로필


서른 살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다. 왼쪽 가슴이 아팠다. 남몰래 가슴을 안고 쓰러지는 들풀이었다. 내려다보는 별들의 눈빛도 함께 붉어졌다. 어머니는 보름달을 이고 징검다리 건너오셨고, 아버지는 평생 구들장만 짊어지셨다. 달맞이꽃을 따라 가출을 하였다. 선천성 심장병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나의 비밀은 첫 시집이 나오고서야 들통이 났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비후성 심근증, 심장병과 25년 만에 첫 이별을 하였다. 그러나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바다는 나를 이어도까지 실어다 주었다. 30년 넘게 섬에서 이어도가 되어 홀로 깊이 살았다. 나는 이제 겨우 돌아왔다. 섬에서 꿈꾼 것들을 풀어놓는다. 꿈속의 삶을 이 지상으로 옮겨놓는다. 나에게는 꿈도 삶이고 삶도 꿈이다. <꿈삶글>은 하나다.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 함께 길을 찾는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함께 마지막 순례를 떠난다.


0001 윤동주 시인


일제강점기에 짧게 살다 간 젊은 시인으로,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늘 고민하는 철학자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그의 얼마 되지 않는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아버지는 윤영석(尹永錫), 어머니는 김룡(金龍)이었다. 


1931년(14세)에 명동(明東) 소학교를 졸업하고, 한 때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大拉子) 학교를 다니다가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에 있는 은진(恩眞) 중학교에 입학하였다(1933). 1935년에 평양의 숭실(崇實) 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폐쇄당하고 말았다.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光明) 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하여 거기서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쿄[立敎]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1942), 다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1942).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학업 도중,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 7),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 중에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유해는 그의 고향 용정(龍井)에 묻혔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으나, 그의 생은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심오한 시인이었다. 그의 동생 윤일주(尹一柱)와 당숙인 윤영춘(尹永春)도 시인이었다. 


그의 시집은 본인이 직접 발간하지 못하고, 그의 사후 동료나 후배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의 초간 시집은 하숙집 친구로 함께 지냈던 정병욱(鄭炳昱)이 자필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발간하였고, 초간 시집에는 그의 친구 시인인 유령(柳玲)이 추모시를 선사하였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첫 작품으로 <삶과 죽음> , <초한대>를 썼다. 발표 작품으로는 만주의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가톨릭 소년(少年)》지에 실린 동시 <병아리>(1936. 11), <빗자루>(1936. 12), <오줌싸개 지도>(1937. 1), <무얼 먹구사나>(1937. 3), <거짓부리>(1937. 10)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선일보》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교지 《문우(文友)》지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이 있다. 그리고 그의 유작(遺作)인 <쉽게 씌어진 시>가 사후에 《경향신문》에 게재되기도 하였다(1946).  


그의 절정기에 쓰인 작품들이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되었다(1948). 


그의 짧은 생애에 쓰인 시는 어린 청소년기의 시와 성년이 된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쓴 시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 대체로 유년기적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겨울> <버선본> <조개껍질> <햇빛 바람> 등이 이에 속한다. 후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성인으로서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한편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깊이 있는 시가 대종을 이룬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씌어진 시> 등이 대표적인 그의 후기 작품이다. 


그의 시비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졌다(1968). 윤동주(尹東柱) 탄생 백주년을 넘기면서 많은 자료들과 영화 등을 통하여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윤동주 시인은 정식 등단 절차를 밟지 않았으므로 습작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윤동주 시인의 작품을 보면 습작시가 아니다. 윤동주 시인은 처음부터 시인으로 태어났음이 분명하다. 오늘날에도 윤동주 시인 같은 시인들이 많이 존재한다.


0002 못다 부른 노래


못다 부른 노래가 있다. 아직도 못다 부른 노래가 있다. 꿈속에서도 못다 부른 노래가 있다. 꿈결에도 노랫소리가 들린다. <여수 블루스> 노랫소리 들린다. <산동애가> 노랫소리가 구슬프게 들린다. <부용산> 노랫소리 들린다. <맹서 하는 깃발> 노랫소리 들린다. 장사익 선생님의 <꽃구경> 노랫소리 들린다. 


<웡이자랑> 자장가소리 들린다. 자랑자랑 자랑자랑 자랑자랑, 웡이자랑 웡이자랑 자랑자랑 웡이자랑, 우리 아긴 자는 소리, 놈의 아긴 우는 소리로고나, 웡이자랑 웡이자랑 웡이자랑 웡이 웡이 웡이자랑..., <이어도 사나> 뱃노래가 들려온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처어라 처어 쳐라 쳐, 젓구나 가고 젓구나 가고, 쉬고나 가자 쉬고나 가자, 쳐라 쳐 쳐라 쳐, 차라 차 차라 차,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한 짝 손에 한 짝 손에, 테왁을 메고 테왁을 메고, 한 짝 손에 한 짝 손에, 비창을 들라 비창을 쥘라, 칠성판을 칠성판을, 등에다 지고 등에다 지고,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산동애가> 사연을 들으며 나는 윤동주 시인을 읽기 시작한다. <부용산> 사연을 들으며 윤동주 시인은 나를 읽기 시작한다.


산동애가 / 열아홉 살 백순례가 오빠 대신 끌려가 죽으면서 불렀다는 노래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골을 멍든 다리 절어 절어

달비 머리 풀어 얹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살기 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아.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도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골에 나는 간다.

노고단 화엄사 종소리야

너 만은 너 만은 영원토록 울어다오.


잘 있거라 산동아 산을 안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놓고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효성 다 못하고

발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나 혼자 총소리에 이름 없이 스러졌네.

  

*  <산동애가>는 열아홉 살 백순례가 오빠 대신 끌려가 죽으면서 불렀다는 노래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은 좀 다르다. <산동애가> 노랫말은 전북 경찰이었던 정성수가 썼다고 한다. 그는 산동에서 경찰로 근무하며 들은 이야기를 참고 삼아서 나중에 노랫말을 쓰고 작곡을 하여 노래를 불렀고 정식 음반까지 냈다고 한다. 


산동애가 / 이효정 가수가 약간 변형해서 부른 노래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 보지 못한 채로

화엄사 종소리에 병든 다리 절며 절며

달비 머리 풀어 얹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짜기에 이름 없이 쓰러졌네

살기 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아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 놓고

열아홉 꽃봉오리 피기도 전에

까마귀 우는 곳에 나는 간다.

지리산 노고단아 화엄사 종소리야

너만은 너만은 영원토록 울어다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 놓고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 효성 다 못하고

발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지리산 골짝에 한을 안고 쓰러졌네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 효성 다 못하고

발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지리산 골짜기에 한을 안고 쓰러졌네


부용산 / 일찍 죽은 여동생을 부용산에 묻고 지은 오빠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제망매가(祭亡妹歌)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 (1절 전문)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은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 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 (2절 전문) 


* 오랫동안 1절만 존재했고 1절만 불렀었다. 빨치산들이 많이 불렀고 작곡자가 월북하면서 많은 사연을 갖게 된 노래가 되었다. 작사자의 운명은 순수했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고 먼 훗날 2절의 노랫말이 추가로 만들어졌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운명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1절 나온 지 53년 만에 2절이 태어났다.


