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이 환하다, 동호와 문재학
오랜만에 빈 고향집에 돌아왔다
빈터에 꽃을 심다가 허리를 폈다
깨복쟁이 친구 어머니가
감나무 아래 샘터에서 목욕을 하고 계신다
어머니와 친구는 오래전 흙이 되어
등목을 할 수 없다
나의 등과 친구 어머니 등에 손이 닿지 않는다
가만히 다시 내려다보니
내가 심은 꽃들이 등을 내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뼈만 남은 저 감나무 말벗이라도 되어야겠다
소설은 이렇게 현실을 반영한다 소설은 이렇게 현실을 더욱 깊이 반영한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는다 중학교 3학년 동호는 교련복을 입고 죽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중학생이 왜 교련복을 입었을까? 형의 교련복을 입은 것일까? 빨리 고등학생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여러번 읽었다 교련복을 입은 중학생 소년이 더욱 소설을 소설답게 만들었다
나는 오늘 사진 한 장을 보았다 2층 복도에 나란히 쓰러져 있는 교련복을 보았다 광주상고 1학년 안종필과 문재학이라고 씌여 있었다 5·18항쟁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인 문재학(사망 당시 16살)군이라고 씌여 있었다 ‘5·18 막내시민군’으로 불리는 문군은 초등학교 동창 양창근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김씨의(어머니 김길자(84)) 만류를 뿌리치고 시위에 참여했으며, 문군은 1980년 5월27일 계엄군의 옛 전남도청 진압작전 때 친구 안종필군과 함께 계엄군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라고 씌여 있었다
아, 좋은 소설은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나이를 한 살 줄였을 뿐인데 느낌이 이렇게 많이 달라지는구나! 중학생과 고등학생 그리고 소년과 청소년, 위대한 작품은 이렇게 태어나는 것이로구나!!
소년이 온다
동호는 중학교 3학년
중학생이
왜 교련복을 입고 있었을까?
혹시 형의 옷을 입었을까?
중학생은 교련 수업이 없는데...,
알고 보니
동호는
아니,
문재학은
고등학교 1학년 이었구나!
소설적 감동을 위해서
소설적 깊이를 위해서
고등학생을
중학생으로
살짝 바꾸어서
설정을 하였구나!
아, 그랬었구나!
아, 그렇게 되었던 것이었구나!
* 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동호는 중학교 3학년으로 나온다. 하지만 ‘5·18 막내시민군’으로 불리는 문재학은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광주상고 1학년 안종필과 문재학, 문재학의 초등학교 동창 양창근도 광주상고 1학년 이었을까(?)
https://youtu.be/IKWe7gjt3VQ?si=cmtUOME6M3QiLTOg
https://www.hani.co.kr/arti/area/honam/1162126.html
수정 2024-10-11 18:42
등록 2024-10-11 16:21
1980년 5월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작전 직후 노먼 소프 기자가 촬영한 안종필(앞)과 문재학군의 주검. 문군은 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이다. 문체부 옛전남도청복원추진단 제공
“한강 작가가 우리 재학이는 물론이고 5·18을 세계에 알리니 너무 감사하죠.”
11일 광주 5·18항쟁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인 문재학(사망 당시 16살)군의 어머니 김길자(84)씨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소식에 연신 “감사하다”고 표현했다. ‘5·18 막내시민군’으로 불리는 문군은 초등학교 동창 양창근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김씨의 만류를 뿌리치고 시위에 참여했다. 문군은 1980년 5월27일 계엄군의 옛 전남도청 진압작전 때 친구 안종필군과 함께 계엄군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김씨는 “한 작가가 소설을 쓰기 전 만나러 온 적이 있다”며 “그동안 5·18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광주가 노력했지만 큰 성과가 없던 상황에서 한 작가가 크게 도움을 주니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한 작가가 태어난 광주 북구 중흥동과 모교 효동초등학교는 축제 분위기였다. 한 작가는 1970년 광주 북구 중흥동에서 태어나 효동초를 다니다가 4학년 때 서울로 이사했다.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 효동초등학교 외벽에 11일 이 학교 출신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대형 펼침막이 걸려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효동초는 정문 인근 건물 벽에 가로 6.5m, 세로 3m 크기 대형 펼침막을 설치해 한 작가의 수상을 축하했다. 이날 오전에는 중앙일간지의 1면 기사를 갈무리해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작가의 수상 소식을 알리고 작품 세계를 알아보는 수업을 가졌다. 교직원들은 학생들이 어렵게 느끼는 5·18 등 국가폭력의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강택구 효동초 교장은 “한 작가의 수상 소식을 듣고 학생과 학부모, 교직원 모두 감격스러운 분위기”라며 “최근 학생들의 문해력이 떨어졌다는 보도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이번 수상을 통해 글이 가진 힘과 영향력을 학생들이 온전하게 느끼는 배움의 동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모교에서 도보로 5분쯤 걸리는 한 작가의 중흥동 생가터는 휴대전화 판매점이 들어서며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중흥동 주민들은 뿌듯하다고 했다. 허경무(60)씨는 “광주의 자랑이자 북구의 자랑이고 특히 중흥동의 자랑”이라며 “어린이들이 큰 자긍심을 갖는 계기가 되고 제2, 제3의 한강이 나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광주 북구청 외벽에도 ‘광주 북구 출신 소설가 한강 2024 노벨문학상 수상’이라고 써진 펼침막이 걸렸다.
5·18기념재단은 공간을 마련해 소설 ‘소년이 온다’의 본판, 10주년 기념판, 영문판 전시에 나섰다. 재단은 현재 서점마다 품절 현상이 이어지는 ‘소년이 온다’를 10여권 확보해 방문객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5·18재단은 보도자료를 내어 “1980년 5·18 광주를 넘고 전국을 넘어 과거 국가폭력의 역사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대단히 기쁜 일”이라며 “한강 작가, 관계자와 협의해 5·18 정신을 확산시킬 수 있는 활동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광주시도 광주문학관, 시립도서관 등에서 ‘시민과 함께 한강 읽기강연’ 등을 운영할 계획이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https://youtu.be/LbO2ENARsl8?si=lLccPbIvU-g03PPo
https://youtu.be/p8QvVCd28Wg?si=hCRNi_omyBOQhW61
https://youtu.be/dHJIekb9liA?si=Y82gXtl9ohKcr_o0
1988년 《문학사상》 신인발굴 당선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yeardo@naver.com
서른 살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다 왼쪽 가슴이 아팠다 남몰래 가슴을 안고 쓰러지는 들풀이었다 내려다보는 별들의 눈빛도 함께 붉어졌다 어머니는 보름달을 이고 징검다리 건너오셨고, 아버지는 평생 구들장만 짊어지셨다 달맞이꽃을 따라 가출을 하였다 선천성 심장병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비후성 심근증, 심장병과 25년 만에 첫 이별을 하였다 그러나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바다는 나를 이어도까지 실어다 주었다 30년 넘게 섬에서 이어도가 되어 홀로 깊이 살았다 나는 이제 겨우 돌아왔다 섬에서 꿈꾼 것들을 풀어놓는다 꿈속의 삶을 이 지상으로 옮겨놓는다 나에게는 꿈도 삶이고 삶도 꿈이다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 함께 길을 찾는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마지막 순례를 떠난다
1부 / 을사년 뱀사골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내 안에 섬들의 발이 있다
내 가슴속에 섬들의 발자국이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도가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주는 섬이 있다
나는 징검다리 같은 이어도가 된다
징은 아플수록
아름답게 운다
이어도에서 하늘만 보았다
이어도에서 바다만 보았다
하늘에서 징소리가 들린다
바다에서 징소리가 들린다
해가 낳은 징소리가
달빛 메아리로 여울진다
바다가 낳은 징소리가
숨비소리보다 깊은 물결로 퍼진다
정방폭포로 가는 사람들을 따라서
윤동주 시인과 함께 징을 찾아간다
득음을 위한 독공이 한창이다
사과나무 속에서
고려청자 굽는 소리 들린다
조선백자 깨뜨리는 소리 들린다
수없이 많은 사금파리들이 쌓인다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를 미리 빚어보고 구워보고 깎아본다
벚꽃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성질 급한 봄꽃들이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도
사과나무는 진득하니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만을 만들고 있다
울컥, 울혈을 토해내고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보았던 사람들, 이어도에서 하늘로 간다 죽어서도 하늘을 우러러본다 서천꽃밭으로 간다 버드나무 아래 우물에서, 동자들이 물을 길어와 꽃밭에 물을 주고 있다 숨결도 함께 주고 있다 서천꽃밭에서 꽃과 꽃씨를 챙겨 삼색 물을 건넌다
서천꽃밭을 나와 하늘에서 본다
소도였던 자리에 솟대가 세워져 있고, 마고할미가 살던 곳에 노고단이 있고, 단군이 내려왔던 곳에 참성단이 있고, 방사탑과 거욱대 위에 새와 돌이 있다
백두산도 보이고 지리산도 보이고 무등산도 보인다 한라산 백록담도 보이고 영실도 보인다 마라도와 가파도와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보인다
한반도 남쪽에는 수직으로 솟아오른 높은 건물들과 붉은 십자가들이 보인다 한반도 북쪽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동상이 미사일처럼 세워져 있다
윤동주 시인이 방학 때마다 타고 갔던, 고향 가는 철로가 기적소리처럼 펼쳐져 있다 강처중의 고향도 보이고 문익환의 고향도 보인다
하늘에서 다시 본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 중간쯤
바다 위에 공 하나 떠 있다
손을 뻗친 손바닥 자국들이
비치볼에 가득 찍혀 있다
높은 하늘에서 본다
미국과 소련이 질러대던
