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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Jun 24. 2024

나는 장사꾼이 된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 서문과 발문 그리고



0012. 나는 장사꾼이 된다



장마가 나의 옥상을 빼앗아갔다

옥상에 나갈 수 없어 옥상출입문

열어 두고 드림타워 보면서 뛴다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한라산도

보이지 않는다 높은 꿈만 보인다


나는 이제 장사꾼이 되기로 한다


일주일 후면 실업자가 된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장맛비가 들친다

내가 뛰는 안쪽 바닥이 미끄럽다

속도를 줄여야만 한다 숨을 쉰다

그래도 나는 끝내 살아야만 한다


장마가 잠시 물러난다 길로 간다

벌써 밤이다 이호테우 해변이다

올해는 쌍원담 앞에 계절음식점

펼쳐놓고 환하게 불을 밝혀둔다

트로이목마 머리 위가 반짝인다

하늘의 별빛들은 보이지 않는다


주머니 속 윤동주 시인을 꺼낸다


육필원고를 읽으니 바다 쪽에서

만년필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정지용 시인의 서문을 읽다 보니

바다에서 글쎄 잉어가 헤엄친다

바로 저거다 잉어를 팔아야겠다


윤동주 시인의 시에 끼워서 판다

나를 끼어서 팔고 시도 끼워 팔고

일 플러스 일로 팔다 보면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을 것도 같아 좋다

연봉이 가장 낮은 수공업자 시인


이제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쓴다



 * 저항시인을 넘어 ‘보편적 인류애’ 텍스트로 기억할 때 / 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중에서

1948년 1월에는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 서문과 강처중 발문과 유영의 추도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초판을 간행하였다. 말하자면 이것이 두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이다. 이 시집 표지는 파란색으로 더 유명하지만, 초간본 겉표지는 사실 갈색이었다. 정음사 대표 최영해의 장남인 최동식(전 고려대 화학과 교수)은 “윤동주의 3주기 추도식에 초간본을 헌정하려 했으나 제작이 늦어져 동대문시장에서 구한 벽지를 마분지에 입혀 표지를 꾸민 뒤 10권을 급하게 제본해 가져갔다”라고 증언한 바 있는데, 즉 벽지로 표지를 제본한 ‘갈색’ 시집 10권이 세상의 빛을 처음 본 윤동주의 최초 시집이었던 셈이다. 이후 한 달 정도 지난 1948년 3월에 초판본 1000부가 파란색 표지로 출간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이 시집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아니어야 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19편만 그 제목으로 출간하려 했던 윤동주의 뜻을 존중한다면, 시집 전체 제목은 ‘윤동주시집’ 정도로 하고 1부 19편을 원래 시집 제목으로, 그리고 나머지 12편을 다른 소제목을 달아 펴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밋밋하게 윤동주시집으로 했다면 대중들의 호응은 훨씬 덜했을 것이니, 윤동주 시집 제목은 역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운명을 타고난 셈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0012-1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


1948년 강처중과 정병욱 등에 의해 처음 출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윤동주 시인의 시들을 모은 유고시집이다. 정음사 발행.

서문은 윤동주의 정신적 스승이자 당시 경향신문 주필이었던 정지용이 쓰고 발문은 윤동주의 친구들 중 하나이자 당시 경향신문 기자였던 강처중이 썼다. 본래는 30여 수의 시밖에 없었으나 간도에 남아있던 윤동주의 친인척이 윤동주의 시들을 가지고 내려와 현재 112여 수에 이르는 시와 네 편의 산문이 삽입되어 있다.

정음사 출판 윤동주 시집의 판본 현황은 다음과 같다. (엄동섭 연구)

판본     / 발행 연월일        / 수록작품

초판본 / 1948년 1월 30일 /  시 31편

재판본 / 1955년 2월 16일 /  시 89편, 산문 4편

3판본  / 1957년              /  시 89편, 산문 4편

4판본 /  1967년 5월 5일   /  시 89편, 산문 4편

5판본 /  1977년 3월 10일 /  시 112편, 산문 4편

6판본 /  1983년 10월 10일/ 시 112편, 산문 4편


원래 윤동주는 1941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하려 했지만, 당시의 암울했던 시대 상황 때문에 스승인 이양하 교수의 만류로 출판하지 못했다. 그래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육필 원고를 세 부 만들어 한 부는 자신이 갖고, 한 부는 정병욱에게 주고, 다른 한 부는 이양하 교수에게 전했는데, 윤동주의 것과 이양하 교수의 것은 유실되고 정병욱에게 준 원고만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졌다. 원래 이 시집의 제목은 ‘병원(病院)’으로 붙일 예정이었는데, 정병욱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의 세상이 온통 환자투성이’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1955년에 사망 10주기를 기념해 정음사에서 유고를 더 보충해서 냈으나,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은 그들이 월북 내지 좌익인사라는 이유로 뺐다.

영화 동주의 일본판 제목은 이 시집의 제목에서 유래한 것.


0012-2 서문 / 저자 정지용 / 발행 정음사


서(序)ㅡ랄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이고 정성껏 몇 마디 써야만 할 의무를 가졌건만 붓을 잡기가 죽기보담 싫은 날, 나는 천의를 뒤집어쓰고 차라리 병 아닌 신음을 하고 있다.
무엇이라고 써야 하나?
재조(才操)도 탕진하고 용기도 상실하고 8.15 이후에 나는 부당하게도 늙어간다.
누가 있어서 "너는 일편(一片)의 정성까지도 잃었느냐?" 질타한다면 소허(少許) 항론(抗論)이 없이 앉음을 고쳐 무릎을 꿇으리라.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遺稿)에 분향하노라.
겨우 30여 편 되는 유시(遺詩) 이외에 윤동주의 그의 시인 됨에 관한 아무 목증(目證)한 바 재료를 나는 갖지 않았다.
'호사유피(虎死留皮)'라는 말이 있겠다. 범이 죽어 가죽이 남았다면 그의 호문을 감정하여 '수남(壽男)'이라고 하랴? '복동(福童)'이라고 하랴? 범이란 범이 모조리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시인 윤동주를 몰랐기로서니 윤동주의 시(詩)가 바로 '시'고 보면 그만 아니냐?
호피는 마침내 호피에 지나지 못하고 말 것이나, 그의 '시'로써 그의 '시인'됨을 알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
.
ㅡ 그의 유시 <병원>의 일절