연꽃 모양을 닮은 ‘부용’이라는 산 이름은 전국에 걸쳐서 여러 군데 있다. 《부용산》이라는 작품의 부용산은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해발 193m 조그마한 산의 이름이다.


《부용산》시를 쓴 주인공 박기동(1917-2004)은 여수 돌산 태생으로 그의 나이 10세 때 벌교로 이사 와서 살게 되었다. 본디 박기동 시인은 순천 사범학교에 재직 중이던 1947년에, 친누이 박영애가 24살의 꽃다운 아까운 나이로 폐결핵에 걸려 사망하자, 박영애 시댁 식구 몇 명과 함께 친정 부모님은 슬픔을 견디지 못해 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차마 보기 어려워 참석 못하고 부용산 중턱에 그를 묻고 유난히 푸른 하늘색 부용산 오리 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인생 무상함에 휘청거리며 가슴 저미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왜 푸른 잔디처럼 푸르게 살지 못하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너는 가고 말았구나!’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골수 깊이 파고 들어가는 비통한 상처 오빠의 애절한 심정을 시로 만든 제망매가! <祭亡妹歌>


빼어난 미모 그리고 착하기 그지없는 데다 아이마저 갖지 못하고 떠나버린 누이의 가슴에 저며드는 애달픈 시가 노래로 탄생된 것은 이듬해(1948) 목포 항도여중(현 목포여고의 전신) 국어 교사로 부임하면서 시인은 운명적으로 음악교사인 안성현을 만나게 된다.


안성현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김소월 작사)》 만든 작곡가로 나주 남평 태생이다. 동경 음악학교 나온 성악가이자 작곡가였다.


서랍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작품에다 곡을 지어 붙여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기구한 운명 속에 탄생되었던 것이다.


항도여중으로 부임한 시인은 누이를 잃은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채 또 다른 애제자 문학소녀 김정희를 만나게 된다.


경성 사범학교를 입학했던 수재 김정희는 상경하여 유학하다가 건강문제로 항도여중으로 전학해 와 학교생활 중 폐결핵으로 열일곱 나이로 요절했다(1948. 10. 1)


문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녀는 《감화원 설계》라는 글로 전국 글짓기대회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수재이며 미모를 가진 학생이다.


우리나라에 감화원이 제일 처음 설립된 시기는 1923년 12월 5일 함경남도 원산 송전만 지역에 조선최초의 사회시설 그 후 20여 년 동안 원산의 감화원이 국내 유일의 소년 범죄자들의 재활교육시설이었고 1937년 전남도서 연안 중에 최종적으로 감화원 부지로 선정된 곳이 바로 고하도였다.


현재 감화원 터는 공생 재활원(1984년 생긴 사회복지 법인) 재활 위한 복지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미소녀 김정희는 노령산맥 마지막 봉우리 호남의 명산 목포의 한과 꿈이 어우러진 유달산에 자주 올라갔다. 다도해의 전경 해안의 풍경 멀리 오가는 선박들을 바라보면서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자신의 건강과 운명을 생각했을까?


저 유달산 앞바다 천연 방파제 구실을 한 고하도를 바라보며 그 고하도 끝자락에 위치한 감화원에 수용되어 있는 감화원생들을 생각하면서 감화원 설계라는 글을 지었던 것이다.


누이의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 설상가상 또 다른 애제자가 요절하게 되자, 본인은 물론 전교생이 슬퍼하였으며 그 슬픔의 작품에 음악교사 안성현 곡으로 세상에 탄생한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 (1절 전문)


낮고 느리되 그윽하게 시작된 이 노래는 중간의 ‘너만 가고 말았구나’에서 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너무나 아리따운 나이에 결핵으로 이승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누이와 애제자에 대한 사랑을 표출한 시적 가사라!


김정희 학생 죽음을 추모하면서 불리어진 이 가슴 저미는 노래 《부용산》은 1948년 10월 목포극장에서 열린 항도여중 예술제 배금순 학생의 노래 발표로 학교 교정을 넘어 목포를 비롯 인근 지역 남도에 들불처럼 빠르게 전파되어 잔잔한 멜로디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면서 널리 애창되었다.


젊어서 죽은 누이동생을 애도한 시가 애제자이던 소녀의 죽음을 추모한 곡으로 변한 이 노래 《부용산》은 그동안 작자 미상의 구전가요로 알려지다 보니 노래에 얽힌 여러 가지 사연과 추측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어지러운 시절 지은이마저 모르고 가사와 곡이 제각각 입을 따라 유행했다. 과거 빨치산들, 운동권 계층에서 즐겨 부르던 인기곡.


최근 몇 년 사이 노래 원본이 발견되고 실제 작사가 박기동 선생의 소식이 알려지게 되어 부활의 노래가 되었던 것이다. 1998년 봄 한국일보 김성우 칼럼 등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역사무대에 새롭게 등장하기까지 아픈 사연이 많았었다.


불행했던 한국 현대사에 매몰돼 금지곡 아닌 금지곡으로 공개적으로 부르지 못하고 진흙 속에 묻어두어야만 했던 노래. 애절한 사연만큼 구구절절 여순사건이 터지면서 산으로 간 빨치산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던 불안한 생활을 하면서 떠나온 고향마을 가족 생각, 애절한 마음으로 부용산을 불렀던 빨치산 주제가?


실제로 남부군 일원이 자신의 처지가 애처롭고 비참하게 죽어간 동지들이 불쌍해서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노래 불렀다는 증언이 있다


그 후 80년대는 운동권 학생들 민주투사들의 비밀스러운 애창곡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작곡가 안성현 선생님은 육이오 동란에 스스로 월북해 버려 사상적으로 문제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 문제로 동료 박기동 교사, 조희관 교장 선생님을 퇴직시키고 말았다. 작사자는 한의사였던 부친 덕으로 일본유학 관서대학 영문학 수학 청소년기 장년기 교편생활 중 발표한 부용산이 영욕을 겪으며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부용산 계기로 박기동 선생님의 외롭고 고단한 삶이 노년기까지 이어지는 쓸쓸한 인생 여정의 서막이 예고되었던 것이다.


순수한 누이에 대한 정을 읊은 부용산으로 인하여 좌경으로 의심받은 나머지 50년대 말 교직을 물러나 직업 없이 국내를 전전하였으며, 1980년 부인(문행자 여사)마저 잃고 낭인의 나날을 보내게 됐다.


목포 사범 국어교사 교직을 떠나 서울로 이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가시밭길 걸어야 했고 80년대에도 늘 감시받고 가택수색, 연행, 구금당한 세월, 좌경 시인으로 몰려 한평생 떠돌아야 했던 것이다.