럭비공 하나 떠 있다
축구공 하나 떠 있다
군홧발로 함부로 차던
족구공 하나 떠 있다
더 높은 하늘에서 본다
미국이 상대선수를 바꾼다
미국과 중국이 야구를 한다
미국과 중국이 탁구를 한다
빠따로 수없이 얻어맞은
상처투성이 야구공 하나 있다
찌그러진 탁구공 하나 떠 있다
하늘에서 또다시 본다
알이 하나 있다
알이 움직이고 있다
알에서 깨어나고 있다
가장 소중한 꽃 한 송이 피어난다
고향집 바로 앞에
연어의 종착역 표지석이 있다
나는 연어가 되어
참으로 먼 길을 거슬러 돌아왔다
나도 이제 너를 만나
붉은 알을 낳아야만 한다
서귀포는 어디라도 문만 열면 태평양이다
서귀포혁신도시에서 중문관광단지까지*
이어도 길을 걷다가 태평양으로 간다
설문대할망의 막내아들을 만나러 간다
남극노인성이 유숙하는 이어도로 간다
바다에서 해(海)를 본다 물이 아프다
인간들의 욕망이 낳은 쓰레기들의 섬
썩지도 않는 플라스틱 욕망들의 얼굴,
바다 해(海) 글자를 더 자세히 본다
어머니가 보인다 어머니가 아프다
아픈 어머니에게 방사능 오염수까지 먹인다
태평양의 수평선이 트로이목마를 끌고 온다
북극곰의 신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바다와 하늘이 함께 뜨거워지고 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막내아들이
뜨거운 어머니 이마에 물수건을 올린다
유숙하던 노인성도 곁에서 돕는다
서천꽃밭 꽃감관도 불사화를 가져온다
용궁으로 가는 올레에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노랫소리 들려온다 하늘에는 서천꽃밭이 있고 땅에는 마고성이 있고 바다에는 이어도가 있다
어머니를 살리려고 노인성과 꽃감관도 떠나지 못한다
* 서귀포시에 도로명주소 ‘이어도로’가 있다
오랜만에 빈 고향집에 돌아왔다
빈터에 꽃을 심다가 허리를 폈다
깨복쟁이 친구 어머니가
감나무 아래 샘터에서 목욕을 하고 계신다
어머니와 친구는 오래전 흙이 되어
등목을 할 수 없다
나의 등과 친구 어머니 등에 손이 닿지 않는다
가만히 다시 내려다보니
내가 심은 꽃들이 등을 내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뼈만 남은 저 감나무 말벗이라도 되어야겠다
심우도(尋牛圖) 속으로 걸어간다 나의 흰 소는 보이지 않고 검은 소들이 있다
소들이 소나무 아래 모여 있다 멍에도 코뚜레도 없다 숲에서 뜯어먹은 풀을 되새김질하며 서로의 눈빛을 본다 서로의 등을 핥아주는 소도 있고 죽비처럼 꼬리로 엉덩이를 치는 소도 있다 새로 발견한 풀밭을 알려주는지 귓속말을 속삭이는 소도 있고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는 소도 있다
나도 소를 길렀다 나는 늘 길을 들이려고 했다 내가 기르는 소는 코뚜레를 하였고 멍에를 하고 쟁기질을 해야 했다 갱본에서 쉬는 동안에도 말뚝에 박혀 있어야 했다 나의 소는 소나무 그늘에서 쉬어보지 못했다
나는 흰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 생각만 하였다 소와 함께 놀아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가 소를 업어 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소들이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소는 걸어가면서도 텅텅텅 똥을 잘 싼다 풀을 먹고 자란 소들이 풀에게 밥을 준다 나도 소나무 그늘에 앉아 바다를 보다가 소들이 들어가는 숲으로 따라 들어간다
숲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찢는다 소나무가 없어져야 땅값이 오른다며 소나무를 죽이고 있다 그해 겨울의 숲처럼 숲은 온통 소나무 무덤이 된다
숲에 소나무가 없다 소들이 함께 모여서 쉴 곳이 없다 가시덤불 속에서 가시에 찔리며 소들이 서 있다
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렵게 새로 돋아나는 소나무 새싹에 콧김을 불어넣는다
나는 심우도(尋牛圖) 밖으로 나와 심우도(心牛圖)를 그린다
당신은 나에게 등을 보이고 떠나버린 등나무였다
등만 보이던 그 등나무가 오늘은 등꽃을 켜고 있다
다랑쉬에는 다랑쉬마을이 들어있다
오름은 움푹해진 백록담도 품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평생 달과 함께 살았다
집들이 모두 불타고 굴속으로 들어갈 때에도
달과 함께 가재쑥부쟁이와 시호꽃을 피웠다
사람들이 다랑쉬굴 안에서 연기가 된 뒤에도
달은 잊지 않고 찾아와 섬잔대와 송장꽃을 피웠다
무쇠솥과 항아리와 놋수저와 신발만 남기고
열한 명이 들려 나와 바다로 떠난 이후에는
더 이상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어둠 속에는 아홉 살 아이가 울고 있는데
벗겨진 신발 찾으러 들어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잠겨버린 어둠은 열리지 않는다
달이 찾아와 소리쳐 불러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곁에 있는 용눈이오름 아끈다랑쉬오름 높은오름
돛오름 둔지오름이 힘을 합쳐도 문을 열 수가 없다
남아있는 늙은 팽나무가 그저 바라볼 뿐
무너진 돌담도 집터도 우물터도 안으로 눈물 흘릴 뿐
달을 따라서 달의 고향으로 온 나도 그저
서로의 얼굴만 바라다볼 뿐
푸른 뱀이라고 했다
1905년
을사오적이 있었다
푸른 뱀이라고 했다
2025년
을사오적이 있었다
뱀은 이무기 됐을까
땅에 떨어진 이무기
용산에 살던 이무기
뱀사골로 가야 하나
우리들의 삼일 정신
아직 끝나지 않았다
2부 / 정방폭포
정방폭포에서 용의 숨비소리 들린다 용은 하늘에서도 살고 땅에서도 살고 바다에서도 산다 용이 다니는 길은 따로 있다 용오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용은 한라산 백록담으로 다시 내려온다 한라산 백록담 속으로 헤엄쳐 들어간 하늘과 함께, 오래도록 참았던 숨을 토해놓는다 한라산에서 땅 속으로, 바위 속으로 내려온 용이, 길게 숨비소리를 하얗게 토한다 용은 깊은 곳에서 어둠을 먹고 산다 용도 어둠을 먹어야 날아오를 수 있다 용도 이무기도, 뱀도 지렁이도 어둠이 밥이다
정방폭포 위에 서복전시관이 있고 서복불로초공원이 있다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구하려고왔다 돌아갔다고 한다
정방폭포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놓고
서복 일행은 서쪽으로, 서쪽 어딘가로 돌아갔다고 한다
서귀포(西歸浦)는 남았는데 서복의 소식은 알 수가 없다
느닷없이 서천꽃밭으로 떠나버린 사람들도 소식이 없다
2023년 5월에 정방폭포 희생자 위령공간이 만들어졌다
서복불로초공원 한쪽 구석에 보일 듯 말 듯 숨겨져 있다
서귀포지역 최대 학살터였던 정방폭포에 글쎄 75년만에 겨우 희생자 위령공간이 우여곡절 끝에 조성되었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그 실체가 밝혀지기 위해서는 한 10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정방폭포 소남머리에서 나는 흑백사진을 본다 서복전시관 자리에 있었다는 전분공장과 창고들을 본다 그곳에 수용되었던 사람들 모두 바다로 떠나고 장방폭포와 소남머리를 배경으로 웃고 있는 이승만 흑백사진을 본다 나무도 없는 정방폭포를 본다
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왜 이렇게 되고야 말았을까
침대에서 책상까지 가기가
왜 이렇게 어렵게 되었을까
왜 이렇게 어렵게 되고야 말았을까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면
가야할 곳은 하나밖에 없는데
왜 나는 이렇게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침대는 언제부터 이렇게
나에게 깊은 수렁이었을까
책상까지만 갈 수 있으면
길이 보일 것만 같은데
나의 길이 보일 것만 같은데
왜 나의 등은 침대를 사랑하는 것일까
그럴수록 몸이 자꾸 식어서
이불이 나를 덮어주려고 하는데
내 몸 안의 발전소는 이제
더 이상 발전을 할 수 없는 발전소일까
풍력발전소도 태양광발전소도
밖에 있어야 발전을 할 수 있는데
바람 있는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데
태양 있는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데
침대에서 책상까지 가는 길이
왜 이렇게 날이 갈수록 멀어지는 것일까
서쪽으로 돌아간 서복을 따라서
서쪽으로 돌아간 해와 달은
어찌하여 다시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일까
사랑을 하면
잠을 못 자는데
왜 사람들은
자고 갈까요
자러 갈까요
라고
말하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정직하지 못하고
잠 핑계를 댈까요
나는 이제
사랑보다
잠이 더
좋은 것일까
사람들 말처럼
잠이
사랑인 것일까
나는 잠이 좋을까
사랑이 더 좋을까
잠은 꿈이 있어 좋고
사랑은 너 있어 좋다
나에게 잠은 무엇일까
나에게 너는 무엇일까
나에게 꿈은 무엇이고
나의 사랑은 무엇일까
나에게 사랑은 목숨이다
목숨을 걸어야 사랑이다
당신은 나의 길을 적시고
나는 그 길에서 젖어든다
당신의 손길로 뭉쳐진 나는
속절없이 당신 속으로 난다
나의 모든 사랑은 늘 그렇게
당신을 향해서만 날아간다
사랑은
나를 비틀어 짠
탕약 한 그릇이다
내가
당신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진액이다
나의 도가니와
뇌수에서 추출한
한 방울의 흰 피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랑 한 방울은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
정자 방출은
핵심 에너지의 낭비
정액 에너지를
명상 에너지나
좀 더 차원 높은
에너지로 승화하라
그것이 바로
종교의 핵심이다
쑥
독종이다
당신은 참으로 독종이다
당신은 한 번 살기로 작정하면
아무리 구박해도 소용이 없다
오죽했으면
쑥대밭이란 말이 생겼겠는가
제초제를 하지 않은 밭에서
대장은 독종, 쑥이 분명하다
나는 끝내 나를 비우고 너
독종과 함께 살기로 한다
독종은 제 몸을 갈아서 나에게
떡도 해주고 밥도 해주고 또한
쑥
독종이다
당신은 참으로 독종이다
당신은 같이 살기로 작정하면
아무리 구박해도 소용이 없다
오죽했으면
쑥대밭이란 말이 생겼겠는가
제초제를 하지 않은 밭에서
대장은 독종, 쑥이 분명하다
나는 끝내 나를 비우고 너
독종과 함께 살기로 한다
독종은 제 몸을 갈아서 나에게
떡도 해주고 밥도 해주고 또한
흑백사진을 본다
우리들에게는 흑백의 시대가 있었다
흑과 백과
회색의 시대가 거짓말처럼 있었다
정방폭포 상단이
앞마당으려 펼쳐진 창고들을 본다
그때는 모두가 감옥이었다
전분공장 주정공장 단추공장 창고들
학교 교실까지 모두가
감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뽕
오디만 먹던 내가
뽕잎을 먹고
비로소 나는 알았다
누에가 어떻게
그렇게 빛나는 실을
뽑아낼 수 있는지
뽕잎을 먹고
나는 비로소 알았다
비단결의 숨결을
나는 이제
오디 보다
뽕잎을 더 좋아한다
겨울을 앓는 친구가 있었다
겨울에는 통증이 심해서 따뜻한 곳에서 지내야만 한다고 했다 그런 희귀병이 있다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따뜻한 외국으로 가지 못하고 서귀포에서 겨울을 견디었다고 했다 봄에 서귀포를 떠나면서 어린 나무를 선물하고 갔다 라일락 이팝나무 포도나무, 친구가 좋아하는 나무라고 했다
나도 2차 심장수술 후에, 금속판막으로 바꾼 후에 몸이 많이 추워졌다 반팔에 반바지 입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내복까지 입어야만 한다
라일락은 이미 꽃을 피웠고 이팝나무는 아직은 꽃이 피지 않는다 포도나무는 참으로 멀리까지 손을 뻗고 있다 올해는 포도가 많이 열릴 것만 같다
나는 아직 포도나무를 잘 모른다 잘 아는 신휘 시인에게 물어보니 한 나무에 서른 송이 이상 달리면 포도가 잘 익지 않는다고 한다 서른살 먹은 포도나무들과 함께 산다는 신휘 시인은 포도순 따기와 포도알 솎기로 바쁘다고 한다
