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삼풍백화점의 기억으로 일어선 아크로비스타
그 상자 안에 숨어 살던 앉은뱅이 주술사 나온다
“국민 여러분께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심려를 끼쳐서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조사 잘 받고 오겠습니다”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판도라를 본다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에피메테우스를 본다
앉은뱅이 주술사와 장님 무사를 본다
붉은 긴꼬리여우와 검은 멧도야지를 본다
어젯밤 지리산에도 멧돼지가 밭을 망쳤다
우리들은 너무 많은 것을 끝내 보고야 말았다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닌 짐승의 바닥을 보았다
장님 무사와 앉은뱅이 주술사는 사람이 아니다
거짓말은 아무리 화려해도 사람의 말이 아니다
맹신·불신의 시대? 더 엄혹했을 때도 포용을 노래했다
[윤동주 80주기 / 어둠 넘어 별을 노래하다] [1] 별
이숭원 서울여대 명예교수
입력 2025.03.26. 00:02업데이트 2025.03.26. 18:32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1941. 11. 20.
윤동주 80주기를 맞아 그의 시를 새롭게 읽는 자리를 마련했다. 윤동주는 어둠의 시대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올바른 길을 찾으려 했다. 혼란스러운 대한민국. 그의 시에 담긴 진실의 힘이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를 희망한다. /편집자
일러스트=이철원
지금 우리는 혐오와 분쟁의 시대를 살고 있다. 두 패로 나뉘어 맞서는 형세는 너무도 살벌하고 전투적이어서 내전을 연상케 한다. 이쪽에 대해서는 무조건적 맹신을, 저쪽에 대해서는 철저한 불신을 일관되게 토로한다. 서로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거친 언어로 상대를 적대시하며, 남의 약점을 찾아내기 위해 매섭고 사나운 눈길을 보낸다. 이런 상황이니, 사랑과 용서, 화해와 포용 같은 말은 사전에만 남은 죽은 단어가 된 것 같다.
이 황잡한 시대에 윤동주의 시를 다시 읽는다. 지금보다 가혹한 시대를 산 윤동주는 그 암울한 상황에서도 사랑과 포용과 희망을 노래했다. 바로 이 점이 윤동주의 고결한 특성이다. 윤동주는 다른 어느 시인보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남긴 시는 오늘날 우리에게 위안이 되고 힘이 되고 등불이 된다. 그의 시에는 어둠을 밝히는 진실의 빛이 있고, 고통을 달래는 위안의 손길이 있으며, 만물을 포용하는 사랑의 온기가 있다. 그의 순정한 시에 담긴 정결한 기운을 되살려 지금 우리 마음에 녹여 넣고 싶다.
1941년 11월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앞둔 윤동주는 시집을 내려고 시 19편을 묶었다. 원고 표지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을 적고 그다음 장에 위의 시를 적었다. 스물네 살 젊은이가 시집 머리에 앉힐 짧은 시의 첫 행에 “죽는 날까지”라는 극단적인 말을 썼다. 그의 생애를 아는 우리는 이 구절에서 가슴이 철렁한다. 윤동주는 결의를 강조하기 위해 이 말을 썼을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기도하며 살겠다고 했다. 우리는 수없이 잘못을 저지르고 부끄러운 일을 많이 하는데, 윤동주는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기를 소망했다. 이것은 매우 가혹하고 엄격한 결단이다.
단 한 점도 부끄러움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인한 결의를 내세운 후, 윤동주는 조금 뒤로 물러서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고 썼다. 잎새에 바람이 이는데 왜 괴로워한단 말인가? 그렇게 작은 변화가 일어나도 그것이 자신의 어긋남과 관련이 없는지 돌이켜보았다는 뜻이다. 세계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그것과 관련지어 자신을 되돌아보는 예민한 자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태도를 지니고 살면 시련과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는 “나한테 주어진 길”을 가겠다고 말했다.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는 말에는 기독교적 소명 의식이 담겨 있다. 소명의 길을 걸으면서 그가 소임으로 내세운 것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일이다. 윤동주 시 여러 편에 별 이미지가 나타나는데, 대부분 순수성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이 시에서 별은 어둠 속에서 빛을 내고 갈 길을 이끌어주며 생명의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윤동주는 바로 그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다.
