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3.9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나는 아직 서울롯데월드타워에 가보지 못했다
나는 아직 제주드림타워를 바라보며 살아간다
나는 아직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잘 모른다
나는 아직도 롯데와 샤롯데를 잘 알지 못한다
나는 아직도 문학을 좋아했던 신격호를 모른다
샤롯데처럼 어여쁜 롯데심벌을 오래도록 본다
Lifetime Value Creator 인생의
모든 순간에 새로운 가치를 드리겠다는 약속
리본 같기도 하고 손하트 같기도 한 심벌에서
나는 사마천이 잘려버린 뜨거운 상징을 본다
나는 아직도 푸시킨, 괴테, 피천득을 잘 모른다
나는 아직 김이듬, 표명희, 민병일을 잘 모른다
나는 우선 푸시킨부터 서둘러서 읽기 시작한다
가을비는 내리고 나뭇잎은 길가에서 길을 본다
가을바람 불어와 마음까지 깊숙이 맑게 깨운다
서울롯데월드타워는 가을에도 술병으로 서 있고
제주드림타워는 늦은 밤에도 꿈을 꿈꾸고 있는데
나는 오늘도 사마천이 되어 밤의 피로 글을 쓴다
베르테르와 푸시킨, 샤롯데와 나탈리아를 만난다
마천루에 올라 치명적은 사랑으로 빛나는 별빛들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 되어 빛나고 있으리
목차
알렉산드르 세르게이비치 푸시킨은 1799년 5월 26일에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의 가계는 가장 오래된 러시아의 귀족 집안 중의 하나였다. 한니발의 성을 가진 그의 어머니는 ‘표트르 대제의 흑인총신’ — 보다 정확하게는 에티오피아인 공병대장 아브라함 한니발 — 의 손녀였다. 시인은 항상 “6백 년 전통의 귀족 혈통”과 아프리카인의 피가 자신에게 흐르고 있음을 자랑했다.
그는 유년 시절과 초기 소년 시절을 18세기 프랑스적인 경박하고 피상적인 문화의 환경에 젖어 있는 가정에서 보냈다. 아들과 부모 사이에 상호 애정이라고는 없었다. 1811년에 푸시킨은 차르스코예 셀로(황제 마을)의 리테이(1811년에 설립됨)에 입학했다. 그에게 리테이는 가족보다 더 친근했고, 그는 항상 급우들에 대해 가장 따스한 감정을 간직했다.
리테이에 다니는 동안 푸시킨은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1814년 『유럽 통보』에 그의 첫 시작품들이 발표되었다. 리테이를 졸업하기 전에 그는 아르자마스 협회의 회원이었고, 주콥스키와 바튜시코프로부터 그들의 경쟁자나 동등한 인물로 대우를 받았다.
1817년에 그는 학업을 끝마치자마자 외무성의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임명은 단지 명목뿐이었고 하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그는 동시대인들 중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명민하며 방탕한 인물들과 어울려 육체적인 사랑에 무절제하게 탐닉하면서 성 페테르부르크에서 생활했다.
그 사이 계속해서 푸시킨은 『루슬란과 류드밀라』라는 여섯 장으로 된 ‘낭만적 서사시’를 써서 1820년 봄에 발표하였다. 이 시는 젊은 세대를 황홀케 했지만 구세대로부터는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이 원고를 읽자마자 주콥스키는 ‘패배한 스승이 승리한 학생에게’라는 글이 새겨진 자신의 초상화를 푸시킨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 시가 출판되기 전에 알렉산드르 1세가 푸시킨의 몇몇 혁명적인 시를 알게 되어 그는 페테르부르크를 떠나도록 명령받았다. 푸시킨은 예카테리노슬라브에 있는 관청으로 전보되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병이 나서 1812년 조국 전쟁에서 명성을 떨친 라예프스키 장군이 관할하는 카프카스로 옮겨 갔다. 푸시킨은 장군의 아들들과 영원한 우정을 맺었고, 장군의 딸들을 열렬히 사모했다.
카프카스와 크림반도에서 라예프스키네 가족들과 친교를 맺고 지낸 두 달은 푸시킨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그가 처음으로 바이런을 알게 된 것도 바로 라예프스키네 가족을 통해서였다. 1820년 말에서 1823년까지 푸시킨은 키시뇨프에서 하찮은 관청일을 하면서 몰다비아인들의 불결한 야만성을 혐오하고 페테르부르크에서와 똑같이 무모하게 살았다.
그리고 그는 혁명운동의 중심 도시들 중의 하나였던 키예프 현의 영지인 까멘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충분한 자유를 즐겼다. 그러나 그는 페테르부르크에서보다 더욱 진지하게 작품을 썼다. 그는 『카프카스의 포로』를 써서 1822년에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루슬란과 류드밀라』보다 더욱 큰 성공을 거두었다. 계속해서 그는 『바흐치사라이의 분수』와 수많은 단시를 쓰고 『예브게니 오네긴』을 쓰기 시작했다.
1823년에 그는 오젯사로 전보되었다. 그는 대 항구의 보다 자유롭고 보다 유럽적인 공기를 호흡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더욱더 불규칙하고 열정적으로 되었다. 오젯사에서의 그의 생활은 두 부인을 향한 사랑(거의 동시적인)으로 특징지워진다. 한 부인은 달마티아인1)인 아말리아 리즈니치이고, 다른 한 명은 옐리자베타 보론초바 백작 부인이었다. 아말리아 리즈니치 부인과의 사랑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강렬한 관능적인 정열이었고, 그의 훌륭한 연애시들 중의 몇몇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백작 부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는 사교계의 물결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바이런 풍의 친구인 알렉산드르 라예프스키로부터 가장 배반적인 대접을 받았는데, 라예프스키 자신도 백작 부인의 연인이었다. 1824년 8월에 푸시킨은 갑자기 내무성에서 축출되어 프스코프 현의 미하일롭스코예에 있는 어머니의 영지에 거주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이와 같은 불명예의 원인은 경찰에 의하여 검열당한 사신(私信) 때문이었다. 이 편지 속에서 시인은, ‘순수한 무신론’은 위안철학은 결코 아닐지라도 “가장 그럴 듯한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미하일롭스코예에 도착한 푸시킨은 그곳에서 부모를 만났지만, 푸시킨과 부친 사이의 일련의 사건 때문에 그들은 말썽꾸러기이자 위험스런 아들을 혼자 남겨두고 떠나 버렸다.
푸시킨의 미하일롭스코예에서의 생활은 자신의 옛날 유모와 트리고르스코예의 이웃과의 사귐을 제외하고는 외로웠다. 이 시골에는 오시포바 부인과 그녀의 두 딸로 구성된 매력적인 가족이 살고 있었다. 여기에서 푸시킨은 케른 부인을 만났다. 그녀는 그와 관련된 아주 사소한 연애사건의 주인공이 되었고, 이 연애사건은 그의 가장 유명하고 영감으로 가득찬 서정시들 중의 한 편2)의 주제가 되었다. 푸시킨이 미하일롭스코예에서 보낸 몇 년은 특히 생산적인 시기였다.