그의 다음 동생 일주(一柱) 군과 나의 문답, ㅡ

"형님이 살았으면 몇 살인고?"
"서른한 살입니다."
"죽기는 스물아홉예요ㅡ"
"간도(間島)에는 언제 가셨던고?"
"할아버지 때요."
"지내시기는 어떠했던고?"
"할아버지가 개척하여 소지주(小地主)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는 무얼 하시노?"
"장사도 하시고 회사에도 다니시고 했지요."


"아아, 간도에 시와 애수와 같은 것이 발효하기 비롯한다면 윤동주와 같은 세대에서 부텀이었구나!" 나는 감상하였다.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


이브가 해산(解産)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無花果)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ㅡ <또 태초의 아침>의 일절


다시 일주 군과 나와의 문답, ㅡ

"연전(延專)을 마치고 동지사(同志社)에 가기는 몇 살이었던고?"
"스물 여섯 적입니다."
"무슨 연애 같은 것이나 있었나?"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술은?"
"먹는 것 못 보았습니다."
"담배는?"
"집에 와서는 어른들 때문에 피우는 것 못 보았습니다."
"인색하진 않았나?"
"누가 달라면 책이나 셔츠나 거저 줍데다."
"공부는?"
"책을 보다가도 집에서나 남이 원하면 시간까지도 아까지 않습데다."
"심술(心術)은?"
"순하디 순하였습니다."
"몸은?"
"중학 때 축구 선수였습니다."
"주책(主策)은?"
"남이 하자는 대로 하다가도 함부로 속을 주지는 않습데다."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ㅡ <간(肝)>의 일절


노자(老子) 오천언(五千言)에,

"허기심(虛基心) 실기복(實基腹) 약기지(弱基志) 강기골(强基骨)"이라는 구(句)가 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ㅡ <십자가>의 일절


일제 헌병은 동(冬)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뼈가 강한 죄로 죽은 윤동주의 백골은 이제 고토(故土) 간도에 누워 있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ㅡ <또 다른 고향>


만일 윤동주가 이제 살아 있다고 하면 그의 시가 어떻게 진전하겠느냐는 문제.
그의 친우 김삼불(金三不) 씨의 추도사와 같이 틀림없이,
아무렴! 또 다시 다른 길로 분연 매진할 것이다.
ㅡ 1947년 12월 28일 지용


0012-3 발문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 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이 마주 앉아 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 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가이든 아무런 때 아무데를 끌어도 선뜻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시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나오는 외마디 비참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곧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 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 전당포 나들기를 부지런이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사양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하는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법이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 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아니하였다. 그 여성도 모르는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쓰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한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복강에서 죽었다. 이역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이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하더니 - 그는 나의 친구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 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이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을 마치고 경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듯 느껴지드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복강에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소리! 일본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소리로서 아주 가 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 지려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건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 강처중


정지용,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문 


서(序)ㅡ랄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이고 정성껏 몇 마디 써야만 할 의무를 가졌건만 붓을 잡기가 죽기보담 싫은 날, 나는 천의를 뒤집어쓰고 차라리 병 아닌 신음을 하고 있다.

무엇이라고 써야 하나?

재조(才操)도 탕진하고 용기도 상실하고 8.15 이후에 나는 부당하게도 늙어 간다.

누가 있어서 "너는 일편(一片)의 정성까지도 잃었느냐?" 질타한다면 소허(少許) 항론(抗論)이 없이 앉음을 고쳐 무릎을 꿇으리라.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遺稿)에 분향하노라.

겨우 30여 편 되는 유시(遺詩) 이외에 윤동주의 그의 시인 됨에 관한 아무 목증(目證)한 바 재료를 나는 갖지 않았다.

'호사유피(虎死留皮)'라는 말이 있겠다.범이 죽어 가죽이 남았다면 그의 호문을 감정하여 '수남(壽男)'이라고 하랴? '복동(福童)'이라고 하랴? 범이란 범이 모조리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시인 윤동주를 몰랐기로서니 윤동주의 시(詩)가 바로 '시'고 보면 그만 아니냐?

호피는 마침내 호피에 지나지 못하고 말 것이나,그의 '시'로써 그의 '시인'됨을 알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이 지나친 피로,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ㅡ그의 유시 <병원>의 일절


그의 다음 동생 일주(一柱) 군과 나의 문답ㅡ,

"형님이 살았으면 몇 살인고?"

"서른한 살입니다."

"죽기는 스물아홉예요ㅡ."

"간도(間島)에는 언제 가셨던고?"

"할아버지 때요."

"지내시기는 어떠했던고?"

"할아버지가 개척하여 소지주(小地主)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는 무얼 하시노?"

"장사도 하시고 회사에도 다니시고 했지요."


"아아,간도에 시와 애수와 같은 것이 발효하기 비롯한다면 윤동주와 같은 세대에서부텀이었구나!" 나는 감상하였다.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

이브가 해산(解産)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無花果)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ㅡ<또 태초의 아침>의 일절


다시 일주 군과 나와의 문답ㅡ,


"연전(延專)을 마치고 동지사(同志社)에 가기는 몇 살이었던고?"

"스물여섯 적입니다."

"무슨 연애 같은 것이나 있었나?"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술은?"

"먹는 것 못 보았습니다."

"담배는?"

"집에 와서는 어른들 때문에 피우는 것 못 보았습니다."

"인색하진 않았나?"

"누가 달라면 책이나 셔츠나 거저 줍데다."

"공부는?"