‘모든 죽어가는 것(the mortal creature)’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뜻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이 ‘죽어가는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라는 말처럼, 세상 모든 존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 세상에 대한 겸허와 연민이 생긴다. 윤동주는 세상 모든 존재를 겸허한 연민의 마음으로 사랑하겠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사는 길이라고 믿었다. 스물네 살의 젊은이가 첫 시집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높고 정결한 마음을 펼쳤다. 이 정결한 발언을 지금 우리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자신의 다짐을 고백한 윤동주는 독립된 시행으로 그가 처한 상황을 암시적으로 표현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고. 밤하늘에서 별이 빛나는 것은 신의 축복과 같다. 밤이 깊어야 별빛이 더 밝게 빛나는 법이다. ‘별이 바람에 스친다’는 말은 바람에 가물거리면서도 빛을 잃지 않는 별의 이중적 상태를 나타낸다. “오늘 밤에도”라는 말은 별이 바람에 스치는 현상이 오늘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늘 그런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풀잎에는 바람이 일고 별에는 바람이 스친다. 세상 모든 일에는 시련이 따른다. 그러나 별이 빛을 잃는 일은 없다. ‘오늘 밤에도’라는 말은 그러한 지속의 의미를 드러낸다. 이것이 어둠 속에서 윤동주를 버티게 한 마음의 동력일 것이다. 자신의 생명이 존재하는 한 별빛은 변함없이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그는 지녔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이 예민한 자아는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이런 깨달음에 이르렀다.
오늘날 미세 먼지 가득한 상황에서는 밤하늘의 별조차 보기 어렵다. 그러나 자연을 탓하기 이전에, 하늘을 우러를 순수한 마음을 잃은 것이 더 큰 문제다. 혐오와 불신이 가슴에 가득 차서 사랑과 연민이 뿌리내릴 토양이 사라졌다. 윤동주의 별은 바람에 가물거리면서도 사랑의 길을 비추어 주었는데, 지금 우리는 소망과 사랑을 염원할 마음의 별을 잃었다.
윤동주의 이 시를 읽으며 우리는 각자 마음의 별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마음속 어딘가 남아 있는 순수의 기운이 있다면, 그것을 자신이 추구하는 상징의 별로 삼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바람에 괴로워하는 존재,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서로 연민과 사랑의 눈길을 주고받기를 소망한다. 가혹한 시대에도 고결한 마음을 갈고 닦은 청년 윤동주의 시를 다시 읽으며, 혐오의 거리에서 벗어나 이해와 화합의 길로 들어서기를 간절히 바란다.
윤동주는 시집 자필 원고를 세 권 만들어서 한 부는 은사 이양하 교수에게 드리고, 또 한 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주고, 한 부는 본인이 지녔다고 한다. 이 중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정병욱의 소장본뿐이다. 그 원고에는 표지에 시집 제목이 있고 다음 쪽에 제목 없이 이 시가 실려 있다. 그러니까 정병욱이 받은 원고에는 이 시의 제목이 없다.
시인 윤동주가 1941년 '서시'를 쓴 육필 원고.
그런데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형이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집에 돌아왔을 때 시집 원고에서 ‘서시’란 제목을 분명히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윤동주는 정병욱에게 원고 한 부를 건네준 다음에 자신이 갖고 있던 원고에 ‘서시’란 제목을 추가한 것일까? 그 원고가 사라졌기 때문에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다. 1948년 초판본 시집에는 이 시 위에 “서시”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어구가 어색하게 병기되었다. 정병욱 소장본과 윤일주의 증언이 엇갈렸기 때문에 그렇게 처리했을 것이다. 1955년에 재판본이 나올 때 비로소 ‘서시’라는 제목으로 시집 맨 앞에 실렸다.