푸시킨은 미하일롭스코예에 강제로 격리되어 있었으므로 1825년 12월의 혁명운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 혁명가들과 그와의 관계는 명백했지만, 새로운 황제는 그러한 사실을 간파하고 노련한 솜씨로 현명한 정책을 펴서 시인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였다(1826년 9월). 새로운 황제는 그에게 완전 사면을 내리고, 시인의 특별한 보호자 겸 후견인이 될 것을 약속하였다. 분명히 보다 자유로워졌지만 푸시킨은 전 정권 밑에서보다 더욱더 간섭적인 감독에 따라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내적인 자유까지 박탈당했다. 왜냐하면 그의 사면이 자비의 과장된 표현이었으므로, 그는 그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결코 많은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주하고자 한 여러 번의 시도가 무산된 이후, 1829년에 푸시킨은 매혹적인 미모를 가졌지만 경박하고 신분이 낮은 열여섯 살의 젊은 처녀인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사랑에 빠졌다.
시인은 그녀에게 구혼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이같은 돌연한 장애를 핑계삼아 그는 터키와 전쟁 중에 있는 카프카스로 훌쩍 떠났지만 허락없이 행동했기 때문에 심하게 힐책을 당했다. 1829년에서 1830년에 이르는 겨울에 그는 해외로 나가고자 여러 번 시도했지만, 그의 ‘보호자들’로부터 허락을 받아내지 못했다. 1830년 봄에 그는 다시 나탈리야에게 청혼하여 이번에는 허락을 받아냈다. 시인 자신의 경제적인 사정은 좋지 못했다.
그는 인지세로 상당한 돈을 받았지만, 그것은 불안정하고 불규칙적인 수입이었다. 더군다나 니콜라이 1세의 검열 때문에 그의 작품이 자주 묶이곤 해서 더욱 그러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1826년 이래 계속 출판이 금지되어 왔었지만, 이제 특별한 호의를 입어 미래의 가정생활을 꾸릴 수 있도록 인쇄가 허락되었다. 이 작품은 1831년 1월에 출판되었지만, 칭찬은 별로 받지 못하고 심한 비난을 받았다. 푸시킨은 결혼하기 전 가을을 시골인 볼지노에서 보냈는데, 이 두 달 동안의 기간은 그의 생애 중 가장 생산적인 시기였다.
그는 1831년 2월에 결혼했다. 처음에 그의 결혼은 영원한 행복을 약속하는 것 같았지만, 이들 둘 사이에는 진정한 공감대가 없었다. 나탈리야는 천박하고 거의 저속할 뿐만 아니라 경솔하고 냉담했으며 지적 및 시적인 관심이 없었다. 나탈리야는 자신의 미모로 페테르부르크와 궁정에서 커다란 명성을 얻었다. 니콜라이 황제가 푸시킨을 ‘시종보’(侍從補)로 만든 것은 바로 궁정의 무도회에 나탈리야를 초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푸시킨은 이 명예에 몹시 분노했다. 그는 더 이상 진보파의 리더가 아니었고, 이제 ‘문학적 귀족정치’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는 젊은 세대로부터 살아 있는 힘으로서보다는 과거의 유물로서 존경을 받았다. 1830년 이후에 그가 쓴 모든 작품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시를 쓰는 것을 거의 포기하고 표트르 대제에 관한 역사 연구에 몰두했으나 결코 그것을 집필하지는 못했다.
여러 차례 거절당한 후 1836년에 그는 문학 계간잡지인 『동시대인』의 발간을 허락 받았으나, 1830년 이후 그가 시도한 모든 일처럼 실패했다. 반면에 궁정에의 속박은 더욱 커졌다. 특히 재무성으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대부를 받은 후로 그는 더욱더 궁정의 은혜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육백 년 전통의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여황제들의 총신들의 후손인 대신(大臣)들로부터 단순한 시인으로서 멸시받으며 단지 나탈리야의 남편으로만 통하는 사교계에서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는 해롭고 타락한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만약 자신이 도시를 떠난다면 그것은 불명예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침내 비극적인 종말이 도래했다. 러시아 군대에 근무하는 프랑스 왕정주의자인 죠지 단테스 남작이 나탈리야에게 관심을 쏟자 푸시킨의 질투심은 격앙되었다. 푸시킨은 그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그러자 단테스는 우선 나탈리야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결투를 피하고 그의 의심이 잘못이라는 것을 짐짓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 결혼 이후 며칠이 지나서 푸시킨은 단테스와 나탈리야가 다시 밀회를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푸시킨은 단테스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말투로 그에게 다시 결투를 신청했다. 결투는 1837년 1월 27일에 이루어졌다. 푸시킨은 치명상을 입고 1월 29일에 사망했다. 국민들의 조문 시위를 두려워하여 관은 푸시킨이 장지로 선택한 미하일롭스코예 근처의 수도원으로 밤중에 서둘러 옮겨졌다.
푸시킨은 일찍이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누이의 회상에 따르면, 리테이에 입학하기 위하여 집을 떠나기 전에 그는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고 전해진다. 날짜를 알 수 없는, 러시아어로 쓰여진 최초의 시는 1814년에 쓴 것이다. 내부 증거에 따르면, 이보다 이른 시기에 쓰여진 미숙하고 조야한 두서너 편의 시가 더 있다.
이러한 몇 편의 시를 제외하면, 푸시킨의 시는 초기부터 매우 쉽고 유려했으며, 가벼움과 유려함이 시인들의 주요한 목표이던 시대에 거의 가장 높은 수준에 달해 있었다. 대략 1820년까지는 비록 그가 주콥스키나 바튜시코프보다는 뒤떨어졌지만, 그것은 숙달이 덜 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독창적인 영감이 결여되었기 때문이었다. 리테이 시절의 푸시킨의 시는 모방적이었고, 소년의 시라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비감정적이고 비감상적이었다.
그는 진실한 의미의 시인이 되기 이전에 이미 최고의 기교가였는데, 이 점은 19세기 시인들에게는 흔치 않은 성장과정이었다. 리테이에서 지은 몇몇 시는 주콥스키, 데르자빈에 의해서 교습받은 형식의 습작이었지만, 대부분은 우호적인 아르자마스 류의 즉흥시와 우정적 서간, 아나크레온적인 서정시였다. 그의 문체는 주콥스키나 바튜시코프의 원칙 밑에서 발전하였지만, 프랑스 고전주의 시인들에게서 상당히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푸시킨은 볼테르를 오랫동안 좋아했다. 다음으로 파르니의 영향을 들 수 있다. 파르니의 비감상적이며 고전적이지만 진실한 열정과 사랑으로 고취된, 훌륭하지만 오랫동안 간과되어온 연가들은 푸시킨의 초기 시들의 모범이 되었다. 우리는 푸시킨의 그러한 시 속에서 진지한 열정의 어조를 느낄 수 있다. 1818년쯤에 푸시킨의 시는 마침내 자신의 고유한 특징을 획득한다. 이즈음의 서간과 연가들 속에는 이미 위대한 시적 재능이 거의 내재해 있다.