결국 혈혈단신 이역만리 호주(1993년)로 떠나 시드니 근교 난민촌 마운틴산에 정부 보조금으로 비좁은 7평 아파트를 보금자리 삼아 살다가 수년 전 서울로 돌아와서 병원에 몸져누운 채 88세 미수로 한 서린 육신의 삶, 생을 마감하고 경기도 마석 모란 공원 아내 옆에 오랜 유랑을 마치고 심신을 쉬고 안식하고 있다. 중앙 문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은 채 한반도 한 자락에서 반세기 넘게 시단 활동해 온 남도의 불행한 서정시인 박기동!


연극인 김성옥 씨의 꾸준한 노력 덕분이랄까.

어쨌든 오랜 세월 이 노래의 탄생 배경을 알아보고 호주로 건너가 박기동 시인을 만났다. 그리고 2절을 부탁했다.


세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1절 나온 지 53년 만에 2절이 태어났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은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 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 (2절 전문)


이전의 가사가 누이에 대한 애달픔을 읊은데 비해 새 가사는 자신의 초연한 서글픔을 드러낸 요소가 물씬 풍긴다. 해외에 나가 살면서 더욱 간절해진 조국의 하늘과 땅에 맺힌 남매의 애틋한 마음의 절정이라 할까!


고독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생의 한 자락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강산이 다섯 번 바뀐 세월 동안 그늘에 숨겨져 오던 부용산!

지난 세기말 새롭게 부활되었다. 50년 동안 초야에 굴러다니면서도 시들지 않고 널리 확산되었던 것이다.

작가 박기동 시인은 2절 작품을 만들고, 지난날 회한이 한꺼번에 밀려와 참을 수 없어 30분가량 그냥 엎드려 울었다 한다.


《부용산》몇몇 뜻있는 분들은 목포에서 태어나 명맥을 이어온 이 노래의 한을 풀어 주기로 했다.


1996년 5월 29일 목포 부용산 음악제! 소프라노 송광선(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 부르고 2절 가사가 처음 공개되었다. 2절 역시 가사만큼 가슴 저리게 불러 청중의 눈시울을 뜨겁게 적셨다. 2002년에는 부용산이라는 이름으로 산문집을 발간, 박기동 선생님은 5월 20일 잠시 귀국하여 목포에서 조촐한 출판 기념회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본인이 직접 부용산이라는 시 낭독을 하기도 하였다.


시집 한 권 내지 못한 안타까운 70년 동안 시만 생각하고 살았으면서도 번번이 원고 압수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함은 실로 안타까움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유작 시구가 “내가 태어나도 참 좋은 나라”, “다시 태어나도 한국에 살고 싶다” 유언으로 다가와 심금을 울린다. 그는 이 노래를 지켜왔고 부활시켰던 목포, 벌교 사람들 것이라 했다.


월북 작곡가 안성현(安成絃 1920. 7. 13 - 2006. 4. 25)은 목포 항도 여중 사택에서 혼자 하숙하며 그 집 피아노로 작곡했다는 그는 무용가 최승희 남편 안막의 조카로 알려져 있으며, 아내를 홀로 두고 끝내 월북하였다. 우리나라 근대 음악사에 선구적 업적을 남긴 월북 작곡가라는 비운의 삶을 살다 간 안타까운 음악가로서 1920년대 일제 강점기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는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해방과 평화를 갈망한 노래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까지도 널리 불리고 있다. 2006년 4월 86세로 타계했으며, 유족으로는 성동월(86) 미망인과 딸이 살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로 60년 전부터 목포지역에서 유행하던 이 노래


요즘도 호남 남도 지역 출신 노년층 동창생들 회식자리 추억의 향토노래로 합창되고 있으며 이는 서편제의 가락에서처럼 원초적인 남도의 사랑과 정한의 강물이 여울져 흐른다. 가수 안치환, 이동원에 의해 무대에서 새롭게 불려지고 음반도 출판되었다.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유행하게 된 모태가 된 두 지역 벌교, 목포는 부용산 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노력으로 대중 곁으로 새롭게 부활의 노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부활의 노래 부용산의 진원지였던 목포여고는 1949년 안성현 곡, “봄바람”으로 합창 경연대회 전국 최고상 수상 경력이라는 전통의 맥이 흘러와 지금도 합창대회 전국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화려한 경력이 증명해주고 있지 않는가!


또한 현 이기봉 교장 선생님의 특히 항도여중 맥 찾기 운동을 추진하여 당시 전국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3대 조희관 교장 선생님의 교육 철학을 본보기 삼아 64년 전통 찾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으며, 특히 교내에 문학관을 만들어 문학의 산실로 교육의 장으로 활용, 학교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여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고 있어 지역에 그리고 교육계에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작사자 고향 1999년 가을 벌교 현지 부용산에 < 부용산 > 시비가 건립되었고, 2002년 봄에는 작곡의 본산지 목포여고 교정에 ( 부용산 ) 노래비가 세워져 무상한 세월을 지켜나가고 있다.


또한 월북 작곡가 안성현의 고향 나주 남평 드들강변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2009년 5월 22일 “그들은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안성현을 기리는 추모 음악회가 처음으로 나주 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기도 했다. 노래가 탄생된 배경의 중심에 섰던 학교 사랑에 각별했다던 당시 항도여중 조희관 교장 선생님을 기념하는 “문학비”가 현 목포여자고등학교 이기봉 교장 선생님의 관심과 노력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갓바위 문화타운 목포 문학관 앞에 세워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이의 귀감이 될뿐더러 목포를 빛낸 100名중 한 사람으로 남도 문학의 숨은 별로 한글사랑과 수필가로 지역교육에 헌신한 교육자로 선정되어 유달산 예술 공원에 공적이 새겨져 있다. 실로 관심 있는 분들로 인하여 수난과 역사 속에 잊혔던 부용산 노래는 시인의 끈끈한 삶과 시 그리고 음악이 어우러진 삼위일체 작품으로 되살아난 부활의 작품, 부활의 노래로 역사성 있고 의미 짙은 국민가요로 아픔의 분단시대 남북한 문학과 음악이 어우러진 통일을 염원한 노래가 새롭게 또 다른 부활을 꿈꾸어 본다  * 부용산 가장 슬픈 부활의 연가 / 해설사 조대형


이어도 사나 / 여러 버전 중의 하나


이엿사나 이여도사나 이엿사나 이여도사나

우리 배는 잘도 간다

솔솔 가는 건 소나무 배요 잘잘 가는 건 잣나무 배요

어서 가자 어서어서 목적지에 들어나 가자

우리 인생 한번 죽어지면 다시 환생을 못하느니라

원의 아들아 원 자랑 마라 신의 아들은 신 자랑 마라

홑베개를 베고 혼자 잠자는 원도 신도 두렵지 않다.

원수님은 외나무다리 길은 무슨 큰길이던가

원수님이 길 막지 마라 사랑 원수는 아니로다.

낙락장송 늘어진 가지 홀로 앉아 우는 새야

내 님 죽은 영혼인가 나를 보면 자꾸만 운다

시집살이 삼 년 첩살이 삼 년 몇 삼 년을 살았다마는

열두 폭의 도당치마가 눈물로 다 젖었도다.