"책을 보다가도 집에서나 남이 원하면 시간까지도 아까지 않습데다."

"심술(心術)은?"

"순하디 순하였습니다."

"몸은?"

"중학 때 축구 선수였습니다."

"주책(主策)은?"

"남이 하자는 대로 하다가도 함부로 속을 주지는 않습데다."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그러나


ㅡ<간(肝)>의 일절


노자(老子) 오천언(五千言)에,

"허기심(虛基心) 실기복(實基腹) 약기지(弱基志) 강기골(强基骨)"이라는 구(句)가 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ㅡ<십자가>의 일절


일제 헌병은 동(冬)섣달에도 꽃과 같은,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뼈가 강한 죄로 죽은 윤동주의 백골은 이제 고토(故土) 간도에 누워 있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ㅡ<또 다른 고향>


만일 윤동주가 이제 살아 있다고 하면 그의 시가 어떻게 전전하겠느냐는 문제ㅡ


그의 친우 김삼불(金三不) 씨의 추도사와 같이 틀림없이, 아무렴! 또다시 다른 길로 분연 매진할 것이다.


-- 1947년 12월 28일 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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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시인을 넘어 ‘보편적 인류애’ 텍스트로 기억할 때 / 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 (1) 재평가가 필요한 이유

북간도 화룡현 명동촌에는 윤동주 생가가 조성돼 있다. 지금은 중국땅인 그곳은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공간이다.


그동안 윤동주(尹東柱)가 기억되어온 대표적 브랜드는 ‘저항시인’이었다. 해방 후 윤동주는 이육사와 함께 우리 사회의 민족주의적 열정을 통합하고 확충하는 실례로 해석돼 왔다. 말하자면 윤동주를 비롯한 몇몇 예외적 개인들에 의해 우리 민족의 정치적, 윤리적 우월성의 근거를 마련하고, 곧바로 그러한 연속성을 이어받자는 문화적 기억의 캠페인이 제도적 틀을 통해 확장되어갔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광복을 희구하며 싸워온 자랑스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에 윤동주를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일제 암흑기에 맞서 싸운 문학인이 존재했어야 한다는 공동체의 소망. 이는 광범위하게 일어난 친일을 들추느니보다는 우리 역사의 예외적인 긍정적 빛을 기억하자는 ‘망각-기억’의 기획으로 교육적 실천 곳곳에 반영돼 갔다. 이에 따라 윤동주를 기억하는 방식은 시 세계의 본령에 대한 충실한 귀납보다는 우리 역사의 윤리적 차원을 선명하게 증명해 가는 방향에서 취해지게 된다. 윤동주는 우리 근대사를 대표하는 저항시인의 표상으로 창안되고 유통된 것이다.

영화 ‘동주’에서의 윤동주(강하늘·왼쪽)와 송몽규(박정민).


윤동주 탄생 100주년은 그를 저항시인의 틀에서 꺼내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가 진실로 지향했던 ‘사랑’과 ‘부끄럼’이라는 인류 보편의 윤리적 가치와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저항’이라는 실존적 행위를 함께 기억해가야 한다. 그를 그렇게 폭넓게 인식하는 지평에서 우리는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를 자기발견의 계기로 삼은 시인의 투명한 시선과 언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그의 시선과 언어는 자기성찰보다는 자기도취로 종종 기울어지는 현대인의 영혼을 깨우치고 항체를 제공하는 맑은 자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윤동주는 좁은 의미의 저항 텍스트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예술적 차원에서 극적 생애와 죽음을 결속하면서, 항구적인 ‘보편적 인류애’의 매혹적 텍스트로 기억되어갈 것이다.


◇‘일본 지성인들이 사랑하는 윤동주’ = 윤동주의 삶과 문학을 재인식하는 데는 일본 지성계의 움직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일본 도쿄(東京)의 릿쿄(立敎)대에서는 시인 윤동주를 추모하는 모임이 열렸다. 지난 2월 19일 일요일에 예배와 문화행사를 절묘하게 결합하여 열린 이 모임은 특별히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성대하게 치러졌다. 오래도록 이 모임을 주관해온 류시경 신부는 올해도 추도예배를 집전하였고, 문화행사에서는 많은 일본인이 윤동주 관련 노래와 연주, 낭송을 이어갔다. 심지어는 윤동주가 졸업한 연희전문학교의 교가와 응원가까지 소개되었다.


최근 일본에서는 ‘일본 지성인들이 사랑하는 윤동주’라는 단행본이 나올 정도로 지성계를 중심으로 윤동주에 대한 추모 열기가 자못 뜨겁다. 끝없는 망언을 되풀이하는 일본 정치인들에 비해 문학인들의 가슴이 먼저 윤동주라는 희생양을 매개로 열리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시인 스스로 희생을 당한 나라의 한복판에서 이러한 반성적 움직임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윤동주가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적 문제성과 세계적 보편성을 가진 시인으로 기억되어 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일본 도시샤대에 있는 윤동주 시비. 일본인들이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갖다 놓은 게 눈에 띈다. 손정순 시인 제공


◇북간도 용정 산(産) 언어 = 윤동주 생애의 출발지인 북간도는 그의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곳이다. 북간도는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故土)로서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가 어린 역사적 공간이다. 지금 이곳은 옌볜(延邊) 조선족 자치주로서, 19세기 후반부터 주로 관북 지역 사람들이 이주하여 건설한 곳이다. 선배시인 정지용은 “아아, 간도에 시와 애수와 같은 것이 발효하기 비롯한다면 윤동주와 같은 세대에서부텀이었고나!”라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판 ‘서(序)’에서 말함으로써, 윤동주의 시를 북간도와 관련지어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윤동주는 그의 대표작 ‘별 헤는 밤’에서 “어머님,/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라고 썼는데, 그렇게 윤동주에게 북간도는 어머니가 계신 모태의 땅이자 ‘또 다른 고향’을 불가피하게 상상하게 한 이산(離散)의 땅이기도 했다.