우리는 개성이 없는 아르자마스 식의 뛰어난 재기를 통하여 아주 놀라운 생명력을 가진 심장과 신경을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시들 속에는 맑고 차가운 분위기가 있을 뿐, 그 외의 어떠한 분위기도 깔려 있지 않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루슬란과 류드밀라』에서도 지배적이다. 이 작품은 반(半)풍자적이고 경박한 로맨스인데, 여기에서 몇몇 이름과 모티브의 주요 골격은 『보바코롤레비치』와 『예루슬란 라자레비치』와 같은 통속적인 이야기에서 취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서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18세기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 속에는 볼테르의 취향에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루슬란과 류드밀라』 속에는 성실한 기교의 진지함 이외에는 아무런 진지함도 없다. 푸시킨이 이 시를 쓸 무렵에 매우 좋아했던 고전 발레와 같이 이 작품은 순수한 희곡인 것이다. 이것은 시의 기교 면에서는 이미 달인이 되었지만 아직 최상의 의미의 시인은 되지 못했던 자신만만하고 쾌활한 젊은이의 작품인 것이다.
1818년에서 1820년 사이에 푸시킨의 시적 스타일의 본질적인 원칙이 확립되며, 이것은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프랑스적이고 고전적인 것이다. 프랑스 고전주의 원칙의 가장 특징적인 면은 이미지와 은유를 완전히 회피하는 것이다. 이 점은 낭만적인 분위기에서 교육받은 독자들에게는 특히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푸시킨의 이미지들은 정확한 단어들의 멋진 사용을 통해 만들어지고, 시적 효과는 환유(換喩)와 이와 비슷한 순수한 수사학적 비유를 사용하여 얻어진다.
대체로 푸시킨의 초기 시와 동일한 스타일로 쓰여진 후기 시는 비프랑스적인 시들 중에서, 리톤 스트라이치가 말한 이른바 “품격, 우아함, 쾌활함이 혼합된 음조”에 가장 가깝고, 프랑스의 성숙한 시적 진수의 독특한 산물들 중의 하나이다.
푸시킨의 마지막 프랑스인 스승은 앙드레 셰니예인데, 셰니예의 유고(遺稿)는 1819년에 출판되었다. 이것은 푸시킨 스타일의 내적 구조에 끼친 마지막 외부의 영향이었다. 그 후의 영향은 단지 주제의 선택과 구성상의 방법에 국한되어 있다.
이 중에서 푸시킨의 창작활동의 제2시기(1820~1823)를 지배한 바이런의 영향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의 특성은 분명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푸시킨은 영국 시인들과 본질적인 유대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푸시킨의 정확하고 논리적인 스타일은 바이런의 어수선한 수사학과는 정반대이다. 바이런의 영향은 이 시기의 서사시에 한정되어 있다.
서사시 중에서도 주제의 선택과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바이런에게서 빌려왔으나, 실제적인 스타일은 이전과 같이 고전적인 것이었다. 푸시킨의 바이런적인 시로 『카프카스의 포로』(1820~1821년에 쓰여져 1822년에 발표됨)와 『바흐치사라이의 분수』(1822년에 쓰여져 1824년에 발표됨)가 있다. 이 두 작품의 성공은 푸시킨의 다른 모든 작품의 성공보다도 큰 것이었다. 푸시킨을 1820년대의 가장 인기 있는 작가로 만든 것은 바로 이 두 편의 시였다.
그러나 이것이 푸시킨의 천재성의 완전한 척도는 되지 못한다. 그 이전의 모든 작품에서 형식은 언제나 내용보다 중시된다. 형식(시구와 어법)은 완벽하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푸시킨 자신에 의해서도 결코 더 이상 능가될 수 없고, 다른 어떤 시인들도 결코 접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독자들은 푸시킨이 성공적으로 시종일관 완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언어와 음성의 순수한 아름다움에 몰입하게 된다.
그 효과는 푸시킨의 시가 비선율적이기 때문에 더욱 경이롭다. 형식의 아름다움과 조화는 순전히 언어적인 것인데, 이것은 리듬과 구문의 상호 완벽한 적절함과 이른바 두운법의 상당히 미묘하고 복잡한 두운(頭韻)체계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두운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하고 변함없지만 강요적이지 않은 그 어떤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이와 같은 언어적 조화는 『바흐치사라이의 분수』에서 완성의 경지에 도달한다. 이후 푸시킨은 지나치게 유창하고 애무적인, 이러한 방법상의 효과를 신중하게 회피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두 편의 바이런적인 시에서 바이런적인 요소는 주제와 서사 구조에 제한되어 있다. 격렬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가진 동양의 미인, 과거에 강한 정열을 소유했지만 현재 인생에 환멸을 느끼는 주인공, 우울하고 조용한 동양의 군주, ‘동양의 풍토’의 그 뜨거운 분위기 — 이러한 모든 요소는 푸시킨이 바이런에게서 취한 것들이다. 가장 중요한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단편적이고 극적인 서사방법, 갑작스런 변화, 서정적인 에필로그는 바이런적인 서사 방법의 영향이다.
그러나 푸시킨도 바이런적인 정신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을 뿐이며, 이 두 편의 시는 차용한 테마에 대한 좀 더 일반적인 시도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이 두 편의 시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순수하게 묘사적인 부분이다. 이를테면 『카프카스의 포로』에서 카프카스인들의 호전적인 습성에 대한 기술은 가장 명민한 18세기 여행자들의 기술만큼이나 정확하고 실제로 신뢰할 만하다.
『바흐치사라이의 분수』에서 하렘3)과 크림반도를 환기시키는 것들에 대한 묘사는 더욱 서정적이고 분위기적이지만, 항상 아주 정확하고 우아하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좀 더 짧은 낭만적이고 바이런적인 시로는 『도둑형제들』(1821)이 있다. 이 시는 앞에서 언급한 두 편의 시보다 언어적으로는 덜 아름답지만, 민중들 사이에서 놀라운 인기를 얻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시는 어떤 민중극의 일부분이 되었을 정도이다.
이 시기의 푸시킨의 서정시는 바이런주의의 모든 형식적이고 감정적인 영향으로부터 현저히 벗어나 있다. 이것은 1816년에서 1819년 사이에 쓰여진 시들의 연속과도 같다. 그러나 푸시킨의 시는 점점 더욱 정열적이고 남성다운 음조를 띠고, 형식면에서 더욱 개성적이고 더욱 완전하게 된다. 훌륭한 억제와 아름다운 표현으로 충만된 일련의 묘사적이고 연가적인 풍자시 속에서 셰니예의 직접적인 영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동일한 영향이 보다 변형되고 축약된 형식으로 이 시기의 가장 훌륭한 서정시인 『나폴레옹』(1821, 푸시킨의 가장 훌륭한 시 중의 하나) 속에 나타난다.
엄격하게 프랑스적이고 볼테르적인 요소는 바이런을 알고 난 이후에도 푸시킨의 시 속에서 얼마 동안 계속 나타난다. 푸시킨의 시 중에서 가장 볼테르적인 시, 즉 불경스럽고 도발적인 『가브릴리아다』(1821)를 쓴 것은 바로 이 즈음이었다. 이 작품 때문에 푸시킨은 니콜라이 1세 치하에서 많은 곤경을 당했고, 푸시킨이 사망한 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이 시는 인쇄되었다(1861년 런던에서).