나는 서천꽃밭 입구에 있는 으름나무처럼 숲농법으로 기를 수 없을까 고민을 한다 검색해보니 방법이 있다 관행농법으로 기르면 20년 수확하고 뽑아내고 새로운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한다 자연농법으로 기르면 200년 300년 천 년을 키울 수 있다고 한다 농약도 하지 않고 비료도 주지 않고 그냥 두면 스스로 자란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핵심은 뿌리라고 한다
순을 따고 가지를 자르는 것은 뿌리를 자르는 것이라고 한다
나무는 위로 자라느 만큼 뿌리가 자란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머루포도라고 했는데
혹시 머루가 열리지나 않을까
나는 일단 지켜만 보기로 한다
포도송이가 좀 작으면 어떠랴
저 포도나무처럼
친구가 오래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원없이 세상을 누비면 푸르게 살 수 있으면 참 좋겠다
― 무등산과 무등이왓
무등산이 무등이왓으로 간다
무등을 타고 무등이왓으로 간다
입석대와 서석대는 정방폭포에 들러
수박령들 모시고 무등이왓으로 간다
동광 육거리 헛묘에도 둘러보고 간다
무등산 주상절리는 하늘로 떨어지는 폭포
정방폭포는 바다로 솟아나는 주상절리
하늘도 바다도 무등을 타고 춤을 추며 간다
우리는 누구라도 존재 자체로 귀한 사람들
누구라도 살아있는 자체가 눈부신 아름다움
정방폭포 수박령들 무등이왓 지박령들 만난다
무등이왓 입구 조릿대에 리본들이 펄럭인다
붉고 푸르고 노랗고 분홍의 마음들
집터에는 작물들만 해마다 기억을 되새긴다
자리 잡은 더덕 꽃이 열매를 낳는다
잘 익은 콩들이 똘망똘망 눈을 뜬다
공고판이 있던 자리에 메밀밭이 백비처럼 누워있다
밤마다 달은 달빛으로 비문을 새겼다가 다시 지우고
날마다 해는 햇빛으로 비문을 새겼다가 다시 지운다
통일의 첫걸음 이었다, 썼다가 지우는 메밀밭
잊지 말자고 그날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볕뉘라도 건져 올려 밥을 짓는 복조리의 마음
하늘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영혼들
지상에서 더욱 아름답게 살고픈 사람들
무등이왓이 무등산으로 간다
큰넓궤에서 잘 숙성된 고소리술을 들고 간다*
헛묘에 들렀다가 정방폭포에도 들러 무등산으로 간다
무등이왓이 무등을 타고 무등산으로 춤을 추며 가고 있다
* 제주도의 예술가들이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에서, 함께 조 농사를 지어, 그 조로 고소리술을 빚어, 큰넓궤에서 숙성시킨 후, 제주4·3민중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 10·19여순민중항쟁 등의 기념식에 쓸 제주로 보내고 있다
― 반야심경
엘리베이터 속에서 폭포 소리가 들린다
엘리베이터 속에서 정방 모습이 보인다
정방폭포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 다슬기처럼
한참을 멈추었다가 다시 올라간다
나를 끌어올리는 엘리베이터 로프도 보인다
나를 하늘로 인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수염이 아니라
기름이 잔뜩 발라진 검은 쇠줄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계단을 오른다
쇠줄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오른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스스로 올라간다
아파트 옥상에는 하늘타리꽃이 피어난다
별처럼 하얗게 피어나는 하늘타리 꽃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독송하고 있다
반야심경(半夜心經)을 염불하고 있다
깊은 밤의 마음을 뚫고 만다라가 핀다
붉게 핀 칸나의 꽃들은 합장을 하고
도라지꽃들은 묵언수행을 하고 있다
푸른 고추들의 얼굴에 붉은빛이 돌고
토란잎에 매달린 취우들의 눈빛이 맑다
흙의 가슴에서는 고구마 순의 상처에서
이제 막 뿌리를 만들며 어둠을 뚫는다
땅속에서 반야심경(半夜心經) 소리
하늘에서 반야심경(般若心經) 소리
마음속으로 반야반야(半夜般若) 소리
저 멀리 보이는 드림타워에서도
정방폭포 소리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밤을 알아야 낮을 알고
달을 알아야 해를 알고
어둠의 그림자를 알아야 빛이 보인다
나는 이제 반야에서 천천히 줄을 타고 내려온다
260자의 윤슬이 마음의 경전으로 빛난다
경전 속에서 바다는
파도를 불러 오도송(悟道頌) 하나 읊고 있다
― 다랑쉬
다랑쉬에는 다랑쉬마을이 들어있다
오름은 움푹해진 백록담도 품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평생 달과 함께 살았다
집들이 모두 불타고 굴속으로 들어갈 때에도
달과 함께 가재쑥부쟁이와 시호꽃을 피웠다
사람들이 다랑쉬굴 안에서 연기가 된 뒤에도
달은 잊지 않고 찾아와 섬잔대와 송장꽃을 피웠다
무쇠솥과 항아리와 놋수저와 신발만 남기고
열 한 명이 들려나와 바다로 떠난 이후에는
더 이상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어둠 속에는 아홉 살 아이가 울고 있는데
벗겨진 신발 찾으러 들어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잠겨버린 어둠은 열리지 않는다
달이 찾아와 소리쳐 불러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곁에 있는 용눈이오름 아끈다랑쉬오름 높은오름
돛오름 둔지오름이 힘을 합쳐도 문을 열 수가 없다
남아있는 늙은 팽나무가 그저 바라볼 뿐
무너진 돌담도 집터도 우물터도 안으로 눈물 흘릴 뿐
달을 따라서 달의 고향으로 온 나도 그저
서로의 얼굴만 바라다 볼 뿐
― 서시(序詩)
서른 살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다 왼쪽 가슴이 아팠다 남몰래 가슴을 안고 쓰러지는 들풀이었다 내려다보는 별들의 눈빛도 함께 붉어졌다 어머니는 보름달을 이고 징검다리 건너오셨고, 아버지는 평생 구들장만 짊어지셨다 달맞이꽃을 따라 가출을 하였다 선천성 심장병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나의 비밀은 첫 시집이 나오고서야 들통이 났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비후성 심근증, 심장병과 25년 만에 첫 이별을 하였다 그러나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바다는 나를 이어도까지 실어다 주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내 안에 섬들의 발이 있다
내 가슴속에 섬들의 발자국이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도가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주는 섬이 있다
나는 징검다리 같은 이어도가 된다
30년 넘게 섬에서 이어도가 되어 깊이 살았다
이어도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부처님도 만났고 예수님도 만났다 공자님도 만났고 소크라테스도 만났다 어머니도 만났고 아버지도 만났다 제주도 사람들도 만났고 여수 사람들도 만났다 고향사람들도 만났다 북간도 사람들도 만났고 북한 사람들도 만났다 제주도 사람들이 먼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정방폭포 위에 위령공간이 만들어졌다는 소문을 듣고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일전에 서복 선생님과 함께 다녀왔던 서복 전시관에 만들어졌다는 소문이 바람처럼 돌았다 정방폭포에서 온 사람들이 먼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윤동주 시인과 함께 나도 따라 나섰다 연어의 종착역에도 가고 백두산에도 가고 북간도에도 가고……, 긴 순례를 떠난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마지막 순례를 떠난다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보았던 사람들, 이어도에서 하늘로 간다 죽어서도 하늘을 우러러 본다 서천꽃밭으로 간다 버드나무 아래 우물에서, 동자들이 물을 길어와 꽃밭에 물을 주고 있다 숨결도 함께 주고 있다 서천꽃밭에서 꽃과 꽃씨를 챙겨 삼색 물을 건넌다
서천꽃밭을 나와 하늘에서 본다
소도였던 자리에 솟대가 세워져 있고, 마고할미가 살던 곳에 노고단이 있고, 단군이 내려왔던 곳에 참성단이 있고, 방사탑과 거욱대 위에 새와 돌이 있다
백두산도 보이고 지리산도 보이고 무등산도 보인다 한라산 백록담도 보이고 영실도 보인다 마라도와 가파도와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보인다
한반도 남쪽에는 수직으로 솟아오른 높은 건물들과 붉은 십자가들이 보인다 한반도 북쪽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동상이 미사일처럼 세워져 있다
윤동주 시인이 방학 때마다 타고 갔던, 고향 가는 철로가 기적소리처럼 펼쳐져 있다 강처중의 고향도 보이고 문익환의 고향도 보인다
하늘에서 다시 본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 중간쯤
바다 위에 공 하나 떠 있다
손을 뻗친 손바닥 자국들이
비치볼에 가득 찍혀 있다
높은 하늘에서 본다
미국과 소련이 질러대던
럭비공 하나 떠 있다
축구공 하나 떠 있다
군홧발로 함부로 차던
족구공 하나 떠 있다
더 높은 하늘에서 본다
미국이 상대선수를 바꾼다
미국과 중국이 야구를 한다
미국과 중국이 탁구를 한다
빠따로 수없이 얻어맞은
상처투성이 야구공 하나 있다
찌그러진 탁구공 하나 떠 있다
하늘에서 다시 본다
알이 하나 있다
알이 움직이고 있다
알에서 깨어나고 있다
가장 소중한 꽃 한 송이 피어난다
― 처음처럼
낮에는 꽃들이 촛불을 켜고
밤에는 별들이 촛불을 켠다
나의 심장에도 촛불을 켠다
평화공원에 누워있는
저 차가운 백비에
처음처럼
촛불의 이름을 새긴다
긴 잠에서 깨어나 목숨으로 만든 길 찾아간다
낮에는 꽃들이 심장을 켜고
밤에는 별들이 심장을 켠다
통일의 첫걸음을 찾아서
평화의 씨앗을 찾아서
봄의 어린 순교자를 찾아서
길에서 다시 피어난 애기동백과 함께 찾아간다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란다면
백비로 누워있는 저 메밀밭에서도
달빛처럼 부드럽게 붉은 피를 핥아야만 한다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깜짝깜짝
놀라며 굴속으로 숨어야만 했다
굴이 발각되어 한라산 오르는 길
밤새 내린 눈도 덮어주지 못했다
전분공장이나 단추공장으로 가서
정방폭포의 아우성으로 떨어졌다
지금도 정방폭포에는 빈 관이 많다
주상절리에 빈 관들이 세워져 있다
새하얀 무명천이 하늘에서 끝없이 내려온다
무명천 할머니께서 수의를 만들고 계시는지
만가(輓歌)처럼 베 짜는 소리도 함께 들린다
멀리, 목호(牧胡)들의 범섬까지 뚜렷하게 보인다
물빛과 무명천은 여전히 하얗고
발을 담그고 세수도 하였을 것만 같은 여울물소리
더 이상 발을 디딜 수 없는 노래는 비명(悲鳴)이 된다
길을 잃고 느닷없이 단애(斷崖) 아래로 떨어진 사람들
서귀, 중문, 남원, 안덕, 대정, 표선, 한라산 남쪽 사람들
태평양을 헤매다가 75년 만에 작은 집으로 돌아온다
불로장생을 꿈꾸며 불로초를 찾아왔던 서복이 머문 곳
지금도 대궐 같은 집에서 불로초를 가꾸고 있는 곳
불로초 공원에 만든 그 작은 공간으로 돌아오는 영혼들
타고난 제 삶도 끝까지 살지 못하고 벼락처럼 떠나버린
그 많은 정방폭포의 사람들
광풍에 느닷없이 길이 끊어져 허공에 발을 딛고
한꺼번에 바다로 추락해 버린 목숨들, 오늘도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바다에서 길을 찾고 있는 사람들
이어도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평화공원과
정방폭포를 둘러보고 무등이왓으로 간다
― 울음의 절창