이런 이유로 이 시의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해야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윤동주가 시집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해서 표지에 제시했는데 그다음에 나오는 시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일 리는 없다. 그러니 동생 윤일주의 기억에 무게를 실어주는 수밖에 없다. 1955년의 재판본도 그런 취지로 이 시 제목을 정했을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알려진 지 70년이 되었고, 더군다나 이 시가 윤동주 시 전편의 성격을 함축하고 있으니, ‘서시’라는 제목이 합당하겠다.
[윤동주 80주기] 역풍에도 피는 배추꽃처럼… 인생, 봄 같지 않다고 주저앉아 있어서야
[어둠 넘어 별을 노래하다] [2] 봄
이숭원 서울여대 명예교수
입력 2025.04.09. 00:24업데이트 2025.04.09. 09:30
일러스트=이철원
봄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 아른, 높기도 한데······
― 1942. 봄 (추정)
아름다운 봄꽃과 고운 향기가 봄 소식을 전하기 전에 거친 불길이 경상북도 일대의 초목을 휩쓸어 갔다.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 화마에 잠기고 천년 고찰 고운사 경내가 불에 덮여 폐허가 되었다. 연기 오르는 잔해 사이에 덩그러니 남은 범종의 참혹한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건조 기후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에 불어닥친 위기다. 미국과 일본에도 산불이 크게 일어나 진화에 애를 먹은 사실을 알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가 어떤 파장을 낳을지 걱정이 앞선다.
어찌 기후뿐이겠는가? 정국도 파란의 고비는 넘어섰으나 혼란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다. 불신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숙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라는 말은 흉노족에게 잡혀간 미녀 왕소군의 처지를 표현한 한시의 한 구절인데, 봄의 정취를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우리 처지를 나타내는 데도 딱 들어맞는다. 난국을 헤치고 봄을 봄답게 느낄 수 있는 마음자리를 찾을 길은 없을까?
‘봄’은 윤동주가 도쿄의 릿쿄대학 1학년에 다니던 1942년 4월에서 6월 사이에 쓴 작품의 하나다. 일본 유학 시절의 작품인데 일본의 정경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일본 풍경이라면 매화나 벚꽃이 나올 만한데, 개나리·진달래·배추꽃이 나오고 종달새가 날아오른다. 이 소재들은 북간도와 한반도에서 즐겨 보던 봄의 자연물이다. 그는 도쿄의 하숙방에서 고국의 정경을 떠올리며 봄의 감상을 표현했다. 도쿄의 봄을 체험하면서도 그의 머리에는 조선의 정경이 떠올랐으니, 뼛속까지 조선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일본 유학 이전에 썼던 작품을 수정해서 도쿄에서 완성했을 수도 있지만, 그의 마음이 향하는 지점이 어디인가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시의 첫 행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라는 구절은 아주 감미롭다. 시냇물이 돌돌 소리를 내고 흐르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혈관 속에도 봄이 시내처럼 흐른다고 상상했다. 윤동주가 창조한 이 아름다운 시구를 내 혈관 속에 새겨 두고 싶다. 시냇가 언덕에 개나리·진달래·배추꽃이 피어나는 정경을 보고 그 자신도 “풀포기처럼 피어난다”고 했다. 자연 경관이 그의 마음에 들어와 자신과 하나가 된 것이다. 윤동주 시에서 드물게 보는 아름다운 봄의 육감적 표현이다. 그의 혈관 속에 봄이 시내처럼 흐르고 그의 마음과 몸이 꽃처럼 피어나자 흥겨운 마음이 종달새를 부른다. 봄이면 보리밭 위로 솟아올라 정겹게 지저귀던 그 종달새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푸르른 하늘은 “아른, 아른,” 높기도 하다고 끝을 맺었다. 종달새를 따라 희망과 이상의 세계로 오르고 싶은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일본에 막 유학 온 젊은 대학생의 기분을 살려 이렇게 밝은 정감을 표현했을 것이다. 대상의 아름다움을 마음속에 흠뻑 받아들여 자기 식으로 변형시킨 점이 뛰어나다. 자연 경관을 투명하게 느끼고 자신의 마음과 동일화한 시의 문맥은 그의 내면이 그만큼 순정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윤동주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신생의 동력으로 삼는 건실한 젊은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윤동주의 시 중 드물게 보는 밝은 작품이다.