이 시는 볼테르와 파르니의 반종교적인 시들의 스타일과 비슷하지만 진지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것들과는 다르다. 다시 말해서 이 시는 반기독교적인 선전이 아니라 불경하고 감각적이며 속박되지 않은 젊음의 공허함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푸시킨의 중기는 『예브게니 오네긴』의 전집필 기간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작품은 그의 가장 길고, 가장 인기 있고, 중요한, 어떤 면에서는 가장 특징적인 것이다. 이것은 여덟 장으로 된 ‘운문 소설’인데, 1823년 봄에 쓰여지기 시작해서 1830년 가을에 완성되었고, 1831년에 약간의 마지막 손질이 가해졌다.
이 작품을 쓰고자 한 최초의 동기는 『돈 쥬앙』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연(聯)을 갖춘 운문 형식으로 장편 서사시를 쓴다는 일반적인 구상을 제외하고, 주제를 동시대의 현실에서 취한 점과 장중함과 경쾌함을 혼합한 음조를 사용한 『예브게니 오네긴』은 바이런의 서사시와는 별로 공통점이 없다.
이 작품은 『돈 쥬앙』의 특징, 즉 바다와 같은 드넓음이나 풍자적인 힘을 갖고 있지 않다. 이 작품의 특징은 바이런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탄탄하고 처음과 중간 그리고 끝이 있는 — 비록 푸시킨이 처음 이 작품을 쓸 때는 어떻게 끝맺음을 해야겠다는 확실한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 이야기인 것이다. 이 작품의 통일성은 의도되거나 미리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적인 삶의 유기적인 통일성과 같은 것이다.
이 작품은, 스물 넷에서부터 서른 둘에 이르기까지 시인이 경험했던 현실상을 반영하고 있다. 제1장의 폭풍과 같은 젊음의 감흥에서부터 제8장의 체념적이고 숨막힐 듯한 비극에 이르기까지의 점진적인 변화는 마치 한 그루의 나무의 성장과도 같다.
1823년에 쓰여진 제1장은 푸시킨의 청춘의 위풍당당한 영광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그의 모든 작품들 가운데서 가장 훌륭하며, 오래되어 진부하지만 여전히 그럴듯한 비유로 표현하면 샴페인과 같이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이것은 성 페테르부르크의 젊은 신사(원래 dandy라는 영어 단어 사용)의 생활, 즉 푸시킨이 추방당하기 이전에 자신에게 친숙했던 생활의 묘사이다. 제1장은 여덟 장 중에서 쾌활함이 명백하게 진지함을 압도하는 유일한 장이다. 이후의 장도 동일한 문체로 쓰여져 있지만 햇수가 지남에 따라 세련되고 원숙해진다. 유머(풍자가 아니라)와 시적 감정의 혼합, 끝없이 풍부하고 다양한 감정의 명암과 변화는 『트리스트람 샌디』(푸시킨은 이 작품의 저자를 극구 찬양하였다)를 생각나게 하지만, 자유분방함과 자연스러움을 갖춘 활기찬 전개는 스턴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예브게니 오네긴』은 푸시킨의 최초의 성숙을 보여주는 위풍당당한 영광이며, 만년의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수법과는 상치되는, 이른바 주관적인 수법의 완전한 표현인 것이다. 그의 모든 작품 중에서 『예브게니 오네긴』은 외견상 가장 덜 구속적이다. 시인은 자신에게 서정적이고 유머적이고 논쟁적인 이탈을 허용한다. 그는 예술적 절제를 보여주지 않는다. 다른 어떤 작품에서보다도 푸시킨은 효과를 위하여 분위기에 의존한다. 그러나 척도의 감각과 완벽한 숙달은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예브게니 오네긴』의 실제적 수법은 많은 러시아인들에 의하여 모방되었는데, 완전히 성공한 사람은 없다. 그것은 결합하기가 극히 힘든 두 가지 자질을 요구한다. 즉, 무한하고 무진장한 활력과 예술적 척도의 오류 없는 감각이다. 이후의 문학 발전에 끼친 『예브게니 오네긴』의 중요한 영향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나는 이 운문 소설의 직접적이고 운율적인 계승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소설 속에 최초로 도입된 일종의 리얼리즘이고, 성격묘사의 스타일이며, 등장인물들 그 자체이고, 이후 러시아 소설의 근원으로 간주되고 있는 이야기의 구조인 것이다. 『예브게니 오네긴』의 리얼리즘은 실제적인 것을 포기하거나 이상화하지 않는 독특한 러시아의 시적 리얼리즘이다. 그것은 레르몬뜨토프의 소설과 투르게네프, 곤차로프, 『전쟁과 평화』, 체호프의 걸작 속에서 다시 살아나게 되는(비록 푸시킨이 리얼리즘에 부여한 완전한 시적 형식 이외에, 리얼리즘의 적법성 여부가 문제가 되기는 했지만) 바로 그와 같은 리얼리즘인 것이다.
『예브게니 오네긴』의 성격묘사는 분석적이거나 심리적이지 않으며, 등장인물들의 사상이나 감정의 해부에 의거하지 않고, 시적이며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서정적이고 감정적인 분위기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묘사의 스타일은 푸시킨으로부터 투르게네프와 다른 소설가들에게 전수되었지만,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는 예외다. 등장인물들 중에서 오네긴과 타치아나는 러시아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선조가 된다.
특히 레르몬토프, 곤차로프, 투르게네프의 작품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완전히 이 계보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푸시킨의 다른 산문소설의 구조와는 매우 다른 이 이야기의 구조는 러시아 소설의 모본이 되었다. 플롯의 구성, 주인공들의 근본적인 특성에서부터 시작되는 플롯의 논리적인 전개, 불행하고 암시적으로 은폐된 결말은 러시아 소설가들, 특히 투르게네프의 모본이 되었다.
『예브게니 오네긴』의 방법 중에서 많은 것이 낭만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의 정신은 낭만적이지 않다. 푸시킨의 모든 원숙한 작품에서처럼 이 작품은 운명의 세 여신4)의 엄격한 도덕적 법칙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오네긴의 무책임한 방종과 자신에의 충실함은 필연적으로 미묘하고 자연스럽게 그를 파멸시킨다. 반면 타치아나의 침착한 자기 억제와 체념은 그녀의 이름과 더불어 연상되는 도덕적 위대함의 명백한 영광을 그녀에게 영원히 안겨준다.
타치아나를 창조하는 데 있어서 푸시킨의 위대함은, 사랑하는 남자를 냉정하게 거절하는 정숙한 부인에게서 보일 법한 오만하고 청교도적인, 거의 피할 수 없는 함정을 피했다는 점이다. 타치아나의 덕행은 그녀가 결코 감당하지 못할 슬픔과 그녀만의 낙원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고, 행복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살겠다는 체념적이고 침착한 결단에 의해서 보상을 받고 있다.