정방폭포 암벽에 글자를 새겼다 세월이 지워버린 화두가 있었다
정방폭포 소리에 울음이 있었다 바람이 지워버린 눈물이 있었다
정방폭포 가슴에 무지개 피었다 득음의 독공소리 끊이지 않았다
서복 일행이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추사선생은 탁본을 하고 있었다
백조 한 마리 날아와 목을 풀었다 흑조 한 마리 날아와 몸을 풀었다
울혈을 토하고 절창을 하는 백조와 살풀이춤으로 길을 터주는 흑조
한라산을 기어서 내려오는 용 한 마리, 바다를 향해 용트림을 한다
정방폭포 위에서 베틀소리 들린다 비단과 무명과 삼베가 흩날린다
무명천 할머니 베틀 노래 부르며, 베를 짜서 수의를 만들어 날린다
정방폭포 아래서 웡이자랑 들린다 비설상 적시는 폭포수 흩날린다
정방폭포 주상절리에서 피아노 소리 들린다 둥둥 북소리도 들린다
삐그덕 탁탁 베틀소리에 깨어나 수의를 입는다 바다가 날개를 편다
저녁노을에 반짝이는 윤슬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하늘 가득 빛난다
온몸에 바느질자국 선명한 선인장 마을 무명천 할머니의 선창 소리와
북촌리 옴팡밭 순이삼촌, 거친오름 비설상 변병생 어머니 후렴소리에
정방폭포 수박령(水縛霊)들 함께 밤새 부르는 아, 울음의 절창(絶唱)
한라산에서 내려온 용 한 마리, 밤에도 쉬지 않고 베옷 입혀 흩날린다
쏴아아 쏴아아 쏴아아 오늘 밤에도 그날처럼 명령소리는 그치지 않고
으아아 으아아 으아아 오늘 밤에도 그날처럼 비명소리가 나를 울린다
― 감옥
정방폭포 위에 감옥이 하나 있다
철창살로 만든 감옥이 하나 있다
깊은 밤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간다
스스로 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근다
정방폭포 감옥에서 책을 읽는다
달빛에 어리는 동백꽃을 읽는다
동백꽃이 진다고 슬퍼하지 마라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낳는다
유채꽃을 노래하던 사람들에게
동백꽃 이름표를 달아주는 4월
동백꽃이 지면 지상에 피었다가
동백의 푸른 열매들로 익어간다
나도 이제 동백꽃 이름표를 달고
마음이 몸이 될 때까지 스며든다
달빛이 정방폭포에 스며들고
별빛이 제주바다에 스며든다
깊은 밤 함께 깊어져서 밤이 되면
여울물소리와 함께 깊이 스며들면
감옥도 물과 함께 흘러가고 말리라
태평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 되리라
나도 감옥도 정방폭포로 쏟아진다
정방폭포 9
― 걸어가야겠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더 이상 가야 할 길이 없을 때, 한 걸음만 더 가보라고 말한다 더 이상 더 낮아질 수 없을 때, 더 이상 더 내려갈 수 없을 때, 한 걸음만 더 내려가라고 말한다 더 이상 더 기다릴 수 없을 때, 더 이상 더 깊어질 수 없을 때,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새로운 길은 열리고, 몸과 마음이 부서진 다음에야 겨우 날개는 돋아난다고 말한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며 물을 칭찬하지만 물의 옷까지 벗어야만 하늘에 닿을 수 있다고 말한다 구름이 되어 산타의 고향, 라플란드까지 가 보아야 순록의 심장소리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눈 속에 숨어있는 쥐의 심장소리까지 보고 들을 수 있는 큰회색올빼미의 눈과 귀, 청어 떼를 만난 범고래와 혹등고래의 숨소리, 한라산으로 내려오는 백록의 발자국소리, 봄의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지던 3월과, 봉화처럼 피어올라 한꺼번에 떨어지던 4월의 동백꽃, 조금만 더 가면 백두산의 평화에도 갈 수 있고 북간도의 고향에도 갈 수 있을 거라 말한다
우리들이 갈 수 있는 길 끝에서, 함께 손을 잡고, 한 걸음만 더 갈 수 있으면, 총에서도 꽃이 피는 아름다운 세상 만날 수 있을 거라 말한다 그렇게 정방폭포의 말하는 빛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다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깜짝깜짝
놀라며 굴속으로 숨어야만 했다
굴이 발각되어 한라산 오르는 길
밤새 내린 눈도 덮어주지 못했다
전분공장이나 단추공장으로 가서
정방폭포의 아우성으로 떨어졌다
지금도 정방폭포에는 빈 관이 많다
주상절리에 빈 관들이 세워져 있다
새하얀 무명천이 하늘에서 끝없이 내려온다
무명천 할머니께서 수의를 만들고 계시는지
만가(輓歌)처럼 베 짜는 소리도 함께 들린다
멀리, 목호(牧胡)들의 범섬까지 뚜렷하게 보인다
물빛과 무명천은 여전히 하얗고
발을 담그고 세수도 하였을 것만 같은 여울물소리
더 이상 발을 디딜 수 없는 노래는 비명(悲鳴)이 된다
길을 잃고 느닷없이 단애(斷崖) 아래로 떨어진 사람들
서귀, 중문, 남원, 안덕, 대정, 표선, 한라산 남쪽 사람들
태평양을 헤매다가 75년 만에 작은 집으로 돌아온다
불로장생을 꿈꾸며 불로초를 찾아왔던 서복이 머문 곳
지금도 대궐 같은 집에서 불로초를 가꾸고 있는 곳
불로초 공원에 만든 그 작은 공간으로 돌아오는 영혼들
타고난 제 삶도 끝까지 살지 못하고 벼락처럼 떠나버린
그 많은 정방폭포의 사람들
광풍에 느닷없이 길이 끊어져 허공에 발을 딛고
한꺼번에 바다로 추락해 버린 목숨들, 오늘도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바다에서 길을 찾고 있는 사람들
이어도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평화공원과
정방폭포를 둘러보고 무등이왓으로 간다
나는 폭포를 볼 때 위에서 먼저 본다
떨어지기 직전의 물의 마음을 본다
정방폭포를 쓰기 시작한다. 정방폭포 이전과 이후를 쓰기 시작한다. 보이는 것들의 이전과 보이는 것들의 이후를 쓰기 시작한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서 오래도록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오래도록 바라보고 메모를 하고 여러 각도에서 다시 바라보고 메모를 수정하고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드디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같은 것도 보는 시간에 따라서 달라진다. 기후 조건과 날씨 상태에 따라서 달라진다. 나는 결코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곳에서만 바라보지 않는다.
이번에 쓰기 시작하는 정방폭포도 그렇다. 나는 우선 정방폭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제주 4·3 당시에 정방폭포 절벽 위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들의 마음을 짐작해 본다. 지금은 서복불로초공원이 근사하게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수용소로 사용되었던 전분공장과 창고들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 내가 정방폭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서복 일행이 지나가면서 썼다는 "서복과지" 혹은 "서복과차"라는 글자를 찾아보고 싶어서였다. 본격적으로 정방폭포에 대하여 메모를 쓰기 시작한 것은 2023년 봄부터였다. 서귀포지역 최대 학살터였던 정방폭포에 5월에 겨우 희생자 위령공간이 우여곡절 끝에 조성되었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그 실체가 밝혀지기 위해서는 한 10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정방폭포는 대한민국 명승 제43호로 지정되었으며 정방폭포는 한라산 남쪽 최대의 4·3 학살터였다(명승 43호와 4·3, 우연일까). 정방폭포는 동양에서 유일하게 바다로 떨어지는 폭포이기도 하다. 정방폭포는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높이 23m의 작은 폭포에 머물지 않는다. 정방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은 어쩌면 한라산 백록담에서부터 출발하였을지도 모른다.
한라산을 내려와 서귀포 시내를 지나오는 동안 누군가가 뱉은 침도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도로가 지나가는 다리 아래로 흘러오면서 자동차 경적의 그림자도 씻고 내려온 물일지도 모른다. 또한 정방폭포 절벽을 기어올라오는 다슬기의 거친 숨소리도 섞여있을 것이다. 그렇게 바다에 다다른 물은 바다의 윤슬로 반짝이며 또다시 하늘로 올라가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늘로 올라간 윤슬은 구름으로 떠돌다가 다시 한라산 백록담으로 내려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정방폭포는 우리들의 모든 사람들의 숨소리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하여 나는 드디어 정방폭포를 쓰기 시작한다.
정방폭포는 천제연폭포, 천지연폭포와 더불어 제주도 3대 폭포라고 불린다. 높이 23m, 너비 8m에 깊이 5m에 달하며, 국내에선 유일한, 뭍에서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폭포다. 서귀포 시내에서 버스로 15분 거리에 있다. 입구의 매표소에서 표를 구매하고 소나무가 있는 계단을 따라 5분 정도 내려오면, 햇빛이 비쳐 은하수 빛깔로 변하는 정방폭포를 볼 수 있다. 멀리서도 시원한 폭포소리가 들리고, 폭포 양쪽으로 주상절리가 잘 발달한 수직 암벽도 볼 수 있다. 한라산에서 내려와 서귀포 시내를 관통하고, 바다 앞으로 하얗게 떨어지는 정방폭포의 모습은, 외국의 거대 폭포처럼 웅장하진 않지만, 자연과 조화롭게 어울리며 단정하게 떨어지는 모습이 전통 수묵화를 감상하는 느낌을 준다.
1995년 제주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국가 명승 제43호로 승격되었다.
정방폭포의 한쪽 석벽에는 '서불과차'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아주 먼 옛날 중국 진시황은 세상을 모두 자기의 손아귀에 넣고 권세를 누리며 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 그런데 그 부러울 것 없는 진시황에게도 어쩌지 못하는 고민이 있었으니, 그건 자신의 나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왕으로서의 위엄이나 왜적을 막아내는 장수로서의 용맹스러움은 나무랄 데 없었으나 점점 늙고 쇠약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음에 늘 진시황은 고민하였다.
늙지 않고 영생을 누리고 싶었던 진시황이 하루는 모든 신하를 불러 놓고 명을 내렸다. “이 세상에서 불로장생 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자가 없느냐?” 서불이라는 꽤 많은 신하는 진시황의 앞으로 나서서 또박또박 그 물음에 대답을 하였다. “소인이 듣기로는 저 동쪽 나라 작은 섬 영주라는 곳에는 영산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불로초가 있다고 합니다. 제가 그곳에 가서 그 불로초를 캐오겠습니다.”
자신의 큰 소원이 이루어지게 된 진시황은 서불이 원하는 동남동녀 각 500명을 뽑아주고, 큰 배와 먹을 것을 잔뜩 내려주었다. 동쪽의 거친 바다를 건너오던 서불 일행은 깊은 바닷속 큰 용을 만나 큰 위기를 맞으나 서불의 쩌렁쩌렁한 호령으로 금방 물리쳤다. 제주에 도착하자 서불은 데리고 온 동남동녀 500쌍에게 제주의 영산 한라산에 가서 불로초를 캐오라고 명한다. 동남동녀 500쌍은 한라산에서 불로초를 찾아 온 산을 헤매었지만 결국 불로초를 찾지 못하고, 한라산의 특이한 식물 시로미를 캔 뒤 정방폭포 서쪽 절벽에 ‘서불과지’라는 마애각을 남기고 서쪽으로 돌아갔다.