그러나 윤동주의 일본 유학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기독교계 학교인 릿쿄대학에도 군국주의 조류가 밀려들어 1942년 첫 학기부터 전시 체제에 맞추어 군사 훈련이 시작되었고 머리를 삭발하는 제도가 시행됐다. 그리고 1943년에는 문학부가 강제로 폐쇄되는 탄압을 받게 된다. 윤동주가 교토 도시샤대학으로 전학한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봄의 정취를 전신으로 흡수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시대는 고통스럽지만 봄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받아들여 마음의 지향으로 삼고자 했다.
윤동주의 이 시를 읽으며 오늘의 상황을 대하는 지혜를 얻는다. 자연과 인생사가 봄 같지 않다고 해서 어두운 나락에 주저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아도 겨울과 여름 사이에 끼어 점점 짧아지는 봄이 아닌가. 짧을수록 귀한 봄의 감각을 전신으로 끌어안고 험한 세파를 넘어서야 할 것이다. 윤동주처럼 마음의 눈을 환하게 열면 우리 혈관에도 봄이 시내처럼 흐를 수 있을 것이다. 역풍에도 피어나는 꽃을 보며 우리 몸과 마음도 풀포기처럼 피어나게 하자. 이른 봄날 하늘로 솟아오르던 종달새를 떠올리며 우리도 한번 마음의 날개를 힘껏 펼쳐보자. 윤동주의 정다운 시 ‘봄’을 외우며.
‘봄’은 미완의 봄일까?
윤동주는 도쿄에서 서울에 있는 연희전문학교 동창 강처중에게 편지를 보냈다. 릿쿄대학 로고가 인쇄된 편지지에 편지와 함께 다섯 편의 시를 적어 보냈다. 강처중은 연희전문학교에서 윤동주와 우정을 나눈 벗이다. 그는 편지는 폐기하고 시 다섯 편을 보관했다가 해방 후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에게 넘겨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강처중이 보관한 윤동주 자필 원고를 보면 다섯 편의 시가 연이어 적혀 있는데, 맨 끝장에 이 시가 있고 창작 시기는 표시되지 않았다.
윤동주가 1942년에 쓴 ‘봄’의 자필 원고.
1948년 1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왔을 때 이 시는 아무런 단서 없이 시집에 수록됐다. 1955년 재판본에도, 1976년 중판본에도 그대로 수록됐다. 그런데 1979년에 나온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인물연구소출판부)에는 ‘봄’의 끝부분에 “이하 원고 분실”이라는 구절이 삽입됐다. 이 책의 발행과 편집을 주도한 사람은 문학평론가 임중빈인데, 평소 인물 연구에 관심이 많은 그는 책 뒤에 ‘윤동주 평전’을 써서 수록했다. 윤동주 평전으로는 선구적인 작업이고, 윤동주 생애를 복원하기 위해 윤일주와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윤일주에게 편지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임중빈은 이 시 끝에 “원고 분실”이라는 과격한 어구를 넣었다. 다섯 편 시의 맨 끝에 적혀 있고 시가 중간에 끝난 듯한 인상을 주니까 나머지 부분은 사라졌다고 판단한 것이다.