임아 임아 정한 말을 하여라. 절구 뒤 절구공이로 알마.

임이 없어도 밤이 새더라 닭이 없어도 밤이 새더라

임과 닭은 없어도 산다.

밤에 가고 밤에 온 손님 어느 고을 누구인 줄 알리오.

저기 문 앞 푸른 버드나무에 이름 성명 써 두고 가소

만조백관이 오시는 길에는 말 발에도 향기가 난다

무적상놈 지나는 길에는 길에서조차 누린내 난다

강남을 가도 돌아 나오고 서울을 가도 돌아 나온다

황천길은 아침 한나절 거리지만 한번 가면 다시 올 줄 몰라.

강남 바다에서 비 지어 오면 제주 바다에 배 띄우지 마라

명지 바다에 실바람 불면 부모의 넋이 돌아나 오게  


웡이자랑 / 여러 버전 중의 하나


웡이 자랑자랑 웡이 자랑자랑 웡이 자랑자랑 웡이 자랑자랑 저래가는 검둥개야이리오는 검둥개야 우리 아기 재와 도라 너네 애기 재와주마 웡이 자랑자랑 웡이 자랑자랑 우리 아기 잘도 잔다 자랑자랑 웡이자랑 아니 아니 재와 주니 질긴 질긴 촘대로 손모가지발모가지 걸려 매고 걸려 매여 깊은 깊은 천지 속에 비 온 날은 들이치고 날 좋은 날은 내 칠기여 자랑자랑 웡이자랑 일가방상화목동이 어서 자랑 부모에게 소신동이 어서 자랑 동숭에게 우애동이 어서 자랑 어서 자랑 웡이 자랑자랑 웡이 자랑자랑 웡이 자랑자랑 웡이 자랑자랑 우리 아기 잘도 잔다 자랑자랑 웡이자랑 어서 점점 쌀밥 먹어 돈잠자라 혼정저녁 허여 사할 거 아니냐 했는다 지엄 시네 무사히영저드람시니 무사히영저드람시니


산동애가 유래


산동애가는 여순사건 때

구례군 산동면 상관마을에 

사는 백부전 열아홉 살 처녀가

부역혐의로 끌려가면서

구슬프게 불렀던 노래다.


산동면에서 부자였던 백 씨 집안은

5남매를 두었으나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일제 징용과

여순사건으로 희생되고

셋째 아들마저 쫓기게 되자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오빠 대신 끌려가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죽게 된다. 

     

<따뜻한 봄날> 김형영 / 장사익의 가슴을 치는 노래 <꽃구경>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 감아버리더니

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 하시나요.

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 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 하시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산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 김형영(1945, 01~ 2021, 02)


0003 자귀


늦은 산책길

월대천 물가

자귀나무 꽃

침실 조명등

자정이 붉다


조금 걸으니

어느 한 사람

길에서 잔다

식당 주차장

술에 취해서

드르렁 드렁

코 골며 잔다


어떻게 할까

깨울까 말까

신고를 할까

자귀꽃 피고

자귀 소리가

하늘 찍는다

밤을 찍는다


0004 오늘이 나의 마지막인 것처럼


나는 내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부터 나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내가 언제 죽게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잘 떠나기 위하여,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나는 언제나 정리가 서툴렀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정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틈틈이 정리를 하려고 한다. 앞으로 잘 가기 위해서는 정리를 잘해야만 한다. 영정 사진을 찍으면 오래 산다는 말이 있다. 영정 사진을 찍는 마음으로 나의 삶과 나의 꿈과 나의 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인 것처럼, 오늘이 나의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만 하겠다. 사람은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사느냐에 따라 다르다. 나는 이제 앞으로 아름다운 시인들과 함께 살기로 하였다. 앞으로 몇 명의 시인들과 함께 살게 될지 나는 아직은 모른다. 하늘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먼저 의미 있는 시인들부터 만나기로 한다. 나는 우선 윤동주 시인과 함께 살면서 앞날을 모색하기로 한다. 얕게 많은 시인들을 만나는 것보다 나는 차라리 한 시인을 만나더라도 깊이 아주 깊이 만나보고 싶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비가 와도 내 몸의 어처구니가 벌떡 일어선다. 어처구니를 잡고 살살 나의 몸과 마음을 돌린다. 나의 몸과 마음이 서서히 뜨거워지고 있다. 나의 영혼까지 불꽃이 옮겨 붙을 것만 같다. 나는 오늘도 어처구니가 있고 비가 내려도 구름 뒤로 해가 떠오른다. 해에게도 어처구니가 있다. 해도 자신의 어처구니를 손으로 잡고 서서히 돌리기 시작한다. 어둠의 부스러기들이 빗물에 젖으며 서서히 갈리기 시작한다. 콩물처럼 맷돌에서 뚝뚝 떨어진다.


0005 윤동주 시인을 잘 만나려면

          ―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사진판)』


윤동주 시인을 잘 만나려면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사진판)』을 먼저 읽어야만 한다. 윤동주 시인의 고향 북간도 방문도 좋고 윤동주 문학관에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윤동주 시인의 거의 모든 자료들이 집대성된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사진판)』을 꼭 읽어야만 한다.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사진판)』은 영원한 민족의 청년시인 윤동주의 시와 산문 전집. 윤동주가 남긴 모든 자료를 육필원고 사진과 함께 수록했다.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사진판 자필 메모, 소장서 자필 서명>, <시고 본문 및 주>로 나눠 총 219편의 시와 메모, 산문 등을 수록했다.


윤동주 시인에 관한 한 현존하는 거의 모든 택스트가 사진으로 담긴 소중한 도서다. 원본은 이제 연세대학교 보관소에 저장되어 직접 볼 기회는 힘들어졌다. 그 대신에 이 도서가 있으니 시간을 거슬러 펜을 잡고 시를 쓰고 있는 윤동주 시인의 생생한 모습과 감정을 유추하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공식적인 지면에 작품을 많이 발표하지 못했다. 따라서 인쇄된 작품이 많지 않은 반면에 윤동주 시인이 직접 쓴 작품노트가 있다. 윤동주 시인은 생전에 3권의 작품 노트를 남겼다. 그리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 등의 작품이 있다. 자신이 직접 쓴 3권의 노트는 다음과 같다.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 『창(窓)』,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사진판)』의 목자는 다음과 같다.


제1부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제2부 사진판 자필메모 소장서 자필 서명

제3부 시고 본문 및 주


후기

부록

작가연보

작품 색인 


그리고 아주 많은 윤동주 시인에 관한 책들이 있는데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사진판)』 다음으로 읽어야 할 책들은  『윤동주 평전』(송우혜),  『처럼』(김응교),   『정본 윤동주 전집』(홍장학),『정본 윤동주 전집 원전 연구』등이 있다. 