타치아나와 오네긴의 관계는 러시아 소설 속에서 자주 재생되었다. 소심하고 연약한 남성과 강한 여성과의 대비는 투르게네프와 다른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거의 진부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푸시킨의 고전적인 태도, 즉 남성들에 대한 연민 없는 동정과 여성들에 대한 보상 없는 존경의 태도는 결코 재생되지 않았다.
『예브게니 오네긴』을 쓰는 동안에 푸시킨은, 초기 시와는 의미가 다르지만, 불변의 완벽함을 갖춘 많은 수의 장·단시를 썼다. 『예브게니 오네긴』과 가장 가까운 작품은 동시대의 러시아 현실을 그린 운문 이야기인 『눌린 백작』(1825)이다. 이 작품은 더 순수하게 사실적이고 반어적인 수법의 운문으로 쓰여진 훌륭하고 재치 있는 일화이다. 『꼴롬나의 작은 집』(1830)은 8행 시구로 된 시인데, 일종의 러시아의 『베포(Beppo)』로써, 『예브게니 오네긴』의 ‘자유 분방한’ 스타일로 쓰여진 푸시킨의 마지막 에세이이다.
바이런적인 서사시 형식은 『집시들』(1824년에 써서 1827년에 발표)과 『폴타바』(1828년에 써서 1829년에 발표)에서 계속 시도되었다. 이와 같은 시들은 바이런적인 두 편의 초기 작품보다 훨씬 우수하다. 서정적인 색채와 삽화(揷話)에서 삽화로 급전하는 운문 이야기라는 최소한의 착상 이외에 이 작품 속에는 어떤 바이런적인 영향도 엿보이지 않는다.
『집시들』은 푸시킨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이 작품은 『예브게니 오네긴』과 더불어 그 자신의 천재성을 최고로 발휘한 최초의 작품이며, 또한 ‘자유롭고’ 달콤하며 애무하는 듯한 푸시킨의 젊은 날의 스타일로부터 그의 후기 작품의 보다 엄격한 아름다움으로 점차 발전해 가기 시작하는 첫 번째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은 상투적이다.
베사라비아의 집시들은 사실적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인간사회의 자연적인 상태의 이상적인 대표자로서 취급된다. 작품의 주제는 교육받은 문명인이 인습적으로 길들여진 감정과 정열, 특히 애인에 대한 소유욕을 버리지 못하는 비극적인 무능함에 대한 것이다. 외견상 이 시는 자유 — 남성에 대항하는 여성의 자유 — 의 강한 확언이며, 복수의 부자연스러운 사악함과 형벌에 대한 비난이다.
그것은 무정부주의에 대한 분명하고 명백한 호소인데, 이 점은 이미 도스토옙스키(그의 유명한 푸시킨 동상 제막식 연설에서)와 뱌체슬라프 이바노프가 언급했다. 이러한 무정부주의가 이상하게도 푸시킨의 이후의 작품과는 걸맞지 않지만 이것은 쉽게 설명될 수 없는 문제이고, 푸시킨 철학의 필수적인 요소로서 수용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비극적인 운명의 세 여신과 피할 수 없는 자연법칙으로 작용하는 네메시스(복수의 여신)에 대한 고전적인 신앙은 다른 어떤 작품에서보다 『집시들』 속에서 완전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비극을 의도한 푸시킨 최초의 시도로서,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러시아어로 쓰여진 작품 중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보편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한 『집시들』의 내용은 너무나 평이하여 철학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이 작품의 시적 아름다움을 정당하게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이 점에 대해 언급할 때 사람들은 역시 푸시킨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교훈은 자제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 같다. 『카프카스의 포로』와 『바흐치사라이의 분수』보다는 덜 유려하고 덜 도발적이지만 이 시는 꼼꼼하고 완전하며 복잡하고 풍부한 표현이 더 많이 배어 있다. 늙은 집시인 오비디우스(Ovidius)에 대한 이야기, 시의 끝부분(알레꼬의 살인에 대한 늙은 집시의 말이 나오는), 특히 에필로그 부분은 그 어떤 것으로도 결코 능가할 수 없는 시의 최고봉이다. 우리들은 단지 이렇게 많은 것을 맛볼 수 있게 허락한 운명의 세 여신들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다.
『폴타바』는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수법을 향해 진일보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푸시킨은 남부 시대 시의 유려한 매력을 신중하고 세심하게 피하고 있다. 우리들에게는 이 시의 엄격하고 거친 문체가 웅장하고 당당하게 들리지만, 처음 읽는 독자들은 새로운 시도에 거부감을 느꼈고 이 시를 훌륭하게 평가하지 않았다.
이 시는 완벽한 통일체는 아니다. 다시 말해 이 시에는 카프카스의 늙은 우두머리인 마제파의 대자(代子)를 향한 낭만적인 사랑담과 스웨덴의 찰스 왕에 저항한 표트르 대제의 투쟁에 대한 민족적 사시(史詩)가 불완전하게 결합되어 있다. 서사시 그 자체, 처음 제1, 2편의 배경과 제3편의 기본주제(폴타바 전투에 대한 간결하고 화려하며 매우 정확하고 장중한 묘사)는 비개인적이고 민족적이며 전민중적인 시에 대한 푸시킨의 최초의 기여인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시는 로모노소프와 데르자빈에게 영감을 주었고, 카람진주의자들의 대업적 이후에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푸시킨 이후 이러한 시는 다시 한 번 사라졌다. 민족적이고 초개인적인 감정의 표현 이외에 『폴타바』의 위대한 힘은 아주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훌륭한 시어에 있으며, 결코 고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가장 풍부하고 가장 숭고한 연상으로 가득찬 시어의 선택이 매우 정확하고 힘차다는 점이다.
『폴타바』와 비슷한 간결하고 힘찬 문체는 그 당시와 그 후의 몇몇 미완성 서사적 단편들 속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클레오파트라, 혹은 이집트의 밤』(1825년에 쓰기 시작하여 중단했다가 1835년에 다시 씀)과 『갈루브』(1830년에 완성)가 있다. 『갈루브』는 『카프카스의 포로』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카프카스에 대한 이야기이다. 『클레오파트라, 혹은 이집트의 밤』은 푸시킨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인 죽음과 정욕에 관한 웅장한 시이다.
『예브게니 오네긴』을 쓰던 시기는 푸시킨의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서정시들이 나온 시기이기도 하다. 대체로 1824년 이전에 쓰여진 서정시들 속에는 최고의 천재성이 나타나 있지 않다(예외적인 것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위대한 나폴레옹에 관한 송시). 그 이후에도 푸시킨은 계속해서 초기의 보다 가볍고 특별한 경우에 사용되는 문체로 시를 썼다.