1983년 윤일주가 개정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를 낼 때도 이 시 끝에 “서울의 벗이 편지를 폐기할 때에 이 작품의 끝부분도 같이 폐기되었다”는 주석이 첨가됐다. 아마도 임중빈의 의견에 영향을 받아 이런 구절을 삽입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시는 뒷부분이 유실된 불완전한 작품이 된다. 과연 그러한가?
이 작품을 보관한 당사자 강처중은 6·25전쟁 때 행방불명되어 그의 증언은 들을 수 없게 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뒤에 남은 사람들이 이 시의 형태를 보고 불완전한 작품으로 오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앞에서 상세히 설명한 대로 이 시는 미완의 구조가 아니다. 말줄임표로 끝난 시행은 종달새가 지향하는 하늘의 드높음을 나타내는 암시적 종결구다. 봄기운에서 시작되어 하늘에 이르는 이 시의 구조는 뚜렷한 완결성을 지니고 있다. 편지 낱장이 폐기되었을 뿐 작품은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 시는 전후 문맥이 살아 있는 아름다운 서정시다. 이 아름다운 시가 불완전한 작품으로 폐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선거철 되자 우후죽순 자서전... 그보다 한 줄 '참회록' 부터 쓰십시다
[윤동주 80주기 - 어둠 넘어 별을 노래하다] [3] 참회록
이숭원 서울여대 명예교수
입력 2025.04.24. 00:10업데이트 2025.04.24. 06:55
일러스트=이철원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 1942. 1. 24.
선거철이 되자 자서전 출판이 늘어났다는 보도가 있다. 일반적으로 자서전이나 회고록은 상당한 연륜을 지닌 사람이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을 성찰하는 형식을 취한다. 제대로 된 자서전이라면 삶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담겨 있을 것이다.
윤동주는 이십사 년 1개월의 젊은 나이에 참회의 글을 쓴다고 했다. 젊은 나이인데도 아무런 기쁨을 얻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참회한다고 고백했다. 진정으로 부끄러운 것은 그렇게 보람 없이 살면서도 거기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못한 나약한 자신을 “어느 왕조의 유물”로 표현했다. 녹슨 구리거울 속에 잔영처럼 남아 희미하게 보이는 자신의 무력한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뿐 아니라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윤동주는 어둠 속에서도 별을 노래한 시인이다. ‘소년’이라는 시에서는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이 마련되어 있다고 했고, 산문 ‘화원에 꽃이 핀다’에서는 서리 내린 낙엽을 밟으면서도 봄이 올 것을 믿는다고 했다. 그만큼 미래를 긍정하고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사람이다. 고통의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즐거운 날이 오리라는 믿음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윤동주는 그가 맞이할 즐거운 날에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윤동주의 진실성이 있다. 정작 참회록을 써야 할 사람들은 침묵하고 있던 그 시대에 윤동주는 미래의 그날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쓰고자 한 미래의 참회록은 “그때 그 젊은 나이에/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라는 솔직한 자기 인식이다. 이 대목에서 나약하게 보였던 그의 참회가 자기반성에 근거를 둔 강한 의지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시인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탐색한다. 온 힘과 정성을 기울여 자기의 본모습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결과 우울하고 고독한 형상을 발견한다.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그것이다. 운석은 하늘의 별이 지상에 떨어져 빛을 잃고 응고된 돌덩이다. 그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저앉은 정지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는 진행의 형상으로 표현했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끊임없는 자기 갱신의 의지가 여기 투영되어 있다.
어두운 시대를 홀로 걸어가야 했던 윤동주는 자신의 무력함을 정직하게 드러내며 반성과 참회의 자세를 표현했다. 그 반성은 일회로 끝나지 않고 미래의 시대까지 이어진다고 믿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참회를 통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난다고 생각한 점이다. 한 젊은이가 뼈에 새기듯 백지에 적어 놓은 참회의 글을 통해 우리는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직하고 올곧은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진정한 자기반성이 사라진 우리 시대에 윤동주의 정직한 참회를 되살려 마음의 등불로 삼고 싶다. 천상의 별처럼 빛나는 윤동주의 시를 읽으며 저마다 한 줄의 참회록을 써 보면 어떠할까?