0006 함양 방짜징


함양 방짜징 소리를 들은 다음부터 자꾸만 징소리가 들린다. 수천 번의 두드림으로 만든다는 방짜징, 그 땀나는 방짜징 소리가 해에서도 들리고 달에서도 들린다. 방정맞은 꽹과리 소리가 아니라 깊고도 멀리 가는 방짜징 소리, 징소리가 들린다. 지리산 같은 방짜징 소리가 들린다. 한라산 같은 방짜징 소리가 들린다. 오늘 아침에도 해에서 빛의 징소리가 쏟아지더니, 오늘 밤에는 달도 보이지 않는데 징소리가 쏟아진다. 나의 몸과 마음이 방짜징 소리를 달빛처럼 입는다. 


0007 운명처럼


권영민 교수님의 『우리 시 깊이 읽기』를 읽는다. 권영민 교수님은 최동호 교수님과 함께 나에게 시인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주신 분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그 큰 은혜에 보답을 하지 못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신경림 선생님과 김우창 교수님께도 빚으로 남아있다. 그리하여 이제라도 다시 처음부터 공부를 시작하려고 한다. 우리나라 현대시를 읽으려면 김소월 시인부터 읽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운명처럼 윤동주 시인부터 좀 더 깊이 읽기 시작한다. 윤동주 시인과 함께 순례를 하면서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눈다. 윤동주 시인의 모든 작품과 모든 삶을 읽고 기록할 작정이다. 다른 시인들도 좀 더 완벽하게 다시 읽고 다시 기록할 것이다.


얼마 전에 문학사상 문예지 휴간 소식을 들었다. 오래도록 주간을 맡으셨던 권영민 교수님 소식이 반가워서 이 책을 읽기 시작한다. 권영민 교수님의  『우리 시 깊이 읽기』 는 저자가 2014년부터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한국 현대시’를 강의하면서 미국의 대학생들과 함께 토론했던 내용을 간추려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유고 시인들을 객관적으로 평론한 내용으로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한국서정시의 대표적 시인 김소월(1902~1934)은 현재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대표적인 시인(진달래꽃 등)이다. 한용운(1879~1944)은 한국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 앞장섰던 승려이며 저항시인(님의 침묵 등)이다. 이상화(1901~1943)는 민족적 저항의 의지를 서정적 정조로 형상화했던 시인(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이다. 김동환(1901~?)은 향토색 짚은 소재를 찾아내어 낭만적 감정을 잘 표현했다. 그는 1949년 반민특위에서 친일문학자로 지목된 시인(국경의 밤 등)이다. 주요한(1900~1979)은 산문적 시적 진술을 통해 감각적 인상을 표현했다. 그러나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문단활동에서 멀아진 시인(불놀이 등)이다. 심훈(1901~1936)은 저항시인(그날이 오면 등)이자 소설가(상록수)이다. 그의 시 <그날이 오면>은 유일하게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던 바우라의 ‘시와 정치’라는 책에 상세하게 분석해 놓은 시이다. 한국의 문학작품이 서구인들에게 수준 높은 안목을 통해 소개된 최초의 시라 할 수 있다. 박세영(1902~1989)은 해방 전 한국에서 활동하다 북한으로 월북한 시인(산제비 등)으로 현실경험과 투쟁 의지를 결합시켜 서정적 어조로 형상화했다고 할 수 있다. 박팔양(1905~1988)은 궁핍한 현실의 고통이거나 왜곡된 근대 도시 문명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하여 시(태양을 등진 거리 위에서 등)를 썼다. 그는 해방 후 북으로 월북하였다. 임화(1908~1953)는 계급적 현실과 그 경험적 구체성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정황이 사실적으로 그려짐으로 시적 주제의 관념성을 넘어섰던 시인(우리 오빠와 화로 등 )이다. 해방 후 남한에서 활동하다가 좌익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자 북으로 월북하였고, 한국전쟁 때 다시 남한으로 왔다가 다시 월북하였다. 최남선(1890~1957)은 초기의 신시 실험과 시조의 창작을 통해 근대문학 성립과 한국의 역사문화등에 대한 폭넓은 활동을 통해 신문화운동을 주도했던 시인(해에게서 소년에게 등)이다. 그러나 광복 후 친일문학가로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이병기(1891~1968)는 시조의 현대화와 고문헌연구를 하였던 시조시인(파초 등)이다. 그는 1996년 초기작품을 포함하여 시조 93편과 시조론, 고전연구, 일기 등을 수록한 가람문선을 발간했다. 


제2부

정지용(1902~1950)은 일본어와 한국어로 시를 쓰는 이중 언어적 글쓰기로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임했다. 그의 시는 모더니즘이라는 커다란 문학적 조류 안에서 설명되기도 하고, 이미지즘의 특징으로 그 경향이 규정되기도 한다. 그는 시(바다와, 유리창 등)의 언어를 통해 음악적인 가락의 아름다움보다는 시적 이미지의 공간적 조형미를 창조하고 있다. 김영랑(1903~1950)은 그는 섬세한 언어와 아름다운 리듬은 정지용의 시가 날카로운 언어 감각과 선명한 이미지와 함께 ‘시문학파’가 도달한 당대 순수시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시(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언어를 통해 찬란했던 때를 지나 모든 것을 상실하고 뒤돌아보면서 그것을 새로운 시작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마치 우리들의 삶의 한 단면처럼, 삶이란 오르막과 내리막을 조화롭게 꾸려가야 하는 것처럼, 그의 시는 늘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게 하고 있다. 김기림(1908~?)은 시의 창작과 비평작업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그는 과거의 시들이 감상벽에 빠져들어 허무주의로 흐르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강하고 명랑한 ‘오전의 시론’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의 시(기상도 외)는 밝은 시각적 이미지들이 중심을 이루지만 회화성만을 추구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시대정신을 담아내개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상(1910~1937)은 사물에 대한 보다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접근법을 채택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인식방법과 주체의 시각 자체를 새롭게 변형할 수 있는 방법을 창출해 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문학과 예술을 가장 빛나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그의 시(오감도 등)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화가가 되기를 원했고, 그는 경성공업학교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며 현대 기술문명을 주도해 온 물리학과 기하학 등에 관한 수준 높은 지식을 터득했고, 그는 이에 관련된 작품을 남기는 데 크게 영향을 주게 되었다. 김광균(1914~1993)은 정지용, 김기림, 이상 등과 함께 193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을 실천했다. 그의 시(추일서정 등)는 서정적 정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섬세한 언어 기교와 감각적 이미지로 시적 대항을 형상화하고 있다. 다양한 이미지의 공간적 구상을 통해 확대하는 시의 내면 공간이라든지 감상적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동원하는 지적 언어 등은 그의 시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제3부