정방폭포 ‘소남머리’는 4·3 당시 정보과에서 취조받은 주민들 중, 즉결처형 대상자들 대부분이 희생당한 곳이기도 하다. 흔히 정방폭포에서 희생당했다고 하는 희생자 대부분이 정방폭포 상단과 이어지는 이곳에서 총살당했다. ‘소남머리’는 동산에 소나무가 많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서귀중학교 학생이었던 송세종 씨는 "그때 당시 어디 여자인지는 모르지만, 도망가다가 절벽으로 떨어졌는데 노송에 걸렸어. 그 여자가 임신을 하고 있었지. 떨어지니까 군인들이, 이건 하늘이 도운 사람이라 해가지고 살려줬어. 사람 두 번 죽인다는 것이 없으니까. 나도 직접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이라고 회고했다. 서귀리 및 서귀면, 중문면 일대뿐만 아니라 남원면, 안덕면, 대정면, 표선면 주민에 이르기까지, 정방폭포 희생자들은 산남 지역 전체에 이른다. <출처: 제주 4·3 연구소, 「4·3 유적 Ⅱ」(2008)>
산은 바다의 지붕 위에 떠 있고
바다는 산에서 내려온 물들의 집
수직은 수평 위에 서 있고
수평은 쓰러진 수직의 잔잔한 잠
산의 고향은 바다
바다의 고향은 산
하늘이 수직으로 떨어져
단애 아래 수평으로 걷는다
산은 바닥에서 다시 출발하고
바다는 또 하늘에서 내려온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목숨들
날아오르지 못하는 날개들
바닥이 너무 깊이 젖어
일어서지 못하는 수평선
허리 굽힌 윤슬이
툭, 어깨를 치며
손을 내민다
* 제주 4·3 당시 130여 가구가 거주한 무등이왓은 ‘잃어버린 마을’ 122곳 가운데 가장 큰 마을로, 조와 메밀, 콩 등을 재배했다. 1948년 11월 15일 토벌대가 무등이왓 마을을 진입해 주민 10명을 총살했으며, 21일에는 주민 3명을 총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동광리는 무등이왓(130여 가구)과 조수궤(10여 가구), 시장밧(3 가구), 간장리(10여 가구), 삼밧구석(45 가구) 등 5개 자연마을로 이뤄진 중산간 마을로 4·3 당시 최소한 172명이 희생됐으며, 인근에는 주민들이 피신 생활을 했던 큰넓궤가 있다.
― 파랑새를 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정방폭포 절벽에 파랑새가 살고 있다
절벽 중간쯤 움푹 파인 돌 틈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파랑새 두 마리
나는 보았다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
정방폭포 물소리의 커튼을 젖히고
힘차게 날아오르는 파랑새를 보았다
꿈인 듯 생시인 듯
밤하늘을 원 없이 날다가
돌아갈 때에는
물고기도 한 마리씩 물고 가는 파랑새들
집에 숨어있는 새끼들에게 주려는 듯
환하게 미소 지으며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정방폭포의 어둠을 먹고 자란 파랑새를 보았다
오래도록 숨어 살던 파랑새가 이제는
당당하게 새끼를 키우는 것을 비로소 보았다
정방폭포에서 태어난 파랑새는 이제 푸르다
한라산으로 날아간다 파랑새가 푸르게 난다
시로미를 입에 물고 한라산 위로 날아오른다
― 문만 열면 태평양이다
정방폭포 앞에서 태평양을 본다
정방폭포 위에서 태평양을 본다
한라산을 등지고 태평양을 본다
제주도는 어디라도 문만 열면 태평양이다
제주(濟州)라는 말은 너무 슬프다
덕판배를 타고 거친 해상을 누비던 탐라국이
이웃나라 고려의 벼슬자리에 눈이 멀면서
탐라국은 물 건너 하나의 작은 고을이 되었다
용불용설처럼 출륙금지령이 오래 지속되면서
덕판배는 사라지고 테우들만 명맥을 이었다
강력한 해상독립국가로 다시 돌아갈 것인가
큰 나라 눈치를 보며 목숨을 연명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가슴의 문만 열면 태평양인데
1946년 8월 1일,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었다
전라남도 제주군이 제주도(道)로 승격되었다
인디언의 땅을 점령한 미국이 눈독을 들였다
섬은 스스로 문을 열지 않으면 섬에 갇힌다
연대와 환대로 마음을 열어야 섬을 지킬 수 있다
덕판배가 판옥선이 되고 거북선이 되는 동안
제주도 사람들은 테우를 타고 멜잡이만 했다
더 늦기 전에 이제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태평양으로 가야만 한다
저 태평양을 보아라
파도가 파도의 등을 밀어주는 태평양을 보아라
바람이 바람을 안고 함께 가는 태평양을 보아라
토박이들이 먼저 이방인들을 안아주어야만 한다
현지인들이 먼저 이주민들을 품어주어야만 한다
연대하는 마음으로 환대하는 마음으로 대해야만
침략자들까지 감동하여 함께 하나가 될 수 있다
탐라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꼭 그래야만 한다
* 탐라국(현 제주도)은 삼국시대에 이르러 백제, 신라와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탐라국이 육지에 직접 예속되어 행정구역으로 편제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중엽인 1105년(숙종 10)부터다. 1271년(원종 12)에 삼별초(三別抄)가 제주도에 웅거 하면서 몽골에 마지막까지 항쟁을 벌이다가 1273년에 패한 후 제주도는 원나라의 직할지가 되어 목마장(牧馬場)이 설치된다. 원의 직할 지였던 까닭에 다른 곳보다도 몽골의 문화적인 영향이 컸으며, 대규모 목마의 흔적으로 환경에도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그 후 약 1세기 동안 제주도는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 소속이 여러 차례 바뀌는 복잡한 과정을 겪다가 1367년(공민왕 16)에 완전히 고려에 복속된다. 조선시대에 들어 1416년(태종 16)에 한라산을 경계로 북쪽에 제주목(濟州牧)을 두고, 남쪽의 동부에는 정의현(旌義縣), 서부에 대정현(大靜縣)을 설치하여 전라도에 소속시켜 조선시대 동안 유지된다. 1864년에 정의현과 대정현을 군으로 승격했으며,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23부제(府制)를 실시함에 따라 1895년에 제주부를 설치하여 정의군, 대정 군을 관할하도록 한다. 1896년에 다시 13 도제(道制) 실시로 전라남도 제주군, 정의군, 대정 군이 된다. 1914년에 시행된 군면 폐합 때 정의군, 대정 군과 완도군 추자면이 제주군에 병합되어 제주군은 제주도 전역을 관할하게 된다. 1915년에 도제(島制)를 실시하여 제주도라 했으며, 1946년에 비로소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제주도(濟州道)로 승격하고 북제주군 및 남제주군을 신설한다.
― 태평양으로 간다
은하수는 한라산으로 내려오고
한라산은 정방폭포로 내려오고
정방폭포는 태평양으로 내려간다
태평양은 가장 낮은 곳에 있다
태평양(太平洋)을 영어로는
퍼시픽 오션(Pacific Ocean)
아주 넓고 고요한 바다
평화로운 바다라고 한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시인이다
시인은 이름을 잘 짓는 사람이다
정방폭포에서 태평양으로 가는
한라산이 묻는다
은하수가 묻는다
일본에게 묻는다 미국에 묻는다
그대들은 평화로운 바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벌였던가요
우리들의 태평양에서
평화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던가
제주도는 어디라도
문만 열면 태평양이다
아니다
제주도는 알고 보면
태평양 그 자체의 몸이다
그리하여 태평양에서는
태평가를 함부로 부를 수 없다
― 태평양에 우리들의 얼굴이 있다
태평양에서 우리들의 얼굴을 보았다
거대한 플라스틱 쓰레기 섬을 보았다
사람들의 손자국과 발자국을 보았다
인류세는 이미 지층이 쌓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머니의 가슴에 총을 쏘고 아버지의
머리에 총을 쏘았고 지구의 몸에도 원자폭탄을
새겨놓았다 우리는 우리들의 가슴에 총을 쏘았다
제주도에서 학살이 일어나던 그 시기부터
우리의 지구는 급격하게 뜨거워졌다
지구는 심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가슴에만 울분이 쌓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들의 지구는 죽어가고 있다
우리들은 이제라도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해야만,
자, 이제 우리들의 가슴에도 평화의 나무를 심고 가꾸자
상처 깊은 어머니의 가슴에도 사랑의 나무를 심고 가꾸자
인류세에서 다시 자연의 지질시대로 돌려놓아야만 하리라
― 쓰레기 섬이 하는 말
은하수에서 한라산으로
한라산에서 정방폭포로
정방폭포에서 태평양으로 간다
일본의 해안에서는 아직도
원자폭탄 냄새가 흘러나오고
원자력발전소에서는 핵 오염수를 방출하고 있다
하와이를 지나 캘리포니아로 가는데
거대한 쓰레기 섬이 나를 붙잡고
제주도의 사연과 어머니의 상처에 대하여 말한다
― 바다에서
바다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
식물도 동물도 모두 바다에서 태어났다
하물며 제주섬도 바다에서 태어났다
바다에서 태어나서 육지로 올라온 생명들
육지로 올라온 동물과 육지로 올라온 식물들
환경이 변하면 그 환경에 적응하며 몸을 바꾼다
환경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류세가 환경변화를 가속화시켜서
식물과 동물들이 적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상은 상생하는 생명들만 살아남는다
나는 이제 누구와 함께 공생할 수 있을까
제비나비와 제주꼬마팔랑나비가 꽃을 찾고 있다
바다에서 글쎄
청띠제비나비와 왕자팔랑나비가 알 낳을 자리를 찾고 있다
― 뼈에는 바다가 있다
바다는 생명의 고향
우리는 몸속에 바다를 품고 있다
등뼈에서 바다의 파도소리 들린다
우리들의 먼 조상은 바다에서 살았다
바다에서 강으로 올라왔다
강에는 칼슘도 없었고 망간도 없었고 인도 없었다
강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바다가 필요했다
민물고기는 몸속에 바다의 등뼈를 만들었다
지느러미는 네 개의 다리가 되었고
심장과 허파를 보호하려고 갈비뼈를 만들었다
이크티오스테가는 서서히 육지로 올라왔고
바다에서 강으로 강에서 지상으로 상륙했다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 그리고 인간
몸 안에 바다를 품고 있는 인간
태아를 기르는 바다
자궁은 몸 안에 품고 있는 바다가 분명하다
― 식물과 동물의 공존
공생관계의 식물과 동물은 살아남고
이기적인 독불장군은 살아남을 수 없다
삼첩기, 쥐라기, 백악기를 살아남았던 공룡
키 큰 나무를 따라서 공룡의 키도 자라났다
몸길이가 27미터나 되었던 바로 사우루스
높은 나무의 나뭇잎을 먹기 위해서 키가 자랐다
공룡의 엄청난 식욕은 산림을 황폐화시켰다
