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서랍을 열어보니
밤의 새싹이 돋아있다
밤의 새싹은 뿌리 같다
잔뿌리가 먼저 나온 듯
나는 밤을 먹을 수 없어
키워보기로 마음먹는다
당신의 어둠 서랍에도
밤의 새싹이 돋아나리
아, 밤의 뿌리가 내리면
언젠가는 싹이 나오리
우리 언젠가 다시 만나
밤나무 아래서 누우리
밤의 서럽 안에서 알밤 하나 오래도록 꿈을 꾸었다 밖이 궁금하여 살펴보니 숨구멍이 있었다 숨결을 따라가니 시나브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문 밖으로 더듬이가 먼저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나의 간절함을 알아차린 누군가 밤의 서랍을 열고 흙이 있는 곳으로 옮겨주었다 흙냄새가 온몸을 흔들어 깨웠다 나의 더듬이에서 뿌리가 뻗어가고 있었다 알밤은 뿌리의 모유였다 뿌리는 무섭게 땅 속으로 파고들었다
땅 속에 새싹의 젖줄이 있었다 알밤의 젖이 말라도 뿌리는 땅 속에서 더욱 큰 젖줄을 찾았다 뿌리는 더 깊은 젖줄을 찾아서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뻗어나갔다 땅 속에 젖의 강물이 있었다
밤송이에서 밤이 툭, 떨어진다
알밤에서 더듬이가 쑥, 나온다
더듬이에서 뿌리가 쓱, 내린다
뿌리에서 새싹을 살짝, 내민다
알밤은 뿌리에 젖을 꽉, 물리고
뿌리는 새싹에 젖을 꼭, 물린다
새싹은 자라나 잎을 쏙, 내밀고
잎은 자라나 줄기를 쭉, 뻗는다
알밤 하나에서 나온 더듬이가 뿌리를 내리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나 밤나무로 성장을 한다 그렇게 태어난 밤나무에서 밤꽃이 피고 밤송이가 열리고 벌어진 밤송이에서 문득 알밤이 톡, 떨어질 것이다
때죽나무꽃이 피어나는 계절에 알밤 하나 열심히 뿌리에 젖을 물리고 있다
알밤의 딱딱한
껍데기를 찢으며
하얀 뿔이 나온다
하얀 뿔이
땅을 들이받으며
흙 속으로 파고든다
뿔 끝에서 잔뿌리가
맹렬하게 뻗으면서
땅속을 깊이 갈아엎는다
알밤에서 나온
뿔의 밑뿌리가 둘로 갈라지고
그 사이에서
피를 흘리며
머리를 하늘로 치켜든다
알밤은 뿌리에 젖을 물리고
뿌리는 새싹에 젖을 물린다
더 자세히 깊숙이 들여다보니
뿌리 속에 이미 새싹이 있었다
새싹은 자라나서 줄기를 낳고
줄기는 자라나서 잎을 낳는다
그렇게 나무는 자라서 밤꽃을 피우고
밤꽃은 죽도록 밤송이에 젖을 물린다
밤송이는 익을수록 가슴을 활짝 열어
가슴에서 키우던 사랑에 날개를 단다
씨앗에서 뿌리가 나오고 새싹이 돋아나는 과정을 들여다볼수록 참으로 신비롭고 참으로 아름다운 길이 보인다 어두운 밤에서도 그렇게 뿌리가 나오고 새싹이 돋아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