이러한 시들은 비록 초기 시에 나타나는 깔끔하고 젊은이다운 생기는 갖고 있지 않지만 보다 원숙하고 섬세한 우아함을 갖고 있다. 그러나 1824년에서 1830년 사이에 쓰여진 푸시킨의 진지한 시들은 러시아의 어떤 시와도 비교될 수 없고 어떤 시로도 능가될 수 없는 일련의 서정시들이다. 원전의 인용 없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입증하고, 이 시들의 특징에 대하여 적절히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시 속의 많은 부분이 주관적이고 특별하며 감정적이다. 실제로 전기적인 사건이 종종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들은 이상화되고 순화되고 일반화되어 있다. 이러한 시들에는 비시적인 감정이나 정제되지 않은 정서와 같은 군더더기가 없다. 주관적이고 뚜렷하게 개인적인 경험에 의거하고 있지만, 그러한 시들은 음조에 있어서는 고전적인 시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이며, 충격적이고 심리적인 관찰이나 지나치게 개인적인 면은 좀처럼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이 시들의 매력은 사포5)의 매력과 같이 평범한 인간적 경험에 있다. 주콥스키의 문체가 더 발전된 것 같은 이 시들의 문체는 몽테스키외가 라파엘을 이야기하면서 언급한 “곧이어 보다 큰 감동을 주기 위해 우선은 덜 감동을 주라”와 같은 고전적인 특질을 갖고 있다. 푸시킨의 작품이 항상 그렇듯이 이 문체의 아름다움은 위트, 비유, 은유로부터 자유롭다. 이것은 표현된 것만큼이나 표현되지 않은 것에 의존하는 그리스 식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이 아름다움은 시어의 선택과 억양에 따른 리듬의 적합성 그리고 음성의 복잡한 구조 — 매우 포착하기 힘들고 아주 조건적인 푸시킨의 훌륭한 두운 — 에 달려 있다. 여기서 이러한 서정시들을 인용하고 분석하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가장 아름다운 몇 편의 작품과 빈틈없이 시작되는 몇몇 시행을 열거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폭풍의 날은 지나갔노라”, 1825년 리테이 기념일 — 모든 시에서 우정에 바친 가장 위대한 찬가, 케른 부인에게 보내는 몇몇 연(聯)(“나는 기적의 순간을 기억하오”, 1825), 아말리아 리즈니치의 죽음(1826)에 바치는 비가(열여섯 행), 『예감』(1826) 아마도 아말리아 리즈니치로 짐작되는 죽은 정부(情婦)에게 (푸시킨이 결혼하기 몇 개월 전에 써서) 바친 서정시들. 이 중에서도 특히 가장 완벽한 작품은 『그대의 먼 고국의 해변가를 위하여』이다.
이와는 달리 자연을 노래한 서정시들 — 모든 시들 중에서 가장 고전적인 — 은 냉담하고 응답이 없는 자연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은 폭풍의 아름다움과 소녀의 아름다움을 ‘벼랑에 선 소녀’에게 유리하도록 멋지게 비교한 『폭풍』(1827)과 『겨울 아침』(1829), 『눈사태』(1829)이다. 웅장한 문체로 쓰여진 푸시킨의 장엄한 발언인 두 편의 시는 — 자주 인용되고 언급되는 『예언자』(1826)나 긴장되고 격렬한 『안차르』(1828) — 보다 높은 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푸시킨의 최고의 발라드인 『신랑』(1825)과 『익사한 남자』(1828)도 이 시기에 나온 작품들이다. 이 발라드의 문체는 사실적인데, 이러한 사실적인 문체는 카테닌에 의하여 도입되었지만 푸시킨의 숙달을 통하여 완성되고 세련되어졌다.
1830년 이후 푸시킨의 서정시는 일반적으로 보편성을 띠게 되며, 엄격히 꾸밈을 배제하고 있다. 이후로 서정시의 특징은 억제되고 암시적이며 대중들이 시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는 우아한 가벼움, 선율성, 유쾌한 감정을 금욕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1830년대의 가장 특징적인 시들은 보편적인 경험의 진부함을 숙고하는 ‘사색하는 마음’에서 나온 일반적인 비가적 명상이다.
이 중에서 가장 장엄한 것은 『사령관』(1836)인데, 이것은 1812년 전쟁에서 부당한 취급을 받고 오해받은 육군대장 바르클레이 드 톨리의 초상(肖像)에 관한 비가이다. 그러나 무지한 대중을 싫어하는 감정과 함께, 푸시킨은 폴란드의 프랑스인 친구들에게 보내는 유명한 반박문인 「러시아의 비방자들에게」(1831)서 처럼 ‘집단 감정’을 애써 말하기도 했다.
가장 완전하고 꾸밈이 없고 산문적이며 가장 단순한 시들 중의 하나인 『표트르 대제의 연회』(1835)는 영웅적인 남성에게 보내는 고귀한 찬사이다. 이와 같은 고상하고 초개인적인 발언과는 달리 푸시킨은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했는데, 이것은 니콜라이 황제와 나탈리야 그리고 사교계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오랜 고통의 소산이다.
『사령관』의 훌륭한 억제는 『신이여, 나를 미치게 하지 마오』(1833)의 몇몇 시구의 냉혹하고 섬뜩한 아이러니와 현격한 대비를 이룬다. 후자는 지금까지 쓰여진 ‘광인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시들 중의 하나이다. 이런 종류의 몇몇 시는 시인이 죽은 후에야 인쇄되었다.
1830년 이후에 쓰여진 대부분의 푸시킨의 서사시는 러시아 식으로 말하면 배역적(personative)이거나 ‘양식화’되어 있다. 시인은 차용한 형식이나 차용한 주제 혹은 이 둘 속에 가면을 쓰고 있고, 그의 인격은 신중하고 효과적으로 은폐된다. 셰익스피어의 「되는 되로」(Measure for Measure)를 번안한 『안젤로』(1833)는 이러한 작품인데, 여기에서 푸시킨은 옐리자베타 여왕 시대의 화려한 문체의 부적절함과 군더더기를 버리면서 셰익스피어의 ‘광범위한 성격묘사’를 유지하고자 했다.
푸시킨의 모든 시작품 가운데 『안젤로』는 가장 적은 찬사를 받고 있지만, 이 작품은 그의 창조적인 정신의 활동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러시아의 서사민요 형식으로 쓰여진 세르비아의 민요를 메리메가 위작(僞作)한 것을 다시 개작한 『서부 슬라브인들의 노래』(1831)는 보다 순수하게 일반적이며, 『옛날 이야기』(1831~1832)가 특히 그렇다.
이 밖에도 18세기의 대중적이고 운율이 맞지 않으며 내용이 천박한 엉터리 시의 수법을 훌륭하게 재생한 냉소적이고 재기 넘치는 『신부와 그의 하인 발다』와, 악의적이며 아이러니컬한 『황금 수탉』이 있으며, 이러한 종류의 최초의 작품은 『살탄 왕』이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살탄 왕』을 러시아 시의 걸작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 작품은 감정과 상징의 모든 부적절함에서 벗어난 최고의 순수 예술로써 ‘순수한 미’이며 ‘영원한 기쁨’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여섯 살의 소년에게나 예순 살의 가장 지혜로운 시 독자에게나 똑같이 감동을 주기 때문에 가장 보편적인 예술이다. 이 작품은 어떤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작품의 이해는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다. 이것은 경박하지도 기발하지도 익살맞지도 않지만 가볍고 상쾌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고도의 진지함이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완전한 미와 자유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보다 더 진지한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살탄 왕』을 푸시킨의 걸작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푸시킨의 위대한 마지막 서사시인 『청동의 기사』(1833년에 쓰여져 푸시킨이 사망한 후인 1841년에 출판됨)를 걸작으로 생각한다. 이 시는 절대적인 우월함을 주장할 만한 실질적인 자격을 분명히 갖고 있다.