초식성 공룡을 잡아먹는 육식성 공룡도 출현했다
공룡이 공룡을 잡아먹고살았다 숲이 사라지고
공룡은 멸종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우리들의 숲이 사라지면 사람들도 멸종되고 말리라
꽃이 피는 현화식물의 탄생으로 공룡이 멸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속씨식물들은
겉씨식물처럼 키가 크지 않아도 된다
꽃으로 곤충을 유혹하여 씨를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곤충과 꽃의 상부상조가 속씨식물을 번식시켰고
키가 큰 겉씨식물이 줄어들어서 공룡들의 식량이 줄었다
포유류들도 식물과 공생관계를 유지하여 살아남았다
하지만 공룡들은 식물들을 뜯어먹기에 바빠서 결국 멸종되고 말았다
사람도 그러하리라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면 결국 죽고 말리라
― 해바라기
정방폭포, 화두 하나 붙들고 살다 보니
내 몸속에서 정방폭포 소리가 들린다
물길이 뚝 끊어지는 지점에 폭포는 있다
물과 허공이 만나면 폭포가 생겨난다
해바라기 하나 스스로 태어난다
친구도 없이 홀로 부지런히 키를 키운다
어느 날 바람이 불어 쓰러지고 만다
쓰러진 해바라기는 포기할 수 없어서
허리를 세우고 다시 해를 향해 다가간다
허리가 꺾인 해바라기는 끝내 꽃을 피운다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긴 해바라기는 겨드랑이에도
꽃을 피운다 머리가 무거워진 해바라기는
친구가 없던 해바라기는 스스로 많은 꽃을 피운다
해바라기 줄기는 하나인데 꽃들이 참 많다
머리가 무거워서 땅 가까이 내려가니
봉선화 친구들이 환하게 웃으며 맞이한다
― 해바라기 폭포
해바라기 몸속에서 폭포소리가 쏟아진다
가까이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물 흐르는 소리와 햇빛 흐르는 소리 들린다
해바라기들은 제 머리까지 해를 끌어내려
8월의 햇빛 폭포에 푸르게 샤워를 한다
해바라기 밭에서는 정방폭포 소리 들린다
해바라기들은 햇빛 폭포가 되어 더욱 푸르다
― 별꽃과 윤슬 꽃이 피어나는 나무
정방폭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
낮에는 햇빛이 쏟아져 바다에서 꽃이 피고
밤에는 바다의 숨결이 올라가 별꽃이 핀다
별빛과 윤슬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서
아무리 험한 절벽이어도 늘 오르내린다
햇빛과 달빛은 아낌없이 환하게 비춘다
정방폭포는 하루에 두 번씩 몸을 뒤집는데
거대한 나무줄기로 햇빛과 달빛이 흐르고
하늘과 바다에 별꽃과 윤슬 꽃이 피어난다
― 정방폭포에는 언제나
낮에는 할머니가 베를 짜고
밤에는 어머니가 베를 짠다
정방폭포는 쉬지 않고 베를 짠다
낮에는 햇빛으로 베를 짜고
밤에는 달빛으로 베를 짠다
정방폭포에는 늘 해와 달이 산다
낮에는 태평양으로 가고
밤에는 한란산으로 간다
정방폭포는 언제나 오르고 내린다
낮에는 무명천 할머니가 베를 짜고
밤에는 반월산 어머니가 베를 짠다
정방폭포에는 상처와 고향이 함께 있다
낮에는 피에타상과 마리아가 있고
밤에는 비설상과 웡이자랑이 있다
정방폭포에는 절규와 자장가소리가 있다
낮에는 이중섭의 서귀포 환상이 있고
밤에는 강요배의 지는 동백꽃이 있다
정방폭포에는 꽃이 피고 복숭아가 열린다
낮에는 순이 삼촌이 바다 밭을 일구고
밤에는 명준이 중립국으로 배를 타고 떠난다
정방폭포 앞에는 언제나 섶섬과 문섬이 있다
― 길 끝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
나는 언제나 길 끝에서
한걸음 더 내딛고 싶었다
한라산에서 먼 길을 돌아서
길 끝에 서서 바라본다
섶섬과 문섬 사이로 용오름이 오르고
더 먼 곳에서 무지개가 떠오른다
발 밑의 절벽이 무서워서 망설이고 있는데
한라산에서 뒤따라온 바람이 등을 힘차게 밀어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드디어 태평양이 되어있다
― 절벽과 사다리
정방폭포 아래 사는 무태장어에게는
오를 수 없는 절벽이지만
절벽을 기어오르는 다슬기에게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징검다리 사다리다
정방폭포 아래에서 오래도록 꿈을 꾸는
이무기는 언젠가는 승천할 수 있지만
정방폭포 위에서 꿈을 포기한
다슬기는 끝내 떨어져서 죽고 말리라
멀리 보이는 수평선도
건널 수 없는 한계라고 생각하면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 되지만
덕판배라도 타고 나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태평양을 가슴에 품은 큰 사람이 되리라
관다발을 타고 오르내리는
햇빛과 물이 돌아보면 서귀포는 언제나
문만 열면 태평양의 가슴으로 활짝 열린다
서귀포의 감귤나무들이 태평양의 바람을 품는다
― 하얗게 지퍼를 내린다
정방폭포가 하얗게 지퍼를 내린다
정방폭포에 백발거사가 살고 있다
문만 열면 태평양인 서귀포
정방폭포가 남대문을 연다
지퍼를 내리고 오줌을 싼다
발이 젖는 늙은이가 되었다
요즘에는 서서 싸지 않는다
남자도 집에서 앉아서 싼다
한라산에 누워있던 설문대
너무 오래 입은 옷이 낡았다
앉기만 해도 엉덩이 보인다
할망의 오줌발은 힘이 세다
남자보다 여자가 힘이 좋다
하르방보다 할망이 더 세다
바람이 분다 하얗게 지퍼를 내린다
수직으로 쏟아지던 폭포가 날아간다
하얀 수직이 푸른 수평으로 날개를 편다
바람은 백발거사를 푸르게 춤추게 한다
― 길 끝에서 날개를 편다
길 끝에서 하늘을 본다
길 끝에서 당신을 본다
길 끝에서 날개를 편다
길 끝에서 앞으로 갈까
길 끝에서 뒤돌아 갈까
길 끝에서 멈추어 설까
나무의 길 끝에서 잎이 핀다
나무의 길 끝에서 꽃이 핀다
나무의 길 끝에서 나비 난다
길 끝에서 바다를 본다
길 끝에서 힘차게 뛴다
길 끝에서 날개를 편다
너에게 날아가는 나비 한 마리
태평양을 건너가는 길을 만든다
나는 드디어 너의 하늘에 안긴다
정방폭포에서는
너에게 갈 수 있는 길이 보인다
너의 푸른 하늘이 환하게 보인다
― 정신없이 쓰다 보니 정리가 필요하다
정신없이 쓰다 보니 너무 어질러져 있다
이제는 정리가 필요하다
정방폭포도 이제 태풍에 대비를 해야 한다
백발거사의 머리칼이 태풍에 휘날릴 것이다
식물의 언어와 동물의 언어와 폭포의 언어를
나는 이제 조금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꽃은 벌과 나비와 나방과 잠자리를 부르는
식물의 언어
세상을 둘러보니
벌레는 어디에도 없다
다양한 곤충들이 있을 뿐
벌레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하늘에서 불을 훔친 것은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식물이다
식물들은
물과 햇빛만 있으면 살 수 있다
식물들의 과학은
인간보다 훨씬 더 앞서간다
맹물로 가는 자동차를
식물들은 처음부터 타고 다녔다
식물들은 누구라도 광합성을 하는데
인간은 아직까지
광합성 인간으로 진화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스스로
지구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
정방폭포 위에서
다시 한번 정방폭포를 본다
아니,
저 먼 곳에서 정방폭포를 다시 본다
내가 살았던 이어도에는 서복 선생님도 함께 살고 계셨다
진시황제처럼 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상머슴이 되셨다
이어도는 하늘에도 있고 바다에도 있고 수중에도 있었다
천국에도 있고 연옥에도 있고 지옥에도 있는 공화국이었다
이어도 사람들은 서복 선생님과 서귀포 이야기를 자주 했다
서귀포에서 가져온 불로초 씨앗으로 서천꽃밭도 만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서복 선생의 꿈
나는 그런 꿈속에서 오십육 년 넘도록 살다가 산책을 나왔다
서복 선생님께서 정방폭포에 쓰셨다는 서불과지(徐市過之)
그 멀고도 아름다운 전설의 길을 따라서 걸어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꼭 필요한 것들만 챙겨서 정방폭포로 간다
서복(徐福), 또는 서불(徐巿)은 전국시대 진(秦) 나라의 인물. 자는 군방(君房), 서불(徐巿)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제(齊) 나라 사람이다. 기원전 219년, 방사로 진시황에게 중용되었고, 이후 명령을 받아 어린 남녀 수천 명을 데리고 동쪽으로 불로초를 구하러 갔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서복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사마천 사기의 진시황본기뿐만 아니라 사기의 '회남형산열전', 진수의 정사 삼국지, 후한서 등에 나온다. 기록에 따르면 서복은 중국을 떠나 단주(亶洲) 또는 이주(夷洲)에 도달하였다고 나오는데, 중국에서 이주(夷洲)는 지금의 타이완을, 단주(亶洲)는 일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또한 서복은 처음부터 불로초를 찾을 수 없음을 알고 아예 진시황의 손아귀를 벗어나 자기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일부러 용왕의 명을 빙자하여 어린 남녀 수천 명과 각종 기술자들을 요구하여 데리고 떠났으며, 동쪽 어느 섬에 자기의 왕국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동쪽으로 간 이후의 행방에 대한 전설로는 그가 일본, 대만 또는 제주도에 도달하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서복에 관한 전승은 동아시아 해안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베링 해협을 건너 알래스카, 즉 아메리카에 도달했다는 전설도 있다.
서복이 다녀갔다는 의미의 서불과차(徐市過此) 혹은 서불과지(徐巿過之)는 글자가 서귀포시 정방폭포 옆에 새겨져 있다. 이 글자 자체는 2000년대 초에 중국인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 주변 정리 사업을 할 때 새긴 것이며 원래는 폭포 절벽 어딘가에 새겨져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2011년에 서귀포에서 글자를 찾아보겠다고 폭포 주변을 정밀 탐색했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설문대하르방이 보고 싶었다
설문대할망의 남편이 보고 싶었다
오백장군의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꿈속에서도 하르방을 찾아다녔다
한라산 백록담에서부터 내려왔다
애이리 내 주변에 소나무들이 많다
나무들이 문섬과 섶섬을 보고 있다
조용하던 물소리가 갑자기 커진다
느닷없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바다로 나가서 한라산을 바라보니
설문대할망이 엉덩이를 까고 앉아
아, 시원하게 오줌을 누고 있구나!