우리 근대사에서 북간도의 이미지는 대개 수난과 저항의 이중주로 특징지어진다. 가령 우리의 기억 속에 북간도는, 안수길 대하소설 ‘북간도’에 나타난 것처럼 민족의 각별한 수난과 저항의 형상으로 각인되어 있다. 안수길은 일제강점기 북간도로 생활 터전을 옮겨 거기서 얻은 체험을 나중에 대하소설로 썼지만, 윤동주는 북간도에서 태어나 자란 생래적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영혼에는 해란강과 일송정을 비롯한 북간도 풍경이 짙게 담겨 있다. 그래서 북간도는 윤동주를 길러낸 양도할 수 없는 우리의 땅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윤동주를 매개로 하는 공간 확장의 기억 단위에 대한 필요성을 생각하게 된다. 말하자면 그는 지금은 중국 땅이 되어버린 북간도에서 태어나, 지금의 북한(숭실중학교)과 남한(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일본에서 공부하다가 죽음을 맞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묻힌, 동아시아 전체에 걸친 공간 편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한중일(韓中日)에 모두 시비가 놓여 있는 유일한 시인일 터이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윤동주의 어린 시절 이름은 해환으로서 해, 달, 별이 그 형제들의 돌림자였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할 당시만 해도 ‘윤해환(尹海煥)’이라고 불렸다. ‘윤동주’는 은진중학에 진학하면서부터 쓴 이름인 셈이다. 고종사촌 형 송몽규는 3개월 먼저 나서 한 달 늦게 옥사하여 윤동주와 생과 사를 같이하였다. 동주와 동생 혜원, 일주는 명동에서 났고, 광주는 용정에서 났다.


윤동주가 다닌 명동소학교는 정주의 오산학교나 평양의 대성학교처럼 신민회의 영향력 아래 운영되었다. 윤동주의 외숙이었던 김약연이 교장으로 있었고 기독교 정신으로 운영되었다. 시베리아 교포 자제들까지 올 정도로 융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1920년 용정에 미션계인 은진중학, 명신여학교 등이 선 데다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그 기운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윤동주는 1931년 3월 25일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송몽규 등과 함께 명동에서 동쪽으로 10리가량 떨어진 대랍자의 관립한족소학교에 6학년으로 편입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10리 길을 걸어 통학했고, 1931년 늦가을 윤동주 집안은 용정으로 이사하였다. “네 용정 사투리”(유영, ‘창밖에 있거든 두드려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를 기억하는 어느 친우의 증언처럼, 윤동주의 삶과 언어는 이처럼 철저하게 북간도 용정 산(産)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로부터 윤동주의 ‘북간도-평양-서울-도쿄-교토(京都)’로 이어지는 평생에 걸친 학생 생활이 시작된다.


◇‘학생 윤동주’에서 ‘시인 윤동주’로 = 은진중학을 다니던 윤동주는 1935년 9월 평양의 미션계 숭실중학으로 옮긴다. ‘공상’이라는 작품은 1935년 10월 숭실중학의 교지 ‘숭실활천’에 발표되었다. 그는 1935년 12월에 동시 창작을 시작하여 ‘조개껍질’ 등을 썼는데, 연희전문학교 1학년 때까지 동시 창작을 계속하였다. 윤동주는 숭실 폐교 이전에 자퇴하여 1936년 4월 문익환과 함께 다시 북간도의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하였다. 광명 시절 윤동주는 많은 습작시를 창작하였다. 특별히 월간 어린이잡지 ‘카톨릭소년’에 다섯 편의 동시를 발표하였는데, ‘카톨릭소년’은 만주 연길교구에서 낸 것으로 용정에서 간행되었다. 1937년 광명중학을 졸업한 그는 1938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게 된다.


윤동주는 원한경 교장 재직 시에 연희전문에 입학하여 윤치호가 교장으로 부임한 후 졸업하였다. 유억겸, 손진태, 이양하, 최현배 등의 스승과 김삼불, 강처중, 허웅, 유영 등의 친우가 함께 학교에 있던 시절이었다. 졸업반이던 1941년 11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스스로 제목을 붙인 친필 책자에 19편의 시를 남겼는데, 이는 결국 해방 후에 세상 빛을 보게 되는 유고시집으로 남았다.


윤동주는 1942년 4월 2일 ‘히라누마 도오주(平沼東柱)’라는 이름으로 릿쿄대에 입학한다. 입학 결정 직후 쓴 ‘참회록’에서 부끄럼 자체를 부끄럼의 대상으로 삼을 정도로 창씨개명은 그 불가피성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진한 자책의 흔적을 남긴다. 그 해 10월 윤동주는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 영문과로 편입하였는데, 1943년 7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피체되어 1944년 6월 사상불온, 독립운동, 비일본 신민, 서구사상 농후 등의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거기서 다음해 2월 옥사하였다.


윤동주는 도쿄에서 ‘쉽게 씌어진 시’를 비롯한 다섯 편을 써서 연희전문 동기인 강처중에게 편지로 보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필적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24년 5개월 남짓한 동안 그는 이렇게 성숙한 시편들을 남기고 갔다. 이후 교토로 가서 잡혀 옥사하기까지는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니, 그는 20대 전반에 절창들을 쏟아놓고 시인으로서의 생을 마감한 진짜 ‘청년시인’인 셈이다. 그 점에서, 같은 20대에 죽었어도 이상(李箱)이나 김유정, 기형도 등이 20대 후반에 좋은 작품들을 쓴 것과 윤동주의 경우는 현저하게 대조된다. 결국 그는 1945년 2월 16일 운명하여 한 줌 재로 부친 품에 안겨 고향 땅 용정에 묻혔다. 북간도, 평양, 서울, 도쿄, 교토, 후쿠오카를 거쳐 다시 북간도로 회귀한 그의 삶과 죽음에 가족들은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글귀를 새겨 넣었다. 평생 ‘학생’이기만 했던 그가 비로소 ‘시인’으로 태어나는 기념비적 순간이 아닐 수 없다. 1946년 가을 ‘쉽게 씌어진 시’가 경향신문에 발표되었고, 친지들은 1948년 1월에 유고 30여 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펴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도 내지 못했던 윤동주는, 해방 이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앞으로 이 연재에서는 윤동주 문학이 지닌 항구성의 맥락과 근원을 세심하게 살피게 될 것이다.