◇비애 금물… 상급… 창씨개명 앞두고 쓴 ‘참회록’ 속 번민·고뇌
시 ‘참회록’은 윤동주가 낱장에 적은 자필 원고 상태로 남아 있다. 괘선 용지에 세로로 내려쓴 시의 하단에는 영어 글자를 썼다가 사선으로 지운 흔적과 여백에 쓴 글자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번민과 고뇌의 과정을 알려주는 생생한 증거다.
사선으로 지운 자리에는 ‘poem’ ‘poetry’ ‘sentimentalism’ 등 시와 관련된 영어 단어들이 있고, 그 아래 여백에는 ‘渡航(도항)’ ‘證明(증명)’ ‘上級(상급)’ 등의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이 글자들을 보면 윤동주의 정신이 시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그가 당면한 문제가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한 도항 증명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테두리 선으로 묶여 있는 “비애 금물”이라는 단어는 감상에 잠기지 말고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는 각오를 엿보게 한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위한 도항 증명, 그와 연관된 창씨개명 신고를 앞두고 괴로운 번민의 시간을 보내면서 머리에 떠오르는 단상들을 여백에 적어 놓았다.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면 나중에 이 시를 정서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처음 상태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시의 문맥은 정제되어 있어서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수용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일본 유학에 오르기 직전 윤동주의 내면 상태를 알려주는 귀한 작품이다.
◇윤동주와 사람들
단짝은 석 달 먼저 태어난 사촌 형 송몽규… 日유학 제안, 1942년 두 사람은 현해탄을 건넜다
윤동주에게는 석 달 먼저 태어난 고종사촌 형 송몽규가 있었다.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명동소학교부터 연희전문학교에 이르기까지 고락을 함께한 사이였다. 용정의 은진중학교도 같이 다녔는데, 중학교 3학년을 마치던 1935년 1월 1일 ‘동아일보’ 신춘원고 응모에 콩트 ‘술가락(숟가락)’이 당선되어 윤동주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이후 송몽규는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비밀리에 중국 난징으로 가고, 윤동주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편입하여 잠시 헤어지게 된다. 두 사람은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 함께 입학함으로써 다시 동학의 길을 걷는다.
송몽규는 민족의식이 뚜렷했고 사상적으로 강경한 면이 있었지만,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1941년 4학년 때 문과 학생회지 ‘문우’가 한글 사용 통제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간행되었다. 전에 언급했던 강처중이 문과 학생회장을 맡아 학생회지 발간을 주도했고, 송몽규는 문예부장으로 편집을 담당했다. 이 ‘문우’ 지에 윤동주의 ‘새로운 길’과 ‘우물 속의 자상화’가 실렸고 송몽규도 ‘밤’과 ‘하늘과 더불어’ 두 편의 시를 발표했다. 송몽규는 당시 시책에 따라 일본어로 편집후기를 썼는데, 문우회가 해산되고 ‘문우’ 발행도 마지막이 된다는 사실을 알렸다.
1941년 12월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더욱 강압적인 전시 체제로 전환했다. 졸업도 석 달을 앞당겨 12월 27일에 시행되었다. 갑자기 졸업을 맞은 송몽규와 윤동주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마지막 탈출구를 찾는다는 심정으로 일본 유학을 추진했다. 적극적인 성격의 송몽규가 먼저 제안했고 윤동주도 여기 호응했을 것이다.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으나 윤동주는 도쿄의 릿쿄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송몽규와의 동행을 원했던 윤동주로서는 아쉬운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새로운 진로를 찾아 1942년 3월 두 사람은 현해탄을 건너는 배를 탔다. 송몽규는 교토로 윤동주는 도쿄로 향했다. 두 사람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42년 8월 일본 유학 중이던 윤동주(뒷줄 오른쪽)와 송몽규(앞줄 가운데)가 여름 방학을 맞아 중국 북간도 용정으로 돌아와 비슷한 연배의 친척들과 찍은 사진./연세대 윤동주 기념관 제공
나의 가장 큰 천적은 ‘나’… 동주는 “와서 뜯어먹어라” 외쳤다
입력2025.07.02. 오후 11:51
수정2025.07.03. 오전 10:22
[윤동주 80주기 / 어둠 넘어 별을 노래하다] [8] 유혹의 거부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 1941. 11. 29.