유치환(1908~1967)은 그의 시에 등장하는 시적 대상이 곧바로 삶에 대한 지적 주체의 개인적 윤리 의식이나 가치문제와 직결되는 시를 썼으며, 자기 의지를 남성적 어조를 통해 직설적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시(깃발 등)는 존재에 대해 고뇌하면서도 생명에 대한 열애에 바탕을 두고 허무의 본질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이를 강인한 의지로 극복해보려고 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부터 생명파 시인으로 지칭되었다. 김광섭(1905~1977)은 ‘지성과 감성이 융합하여 흐르는 논리를 놀라운 형상 속에 넣으려고 했다’며 자신의 시의 방향을 밝히기도 했고, 일제 말기인 1941년 중동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반일민족사상을 고취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되어 3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60년 중반 뇌출혈로 쓰러진 후 병마를 극복하고, 다시 펜을 든 후 발간한 것이 시집(성북동비둘기 등)을 통해 자신의 시 세계를 병고를 견디면서 얻어낸 삶에 대한 긍정적 시선과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되었다. 특히, 삶의 현실 속에서 파괴되고 있는 자연의 섭리라든지 인간성의 상실 등과 같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신석정(1907~1974)은 현대문영의 잡담을 멀리 피한 채 한 개의 유토피아를 흠모하는 묵가적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의 시(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등)에는 본질적으로 부조리에 현실에 대한 거부와 함께 초월적이고 본원적인 실재에 대한 강한 희구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전원적, 자연친화적 이상향에 대한 시적 열망으로 그려졌다. 서정주(1915~2000)는 초기 시에서 인간의 본능과 생명의 근원을 탐미주의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러나 전통적인 토속세계로 관심을 돌리면서 인간의 운명과 그 영원성으로 회귀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신라’라는 상상력의 거점을 발견하고 불교적인 영원회귀의 정신을 시적 주제로 내세우기도 했다. 그의 시(동천 등)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면서 시 형태의 균형과 함께 토착적인 언어의 지적 세련을 달성하였다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일제 말기에 다쓰시로 시즈오로 창씨개명한 후 태평양전쟁을 성전으로 미화하고 일제의 시민정책을 적극 지지하였던 대표적인 친일문학인이었다. 오장환(1918~(1951?))은 시적 주체로서 그 존재를 가능하게 했던 고향으로부터 출발한다. 그에 있어 고향은 단순한 회고 취향의 산물이 아니며, 감상적인 동경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삶의 근원을 다스리는 영역이었다. 그의 시(고향 앞에서 등)의 가장 근원적인 공간은 고향이었다. 그는 1945년 좌익문단 조직인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했고, 1947년 무렵 월북했으며, 모스크바에서 1951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석(1912~1995)은 그의 시적 공간을 대부분 고향의 토속적인 풍물로 채웠다. 이것은 고향이라는 공간과 갖가지 풍물에 대한 체험이 그만큼 시인의 의식 속에 강렬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는 고향의 풍물과 토속적인 인간미를 그의 시(국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등)를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면서 현실의 삶 가운데 훼손된 인간적 가치와 그 회복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육사(1904~1944)는 고통의 현실 속에서도 시를 통해 민족 주체의 정립과 자기 확인을 수행하였으며, 투철한 저항 의식을 실천적 행동으로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그는 시작 활동뿐만 아니라 항일 독립투쟁에 헌신하여 전 생애에 열일곱 번이나 투옥되었다. 이와 같은 활동을 그대로 대변한 듯 그의 시(광야 등)는 식민지하에서 우리 민족의 비운을 바탕으로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내고,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그는 고통스러운 식민치하에서 강하게 현실에 맞섰고, 또한 맞서고자 했던 의지적인 시를 많이 발표했다. 이에 반해 청포도는 고향을 배경으로 밝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드러낸 시라고 할 수 있다. 이용악(1914~1971)은 그의 시(북쪽 등)에서 궁핍한 삶의 고난과 역경, 현실의 참담한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식민지 시대 민중의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였다. 문학활동을 하다 함경북도 경성 고향에서 칩거하다, 1945년 광복 직후 상경하여 좌익문단 조직인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였으며 ‘중앙신문’ 기자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1947년)에 일제의 강점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채 유랑하던 우리 민족을 오랑캐꽃에 비유하여 노래한 ‘오랑캐 꽃’을 발간하였으며, 일제의 강압적인 정책 아래 고뇌하는 지식인의 자의식을 담은 ‘두메산곬’을 발간하였다. 좌익문화활동에 연루되었다가 한국전쟁 당시 출옥하여 월북 후 1971년에 사망하였다. 노천명(1911~1957)은 뛰어난 언어 감각과 서정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시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는 시(사슴 등)에서 자기 존재의 시적 탐구와 함께 감각적인 서정시를 많이 남겼다. 그러나 역사의 격변기를 거치며 보여준 친일 행적 등에 대한 비판이 여전히 문제적인 상태로 제기되고 있다. 모윤숙(1910~1990)은 1934년 유치진, 서항석 등이 주도했던 극예술연구회에 가담하여 1938년까지 활동했다. 1940년 친일적 성향의 조선문인협회에 관여하면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지지하고 전쟁을 찬양하는 글을 발표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다시 문단에 나왔고, 1949년 월간 ‘문예’ 지를 창간했으며,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이후 많은 활동을 하며 1969년 여류문인협회 회장을 맡았다. 윤동주(1917~1945)는 동심 지향과 실향의식, 그리고 속죄양 의식 등으로 그 시적 경향을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많은 작품에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자아에 대한 ‘부끄러움’이 내재되어 있다. 그의 시(별 헤는 밤 등)는 억압적인 현실에 대한 불안감을 바탕으로 자아의 내면에 대한 성찰과 함께 민족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뚜렷한 자기 문학의 특징을 살려내게 되었다. 그는 이육사와 함께 일제 말기 민족문학의 부재상태, 이른바 암흑기를 정신적으로 극복한 민족시인으로 손꼽을 수 있다.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옥사했다.