설문대하르방은 언제 볼 수 있을까
여름 장마가 시작되었다
예부터 정방하폭(正房夏瀑)이라 하였다
<4.3과 평화> 표지에서도
정방폭포 물소리가 들린다
안쪽은 옛날 소리에 젖는다
전분공장, 단추공장, 창고들
물보라가 전분가루처럼 흩날린다
햇빛을 받으니 단추처럼 반짝인다
물줄기가 갑자기 삼베로 펄럭인다
무명천으로, 날아가버린 턱을 감싼다
무명천 할머니가 무명천을 풀고
무지개를 타고 창을 하기 시작한다
섶섬이 고수인지 문섬이 명창인지
득음한 목소리에 쩌렁쩌렁 울린다
정방폭포는 역시 여름이 제철이다
정방폭포는 대한민국 명승 제43호로 지정되었다
정방폭포는 한라산 남쪽 최대의 사삼 학살터였다
너븐숭이 순이 삼촌 목소리가 여기서도 들린다
순이 삼촌 소설이 창작오페라로 꽃을 피우는 동안
정방폭포 영령들은 이제 겨우 위령 공간 얻었네
절벽이 너무 높아서 아직도 올라오지 못하는 영혼들
아직도 바람처럼 파도처럼 허공을 떠돌고만 있네
사람들은 바다로 떨어지는 절경이라며 환호하지만
단추처럼 뚝, 떨어진 죽은 영혼들은 오늘도 눈물만,
정방폭포에 무지개가 자주 떠오르는 것은
그때 떨어져 죽은 영혼들이 다리를 놓는 소리
하늘로 올라가는 길에 자꾸 미끄러지는 흔적
울부짖으며 허우적거리며 토해놓는 붉은 울음
눈동자도 눈꺼풀도 모두 짓물러버린 피눈물
아,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깊은 무지개의 목소리
폭포를 만나려면 어디가 좋을까
상류에서 만나는 것이 좋을까
하류에서 만나는 것이 좋을까
우리 인생에서
꼭 한 번 만나야만 한다면
초반부에 만나는 것이 좋을까
후반부에 만나는 것이 좋을까
흐르기만 하는 물은 폭포를 보지 못한다
떨어지는 물만이 절벽을 볼 수 있다
한라산을 내려오며 보았던
작은 폭포들을 돌아보면서
정방폭포 위에 다다른 물줄기
문섬과 섶섬이 있는 태평양을 본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한 높이를 가늠하며
온 힘을 다하여 날개를 펼치고 뛰어내린다
* 정방폭포를 쓰기 위해서 현지답사, 자료 조사 및 메모를 시작합니다.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 서귀포라 하였는데
또다시 돌아왔으니 무엇이라 해야만 할까
정방폭포가 더 좋아서 또다시 돌아온 서복
정방폭포와 소남머리 사이에 집을 지었다네
전분공장과 단추공장이 있었던 자리에 글쎄
터를 잡고 아예 살림을 차리고 살아간다네
해방이 되고 3.1절 발포 사건이 일어나고
4.3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초토화 작전으로
단추공장과 전분공장으로 끌려간 사람들
정방폭포 아래로 눈물 떨어뜨려 죽일 때
‘서복과지’글씨에 매달린 영혼들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정방폭포로 돌아왔다네
가족들은 무서워서 시체도 찾아가지 못하여
동남동녀들과 영혼들과 함께 살림을 차렸다네
무서운 단추공장과 전분공장의 기억을 지우고
죽은 사람들과 함께 불로초를 기르며 살아가네
용왕님도 가끔 찾아와 머물고 가는 이곳에는
소나무 가지에 용왕님의 그림자가 걸려있고
하늘에는 남극성이 피고 땅에는 황근꽃이 뜨네
뼈아픈 고통도 억울함도 원망도 잘 익으면 저렇게
용 같은 소나무로 자라고 남극성으로 빛나고
노랗게 피어나는 무궁화, 황근꽃으로 떠오르는구나
정방폭포 위쪽 물에 발을 담그고
무섭게 떨어지는 폭포수를 본다
나도 함께 떨어질 것만 같아서
한 발짝 더 뒤로 물러선다
물러서서 먼바다를 본다
하늘과 바다가 닿아서 더욱 푸르다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왔으리라
너븐숭이 순이 삼촌도 왔으리라
선인장 마을 무명천 할머니도 왔고
이덕구도 김달삼도 이재수도 왔으리라
잃어버린 영혼의 몸을 찾고자 왔으리라
정방폭포 위에서 비로소 보인다
폭포는 절벽, 천길 낭떠러지로 보인다
한 때는 공장 앞마당이었던 빨래터
물가에는 이제 제법 큰 소나무도 자라고
숲이 자라도 그날의 아우성 덮을 수 없다
발가락이 간지러워서 문득 발을 내려다보니
절벽을 기어오른 다슬기가 발등으로 오르고 있다
폭포는 모두가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고
착각하지 마라
하느님이 보면
모두가 낮고
용왕님이 보면
모두가 높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이
더 낮은 곳으로 떨어지고
발목 아래로 흐르는 물이
더 깊은 곳으로 떨어진다
아스팔트 다리 위에는
오늘도 사람들이 지나가고
내일도 자전거가 지나가고
모레도 자동차가 지나가리라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폭포
바다보다 더 깊은 곳으로 떨어져
다시 한번 높이 솟아오르는 물소리
바다로 가는 물소리가 있다
바다로 가는 발소리가 있다
더 이상 디딜 바닥이 없을 때
우리는 모두 정방폭포가 된다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 낮은 곳으로 떨어져서
시체도 찾을 수 없는 영혼들이 있다
늘 낮은 곳에서만 사는 바다는
더 높은 곳을 꿈꾸며
날고 싶어서 날아보고 싶어서
오늘도 파도의 날개를 펼쳐본다
정방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은 어디에서 왔을까
한라산에서 출발을 하였으니
백록담에서 헤어진 물도 조금은 섞여 있으리라
미악산을 지나 애릿내를 지나왔으니
애기무덤들의 울음소리도 조금을 섞여 있으리라
복개천 서귀포 시내 지하로 흘러왔으니
서귀포의 어둠의 숨소리도 조금은 섞여 있으리라
자동차가 달리는 다리 아래로 흘러왔으니
자동차 바퀴소리의 그림자도 조금은 섞여 있으리라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다리 아래로 흘러왔으니
사람들의 발자국소리도 조금은 섞여 있으리라
내가 헛묘 속의 주인을 찾아서 여기까지 왔으니
나의 눈물도 조금은 섞여 있으리라
동광에 있는 임문숙 씨 가족과 김여숙 씨 가족의
헛묘에 묻혀있는 주인공들의 눈물도 섞여 있으리라
무등이왓에서 큰넓궤로, 볼레오름으로, 단추공장으로
소남머리로, 정방폭포로 걸어갔던 발자국도 있으리라
정방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속에는
어찌하여 그것들 뿐이겠는가
백록담에 잠시 머물렀던 물은
바다에서 하늘로 다시 올라간 구름이었으며
또다시 지상으로 내려온 빗물이 아니었던가
그 속에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당신이 언젠가 흘렸을 눈물도 조금은 섞여 있으리라
아, 그리하여 오늘은 이렇게 정방폭포로 떨어지고
바다의 윤슬로 반짝이며 서로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우리들은 함께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고 말리라
삼십 년 넘게 시를 썼지만 아직도 나는
나의 대표작이 없구나
나의 시의 농사는 이렇게 망하는 것일까
나도 나의 대표작 한 편 쓰려고
화두 하나를 잡았는데
이것이 바로 정방폭포로구나
하필 잡은 화두가
'이 뭣꼬'도 아니고 정방폭포라니
정방도 아니고 폭포도 아니고 정방폭포라니
차라리 나무라면
끝까지 붙들고 있으면 언젠가는 자라겠지만
하필 붙잡은 화두가 정방폭포라서
붙잡을수록 자꾸만 아래로 떨어지기만 하는구나
정방에 앉아서 참선이라도 하려 해도
자꾸만 떨어지는 폭포수에 마음까지 젖는구나
그래도 한 번 잡은 화두는 끝까지 잡아야만
무엇인가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나는 오늘도 정방폭포 속에서 살아간다
정방폭포 하나 붙들고 날아오를 꿈에 젖는다
하늘과 바다를 뻥 뚫고 빛 속으로 날개를 편다
발아래 길이 없어지는 순간
갑자기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구름다리도 없었고
무지개다리도 없었다
폭포수는 빛이 되어 날기 시작했다
환한 빛 속에 구슬들이 반짝였다
하늘빛 구슬과 폭포수빛 구슬과
바다빛 구슬이 반짝이며 떨어졌다
푸르고 하얗고 파아란 빛의 구슬들
폭포수뿐만 아니라 모든 풍경이
노을빛으로 변하여 펄럭이고 있다
그 노을빛 풍경 속에서
베 짜는 소리가 들린다
무명천 할머니께서 달빛처럼 운다
무명천 할머니의 절창이
새가 되어 날아간다
뒤늦게 수의 한 벌 얻어 입은 영혼들
베틀소리 절창에 날개를 달고
푸른 하늘로 올라가 별빛으로 반짝인다
제주도는 어디라도 한라산에서 내려온 물이 흐르고
서귀포는 어디라도 문만 열면 태평양이다
우리들은 어찌하여 한라산에서 만나 정방폭포로 왔을까
서귀면에서도 오고 중문면에서도 오고 안덕면에서도 오고
대정면에서도 오고 남원면에서도 오고 표선면에서도 오고
산남지역 사람들은 어찌하여 이렇게 모두 이곳으로 왔을까
한라산은 어찌하여 이렇게 태평양이 되었을까
제주도는 어찌하여 이렇게 태평양의 날개가 되었을까
정방폭포, 화두 하나 들고
행주좌와어묵동정으로 수행하니
나도 모르게 나는 정방폭포가 된다
폭포가 되어 깊이 바라보니
절벽을 기어오르는 다슬기들이 있다
큰 물에 떠내려간 저 다슬기들은
언제쯤 올라가 다리 아래서 쉴 수 있을까
폭포수가 되어 깊이 뒤돌아보니
서복 일행이 왔다가
내 몸 절벽에 '서복과차' 새기고
떠나간 그 옛날의 사람들도 생각이 나고
난리가 나서 많은 사람들이 끌려와
총을 맞고 붉은 피를 흘리며
나와 함께 떨어지던 비명소리도 들리고
동광 사람들이 찾아와서 시체를 찾지 못하고
영혼만 모셔가서
헛묘를 만들었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그 후로 온몸에 바느질 자국이 선명한
선인장 마을에서 왔다는 무명천 할머니가 와서
손수 만든 수의 한벌씩 입혀주던 생각도 나고
너븐숭이 옴팡밭에서 왔다는 순이 삼촌이
정방폭포 아래에서 뼈라도 찾아보겠다며
호미질을 하던 일도 생각이 나고
곁에 있던 단추공장과 전분공장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불로장생을 꿈꾸는 서복전시관이 들어서고
섶섬과 새섬과 문섬과 범섬을 지나
저 먼바다에서는 오늘도 윤슬로 반짝이고
나도 따라서 바다에서 돌아보면
나의 고향 같은 백록담이 보이고
더 먼 고향 같은 하늘도 보인다
나는 오늘도 정방폭포가 되어
걷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가만히 있어도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는 선이다
행주좌와 어목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무시선 무처선(無時禪 無處禪)
너는 어찌하여 나를 만날 수 없을까
너는 어찌하여 나를 만질 수 없을까
너는 어찌하여 나를 안을 수 없을까
나는 어찌하여 너를 만날 수 없을까
나는 어찌하여 너를 만질 수 없을까
나는 어찌하여 너를 안을 수 없을까
너와 나는 언젠가 꼭 만나야만 한다
너와 나는 언젠가 꼭 만져야만 한다
너와 나는 언젠가 꼭 안아야만 한다
너와 나는 우리가 되어야 꽃이 된다
너와 나는 우리가 되어야 밥이 된다
너와 나는 우리가 되어야 삶이 된다
함께 우리가 되기 위하여 내가 먼저
너에게 나를 꿈과 사랑으로 보낸다
행복으로 꽃피는 삶을 위하여 간다
나는 요즘 내 삶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길에서 나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서 찾고 있다. 한라산에서 내려온 물이 서귀포 시내의 복개천 안으로 흐르다가, 이제 잠시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이다가 마지막 다리 아래를 흐르고 있다. 머지않아 이 물은 더 이상 길이 없어질 것이다. 길 끝에서 허공에 발을 내딛어야만 할 것이다. 나의 삶도 이제는 그럴 것이다. 그동안 무난한 길을 걸어왔던 나는 이제 그 길 끝에 도달하고 말았다. 이제는 길 없는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3년만 근무하고 나오려고 했던 발전소에서 나는 벌써 36년 가까이 머뭇거리고 있다. 이제 얼마 후면 임금피크에 접어들고 2년 3개월 후에는 어쩔 수 없이 나와야만 한다. 나는 그동안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에 취해서 살았다. 삶의 의미를 깊이 깨닫지 못하고 월급의 마약에 취해서 정신없이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나의 지금 심정은 정방폭포 위에서 어떻게 날개를 펼쳐야만 바다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과연 나의 날개를 펼치고 날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과연 사랑하는 당신을 기어이 만날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중이다.
