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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사실과 진실과 진심

4.16 한 갈피 두 갈피

by 강산





현실과 사실과 진실과 진심

4.16 한 갈피 두 갈피





현실과 사실과 진실과 진심이 잘 보이지 않는다

요즘에는 사진도 조작이 가능하고

동영상까지도 조작이 가능한 시절이 되었다

우리들은 대부분의 사실들을 언론이나 소문으로 접한다

어리석은 나는 소설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어쩌면 소설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더 큰 진실, 더 깊은 진실을 위해서 쓰는 거짓말이다

그런 말이 자꾸만 나를 붙잡고 속삭이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한 갈피 두 갈피 더욱 깊이 들여다본다


이창우라는 친구가 있었다

이정우라는 친구가 있었다

창우와 정우는 친구이면서 친척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창우에게는 형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축구를 참으로 잘하는 형들이 둘이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고향에서는 주로 광복절에 축구대회를 하곤 하였다

마을대항 축구대회를 꽤 오랫동안 한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살았던 원등 1구에서 우승을 많이 하였다

3년 연속 우승을 하면 우승기를 마을에 주고

새로운 우승기를 제작하여 다시 시작하곤 하였다

나의 기억으로는 원등 1구에서 우승기를 몇 개 차지하였다

가장 큰 공로자가 바로 창우 형들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며칠 전에 반월산 아래서 창우 어머니의 묘를 보았다

예쁘게 잘 만들어진 수목장 묘지에서 빗돌의 글을 읽었다


제목 전달: 이창우의 모친 故 허판

이창우의 모친 故 허판임님께서 별세하셨기에 부고를 전해 드립니다.


<유인태인허씨판임지묘>

아들 : 이창우

며느리 : 이현숙

딸 : 이현숙, 이숙희, 이영애

사위 : 남철우, 김현섭, 박대인

손 : 이예은, 이상은

외손 : 남경목, 남연지, 김영일, 김미라, 박유, 박주미


현실과 사실과 진실과 진심은 어떻게 다를까?


나는 오늘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전에는 초등학교 6학년 19명과 함께

자부보리로 빵을 만드는 체험 도우미를 하였고

오후에는 마늘심기를 하였다

그리고 내일은 유치원생 야와 활동으로

벼이삭에서 벼 낱알을 터는 체험을 한다는데

비가 예보되어 있어서 약간의 걱정을 하며 깨어있다





"남북, 1991년부터 두 국가로 살기로 합의… 이것이 통일로 가는 길"



[두 국가 딜레마]①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인터뷰
"전작권 환수한 뒤 화해 제스처 보인다면 북한도 대화의 장 나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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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2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5.10.2/뉴스1 ⓒ News1 이호윤 기자


(서울=뉴스1) 김예슬 기자 = 북한의 '남북 두 국가론'을 이재명 정부가 인정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며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대북 주무부처인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나서 남북은 국제사회에서 이미 두 국가로 살아왔다며 오히려 이것이 통일로 가는 과정이라고 언급하며 관련 논쟁은 증폭하는 모양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세현 전 장관도 남한과 북한은 이미 30년 넘게 두 국가로 살아왔다며, 독일의 사례를 토대로 두 국가를 인정하는 것이 통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정 전 장관은 두 국가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9·19 군사합의 단계적 복원 등이 이뤄진다면 내년 말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될 것으로 내다봤다.


다음은 정 전 장관과의 일문일답.


-정동영 장관이 언급한 '남북 두 국가론', 어떻게 보고 있나.


▶남한과 북한은 1991년 각각 유엔 가입을 하고 다음 해 기본합의서가 발효됐다. 이는 사실상 당사자끼리 두 국가로 살기로 합의한 셈이다. 유엔 가입이 의미하는 건 국제법적으로, 국제정치적으로 두 국가를 인정한다는 것으로, 새삼스러운 언급이 아니라 당연한 말이다.


-말씀하신 것처럼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1조를 보면 '남과 북은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기재돼 있다. 30년이 지난 지금 돌연 두 국가론 관련 논란이 불거진 배경은 무엇이라고 보나.