그러나 시적 위대함에 대한 개념이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탄 왕』에서와 같이 모든 시가 ‘인간적인 것’에서 자유로워야만 한다는 (가정적인) 견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 시의 우월성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고전주의자, 낭만주의자, 상징주의자, 표현주의자들 모두 『청동의 기사』의 평가에 동의해야만 한다. 이 시의 실제적인 소재는 1824년의 페테르부르크 대홍수와 이 대홍수에 애인의 집과 식구들이 바다에 휩쓸려버린 후, 가난하고 하찮은 관리인 예브게니가 입은 결과이다.
이 시의 철학적인 (혹은 다른 어떤 단어로 대체하든지 간에) 주제는 원로원 광장에 있는 페테르부르크의 수호신인 표트르 대제의 청동상에 구현된 사회의 권리와 페테르부르크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파멸한 비참한 예브게니에 의해 대표되는 개인의 권리 사이의 화해될 수 없는 갈등이다. 이 시의 위대함은 푸시킨이 어떤 훌륭한 조화 속에서 이 둘을 화해시키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비록 이 시가 표트르 대제와 페테르부르크를 장엄하게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위대한 황제는 거의 신과 같은 형상을 띠고 있다. 이 형상은 『폴타바』와 『표트르 대제의 연회』의 인간적인 표트르 와는 현저히 다르다. 『청동의 기사』의 표트르는 자비라고는 알지 못하는 비인간적이고 강한 악마의 형상을 띠고 있다. 파멸한 예브게니에 대한 시인의 기본적인 동정은 예브게니의 적의 위대함 때문에 결코 손상당하지는 않는다.
도덕적인 갈등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평형을 유지하고 있다. 문체상으로 『청동의 기사』는 『폴타바』쪽으로 진일보하고 있다. 8음절 시구의 집중된 풍부함과 탄탄함, 엄격하게 사실적이지만 최고로 표현이 풍부하고 의미심장한 어휘, 자연스럽고 장중한 움직임, 시어 하나 하나와 시 전체가 보여주는 수많은 퍼스펙티브는 이 서사시에 시적 무게를 부여하며, 이 시를 러시아어로 쓰여진 가장 위대한 시의 가장 위대한 모본으로 만들고 있다.
푸시킨의 첫 번째 희곡 작품이자 가장 긴 『보리스 고두노프』(1825년에 쓰여져 1831년에 출판됨)는 그의 첫 산문처럼 본래 형식적인 실험으로 쓰여졌다. 이 희곡을 쓰면서 푸시킨은 등장인물들의 행위나 운명보다 러시아 비극과 러시아 극시의 운명에 관심을 가졌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이때까지 유행하던 프랑스적인 형식과 대치되는 러시아의 낭만적 — 셰익스피어 풍의 — 비극의 첫 번째 시도이다.
1826년에 푸시킨이 이 작품을 모스크바로 갖고 왔을 때, 셰익스피어(독일적인 셰익스피어)와 괴테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던 젊은 이상주의자들은 이 작품을 걸작으로 인정했다. 오늘날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보리스 고두노프』는 푸시킨의 미숙한 습작기의 작품들 중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 작품은 그 이전의 작품들 — 이를테면 『집시들』, 『예브게니 오네긴』의 처음 몇 장 — 보다 덜 성숙되고 덜 완전하다. 이 희곡의 소재는 카람진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이 이야기는 카람진의 『러시아 국가의 역사』에 이따금 나오는 중요한 문학적인 흥미를 끄는 극적인 이야기들 중의 하나이다. 역사적 사실들을 해석하면서 푸시킨은 꼼꼼하게 카람진을 따랐으며, 이것이 중대한 장애가 되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속죄에 대한 비극이지만, 푸시킨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줄곧 덜 숙련된 솜씨로 이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비극은 가끔 거의 감상적이며, 운율, 특히 무운시의 단조로운 형식은 아주 불만족스럽다. 시어는 약간 과장되며 진부하다. 희곡의 구조는 여러 가지 점에서 극적이기보다는 서술적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대화체로 된 기록이기 때문에 상연되기보다는 읽혀지기에 좋고, 경제적인 면에서 푸시킨이 최초로 성공을 거둔 것들 중의 하나이다.
등장인물들, 특히 가짜 드미트리는 훌륭하게 묘사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의 세련된 아이러니와 더불어 산문적인 장면들은 희곡 중의 백미인데, 이전의 러시아 문학 중 어떤 것도 이와 비견할 만한 것이 없다. 두서너 곳에서 — 보리스의 죽음 장면과 고두노프들을 살해하고 (무대 뒤에서 프랑스 식으로 처리) 황제 참칭자의 선언이 나오는 매우 압축된 마지막 장면 — 이 비극은 실제로 극적인 아름다움을 달성하고 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상연보다는 독서용의 극이다. 이 작품이 러시아의 극에 대변혁을 일으킬 것을 기대한 푸시킨의 소망은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이 작품을 발표한 직후와 푸시킨의 사후에 이 작품이 미친 영향은 상당한 것이었지만, 본질적으로 중요하지는 않다. 러시아는 결코 진실한 의미의 독창적인 ‘셰익스피어적인’ 비극을 생산해내지는 못했다.
푸시킨의 후기 희곡작품들 — 이른바 네 편의 ‘소비극(小悲劇)’과 『루살카』 — 은 완벽성과 독창성 면에서 훨씬 높은 수준에 있다. 소비극은 1830년 볼지노에서 멋지게 보낸 가을에 주로 쓰여졌다. 이들 중 두 편 —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와 『역병 중의 연회』 — 은 곧 출판되었다. 세 번째 작품인 『욕심 많은 기사』(The covetous knight라는 영어 제목은 푸시킨 자신이 부친 것이다)는 1836년에 (익명으로) 출판되었다.
『돌손님』은 1836년에 최종 손질되어 시인이 사망한 후 1840년이 되어서야 출판되었다. 『보리스 고두노프』와 달리 소비극들은 형식적 실험으로 의도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작품들은 성격과 극적인 상황을 이해하면서 쓴 것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희곡작품들을 위해 푸시킨이 제안했다가 스스로 거부한 명칭의 하나는 ‘극적 탐구’였다. 이 소비극의 형식은 배리 콘월(대부분의 동시대인들처럼, 심지어 영국의 동시대인들처럼 푸시킨은 현재 우리가 이 작가를 평가하는 것보다 더 높이 평가했다)의 유사한 작품에서 암시를 받은 것이다. 『욕심 많은 기사』는 “셴스톤의 희비극 중의 장면들”이란 부제(副題)를 달고 있다.6)
『역병 중의 연회』는 죤 윌슨의 『역병의 도시』의 장면을 훌륭하고 정확하게 옮겨 놓은 것이다. 따라서 소비극들은 영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것들은 푸시킨의 가장 독창적이고 특징적이며 완전한 작품에 속한다. 이 속에서 푸시킨은 최고도의 집중에 도달하고 있다. 『돌손님』을 제외하면, 이 작품들을 희곡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이 작품들은 오히려 개별적 상황이며 극적인 ‘순간’들이지만, 더 이상의 전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중요한 의미로 채워진 순간들이다. 이것은 서정시의 방법을 극에 응용한 것이다. 이 작품들의 길이는 1장과 200행이 약간 넘는 『역병 중의 연회』에서부터 4막과 5백여 행에 달하는 『돌손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역병 중의 연회』는 가장 덜 복잡하다.