* 유성호 


한양대 교수로 현대시와 비평, 시로 읽는 인문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한국교원대 등을 거쳐 2007년부터 한양대에서 지도·연구해 왔다. 

저서로 ‘한국 현대시의 형상과 논리’ ‘근대시의 모더니티와 종교적 상상력’ ‘움직이는 기억의 풍경들’ ‘다형 김현승 시 연구’ 등이 있다. 팔봉비평문학상, 김환태평론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 (2) 그는 ‘북간도 시인’으로 기억돼야 한다

용정에 있는 고향 집에서 치러진 윤동주의 장례식. 가운데 영정 사진의 오른쪽이 윤동주의 가족이다.

명동소학교 졸업사진.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윤동주다.


파평 윤씨 집안 증조부 윤재옥이 북간도로 삶의 터를 옮겼을 때는 우리 민족이 북간도로 이주하던 초창기였다. 초기 이주 세력 가운데 하나인 윤하현의 외아들 윤영석과 동만(東滿)의 대통령이라 불렸던 김약연의 누이 김용 사이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생래적인 ‘북간도 시인’이었다. 북간도와 관련 있는 근대 문인들 가령 염상섭, 유치환, 강경애, 서정주, 안수길 등이 타지에서 태어나 북간도로 이동해 잠시 살았던 것과는 달리, 윤동주는 북간도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고유한 이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사잇섬(間島)’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범박하게는 ‘만주(滿洲)’라고도 불렸던 북간도는 서구 열강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틈에서 일종의 중간자적 처지를 감당해야 했고, 북간도 사람들은 그 사이에 낀 채 온몸으로 수난을 견뎌야만 했다. 이렇게 볼 때 북간도는 자연스럽게 디아스포라(diaspora)의 형상을 띠게 되고, 결국 북간도는 윤동주처럼 ‘길 위’에서 살아간 비극적 운명들이 태어나고 자란 ‘디아스포라 땅’으로 성격화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윤동주의 북간도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 드러난 ‘만주 유토피아’ 곧 만주에서 새로운 낙원을 꿈꾸었던 기대 심리와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표현돼 나타났다. 그것은 민족수난사의 정점이자 현장으로서의 북간도 체험이었다. 이러한 북간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윤동주는 태어나고 자랐고 살았고 또 묻혔다. 그의 어린 시절 풍경을 아우 윤일주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 남매는 3남 1녀였다. 내 위로는 누님(혜원), 아래로 동생(광주)이 있다. 용정에서 난 동생 광주를 제외한 우리 남매들이 태어난 명동집은 마을에서도 돋보이는 큰 기와집이었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 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텃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 밖에는 30주(株)가량의 살구와 자두 과원, 동쪽 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우물가에서는 저만치 동북쪽 언덕 중턱에 교회당과 고목나무 위에 올려진 종각이 보였고, 그 건너편 동남쪽에는 이 마을에 어울리지 않도록 커 보이는 학교 건물과 주일학교 건물들이 보였다.”


우물과 학교와 교회로 둘러싸인 공간에 자리 잡은 윤동주의 집은 두 가지 의미를 암시해준다. 하나는 윤동주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윤동주 유고시집 초판 서문에서 정지용과 윤일주가 주고받은 대화에서도 ‘소지주’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한다. 이러한 경제적 상황은 그들이 꿈꾼 공동체를 실현 가능하게 한 물리적 밑거름이 됐고, 자녀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다. 그래서 실제로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 서울 연희전문, 일본의 릿쿄(立敎)대와 도시샤(同志社)대 등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고, 어렵지 않게 유년 시절 내내 잡지와 시집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점에서 윤동주의 평생은 ‘학생’으로서의 과정에 놓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고난받는 민족공동체’로서의 북간도


다른 하나는 윤동주 집이 북간도의 민족주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북간도 공동체는 기독교를 수용함으로써 수탈과 소외 속에서 ‘고난받는 민족공동체’를 상상하고 또 회복하려고 했다. 물론 윤동주가 태어나면서 그 나름대로 새로운 민족공동체의 구심을 구상해갈 수 있었겠지만, 어릴 때만 해도 그는 그곳이 여전히 소수집단에 그칠 수밖에 없었음을 선명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으로 들어가기 위해 처음으로 집을 떠나면서 북간도의 현실과 상황을 인지하게 된다.


숭실중학에 입학했지만 신사참배 문제로 곤경에 빠진 학교의 모습을 보고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인지한 후, 윤동주는 처음으로 ‘조선-북간도’의 지리학과 ‘제국-식민지’의 정치학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연희전문에 진학하기 위해 북간도를 다시 떠나면서 북간도 공동체의 역사적 처지를 뚜렷하게 알게 된다. 이처럼 평양과 서울에서 바라본 북간도야말로 디아스포라의 현실을 인식하게끔 해준 체험적 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1930년대 후반의 북간도는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의 현장이었고, 일본이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세워 ‘오족협화(五族協和)’를 외치며 대륙침략 정책을 펼쳐가던 공간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북간도는 일본이 만들어낸 ‘대동아공영권’의 핵심적 장(場)으로 인식됐다. 이러한 상황과 사정을 그가 평양과 서울에서 선명하게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일본 유학을 통해 ‘조선-북간도’를 다시 한 번 발견하는 현실인식을 가지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이 점, 윤동주가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별 헤는 밤’)라고 서울에서 쓴 것이나, “육첩방은 남의 나라”(‘쉽게 씌어진 시’)라고 일본의 심장 도쿄(東京)에서 쓴 것의 핵심적 의미를 새삼 알게 해준다.