제4부

박목월(1916~1978)은 초기의 시에는 자연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많다. 1950년 한국전쟁을 겪은 후 박목월의 시는 일상의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박한 생활인의 자세를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그의 시(나그네 등)는 자연에 대한 친화적 접근법에서 벗어나 생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소박하게 담아낸다. ‘가정’이라든지 ‘밥상 앞에서’ 등과 같은 작품을 보면 소박하면서도 인정미를 담고 있는 생활의 단면들이 시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박두진(1916~1998)은 그가 노래하고 있는 자연은 시적 자아와 거리를 두고 있는 대상이 아니다, 자연은 언제나 시적 자아와 동일시된다. 그의 시는 자연의 친화력에 의해 대상과 주체가 하나가 되고 있으며, 거기서 오는 영원한 생명력이 시적으로 구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그(해 등)의 시들은 존재의 심연을 헤매는 기도로 나타나기도 하고, 생명에의 경외감으로 채워지기도 한다. 그의 시에 과감하게 활용되고 있는 의성어, 의태어나 직유적인 표현, 파격을 이루는 형태의 시적 진술 등은 격렬한 정서의 충동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데 기능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조지훈(1920~1968)은 절제와 균형과 조화의 시를 통해 자연을 노래하고 전쟁의 고통 속에서 역사와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는 변화의 시인은 아니었지만, 그가 가지고 있던 절제의 목소리, 균형 잡힌 시 형식, 그리고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인식은 그의 시(승무 등)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그는 ‘풀잎 단장’이라는 시집에서 한국전쟁의 혼란을 겪은 뒤에 시대의 고통을 견뎌내는 의지를 시적으로 표현하였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풍설, 풀, 바위, 구름, 사람 등이 각각 존재 의미를 부여받고 자연적 질서 속에서 그 가치를 실현한다는 자각을 보여 주었다. 김현승(1913~1975) 은 고독의 시인이다. 그는 스스로 키워온 청교도적인 신앙과 사상에 입각하여 인간의 내면, 인간 조건의 본질을 끈질기게 추구하였다. 그가 그려내고 있는 고독은 투철한 자기 인식에 근거함으로써 철저한 윤리의식으로 확대되기도 하고 존재의 내면에서 더욱 견고한 인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의 시(눈물 등)는 고독과 자연에 대한 주관적 서정과 감각적 인상을 노래한 시들이 많다. 그가 즐겨 그려낸 자연은 가을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낙엽, 꽃잎, 바람 등의 현상적인 것들과 열매, 뿌리, 보석 등의 본질적인 것의 대조적인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김수영(1921~1968)의 시는 현실 참여의 경향이 강하며 자유의 개념을 표출하고 있다. 그는 한국 문화의 다양성과 활력을 깨치는 무서운 폭력을 정치적 자유의 결여라고 규정하였고, 자유의 참뜻이 군사정권에 의해 좌절되는 것을 보면서 깊은 회의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의 시(풀 등)는 자기 풍자의 극단적인 산문적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시 ‘풀’에서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을 노래하였고, 자연과 생명을 중시하는 생태적 상상력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우리가 사회학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풀’이라는 의미를 확장하여 보면 풀은 곧 외부적 세력의 억압과 횡포를 견디며 살아가는 ‘민초’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김춘수(1922~2004)의 시(꽃 등)는 첫 번째 단계에서는 ‘꽃(1952)’과 같은 작품에서처럼 존재에의 탐구를 수행하던 시기로 존재와 언어의 관계가 강조되는 시기, 두 번째 단계는 1950년대에서 1960년대의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로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를 지향하던 묘사적 세계인 ‘타령조’ 같은 시들로 언어유희가 두드러졌다. 셋째 단계는 ‘처용 단장’을 중심으로 탈이미지의 세계가 강조되었다. 넷째 단계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로 종교 또는 예술에 대한 성찰이 그의 시를 통해 강조되었다. 박재삼(1933~1997)의 시(울음이 타는 강 등)는 1950년대에 새롭게 부각된 모더니즘 시의 이국적인 취향과 관념적 요소와는 달리 토속어에 대한 친화력을 바탕으로 깊이 있게 서정성을 추구하였다.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어체의 어조와 잘 조율된 율격은 서정시의 격조와 그 아름다움을 살려내는 데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연을 통해 삶의 위로와 지혜를 얻으면서도 때로는 완벽한 아름다움과 인간과의 거리 때문에 절망하기도 하였다. 조오현(1932~2018)의 시(무설설 등)는 불교적인 선의 세계를 시조의 시적 형식과 결합해 낸 특이한 상상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적인 깨달음의 과정을 서사화하여 연시조 형식으로 완성한 ‘무산 심우도’ 10수는 불교시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진리는 문자로 표시할 수 없다는 ‘간화선’의 대표적인 공안을 시화한 연시조 ‘무자화’ 부처나 깨달음을 스스로 체득함으로써만 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에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다는 ‘무언무설’의 선의 경지를 노래한 연시조‘무설설’등은 선의 세계와 불교적 연기와 공 사상에 관한 시적 탐구에 해당한다.

 

시인은 어쩌면 천형을 갖고 태어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그가 시를 씀으로써 삶의 기쁨을 느끼고 세상에 희망을 주는 것이란 자랑스러움에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물질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신적인 만족이다. 시인은 그런 점에서 신의 대리인 다음으로 아마도 가장 정신적인 만족도가 높은 사람이 아닐까? 시인은 가장 낮은 연봉을 받는 사람가운데 하나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그는 시 한 편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만으로도 배부르다며 웃기도 한다. 시인은 시를 씀으로써 행복하지 않다고도 하지만, 시를 읽는 사람은 행복해하고 미소 짓는 것, 그것이 아마도 시인이 자신은 고통스럽지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그것을 기쁨으로 여긴다고 어느 시인의 쓸쓸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삶에서 우리는 시인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시를 읽자, 그들에게 아름다운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들의 시를 소리 내서 읽자. 그리고 우리들의 힘들고 지친 손을 모아 박수를 치며 오늘도 시 한 편을 필사해 본다면 그것 또한 우리들의 행복이 아닐까?


0008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

           ― 어머니, 시인의 월급은 가난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길을 간다

두엄자리 곁에 세워진 아버지의

낡은 지게를 지고 저물녘을 간다

참깨 베러 가신 어머니의 산밭으로

늦은 마중을 간다 오랜만에

바람을 비껴 여름 한쪽 끝으로

산길을 오른다

노을이 차마 곱게 익는다


일찍부터 외항선을 탄 만수

뱃사람이 된 만수네가 새로 장만한

논을 바라보며 들길을 간다

일곱 번씩이나 떨어지고도 다시

행정고시공부를 시작했다는 현길이,

이미 기울어 버린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팔아넘긴 논배미를 지나

쓸쓸하게 걸어간다 새를 쫓는 깡통소리와

반짝이는 반짝이의 마음들이 노을 속으로

새를 날려 보내며 또 내일을 염려하는 가슴을

가다듬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허수아비는

쓰러지지 않고 동그랗게 질린 비닐 얼굴들이

하늘까지 닿으려는 마음으로 솟아오르곤 했다


콩밭으로 바람이 기어들어가고 밤은

들쥐처럼 숨어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어머니와 함께 산길을 내려온다 가끔

고개 치켜드는 벼 포기 사이로 추억들이

발소리를 숨죽이며 기어 나왔다 나는 참깨를 지고

어머니는 토란대를 이고 오셨다 가슴조인

달빛이 풀어지고 우리는 하염없이 걸어 내려온다


― 어머니, 저 이제 시인이 되었어요

― 그래, 시인이 뭣 허는 것이다냐

― 예, 지금까지 제가 되고 싶었던 것이에요

   밤낮을 밤으로만 지내면서 말이에요

― 그러냐, 그럼 이제 취직이 됐단 말이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것이 아니에요

― 그럼, 시인이 뭣 하는 것인디 그러냐

   오랜만에 니가 웃기까지 하고 말이여

― 예, 앞으로

   우리들의 고향을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노래? 그럼 인쟈 테레비에도 나온다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게 아니에요