▶2023년 12월 말에 북한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해 남북관계를 '적대적'이고 '교전 중'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했다. 그동안 남북관계는 '공존적'이고 '협력적'인 두 국가였다. 북한은 우리에게 쌀과 비료를 받는 등 경제적으로 득을 크게 봤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남한의 문화가 북한에 유입됐다는 것이다. 북한의 젊은 세대들이 남한화 되면서, 김정은 입장에서는 남한에 흡수통일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생겼을 것이다. 북한 인민에게 남한에 대한 적대 의식을 지니라는 차원에서 적대적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또 윤석열 정부는 노골적인 군사적 적대 행위를 이어갔고, 이를 지켜본 북한은 곧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교전 중'이라는 수식어를 넣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동영 장관은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내며 '협력적 두 국가'를 몸소 체험한 사람이다.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정 장관의 '두 국가론'이 김정은과 북한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비난했는데, 국민의힘 전신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가 대통령이었을 때 남과 북이 두 국가로 규정됐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국제정치, 남북관계를 모르는 이들이 무조건 비난을 하니 논란이 새삼스레 불거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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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2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5.10.2/뉴스1 ⓒ News1 이호윤 기자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정부가 두 국가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위 실장은 외교관 출신이니 누구보다 남북이 국제법적으로 두 국가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자주파니, 동맹파니, 물타기를 하려는 모양인데, 이는 논리적이지도 않고 국제법이나 국제정치학적 이론에도 맞지 않는다.


-두 국가론이 결국 영구 분단을 인정하는 게 되어 앞으로 국민적 통일 의지가 약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한 개 국가라고 강변한다고 반드시 통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독일 통일도 두 국가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서독의 경우, 보수 정권인 기민당이 집권할 때 '하나의 독일' 기조하에 통일전담조직으로 '전독문제성'을 설치했다. 이후 빌리 브란트 당수가 이끈 사민당이 집권해 동방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1969년 '전독문제성'이 '내독관계성'이라고 명칭이 변경됐고, 서독이 동독을 꾸준히 지원한 끝에 결국 선거로 통일이 이뤄졌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90년까지 20년 넘는 지원 끝에 통일이 이뤄졌다. 결국 두 국가를 인정하지 않으면 통일이 되는 게 아니라, 두 국가를 인정했기 때문에 통일이 된 셈이다.


-일각에서는 두 국가론이 헌법 3조와 충돌하기 때문에 이 조항의 해석 변경이나 조항 자체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은 지향점을 성문화한 것이다. 우리는 이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강령적 목표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을 가지고 시비를 걸 필요는 없다. 앞서 헌법 3조, 4조가 그대로 있는 조건에서도 91년 기본합의서를 만들었고, 2000년 정상회담도 이뤄졌다. 남북 두 국가를 인정하면 헌법 3조를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하려면 노태우 전 대통령부터 다 불려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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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2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5.10.2/뉴스1 ⓒ News1 이호윤 기자


-앞으로 5년, 10년간 남북관계의 양상은 어떨 것으로 예상하나.


▶새 정부 들어서 대북 유화책을 쏟아내고 있다고 해도, 불과 얼마 전까지 욕하고 화내던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선 이재명 대통령이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해 오고, 9·19 군사합의서를 단계적으로 복원하면 북한에서도 슬그머니 따라올 것이라고 본다.


특히 전작권 환수는 중요하다. 전작권을 환수해 오면 북한의 군사 도발은 훨씬 줄어들고, 군사적 정세가 안정적인 쪽으로 변화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명 정부가 꾸준한 화해 제스처를 보이거나, 북한에 구체적으로 득이 되는 방향으로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 북한은 대화 장에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지금 우리가 북한에 제시할 수 있는 '당근'은 무엇일까.


▶선이후난(先易後難, 쉬운 것 먼저 어려운 것 나중에), 선민후관(先民後官, 민간 먼저 관은 나중에). 이런 접근법을 구사한다면, 아마 내년 하반기에는 남북 간 정상회담이 이뤄질 여건도 조성될 수 있다고 본다.


현재 북한 경제는 남북 교류가 재개되지 않으면 굴러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김정은 체제의 토대를 굳히기 위해 '지방발전 20X10 정책' 등 다양한 사업을 벌여놨는데, 공장 200개 짓는 데 필요한 자재와 장비를 중국이 모두 지원해 주기 힘들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의 대북 지원도 끝날 것이다. 그나마 북한이 기댈 곳은 대북 지원이 남북 간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 민주당 정부뿐이다.





소설 출간에 실패하자 자살한 소설가가 있었다

이승하

2023. 3. 22. 4:58


『월간에세이』의 청탁을 받고 아래의 글을 쓴 것이 2007년 5월쯤이었습니다. 마침 존 케네디 툴의 소설을 읽고 있었습니다. 책을 낸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구나, 깊은 깨달음을 준 소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책 출간을 너무 많이 한 저이기에 반성의 계기로 삼고자 예전에 블로그에 올린 글을 다시 올립니다.


미지의 독자에게 올리는 편지 / 이승하


1984년 1월 1일 중앙일보사가 제게 시인의 관을 씌워준 이래 글을 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관이 요즘에는 월계관이 아니라 제 시신이 안치된 관이란 생각이 많이 듭니다. 관 속에서 호흡하기? 관 속에서 시 쓰기?