최근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은 드라마 ‘미지의 서울’에 “나의 가장 큰 천적은 나”라는 대사가 나와 사람들 입에 한참 오르내렸다. 이 구절을 시로 먼저 쓴 분은 조병화(1921~2003) 시인이다. 그는 ‘천적’이라는 제목으로 “결국, 나의 천적은 바로 나였던 거다”라는 한 줄짜리 짧은 시를 쓴 바 있다. 모순된 표현처럼 보이는 구절이지만, 많은 사람이 이 말의 의미에 공감한 것 같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망설이거나 자신 없어 할 때, 해야 할 일을 미루며 자기 합리화에 빠질 때, 외부 장애물보다 내면의 불안감이 더 큰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윤동주의 시 ‘간’은 내용이 좀 복잡하다. 고전 설화인 토끼전과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 거북이와 독수리를 등장시켰다. 거북이는 토끼를 용궁으로 유인하여 간을 빼앗으려는 외부의 적이다. 독수리는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뜯어 먹는 존재인데, 윤동주 시에서는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마음속에 작동하는 불안, 무력감, 두려움 등 스스로를 괴롭히는 내적인 문제를 암시한다. 외부의 적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하고 자신을 지키면 되지만, 내면에 오래 길러온 독수리는 대처하기 어렵다. 시인은 독수리에게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라고 말한다. 얼핏 자학적 태도처럼 보이는 이 말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내면의 부정적 존재가 강화될수록 자신은 점점 지쳐가고 고통으로 피폐해진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시인은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라고 말했다. 이것은 내면의 고통이 커지더라도 그것을 감내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렇게 내부의 적을 극복했을 때 외부의 적에 대처하는 용기와 힘이 생긴다.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라는 구절은 그러한 시인의 태도를 뚜렷이 드러낸다. 그는 어떠한 고통이 밀려와도 의연하게 자신이 추구하는 정당한 자리를 지키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육체적으로는 쇠약해질지라도, 정신과 영혼은 더 높고 정결한 자리로 나아가려 했다.
마지막 연에 나오는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은 십자가에 피 흘리며 순교하는 예수의 형상과 통한다. 희생과 순절(殉節)을 자신의 운명으로 담담히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표면적으로는 추락하는 모습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고고한 견인(堅忍)의 자세다. 이러한 자세는 자기 내부의 적인 독수리를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해진다. 진정한 용기는 내면의 두려움과 약함을 직시하고 그것을 극복할 때 솟아난다. 윤동주는 현실의 압력에 모두가 진실을 외면하던 시대에, 고통을 용기로 바꾸는 고결한 정신을 시로 표현했다.
토끼전·그리스 신화 결합한 ‘저항시’… 일제 치하에서의 울분·의지 드러내
토끼전 이야기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친숙한 내용이다. 토끼의 간이 용왕의 병에 효험이 있다고 해서 거북이가 토끼를 유혹하여 용궁에 데려갔으나, 토끼가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은 가끔 간을 바위에 널어 말린다고 둘러대서 위기를 모면한다는 이야기다.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라는 대목은 설화의 문맥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위해 신전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 준 존재다. 이 일로 제우스신의 노여움을 사서 코카서스산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는 형벌을 받는다. 독수리가 간을 쪼아 먹으면 간이 재생해서 형벌의 고통이 끝없이 이어진다. 이러한 서사적 특징 때문에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고통을 받는 의인의 형상으로 전승되었다.