― 그라믄, 시인 한 달 월급이 얼마나 된다냐

   먹고 살만한 직업이다냐

   요즘 시상에는 돈이 최고드라

   봐라, 만수는 돈 있승께 다들 걱정허는

   장개도 쉽게 간다드라

   돈 많은 이쁜 색시가 낼 모레 온다드라

― 어머니, 하지만 저는 그렇지를 못해요

   앞으로 어머니를 팔지도 몰라요

   앞으로 고향을 팔아먹을지도 몰라요

   시인은 가난한 직업이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잖아요

   마음을 갈고닦아 영혼을 맑게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더욱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우리들의 이야기가 들판 가득 출렁일 때 달빛은 우리가 걸어온 들길을 따라오고 있었다 어머니, 저는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머니와 고향을 위하여 우리들의 생활을 팔아먹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땅의 눈물 같은 시 한 편으로 살고 싶습니다


0009 눈사람 자살 사건


최승호 시인의 『눈사람 자살 사건』을 읽는다. 책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오랫동안 절판되었던 책 『황금털 사자』(해냄,1997)를 다시 내게 되었다. 책 제목을 『눈사람 자살 사건』으로 새로 정하고, 작품도 부분적으로 수정하였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


서울의 대형 출판사 해냄에서 출판했을 때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최승호 시인의 고향 춘천에 있는 작은 출판사에서 새로 발간한 동일한 책은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우리들의 시대와 책이 맞아떨어져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책을 만든 편집자의 정성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동안 쌓아온 최승호 시인의 높아진 지명도 때문일까.


책 표지 디자인부터 많이 신경을 써서 만들었다는 느낌이 든다. 또한 글과 함께 배치한 유명한 그림들도 책 판매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에는 많은 시인들이 자신의 책을 팔기 위해서 여러 곳에 강의도 다니고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이 그만큼 많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로부터 시도 멀어지고 종이책도 많이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눈사람 자살 사건』을 읽으며 나의 절판된 책도 복간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책으로 나의 첫 번째 시집을 복간하면 어떨까 깊이 생각한다. 『땅의 뿌리 그 깊은 속』을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로 제목도 바꾸고 시들도 좀 손을 보면 어떨까 생각 중이다. 그보다 먼저 나의 지명도를 높이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를 고심하고 있다.


두 출판사가 발행한 각각의 책 표제작을 함께 읽어보자.


 눈사람 자살 사건 / 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황금털 사자 / 최승호


암고양이가 황금털 수사자에 반한 것은 늠름한 자태 때문이었다. 황금털 수사자에게는 기백이 있었고 기품이 있었다. 그는 결코 가볍게 처신하지 않았으며 걸을 때면 앞발로 대지를 누르듯이 당당하고 느긋하게 걸었다.


게으름조차 그에게선 멋을 풍겨댔다. 황금털 수사자가 하품하는 모습은 하늘을 삼켰다가 토하는 것 같았고 벌렁 드러누워 낮잠에 빠진 모습은 천하의 일을 다 한바탕 꿈으로 여기고 내버려 둔 채 홀로 태평스러운 듯하였다.


고독한 수사자에게 어느 날 암고양이가 교태를 부리며 사랑을 고백하였으나 황금털 수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도도했고 그럴수록 암고양이는 그의 풍모에 매혹되었다.


"참 귀여운 암컷이로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사자는 암고양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자신에게는 없는 가벼움의 아름다움이었다. 친근해진 뒤에 황금털 수사자는 안고양이에게도 발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격이 없어지자 암고양이는 사자의 수염을 뽑기도 하고 머리 위에 올라가 장난을 치며 황금털 갈기를 꽈배기처럼 땋아 예쁜 사자를 만들어 보려는 무모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착하기만 하다간 내가 쥐 꼴이 되겠구나."


황금털 수사자는 더 이상 암고양이의 가벼운 행동들을 참을 수가 없었다. 수사자가 한 번 크게 포효하자 벼락에 뇌가 찢어진 듯 암고양이가 비틀거리며 멀리 달아났다. 


최승호, 눈사람 자살 사건       


책 소개


최승호 우화집 『눈사람 자살 사건』에 나오는 우화들은 대개 짧다. 웬만한 산문시보다도 짧다. 그런데 그 짧은 문장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결코 녹록지 않다. 또한 처음 책이 나온 지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최승호 선생이 들려주는 한 편 한 편의 우화는 지금의 세상과 빗대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고전이 그렇듯이 좋은 글은 세월의 풍화를 이겨내는 법이다.


출판사 서평


시 같은 우화, 우화 같은 시
― 최승호 우화집 『눈사람 자살 사건』 편집 후기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절판되었던 최승호 선생의 우화집 『황금털 사자』(해냄, 1997)를 복간하였다.

이번에 복간하면서 선생께서 제목도 “눈사람 자살 사건”으로 바꾸셨고, 내용도 상당 부분 바꾸셨다. 박상순 시인의 북디자인이 또한 책을 새롭게 만드는 데 큰 몫을 했다. 표지 디자인은 물론 본문의 그림도 다 바뀌었다. 따라서 복간이라기보다는 개정판에 가깝다고 하겠다.

우화집이라고 하였지만, 한 편 한 편을 들여다보면 우화(산문)라고 하기에는 오히려 시에 가깝다. 한 편 한 편 최승호 선생 특유의 시적 문장과 문체로 그려냈는데, 독자 입장에서는 굳이 산문이다 시다 구분 지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가령 우화 「거울의 분노」를 보자.

그 거울은 무심(無心) 하지 못하였다. 날마다 더러워지는 세상을 자신으로 여긴 거울은 혐오감을 참지 못하고 분노의 힘으로 온몸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일종의 자살이었다. 그러자 조각조각마다 보기 싫은 세상의 파편들이 또다시 비쳐오는 것이었다.
― 「거울의 분노」 전문

이 짧은 우화를 두고 과연 산문이라 할 것인가 아니면 시라고 할 것인가. 무어라 한들 어떠할까 싶다. 짧지만 그 울림은 길고 넓지 않은가. 다음의 우화 「고슴도치 두 마리」는 또 어떤가.

고슴도치 두 마리가 가시를 상대방의 몸에 찌른 채 피투성이가 되어 함께 죽어 있었다. 그들은 서로 너무 깊이 사랑했던 모양이다.
― 「고슴도치 두 마리」 전문

최승호 우화집 『눈사람 자살 사건』에 나오는 우화들은 대개 짧다. 웬만한 산문시보다도 짧다. 그런데 그 짧은 문장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결코 녹록지 않다. 또한 처음 책이 나온 지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최승호 선생이 들려주는 한 편 한 편의 우화는 지금의 세상과 빗대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고전이 그렇듯이 좋은 글은 세월의 풍화를 이겨내는 법이다.

삶이란 무엇인지, 인간관계란 무엇인지, 생태계 속에서 인간과 자연은 어떻게 함께하는지 등등 주옥같은 우화를 만나보기 바란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이런 우화는 없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시 같은 우화, 우화 같은 시”
“시집 같은 우화집, 우화집 같은 시집”
어떻게 불러도 좋을 최승호 선생의 우화집 『눈사람 자살 사건』이 독자들에게 큰 울림과 위로를 줄 것이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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