정방폭포 위에 감옥이 하나 있다. 쇠창살 안에서 달빛이 책을 읽고 있다. 나와 함께 책을 읽던 달빛이 뛰어내린다. 달빛이 부서지며 햇빛과 섞인다. 정방폭포 위에 있던 감옥도 함께 부서진다. 달빛과 햇빛과 윤슬이 만나 무지개를 만든다. 무지개 다리 위로 오늘이 환하게 웃는다. 무지개 다리를 건너가는 사람이 있다.
책을 읽다가 꿈을 꾸었다. 눈을 뜬 채로 꿈을 꾸었다. 바위 속에 숨어 있던 부처님께서 바위를 열고 피어났다. 나는 돌부처 몸에 피어난 지의류였다. 돌부처 아래 사는 밑들이벌이었다. 아니, 지의류에 숨어 사는 이끼개미귀신이었다. 아니다. 이끼개미귀신에 붙잡힌 돌좀이었다. 그러나 아, 이제 보인다. 섶섬 문섬 범섬이 보인다.
오늘도 나는 시를 생각한다. 오늘도 나는 너를 생각한다. 오늘도 나는 사랑을 생각한다. 시는 사랑이다.
마늘꽃
사람들은 당신의
꽃이 피기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마늘의
꽃이 필까봐서
마늘쫑 목을 친다
나는 마늘보다
마늘꽃이 더 좋다
나는 늘 기다린다
당신이 활짝 피어야
나는 더욱 환해진다
나의 사랑은 그렇다
우리들의 사랑은
그래야만 하리라
마늘꽃이 환하다
꽃과 사랑
꽃이 핀다
사랑하면 죽는다는데
그래도 사랑하고 싶다
오늘 해야 할 사랑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꽃이 진다
아니,
꽃이 사랑을 낳는다
아름다운 폐가
일찍 핀 꽃은 일찍 지고
늦게 핀 꽃은 늦게 진다
일찍 핀 매화 일찍 지고
늦게 핀 살구꽃 한창이다
일찍 피었다고 웃지 말고
늦게 피었다고 울지마라
나뭇가지에 빈 둥지 하나
아름다운 꽃대궐 환하다
봄물
나에게 봄물 오르니
만물이 꿈틀거린다
건조한 너의 마음에
단비로 적시고 싶다
뼈와 인대
조개 한 마리
뼈 사이에 조용히
부드러운 살을 내밀고 있다
위험을 감지한 조개 한 마리
부드러운 발을
뼈 속으로 숨기고
뼈를 꽉 다물어버린다
밖에서는 더 이상
조개의 문을 열 수 없다
양쪽에 붙어있는
하얀 인대가
뼈보다 힘이 더 쎄다
세상은
뼈가 아니라
인대가 움직인다
다시 백미러
앞으로 잘 가려면
뒤도 함께 보아야만 한다
백미러 속에 길과 산이 보인다
백미러 속에 강과 산이 보인다
백미러 속에 강산이 보인다
백미러 속에 이어도가 보인다
백미러 속에 그림자가 보인다
백미러 속으로 앞날이 보인다
앞으로 잘 가려면
앞만 보아서는 안 된다
앞으로 잘 가려면
뒤도 함께 보아야만 한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잘 뒤돌아 보아야만 한다
내가 걸어온 나의 길이
내가 걸어갈 나의 길을
뒤에서 잘 밀어줄 것이다
방황과 여행과 순례는 나에게
여행은 돌아올 곳을 여기에 두고 떠난다
방황은 돌아올 곳을 박차고 떠나 버린다
그리하여 여행이 끝나면
처음 있었던 곳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방황이 끝나면
나는 반드시
새로운 곳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여행보다 오히려
방황의 길이
더욱 의미 있고 아름다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순례는 나에게 무엇일까?
거시기와 어처구니
꿈속에서 나는 어처구니 없이 콩을 갈고 있었다
꿈속에서 나는 온몸으로 맷돌을 돌리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어처구니 없이 마구 웃었다
나는 거시기를 뽑아서 어처구니로 사용을 했다
나는 어처구니를 잡고 내 몸을 돌리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 사전을 찾아보니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꿈 밖에서도 마구 웃었다
나는 이제 어처구니도 없고 거시기도 없어졌다
혓바늘
혀의 바늘은
붉은 말이다
혀에 돋아나면
말도 아파진다
말은 입 속의
로즈마리 이다
입 안에 있으면
은은한 꽃 향기
입 밖에 나오면
바늘이 되지요
상처를 꿰매는
바늘이 되거나
심장을 찌르는
바늘이 되지요
입 속의 혓바늘
함부로 뱉어버린 말들이
내 입 속으로 다시 돌아와
입천장에 가시로 박히었다
거꾸로 박혀버린 바늘들이
솔입처럼 박혀버린 가시들
그 아픈 가시 빼내려면
나의 평생이 걸리어 있다
아, 함부로 뱉어버린 말들이
너무 아파서,
바늘처럼 아파서
차마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바다와 나의 숨결이
바다는 언제나 숨을 멈추지 않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어도
바다는 언제나 숨을 멈추지 않는다
바다는 오늘도 살기 위하여 숨 쉰다
바다는 오늘도 쓰레기 가득 토한다
나도 자주 쉬지 않고 울분을 토한다
바다와 나의 숨결이 만나 춤을 춘다
바다와 나의 숨결이 만나 하늘 된다
바다와 나의 숨결이 만나 구름 된다
바다와 하늘 사이에 틈이 있어 산다
바다와 하늘 사이에 틈이 좋아 산다
바다와 나 사이에도 틈이 있어 좋다
하늘과 나 사이에도 틈이 있어 산다
오늘은 정방폭포에 다시 와서 시와 시조를 생각한다. 詩(시)와 時調(시조)를 생각한다. 時調(시조)에서 중요한 것은 詩(시)가 아니라 時(시)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시조(時調)라는 명칭은 조선 영조 때의 가객 이세춘이 당시에 ‘단가’라고 불리던 것을 ‘시절가조(時節歌調)’라고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시조’라는 명칭의 원뜻은 시절가조(時節歌調), 즉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라는 뜻이었으므로, 엄격히 말하면 시조는 문학 갈래 명칭이라기보다는 음악곡조의 명칭이다. 1920년대 후반 최남선의 「조선국민문학으로의 시조」를 필두로 전개되었던 시조부흥운동과 더불어 문학 갈래 명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 다시 시작하는 순례
<4·3과 평화> 여름의 얼굴이 된 정방폭포
상처가 깊을수록 많은 눈물을 쏟아서 더욱 하얗다
새하얀 무명천이 하늘에서 끝없이 내려온다
무명천 할머니께서 수의를 만들고 계시는지
만가(輓歌)처럼 베 짜는 소리도 함께 들린다
얼굴 안쪽에 그늘처럼 흑백사진 한 장이 숨어있다
수용소로 사용되었던 전분공장과 창고들이 보이고
멀리, 목호(牧胡)들의 범섬까지 뚜렷하게 보인다
물빛과 무명천은 여전히 하얗고
발을 담그고 세수도 하였을 것만 같은 여울물소리
더 이상 발을 디딜 수 없는 노래는 비명(悲鳴)이 된다
길을 잃고 느닷없이 단애(斷崖) 아래로 떨어진 사람들
서귀, 중문, 남원, 안덕, 대정, 표선, 한라산 남쪽 사람들
태평양을 헤매다가 75년 만에 작은 집으로 돌아온다
불로장생을 꿈꾸며 불로초를 찾아왔던 서복이 머문 곳
지금도 대궐 같은 집에서 불로초를 가꾸고 있는 곳
불로초 공원에 만든 그 작은 공간으로 돌아오는 영혼들
타고난 제 삶도 끝까지 살지 못하고 벼락처럼 떠나버린
그 많은 정방폭포의 사람들
광풍에 느닷없이 길이 끊어져 허공에 발을 딛고
한꺼번에 바다로 추락해 버린 목숨들, 오늘도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바다에서 길을 찾고 있는 사람들
그중의 한 사람을 따라서 긴 순례를 다시 시작한다
* 정방폭포는 한라산 남쪽 최대의 학살터였다. 75년 만인 2023년 5월에 비로소 서복불로초공원 한쪽에 작은 4·3 희생자 위령공간이 마련되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_(1941. 11. 20. 윤동주 25세)
* 정방폭포에서 베틀소리가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만가(輓歌) 소리도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아우성소리가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자장가소리도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원자폭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일본이 항복하는 소리 들린다.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대한민국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에 윤동주와 송몽규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었다. 그전에 이육사도 감옥에서 죽었다. 해방은 원자폭탄처럼 떨어졌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던 원자폭탄의 위력은 제주도까지 휘몰아쳤다. 해방에서부터 한국전쟁까지 제주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아니, 어떻게 죽었을까? 산에서 죽고 바다에서 죽고 감옥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왜 돌아오지 못했을까? 윤동주와 송몽규는 시체라도 돌려받았는데 어찌하여 제주도 사람들은 골령골에 암매장되거나 바다에 수장되고 말았을까.
왜 제주도의 폭포는 남쪽에만 있을까? 자세히 살펴보니, 북쪽의 폭포들은 낮은 포복으로 기어 오고 있었다. 윤동주 시인이 요즘 시인이라면 어떤 시를 쓰고 있을까? 나는 윤동주 시인을 생각하며 나의 꿈과 나의 삶과 나의 문학을 처음부터 다시 한번 점검하며 순례를 떠난다. 윤동주의 거울 하나 들고서 순례를 다시 시작한다.
"하늘을 보지 못해서 부끄럼이 너무 많구나! 나는 지금껏 죽어가는 것들을 얼마나 사랑했을까? 나는 이제라도 나한테 주어진 길이 아니라,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길을 찾아서 걸어가고 싶다. 오늘 밤에도 나의 별은 잠들지 못하고 추위에 떨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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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3. ∴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 또는 서귀포시 동부로5번길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