고향이란 무릇 타관 또는 객지라는 타자를 체험 속에 거느릴 때 강한 영상으로 부각되는 실체일 것이다. 자신의 원형이 형성된 곳이기에 늘 추억과 그리움의 대상이 되지만, 또한 그곳은 자신의 한계를 만들어놓은 원죄 공간이기도 하다. 북간도는 그렇게 중층적으로 윤동주에게 다가왔다.


◇‘북간도 기독교’의 정신


윤동주가 다닌 명동소학교는 처음에 명동서숙으로 시작했다. 윤동주는 아홉 살 나이로 여기 입학했는데, 당시 이 학교는 이른바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소굴로 일제가 인식하고 있었다. 이 땅에서 윤동주는 4학년 때 ‘아이생활’이라는 잡지를 서울로부터 구독해 읽었고, 송몽규도 ‘어린이’를 즐겨 읽었다. 그들은 5학년이 되면서 ‘새 명동’이라는 등사판 월간 문예지를 만들기도 했다. 윤동주는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했고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명동에서 동쪽으로 10리가량 떨어진 대랍자의 관립한족소학교에 6학년으로 편입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별 헤는 밤’)이라는 구절은 이때의 경험을 투사한 것이다. 그들은 날마다 10리 길을 걸어 통학했고, 1931년 늦가을 윤동주 집안은 용정으로 이사했다.


북간도 기독교 정신은 그곳 출신의 구성원들이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 남긴 삶을 통해서도 귀납적으로 증명된다. 윤동주, 송몽규, 문재린, 문익환, 문동환, 송창근, 김재준, 안병무, 강원룡, 정대위, 나운규 등 많은 이가 북간도에서 자라나 교육을 받았다. 특별히 윤동주와 송몽규, 문익환, 문동환은 집안 대대로 공동체의 핵심 구성원이었고, 문익환과 문동환 형제의 아버지 문재린은 1896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태어나 네 살에 북간도 명동으로 이주해 평양신학교, 캐나다 임마누엘 신학교를 졸업한 근대 신학자였다. 또한 송창근은 명동중학과 광성중학에서 수학했고, 김재준은 1937년 3월부터 1940년 7월까지 용정 은진중학 교목으로 지내면서 신앙을 학생들에게 가르쳤으며, 강원룡과 안병무, 정대위, 나운규 등도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이들은 해방 이후 현대사를 통해 정신사적으로 큰 발자취를 남김으로써 북간도 기독교 정신을 역사에 깊이 새겼다. 북간도 기독교의 고유한 속성이자, 우리나라 주류 기독교가 보수적 복음주의에 침윤돼 나타난 맥락과는 전혀 다른 층위를 한국 근대사에서 보여준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또한 윤동주를 설명하는 데 빠져서는 안 될 ‘북간도’의 힘이자 후광이었다.


 ◇동아시아 전역에 걸친 빛과 그늘


용정에 있는 윤동주 묘비.


이처럼 윤동주의 시와 함께 북간도에서 그가 경험한 사건들을 기억하고 재구성하는 일은, 이제 문학적 의미를 넘어 외교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작업이 돼가고 있다. 이제 그곳은 중국 국경 너머의 땅이다. 두루 알다시피 중국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북간도에 관한 기억들을 자국 역사 속으로 편입해 동아시아 역사를 재구성해 가고 있다. 동북공정이란, 현재 중국 국경 안에서 이뤄진 모든 역사는 중국 역사이므로 고구려와 발해 또는 일제강점기의 만주 역사 또한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역사 프로젝트를 말한다.


이때 우리는 근래 들어 갑자기 세워진 윤동주 용정 생가의 표지석을 떠올리게 된다. 거기에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표현이 한글과 한자로 새겨져 있다. 중국이 강력하게 추진해온 동북공정의 결과이자, 윤동주의 삶과 문학을 중국의 그것으로 치환하려는 의도가 내재된 역사 오도(誤導)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이럴 경우 윤동주의 국적은 중국이 된다. 하지만 윤동주는 자신이 중국인이나 일본인과는 전혀 다른 조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국소녀들”과 “남의 나라”라는 심층적 표현이 가능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모든 시를 명백하게 한글로만 썼다. 표지석에 ‘한국 시인’이라고 표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저 ‘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한글로 쓰면 된다. 왜냐하면 윤동주는 오직 한글로만 시를 썼고, 그렇게 표기만 해도 그는 분명한 한국 시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새 정부의 외교부나 문화체육관광부의 노력이 강력하게 요청된다. 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어 윤동주가 중국 국적으로 표기되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 이제 윤동주와 북간도는 우리의 기억만을 투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게 됐다. 중국을 비롯한 일본, 북한과도 기억 투쟁을 해야 하는 대상이 돼버렸다. 그 점에서 ‘기억’은 곧 ‘정치’이자 ‘역사’가 된다.


이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애송되는 불멸의 시집이 됐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윤동주 관련 연구나 번역 혹은 시 읽기 모임이 연쇄적으로 생겨나고 있고, 최근에는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이 일본어로 완역되기도 했다. 그의 목숨을 거둬간 적국(敵國)의 심장에서, 그야말로 시를 통해 그들의 마음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윤동주의 핵심 사상인 평화와 부끄럼과 연민이 그들에게까지 감염된 역사적 사례일 것이다.


이처럼 윤동주는 지금의 중국 땅에서 태어나, 지금의 북한 땅에서 조국을 처음 발견하고, 지금의 일본 땅에서 죽어, 다시 지금의 중국 땅인 고향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그를 ‘북간도 시인’으로 기억해야 할 이유도, 그의 시적 태반이 북간도에 있다는 점 외에도, 그의 생애가 우리에게 던지는 이러한 동아시아 전역에 걸친 빛과 그늘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기도 하다.            


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 (3)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세 권의 시집


1941년 윤동주가 원고지에 정서해 간직했던 첫 번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발간되지는 않았다.