작품의 창조적인 작업으로 푸시킨은 시작과 끝을 선택하고, 윌슨의 냉담한 영시를 자신의 뛰어난 러시아어로 번역하며, 두 편의 노래를 덧붙인다. 이 두 편의 노래는 푸시킨의 최고작에 속한다. 그중의 한 편인 ‘역병 찬가’는 푸시킨이 쓴 것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고 섬뜩한 것으로, 보기 드물게 사물의 어두운 면을 내보이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질투라는 열정에 대한 연구이자,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재능을 부여하고 평생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는 재능을 부여하지 않은 불공평한 신에 대한 연구이다. 『욕심 많은 기사』는 욕심꾸러기에 대한 가장 거대하고 훌륭한 연구들 중의 하나이다. 욕심 많은 남작이 보물창고에서 독백하는 제2장은 러시아의 희곡 중에서 가장 훌륭한 극적 독백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시적 장엄함을 갖춘 최고의 모범인 것이다.
『돌손님』은 『청동의 기사』와 함께 푸시킨의 걸작으로 간주되어야 할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 『청동의 기사』보다는 덜 화려하고 분명 내용이 덜 풍부한 이 작품은 시종일관 한 번도 구어를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엄격하게 비수식적인 시의 지극히 심리적이고 시적인 다의성 면에서 『청동의 기사』를 능가하고 있다.
이것은 돈 쥬앙의 마지막 연애사건 — 돈 쥬앙이 살해한 남자의 과부와의 연애사건 — 과 돈 쥬앙의 비극적 종말에 대한 이야기고, 네메시스의 주제 — 푸시킨의 가장 중요한 주제 — 에 관한 푸시킨의 최고의 성과이다. 무운시의 유연함(『보리스 고두노프』의 무운시와는 달리), 구어와 운율의 매우 섬세한 결합, 대화의 무한한 함축성, 남부의 섬세하게 정제된 분위기 — 그리고 속죄의 분위기 — 에 있어서 어떤 것도 이 작품에 필적할 수 없다. 스페인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푸시킨의 모든 작품들 중에서 가장 러시아적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남용된 단어의 형이상학적 의미 때문이 아니라, 고전적이고 구어적이며 시적인 러시아어에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을 이 작품이 달성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것들이 러시아 시의 지고의 열망 — 선택적이고 비수사적이며, 사실적이고 서정적인 완전성을 지향하고자 하는 노력 — 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도저히 번역될 수 없는 푸시킨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 속의 단어 하나 하나가 갖고 있는 시적이고 감정적인 가치가 극도에 달해있고, 완전하게 소진되었으며, 러시아어의 리듬(구어적이며 동시에 운율적인)의 자연스러운 가능성이 최고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희곡의 플롯만을 보아서는, 푸시킨의 언어의 경제와 절제는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 이면의 무한히 중요한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푸시킨의 극적 시도들 중에서 마지막 작품인 『루살카(강의 요정)』는 미완성 유고이다. 미완성 유고로 끝나지만 않았다면 이것은 『청동의 기사』, 『돌손님』과 함께 러시아 시에서 최고의 자리를 요구할 만한 세 번째의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루살카』의 시행과 시어는 『돌손님』에서 말한 것과 같다. 차이가 있다면 『루살카』의 주제와 분위기가 러시아적이라는 점이다. 이 작품 역시 복수의 비극, 다시 말해 정조를 유린당한 처녀가 강에 몸을 던져 ‘강력하고 냉혹한’ 강의 요정이 되어 무정한 구애자인 왕자에 대한 복수를 그린 것이다.
당시 푸시킨이 최대의 성공(일반 대중 사이에서)을 거둔 작품은 『카프카스의 포로』와 『바흐치사라이의 분수』 그리고 (동시대의 비판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보리스 고두노프』이다. 이것들 모두 원숙하지 못한 청년 시절의 작품들이다. 『폴타바』로부터 시작되는 푸시킨의 후기 작품들은 점점 냉담한 대접을 받았으며, 사망하기 직전에 푸시킨은 젊은 세대들로부터 존경할 만한 인물로 인정은 받았지만, 시대에 걸맞지 않고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폐물 같은 고전작가로 간주되었다.
푸시킨의 죽음은 국민적인 영광으로 그를 인정하게 되는 신호였다. 그러나 1840년대의 사람들은 푸시킨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들은 푸시킨이 러시아 문학의 언어를 만들어냈고 러시아 문학의 독창성을 확립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푸시킨이 더 민족적이고 근대적인 작가들에 의하여 대체되고 있고 실제로 대체되었다고 생각했다. 슬라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푸시킨은 러시아적이지 못했고, 급진적인 서구주의자들에게는 만족할 정도로 근대적이지 못했다.
서구주의자들과 슬라브주의자들은 모두 고골을 더 좋아했다. 한편으로 투르게네프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고리예프와 도스토옙스키 같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오늘날 러시아의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확실한 푸시킨 숭배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투르게네프가 어느 정도 덜 활기차고 덜 박력있고, 더욱 ‘여성적’인 푸시킨의 일면을 받아들인 진실한 상속자라면, 그리고리예프와 도스토옙스키는 전혀 다른 정신을 가진 작가들이다.
정확히 말해 그들의 푸시킨 숭배는 그들이 도달할 수 없는 뛰어난 가치가 푸시킨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푸시킨에 대한 그들의 숭배는 실낙원에 대한 신앙이었다. 19세기 후반의 인텔리겐치아의 주요 인사들은 푸시킨에게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었다. 수년 동안 공리주의가 지배했던 까닭에 그들은 푸시킨의 위대함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엘리트 계층 사이에서 푸시킨에 대한 숭배는 점증했다.
1880년 푸시킨 동상 제막식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연설은 환상적이었고, 푸시킨을 올바로 말하진 못했지만 분명히 푸시킨 숭배를 촉진하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1887년에 푸시킨 작품의 저작권이 소멸되었고, 이때부터 수많은 싸구려 판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문학과 문화에서 푸시킨의 우수성과 중요성에 대한 이해가 알게 모르게,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증대되었다.
20세기에는 이런 이해를 완전히 받아들였다. 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러한 이해는 너무나 일반적이고 강력하여, 정신적인 면에서 도스토옙스키와 마찬가지로 푸시킨과 무관했던 볼셰비키들조차도 혁명 이전의 러시아를 모두 잊고 비판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푸시킨의 이름만은 제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