이십 년을 넘게 글을 쓰면서 살아왔는데 요즘처럼 힘에 부치는 때가 없었습니다. 앞으로 좀 나아질까요? 아니면 더욱 악화될까요? 글을 쓰는 것도 이젠 두렵고 책을 내는 일은 더더욱 두렵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만났다』라는 산문집을 낸 적이 있습니다. 책을 내자마자 영화사의 자회사인 출판사가 영화의 흥행 실패로 문을 닫아 인세를 몽땅 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영화 때문에 출판사가 망하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전 그 책을 주변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었습니다. 공수래공수거. 책도 돈처럼 무덤에 지고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1994년 모월 모일에 출판사 고려원에서 제게 전화를 해왔습니다. 시집 내실 원고가 준비되어 있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시집 시리즈를 막 내기 시작했는데 이형기, 오세영, 이윤택의 시집 원고를 받아 1, 2, 3번 번호를 매겨 시집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데 4번을 저로 모시고 싶다고 했습니다. 출판사의 정성이 놀라워 저는 요청에 흔쾌히 응하였고, 원고를 준비하여 넘겼습니다. 웬걸, 굴지의 그 회사가 어학 교재 사업에 뛰어들더니 폭삭 망해 졸지에 문을 닫는 것이었습니다. 그 출판사에서 낸 수많은 시집과 함께 제 시집도 구정가 세일로 길거리에서 팔리는 것을 보고 눈에 뜨일 때마다 얼른 사서 집에 쌓아둘 때의 서글픔이라니.


책을 내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존 케네디 툴이라는 미국 소설가가 있었지요. 1937년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난 그는 1969년, 그러니까 서른둘의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쳤습니다. 콜롬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은 뒤 몇 개 대학에 출강하면서 밤잠을 줄여가며 쓴 장편소설 『저능아들의 동맹 A Confederacy of Duces』을 들고 수많은 출판사를 찾아가 직접 내밀기도 하고 우편으로 부치기도 했지만 내주겠다는 출판사가 없었습니다. 몇 년 동안 필사적으로 책 출간을 시도했지만 끝끝내 자신의 작품을 인정해주는 출판사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툴은 총을 한 자루 구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아들의 한을 어머니가 풀어주고 싶었던가 봅니다. 아들의 사후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원고를 들고 줄기차게 출판사를 찾아다녔습니다. 12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이나 말입니다. 우와! 12년 세월 동안 아들의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다닌 어머니의 집념이라니! 어머니의 정성이 헛되지 않아 어느 출판사에서 책을 내주기로 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작품에 대해 퓰리처 재단이 퓰리처상 소설 부문에 상을 주기로 한 것입니다. 죽은 사람에게 상을 준 것은 퓰리처상 역사상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저능아들의 동맹』이 그만큼 좋은 소설이었다는 말입니다.


책 한 권을 내는 일이 이렇게 어렵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몇 권 책의 저자인 저만 해도 서점에 가서 책을 살 때 저자와 출판사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책을 사지 않습니다. 비싸다, 별 재미가 없다, 편집이 엉성하다 등 온갖 타박을 하며 책을 읽고는 헌 신짝 버리듯이 신문지 버리는 날 함께 버리지요. 이사할 때는 책이 더더욱 천덕꾸러기가 되지요.


아마 제 책도 상당수 그런 식으로 버려질 것입니다. 제가 애써 낸 책을 미지의 독자가 읽지도 않고 외면해 버린다면? 그러나 책을 쓰고 책을 내는 것이 저의 운명인 것을 어떻게 합니까. 어느 시인이 낸 동화책 『연어』가 100쇄를 찍는 것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내 책의 값어치 없음을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아아, 글을 쓰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책을 내는 일은 더더욱 부끄러운 일입니다. 나무를 베어 펄프를 만들고 펄프를 갖고 책을 만들지 않습니까. 지상의 산소가 제 책이 되었습니다. 제 책이 산소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 전혀 자신할 수 없습니다. 제 책을 극소수의 독자가 읽을지라도 그 극소수의 독자에게 고개 숙여 감사드릴 일입니다.


모든 만남은 기적인데, 그 기적이 제 책을 매개로 하여 일어난 것이니 책의 저자인 저는 독자에게 고개 숙여 감사드릴 일입니다.


첫 시집 『사랑의 탐구』를 냈을 때 출판기념회 회식 자리를 마련해준 문학과지성사의 선생님들이 잊히지 않습니다. 김병익, 김현, 김주연, 김치수 등 문단의 대가들이 내미는 술잔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고 잔뜩 취하여 돌아오면서 ‘집에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죽어도 웃으며 눈을 감으리라’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날의 감격은 제 삶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제 책은 제 영혼의 비명이기에 몇 사람이 사주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단 한 명이라도 귀 기울여 들어줄 사람이 있기를 바라면서 저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미지의 독자와의 만남, 그 기적적인 시간을 위하여.


ㅡ『월간에세이』(2007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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