1948년 정음사에서 처음 발간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자필 원고에 이어 두 번째다.

1955년 정음사에서 재간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전체적으론 세 번째 판본이다.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왼쪽)와 정지용(오른쪽)이 만나는 장면. 그러나 둘이 생전에 만났다는 문헌적 증거는 없다. 다만 정지용과 윤동주는 일본 도시샤대 영문과 선후배였으며 해방 후에 정지용은 윤동주의 동기인 강처중을 통해 윤동주의 유고를 접했고, 시집 초판에 서문을 썼다.


◇ 정지용과 윤동주와 ‘카톨릭소년’


윤동주는 북간도에서 ‘카톨릭소년’에 동시를 몇 편 발표하였다. 시를 써두기만 하고 발표를 거의 안 했던 그로서는 이 잡지가 중요한 발표 지면이었던 셈이다. 이 잡지는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힘에 의해 일제강점기에 서울과 만주에서 발행되었는데, 이는 당시 만주 옌지(延吉)에 가톨릭 교구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대 영문과에 다니던 정지용은 1928년 7월 교토의 가와라마치(河原町) 성당에서 천주교 입교 의식으로 세례를 받았다. 영세명은 프란치스코였고, 중국식 표기인 방지거(方濟各)를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9년 휘문고보 영어교사로 돌아온 정지용은 천주교 종현(鍾峴) 성당 청년회 총무를 맡았다. 1933년에는 천주교 전국 5개 교구(옌지교구 포함) 연합으로 창간한 월간 ‘카톨릭청년’의 문예란 편집을 맡게 되었다. 편집위원은 윤형중 신부를 비롯하여 장면, 장발, 정지용으로 구성되었고, 주간은 이동구였다. 필진은 이병기, 정지용, 이상, 신석정, 이태준, 김기림, 김억, 조운, 유치환, 김동리, 박태원, 김소운, 이효상 등이었다.


정지용은 카톨릭청년 문예란에 이병기의 ‘조선어강좌’를 연재하였다.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상(李箱)의 시편을 처음 싣기도 했다. 처음에 그림과 숫자로만 시를 썼던 이상은, 이 지면에 이르러 처음으로 ‘꽃나무’ ‘이런 시(詩)’ 등 의젓한 한글 시편을 발표하였다. 비록 일제의 탄압으로 청년회가 해체되기는 했지만, 정지용의 신앙은 더욱 고양되어 1937년 성프란치스코회 재속(在俗) 회원으로 입회하기도 하였다. 이후 정지용은 서울 백동(혜화동) 성당에서 장면, 장발, 유홍렬, 한창우 등과 착의식에 참석하였는데, 한창우는 나중에 경향신문 사장이 되는 인물이다. 정지용은 일제 말기에 부천 소사로 이사하여 천주교 공소 신자로 신앙생활에 열중하였다.


바로 그 무렵 윤동주는 가톨릭 만주 옌지교구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의 애독자이자 투고자로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매체들에 의해 연결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정지용은 해방 후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초판(정음사, 1948년) 서(序)에서 윤동주의 신앙시 ‘십자가’를 정성스레 인용할 정도로, 두 사람은 신앙이라는 공통항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던 경향신문 주간도 물러나고, 이화여대 교수도 사퇴한 후 녹번동 한 초가에 은둔하다가 정지용은 홀연히 북으로 떠나갔다.


◇‘정지용시집’과 정음사와 윤동주


정지용과 윤동주는 도시샤대 영문과 선후배였지만 생전에 만난 적은 없다. 영화 ‘동주’에서는 윤동주가 정지용을 찾아갔을 때 정지용이 일본 유학을 권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윤동주가 정지용을 만났다는 문헌적 증거는 없다. 다만 해방 후에 정지용은 윤동주의 동기인 강처중을 통해 윤동주의 유고를 접하게 되었고, 시집 초판에 감동적인 서문을 씀으로써 도시샤대 선후배로서의 인연을 완성한다. 그리고 정지용의 월북 후 만들어진 윤동주 시집 재판은 ‘정지용시집’(시문학사, 1935년)의 배열을 그대로 따랐다. 북으로 간 강처중이 아니라, 시인의 아우인 윤일주와 후배인 정병욱의 편집 결과였다. 박용철에 의해 만들어진 정지용시집은 모두 5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 최근작, 2부 초기 시편, 3부 동요·동시, 4부 신앙시, 5부 산문시였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재판(정음사, 1955년 2월 16일) 역시 1부 자필시고, 2부 도쿄(東京) 시편, 3부 연대가 기입되지 않은 작품군(群), 4부 동요, 5부 산문으로 배열했다. 윤일주와 정병욱이 이 시집을 편집했을 때 정지용시집을 깊이 참고했으리라.


이 시집을 출간한 정음사(正音社)는 1928년에 국어학자인 외솔 최현배가 창설하여,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한글을 지키는 출판 활동을 벌여온 출판사이다. 정음사에서는 외솔의 ‘우리말본’을 비롯하여 1930년대에도 꾸준하게 한글 관련 책을 출간하였다. 바로 그 출판사에서, 일본 후쿠오카(福岡) 감옥에서 ‘사상불온, 독립운동’ 죄목으로 싸늘하게 옥사한 비극적 청년 시인의 유고시집이 출간된 것이다. 정음사 사장 최영해는 최현배의 아들로서, 양정고보와 연희전문 문과를 나왔고, 조선일보 출판부에 들어가 ‘소년’ 편집을 하기도 했고, ‘삼사문학’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 후 경향신문 부사장을 역임하였고, 정음사 사장을 지내면서 윤동주 유고시집을 출간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정지용과 강처중, 최영해, 한창우 등이 결속하여 윤동주의 유고 시편을 발표하고 시집을 발행하는 동선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가톨릭-연희전문-경향신문-정음사’의 동선과 그대로 겹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윤동주는 정지용시집을 소장하게 된 날짜를 1936년 3월 19일로 시집 내지에 감격적으로 기록하였다. 정지용 시는 윤동주뿐만 아니라 당대의 여러 후배 예컨대 신석정, 이상, 임화, 청록파 등에게 매우 보편적으로 감염된 어떤 수원(水源)이자 정전(正典) 역할을 했다. 마치 근대 초기에 시인들이 모두 김억의 번역 스타일을 따라 하자 춘원 이광수가 “전부 ‘오뇌의 무도’화(化) 하였다”고 말한 현상이 1930년대에 정지용 모방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특별히 윤동주에게는 정지용 영향의 흔적이 상대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난다. 말하자면 정지용시집은 윤동주 습작 시절의 교과서였던 셈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맥락