윤동주는 두 설화에 ‘간’이 공통 소재로 나온다는 점에 착안하여 ‘간’을 축으로 문맥을 융합했다. 간을 지키면서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토끼를 자신과 동일화했고, 인간을 위해 의로운 일을 하고 고통받는 프로메테우스를 자신의 전범(典範)으로 삼았다. 이러한 윤동주의 착상은 새롭고 도전적이다. 시도가 창의적인 만큼 의미 맥락을 순조롭게 연결하는 작업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윤동주의 시 중 가장 난해한 작품이 되었고, 가장 저항시다운 작품이 되었다.
윤동주가 이 시를 쓰던 당시 상황은 살벌한 전시 체제였다. 윤동주는 당시의 강압적 현실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비유와 상징의 어법을 동원했다.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여 독특한 화법으로 ‘감시와 처벌’로 이어지는 강압적 현실을 표현했다. 이것은 억압적 상황에서 산출된 많은 저항시의 공통적 특징이기도 하다.
[윤동주와 사람들] 고향 친구이자 동창인 문익환
“동주야, 넌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난 일흔 고개에 섰구나”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동주와 함께 성장하고 같이 공부한 친구로 문익환(1918~1994)이 있다. 문익환의 부친 문재린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캐나다 토론토의 임마누엘 신학교를 졸업한 엘리트 목사였다. 그는 세계를 여행한 후 1932년부터 용정 중앙교회 목사로 봉사했고 북간도 한국 기독교인의 리더 역할을 했다. 1945년 2월 16일 윤동주가 옥사하고 3월 6일 용정에서 영결식을 치를 때에도 문재린 목사가 집례했다.
문익환은 윤동주, 송몽규와 함께 명동소학교를 다녔고 은진중학교도 같이 다녔다. 은진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문익환은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편입했고, 여기 자극을 받은 윤동주도 2학기에 숭실중학교 편입 시험을 보았으나 3학년으로 입학 허가가 나서 문익환의 1년 후배가 되었다. 이듬해 3월 말 숭실중학교가 신사 참배 거부로 혼란에 처하자, 윤동주와 문익환은 숭실중학교를 자퇴하고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했다. 여기서도 두 사람은 1학년 차이가 나서 문익환이 먼저 졸업하여 도쿄의 일본신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문익환은 방학 때면 고향에서 윤동주를 만나 대화하면서 그의 성숙한 태도에 많이 놀랐다고 회고했다. 시에 대한 엄격한 자세는 말할 것이 없고 대단한 독서량에 경이감을 느꼈다. 특히 기독교 철학자 키르케고르에 관해 대화했는데, 키르케고르 이해가 신학생인 자신보다 훨씬 깊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1942년 8월경 윤동주가 도쿄 릿쿄대학에서 교토의 도시샤대학으로 옮겨갈 무렵 윤동주 하숙집을 방문했더니 2층의 육첩방에서 이삿짐을 싸고 있었다고 했다. 이것이 그가 본 윤동주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는 윤동주를 유순하고 조용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그래서 “그의 저항 정신은 불멸의 전형이다”라는 글을 읽을 때마다 수긍하기 어려웠다고 썼다. 그러한 그가 1970년대 중반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 투신하고, 1980년대 후반 재야 운동권의 중심에 섰을 때 윤동주를 떠올리며 ‘동주야’라는 시를 썼다.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라고 세월의 흐름을 언급한 다음, 너의 영원한 젊음이 있기에 이 땅의 젊은이들이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칠 수 있다고 노래했다. 윤동주의 순교적 희생을 민주화 운동의 표상으로 끌어온 것이다. 현실의 전위에 섰던 문익환에게 윤동주라는 이름이 순절의 상징으로 재소환되었음을 알려주는 사례다.
이숭원 서울여대 명예교수
https://www.chosun.com/tag/yun-dongju-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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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3/26/FYMTES5IVRDWTBWRXAG76Q4CW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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