그런데 이 재판 시집은 사실 세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이다. 두루 알려져 있듯이 첫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윤동주가 연희전문 졸업반 때 자신의 시편 가운데 18편을 정선하고, 마지막에 1941년 11월 20일 날짜로 시집의 서시를 써서, 모두 19편으로 만들어 원고지에 정서해 묶은 것이다. 비록 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발간되지는 않았지만, 1941년 11∼12월에 완성된 윤동주 자선 친필 시고가 온전한 제목으로서의 첫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인 셈이다. 윤동주가 정병욱에게 준 이 원본 시고가 남아, 훗날 일반에게 공개되어 친필 전집의 자양이 된 것이다.


이어 1947년 2월 13일 경향신문에 정지용의 소개 글과 함께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詩’가 최초로 발표되었고, 1948년 1월에는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 서문과 강처중 발문과 유영의 추도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초판을 간행하였다. 말하자면 이것이 두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이다. 이 시집 표지는 파란색으로 더 유명하지만, 초간본 겉표지는 사실 갈색이었다. 정음사 대표 최영해의 장남인 최동식(전 고려대 화학과 교수)은 “윤동주의 3주기 추도식에 초간본을 헌정하려 했으나 제작이 늦어져 동대문시장에서 구한 벽지를 마분지에 입혀 표지를 꾸민 뒤 10권을 급하게 제본해 가져갔다”라고 증언한 바 있는데, 즉 벽지로 표지를 제본한 ‘갈색’ 시집 10권이 세상의 빛을 처음 본 윤동주의 최초 시집이었던 셈이다. 이후 한 달 정도 지난 1948년 3월에 초판본 1000부가 파란색 표지로 출간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이 시집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아니어야 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19편만 그 제목으로 출간하려 했던 윤동주의 뜻을 존중한다면, 시집 전체 제목은 ‘윤동주시집’ 정도로 하고 1부 19편을 원래 시집 제목으로, 그리고 나머지 12편을 다른 소제목을 달아 펴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밋밋하게 윤동주시집으로 했다면 대중들의 호응은 훨씬 덜했을 것이니, 윤동주 시집 제목은 역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운명을 타고난 셈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 세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이후 1948년 12월 누이 윤혜원이 윤동주의 습작 노트를 가지고 북간도에서 서울로 이주하였다. 1953년 7월 15일 정병욱이 ‘연희춘추’에 ‘고 윤동주 형의 추억’을 썼고, 1953년 9월에는 윤동주에 대한 최초 비평 ‘윤동주의 정신적 소묘’가 고석규에 의해 쓰였다. 1955년 2월에는 시인의 10주기를 기려 시 89편과 산문 4편을 엮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재판을 정음사에서 펴냈는데, 이때 초판본에 실렸던 정지용 서문과 강처중 발문은 제외되었다. 편집은 정병욱과 윤일주가 하고 표지화는 김환기가 담당했다. 이것이 세 번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이다. 앞에서 말한 정지용시집 편제를 따른 바로 그 시집이다. 그리고 1967년 2월에는 백철, 박두진, 문익환, 장덕순의 글을 책 말미에 추가 수록하고 판형을 바꾸어 새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대중 보급판이 완료된 셈이다. 이러한 텍스트의 역사 안으로 제국과 식민, 기억과 망각, 해방과 분단과 전쟁의 흔적이 흘러간다. 그 점에서 모든 텍스트는 역사적 산물이다. 우리가 텍스트의 맥락과 구성까지 면밀히 들여다보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습작과 완성작, 진정한 윤동주 정전을 위하여


윤동주는 명동소학교에 들어간 이후 죽을 때까지 학생 신분으로만 있었다. 학교도 여럿 다녔다. 그는 자신을 ‘시인’이라고 여기지 않았고, ‘학생’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견지하면서, 선행 명편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그 가운데 핵심이 되는 표현이나 사유에서 자신의 시적 좌표를 정성스레 찾아갔다. 마치 서양화 그리는 학생이 데생 연습을 반복하면서 어떤 상(像)을 그려가듯이, 윤동주는 선배들의 빛나는 성과에 힘입어 자신의 시상(詩想)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해간 것이다. 그 대상은 정지용, 김광섭, 이상, 백석, 이용악 등에 두루 걸쳐 있다. 특별히 정지용의 압도적 영향 아래 여러 편의 습작들을 써두었다.


그러나 윤동주는 자신이 마지막 정리한 친필 시고에서 정지용 모작들을 모두 뺌으로써, 그것들이 학생 시절 습작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하였다. 그러니까 윤동주가 남긴 노트의 습작들을 인용하면서 그가 엄선한 작품들과 등가적으로 처리하는 일은 적절치 않다. 심지어 그것을 예로 들어 윤동주 시의 결함이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전혀 온당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윤동주가 최종적으로 갈무리한 19편을 일단 윤동주 정선(精選)이라고 보아야 하고, 그 나머지는 섬세하게 실증적 위상을 따져 윤동주의 ‘습작’과 ‘완성작’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그가 오랜 습작기를 거쳐 진정한 ‘시인’에 이르게 된 과정을 온전하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          


https://youtu.be/fg6wGeaXf6M?si=r-PciCfS1AgDkjYW


https://youtu.be/AzrUSEjmBYc?si=lRnHSq2MfzwzWdZ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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